551화
“후우. 자네 여기 있었군.”
집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서류를 보고 있던 아이누 탐사대장은 문이 열리고 투란이 나타나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 벌써 연회가 끝난 겁니까?”
러시아 차르국과 시베리아 부족 연합이 평화 조약을 맺었고, 이를 축하하는 연회가 벌어지긴 했지만, 아이누 탐사대장은 잠깐 자리를 지키다가 나와 집무실로 이동했다.
아무래도 아이누 탐사대장의 경우 일단 대외적으로야 용병 출신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북미왕국 소속이다 보니 러시아인들과 술을 마시다가 무심코 이를 발설할 수도 있었기에 바로 빠진 것이다.
다만 투란은 술과 연회를 좋아하는 편이고 연회를 주최하는 입장이니 만큼 연회가 끝날 때까지는 자리를 지키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자신의 집무실로 찾아오자 의아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투란은 어깨를 으쓱하며 투덜거렸다.
“끝난 건 아닌데 러시아 사절단의 대표가 잔뜩 취해버려서 말이야. 했던 말을 하고 또 하고 계속해서 반복하길래 바람 쐰다고 둘러대고 도망쳤네.”
“푸하하. 그럼 가볍게 한잔하시겠습니까?”
“오! 좋지.”
술이 부족하긴 한 모양인지 아이누 탐사대장이 권유하자 투란은 반색했고, 그런 투란의 반응에 피식 웃은 아이누 탐사대장은 책상 안에서 소주를 꺼내 빈 커피잔에 술을 따라 건넸다.
투란은 이를 받아들고 홀짝인 후 탄성을 질렀고.
“크으. 역시 술은 소주가 최고긴 해. 물론 다른 북미왕국의 술도 좋긴 한데...”
투란의 말에 아이누 탐사대장은 웃으면서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입을 열었다.
“그보다 오늘부로 러시아 차르국과의 전쟁은 끝났군요.”
이에 투란은 여러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지 싶은 한숨을 내쉰 후 소주가 담긴 커피잔을 내려놓고 진지한 얼굴로 아이누 탐사대장을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휴우. 그렇지. 그리고...그동안 러시아인들에게 제대로 된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고 철저히 착취만 당하던 우리가 이렇게 연합을 이루고 러시아 차르국에 대항할 수 있었던 것에는 북미왕국과 더불어 자네의 도움이 무척 컸네. 정말...정말 고맙네.”
물론 투란과 연합의 족장들은 이제 북미왕국이 단순한 선의로 자신들을 도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만 의도가 무엇이든 북미왕국이 자신들을 돕기로 하고 각종 물자를 지원하면서 러시아 차르국의 힘 앞에 굴복했던 자신들이 독립할 수 있었던 만큼, 그리고 결국 러시아 차르국을 물러나게 하고 평화 조약까지 맺음으로써 대등한 나라로 인정받은 셈이니 북미왕국에 고마울 수밖에 없었고.
또한, 아이누 탐사대장은 처음부터 시베리아 지역에 와서 자신들을 도왔고, 연합의 영역이 이 크라스니야르 요새까지 확대된 것은 솔직히 아이누 탐사대장과 탐사대원들의 공이었기에 투란이 다시 한번 감사의 뜻을 표하자 아이누 탐사대장은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아닙니다. 저야 뭐 본국의 명령대로 했을 뿐이니까요.”
“알아. 알아. 걱정하지 말게. 북미왕국이 베푼 은혜, 절대 잊지 않을 테니까.”
그러면서 투란은 언제든지 북미왕국을 도울 생각이니 필요하다면 말만 하라고 이야기했고, 이번에 청나라와 북미왕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연합에서는 북미왕국을 도와 청나라를 공격하자고 나섰다는 것을 아는 아이누 탐사대장은 참 믿음직스럽다고 여기며 기분 좋게 커피잔에 있는 술을 들이켰다.
“크으. 좋군요. 그보다 내일부터는 또 바빠지겠네요.”
“아. 바로 이동할 생각인가?”
“그래야지요. 이르쿠츠크 요새 동쪽 지역을 빠르게 장악하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이르쿠츠크 요새를 함락시킨 지도 벌써 10개월이 흘렀고, 그동안 본국과의 연결이 끊긴 러시아 차르국 병사들은 이르쿠츠크 요새 동쪽에 위치한 베르흐네우딘스크에 모여 이르쿠츠크 요새를 탈환하기 위해 진군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 지역에 배치된 러시아 차르국 병사들의 수는 얼마 되지도 않을뿐더러 이미 인근의 부랴트 족이 연합에 합류했기에 수적으로 턱없이 부족한데 연합의 병사들이 철저히 방어 중인 이르쿠츠크 요새를 탈환할 수 있을 리 없었고.
오히려 도중에 부랴트 족의 습격으로 피해를 보고 이르쿠츠크 요새로 진군하는 것을 포기한 러시아 차르국 병사들은 다시 베르흐네우딘스크로 회군해 방어에 전념하고 있었고, 최근 듣기로는 물자가 떨어져 꽤 곤란해 보인다는 정보를 입수하기도 했고.
그런 만큼 빠르게 이곳으로 진군해 이들을 항복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아이누 탐사대장이었다.
괜히 현재 베르흐네우딘스크에 모여 있는 병력이 뿔뿔이 흩어지면 그게 더 골치 아팠으니까.
이러한 사항을 이르쿠츠크 요새에 들렀을 때 파악한 투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럼 내가 이르쿠츠크 요새로 돌아갈 때 같이 움직이면 되겠군.”
“예. 그러시지요.”
“헌데 북미왕국의 용병들 전체를 움직일 생각인가?”
투란의 질문에 아이누 탐사대장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흠...뭐 러시아 차르국과 평화 조약을 맺긴 했습니다만 만약을 대비할 필요는 있겠지요. 그러니 일부 병력을 남겨두겠습니다. 물론 후장식 화포도 함께요. 어차피 러시아인들을 설득할 러시아 차르국 관리와 함께 움직인다면 저들도 순순히 항복할 것 같고...부족한 병력이야 바하르에게 이야기해 부랴트 족과 함께 움직이면 되니까요.”
“음. 그렇다면 이곳은 안심이군. 다만 러시아 차르국이 장악하고 있던 지역을 접수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청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게 될 텐데...”
동쪽으로 이동해 오호츠크 해를 발견한 러시아 차르국은 모피는 넘쳐도 농사를 짓기는 어려운 땅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남하했고, 결국 청나라와 대치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연합이 러시아 차르국의 영역을 모두 장악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청나라와 국경을 맞대게 되고.
그것이 부담스러운지 말을 흐리는 투란을 보고 아이누 탐사대장이 괜찮다는 듯 말했다.
“뭐 북방의 청나라 세력은 미약한 만큼 청나라가 먼저 시비를 걸지야 않을 겁니다.”
“그야 그렇겠지. 고작 4, 500명 남짓한 병사가 주둔한 알바진 요새도 함락하지 못하고 대치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고. 다만...청나라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가 고민이라서 말이네.”
러시아 차르국과는 달리 연합은 남하하는데 기를 쓸 필요는 없었다.
북미왕국과의 교역을 통해 부족한 식량과 각종 물자를 거래하면 그만이었기에.
그리고 인구와 비교하면 영역이 워낙 넓은 터라 굳이 만주가 필요하지도 않았고.
다만 청나라와 바로 협상을 해서 국경을 확정하기에는 현재 청나라와 북미왕국 간의 관계가 걸릴 수밖에 없었고, 해서 곤란한 표정을 짓자 아이누 탐사대장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흠. 그건 저도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어렵군요. 아마 내년에 본국에서 따로 지침을 내려줄 것 같기야 한데...”
“역시 자네에게도 따로 말한 것은 없는 모양이군?”
“예. 일단 청나라와 조선의 국경에서 청나라군의 주력을 섬멸한 후 상황을 봐서 따로 명령을 내리겠다고 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누 탐사대장이 투란에게 북미왕국의 전략을 설명해주자 투란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럼 내년 여름이 되기 전까지는 러시아 차르국의 잔당들을 모두 설득시켜야겠군.”
“그래야지요. 뭐 곧 겨울이니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만큼, 3월이 되기 전에 알바진까지 진군할 생각입니다.”
이에 투란이 조금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알바진이라...자네가 그곳까지 진군하면 알바진 요새 사령관이 어떻게 반응할지가 궁금하긴 하군. 큭큭큭.”
“푸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 * *
정성국이 탄 배는 빠른 귀환을 위해 다른 항구에 들르지 않고 곧바로 플로리다 반도로 향했고, 플로리다 반도 인근 해역에 도착했을 때 갑판에 나와 있던 정성국의 눈에 서양의 배가 보여 이야기를 나누던 김봉길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건 뭔가? 작은 것을 보면 상선 같지는 않고...어선인가?”
“아. 저건 아마 바하마의 어선일 겁니다.”
“바하마의? 그럼 잉글랜드의 어선이라는 뜻인데...잉글랜드의 어선이 우리 해역을 드나든다고?”
정성국의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김봉길은 조금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고기를 잡기 위해 우리 해역에 온 것이 아닙니다. 아마 밀입국을 위해 이곳에 왔겠지요.”
“밀입국? 불법 이민자라고?”
“그렇습니다. 아국이 대서양에 진출한 이후 카리브 해에 북미왕국의 소문이 널리 퍼졌지요. 당연히 그중에는 북미왕국이 노예 제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과 북미왕국의 백성 중 일부는 노예 출신인데 북미왕국에 팔려 노예에서 해방되어 일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포함되었고요.”
여기까지 설명하자 정성국도 상황을 이해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전까지 바하마 제도에는 루카요 족이 살고 있었지만, 콜럼버스가 이곳에 진출한 이후로 루카요 족은 서양인들이 가져온 각종 질병과 서양인들이 강요하는 고된 노동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 나갔다.
그 후 에스파냐가 이곳을 방치했을 때 잉글랜드가 이곳을 점령한 후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대거 사들여 바하마 제도를 개발하기 시작했고.
그런 만큼 바하마 제도에는 흑인 노예들이 무척 많은데 이들이 북미왕국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당연히 혹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다.
“아...그럼?”
“예. 카리브 해의 노예들은 어떻게든 북미왕국의 땅을 밟을 수만 있다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고 인식한 모양입니다. 그래서인지 바하마 제도뿐만 아니라 남쪽에 있는 쿠바 섬의 노예들도 기회가 되면 쪽배나 어선을 탈취해 아국을 향해 노를 저어 탈출하고 있고요. 아마 저것도 그런 배 중의 하나일 겁니다. 아니라면 멀리서 아국의 함대가 보이는 데 가만히 있겠습니까?”
이에 정성국은 조금 당황한 눈치로 중얼거렸다.
“허...그건 못 들었는데?”
“아마 그 수가 많지는 않으니 따로 보고하지 않았을 겁니다.”
김봉길이 정성국의 반응에도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정성국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어? 수가 많지 않다고? 바하마 제도나 쿠바 섬에도 노예가 꽤 많지 않나?”
바하마 제도도 그렇고 쿠바 섬 역시 원주민들만으로는 노동력이 부족해 노예 상인들을 통해 아프리카 노예들 수입하고 있다는 사실은 보고 받았기에 의문을 품자 김봉길이 쓴웃음을 머금고 답했다.
“처음에 노예들이 북미왕국으로 탈출하는 것을 알게 되면서 에스파냐나 잉글랜드에서 노예의 관리와 해안 경계를 더 철저히 해서 말입니다.”
“쯧. 그래도 아국에 항의하지는 않은 모양이네?”
잉글랜드와 에스파냐의 대응에 정성국이 혀를 차며 그렇게 이야기하자 김봉길이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설마요. 초창기에 에스파냐와 잉글랜드 외교관이 새진주에 와서 노예들은 농장주들의 사유재산이니 이들이 탈출해 북미왕국으로 도망친다면 체포해 돌려달라고 요구했었지요.”
“어? 그래?”
“예. 하지만 웅크린 늑대는 어찌 같은 인간을 사유재산으로 삼을 수 있느냐면서 북미왕국에는 노예 제도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니 그건 불가하다고 단칼에 잘랐지요. 그렇다고 에스파냐나 잉글랜드가 아국을 강압할 힘도 없으니 어쩌겠습니까. 노예 관리와 해안 경계에 더 힘을 쏟는 수밖에요.”
정성국은 웅크린 늑대의 대응에 만족하고 있다가 에스파냐나 잉글랜드의 반응에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거참...그냥 적당한 대가를 주고 부리면 될 것을...”
“그러게 말입니다. 다만 노예들의 위생 상태가 썩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고, 이들이 다발적으로 플로리다 지역 곳곳에 상륙해 아국의 백성들과 접촉하는 것은 전염병을 퍼트릴 우려가 있어 에스파냐와 잉글랜드가 철저히 노예를 관리하고 해안가를 경비하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저희도 그 문제 때문에 마이애미 항에 2함대 꽤 많이 배치하고 주변 해역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고요.”
김봉길의 말마따나 유럽인들은 흑인 노예들을 인간이 아닌 소모품으로 보았기에 이들의 건강 상태를 꼼꼼하게 관리할 턱이 없었다.
물론 이곳까지 살아서 온 만큼 무척 건강한 이들이긴 했지만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면서 끊임없는 노동에 시달리니 당연히 쇠약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여러 전염병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있어 이들이 막무가내로 플로리다 반도로 밀입국하면 플로리다 반도의 주민들이 위험하다는 이야기에는 정성국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끙...그건 또 그렇군. 헌데 2함대의 일부로 플로리다 반도 주변 해역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긴 한가?”
“그럼요. 뭐 저들은 해류를 타고 오는 거라 몇몇 지점만 감시하면 그만이라서 말입니다.”
이에 정성국은 안도하면서 2함대와 접촉한 노예들의 행방을 물었다.
“아하. 그럼 그들은 어떻게 되나?”
“마이애미 항의 격리 마을로 보내 잘 씻기고 먹인 후에 이주민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2함대의 조치가 괜찮았기에 정성국은 만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거 다행이군.”
“예. 다만 노예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유럽인들이 노예를 다루는 것이 생각보다 가혹해서...가끔은 아국이 카리브해를 모두 점령하고 노예들을 해방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기는 합니다.”
김봉길의 과격한 의견에 정성국은 쓴웃음을 짓고 입을 열었다.
“유럽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럴 수야 없네만...나도 노예들의 처지가 안타까운 것은 마찬가지일세. 해서 이번에 캐롤라이나 지역을 방문했을 때 불씨를 만들어두긴 했으니까...조금만 더 참게. 불씨가 다른 곳으로 옮겨붙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걸세.”
“으음...알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