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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550화 (550/850)

550화

정성국은 가족들과 함께 떠나는 자신을 열렬히 배웅해주는 백성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다가 점차 멀어지는 보스턴 항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아. 일정을 조금 더 길게 잡을 걸 그랬나?”

이런 정성국의 중얼거림을 옆에 있던 하얀 들꽃이 들었는지 고개를 돌려 정성국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쉬우세요?”

“응. 아쉽네. 여기까지 온 김에 급격히 발달 중인 누벨 프랑스 지역이나 이로쿼이 지역, 일리노이 지역을 방문하는 것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말이야.”

일단 이번 정성국의 일정은 북미 동해안 지역, 그러니까 매사추세츠 지역까지만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아무리 정성국이 새한성을 비워도 큰 문제 없도록 체계를 잡아놓았다고 하더라도 청장들이 모든 결정을 내릴 수는 없는 법이라 때때로 정성국에게 중요한 사안들을 보고하고 정성국의 의중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기에 통신선이 연결된 북미 동해안 지역까지만 방문하기로 한 것이다.

다만 정성국이 새목포에서 파나마 운하를 방문한 후 산아구스틴에 도착할 때까지 청장들과의 연락이 끊겼는데도 청장들이 비교적 일 처리를 잘 했기에, 그리고 여기까지 온 김에 다른 지역을 둘러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고.

하지만 하얀 들꽃은 그런 정성국의 이야기에 고개를 저었다.

“전하께서 북미왕국 곳곳을 방문하시는 것은 좋아요. 하지만 전하께서 새한성을 비운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어요. 너무 오랫동안 새한성을 비워두는 것이 좋지는 않잖아요.”

“맞아요. 이번에 방문하지 못한 지역들은 다음에 방문하면 되지 않겠어요? 특히 누벨 프랑스 지역이나 이로쿼이 지역은 몰라도 일리노이 지역을 방문하려면 육로로 이동해야 하니 시간이 꽤 걸릴 텐데요.”

반대편에 있던 전아라 역시 그렇게 이야기하자 정성국은 아쉬움을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음...역시 그래야겠지?”

“예. 그리고 누벨 프랑스 지역이나 이로쿼이 지역, 일리노이 지역 등은 이주민들로 인해 한창 정신없는 상황이라 조금 나중에 방문하는 것이 괜찮을 것 같아요.”

하얀 들꽃의 이야기에 정성국은 미련은 완전히 털어냈다.

한창 바쁘게 일하는데 높은 사람이 방문하는 것만큼 귀찮은 일이 없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기에.

“흠. 그렇긴 하지. 그럼 좀 나중에 다시 방문해야겠다. 대신에 기동이나 좀 굴려야지.”

정성국의 중얼거림을 듣고 전아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깔깔깔. 기동이를요? 다음번엔 비행기를 타고 오시게요?”

박기동이 비행기 제작에도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전아라가 묻자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겠지. 이동에 걸리는 시간이 확 줄어들 테니까. 물론 몇 년 내에 그게 가능할까 싶기는 한데...”

일단 최근 개발 중인 4인용 비행기가 있긴 한데 이 비행기가 성공적으로 개발된다 하더라도 이걸 타고 북미왕국 곳곳을 방문하는 데 써먹기는 어려워 보였다.

비행기의 안전 문제는 둘째 치더라도 정성국의 호위 문제를 생각하면 호위대장이 이를 허용할 리 없었으니.

‘못해도 10인용 여객기 이상은 개발해야 써먹을 수 있을 텐데 금방은 어렵겠지.’

정성국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옆에서 하얀 들꽃이 정성국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안전을 떠나서 전하는 비행기로 장거리 이동은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하늘을 날다 사고라도 나면...”

이에 정성국은 생각을 멈추고 하얀 들꽃을 달랬다.

“아. 나도 비명횡사할 생각은 없어. 그러니 비행기를 신뢰할 수 있을 때나 이동 수단으로 사용할 생각이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정성국의 대답에 하얀 들꽃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말했다.

“약속하셨어요?”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연구청에서 한창 개발 중인 4인용 비행기를 떠올리고 슬쩍 말을 바꾸었다.

“그래. 약속할게. 어...근데 잠깐 타는 건 괜찮지?”

* * *

“자. 서명하시지요.”

예브게니가 국경 문제를 대략 합의한 후 3일 넘게 고치고 수정한 2부의 조약문에 서명하고 옆으로 비켜나자 투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럽시다.”

한글은 표음문자이고 배우기도 쉬운 터라 이미 연합에서는 한글을 문자로 사용하고 있었기에 투란이 자신의 이름을 한글로 쓰자 예브게니는 이를 보고 조금 이채를 띠었다.

예브게니는 런던에서 북미왕국 대사와 여러 대화를 나누었기에 지금 연합의 협상 책임자가 쓴 문자가 북미왕국에서 사용하는 문자라는 것을 파악한 것이다.

다만 연합과 북미왕국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기에 별 말하지 않고 투란이 다른 한 부의 조약문에 서명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마침내 투란이 다른 한 부에도 서명을 완료하자 예브게니는 연합의 서진을 막았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투란은 그런 예브게니의 반응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잠시 묘한 눈빛으로 2부의 조약문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이것으로 우리 시베리아 부족 연합과 러시아 차르국의 전쟁은 끝이 난 셈이군요.”

아무래도 투란으로서는 이전 러시아 차르국에 공물을 바치기 위해 고생했던 시절이 생각났고, 이제 자신들과 후손들은 러시아 차르국의 통치에 고통받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예브게니는 생각보다 빠르게 협상을 끝냈고, 일부 조약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연합에 계속해서 밀렸던 현 상황을 감안하면 충분히 좋은 조건에 평화 조약을 맺었기에 확실한 공적을 세운 셈이라 무척 기뻐 이런 투란의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이번 조약으로 양국은 더욱 발전적인 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서 예브게니는 이번 조약으로 러시아 차르국과 연합의 장밋빛 미래를 예측하며 떠들어댔고 투란은 그런 예브게니의 반응에 피식 웃으며 적당히 이를 들어주다가 입을 열었다.

“그보다 이르쿠츠크 요새 동쪽에 있는 러시아인들을 설득하러 귀하가 직접 움직일 생각입니까?”

이미 러시아 차르국과 평화 조약을 맺었고, 러시아 차르국과 연합의 국경선은 이 크라스니야르 요새 서쪽에 그어져 있는 만큼, 이르쿠츠크 요새를 기준으로 동쪽에 아직 남아 있는 러시아 차르국의 잔당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도 논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예브게니는 이르쿠츠크 요새가 점령되어 이미 동쪽의 러시아 차르국 세력은 소멸했으리라 여겼는데 연합에서는 이들을 내버려 두었다는 사실을 의아하게 여겼고.

다만 투란이 어차피 이르쿠츠크 요새를 점령한 이상 잔당들은 러시아 차르국과의 연결이 끊긴 터라 시간이 흐르면 물자 부족으로 자연히 연합에 항복할 거로 생각해 그냥 내버려 두었다고 설명하면서 상황이 변했으니 러시아 차르국에서 이들을 설득해 무장을 해제하고 연합에 순순히 항복하도록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했다.

이를 듣고 예브게니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연합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게 낫겠다 싶어서 자신들의 설득으로 순순히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한 러시아인들은 러시아 차르국으로의 귀환을 보장한다면 돕겠다고 조건을 걸었고 투란은 이를 수락했다.

어차피 이르쿠츠크 요새 동쪽의 러시아인들은 그리 많은 편이 아니라 이들을 포로로 잡아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보다는 그냥 저들에게 안전한 퇴로를 제공하는 대신 빠르게 이르쿠츠크 동쪽 지역을 안정화하고 연합의 영역을 남동쪽으로 확장하는 것이 나아 보였으니까.

그리고 조약을 맺은 이상, 또한 청나라와 북미왕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이상 빠르게 이르쿠츠크 동쪽 지역을 안정시켜야겠다는 생각에 투란이 예브게니에게 질문하자 예브게니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곧바로 모스크바로 돌아가 이번 평화 조약의 내용을 차르께 보고해야 하는지라 그럴 수는 없고 제 보좌관이 연합의 병사들과 동행하며 러시아인들을 설득할 겁니다.”

이에 투란은 고개를 끄덕인 후 차가운 얼굴을 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시지요? 저들이 무장을 해제하지 않는다면...”

보좌관의 설득에도 러시아인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공격할 수밖에 없다는 투란의 이야기에 예브게니는 상관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 보좌관에게 차르께서 내리신 임명장을 들려 보낼 생각입니다. 그러니 보좌관의 말은 곧 차르의 명령이나 다름없고, 차르의 명령을 무시한 이는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라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연합이 그런 반란군을 공격하는 것에 대해서 딱히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야...”

예브게니의 대답에 투란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 예브게니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아. 그리고 알바진 요새 사령관은 연합에서 알아서 하시고요. 보좌관에겐 따로 이야기해두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러시아 차르국이 북미왕국과 분쟁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알바진 요새 사령관 니키포르를 모스크바로 끌고 가 각종 죄목으로 사형에 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긴 했다.

다만 이를 위해 연합 뒤에 있는 북미왕국의 심기를 건드릴 수야 없었기에 예브게니가 깔끔하게 이를 포기하자 어느 정도 사정을 아는 투란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그보다 조약의 내용대로 현재 연합에서 노역하고 있는 러시아인 포로들을 잘 대우해주시리라 믿겠습니다.”

“물론입니다. 몇 번 설명했다시피 포로 중에는 민간인도 있는 터라 잘 대우해주고 있습니다. 비록 노역을 시키고는 있습니다만 충분한 식량과 휴식 시간을 보장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조약대로 3년의 노역형이 끝나면 포로의 의사를 물어 러시아 차르국으로 돌아가길 원한다면 풀어주겠습니다. 아. 물론 이 의사를 물을 때는 포로를 이곳으로 이동시킨 후 귀국의 관리와 동석시킨 장소에서 확인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평화 조약을 맺기로 했으니 당연히 포로 문제도 협상했다.

문제는 연합에서는 유럽의 관례대로 러시아 차르국이 그동안 포로들을 먹이고 관리하는 데 들어간 비용, 즉 포로의 몸값을 지불해야 포로를 풀어주겠다고 이야기했지만, 러시아 차르국에서는 가뜩이나 돈이 되는 검은담비의 모피를 구할 수 있는 지역을 대부분 잃은 상태에서 비싼 포로의 몸값을 모두 내는 것은 부담스러웠고.

그리고 꼭 몸값을 지불해가면서 데리고 와야 할만한 포로도 없었다.

해서 논의 끝에 연합에서 노역 중인 러시아인 포로들은 3년간 노역을 하며 연합에 진 빚을 갚은 후 포로 신분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합의했고.

다만 포로 중 일부는 북미왕국이 관리하고 있었고, 연합에서도 영토에 비해 인구가 적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북미왕국의 조언대로 포로들에게 일은 시키더라도 풍족한 식량을 제공하는 등 나름대로 포로들에게 신경 쓰고 있던 터라 포로들을 3년 후 무조건 러시아로 송환할 수는 없었다.

더불어 포로 중에는 이르쿠츠크 요새의 병사들처럼 연합에 항복한 이들도 있었으니.

해서 투란은 3년의 노역으로 연합에 지은 빚을 모두 갚은 포로들에게 연합에 남을지, 러시아 차르국으로 돌아갈지 의사를 물어 포로의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조건을 걸었고.

예브게니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이를 받아들였다.

예브게니가 생각하기에는 포로들이 노역을 마친 후에는 당연히 조국이자 고향으로 귀환하겠다는 선택을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해서 예브게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투란을 바라보았다.

“예. 믿겠습니다. 헌데 그렇게 되면 가장 처음 풀려나는 이들은 역시 야쿠츠크 요새 출신 포로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들은 연합의 포로가 되어 벌써 2년 가까이 모처에서 노역 중이니만큼, 아마 내년 말에 빚을 다 갚고 자유의 신분이 될 겁니다. 다만 그들이 노역 중인 곳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못해도 반년은 걸릴 듯싶긴 합니다만...”

야쿠츠크 요새 출신 포로들은 민간인 가족들 때문에 아이누 섬으로 이송되어 석탄을 캐고 있었기에 투란이 말을 흐리자 예브게니가 괜찮다는 듯 손을 들었다.

“아. 뭐 시베리아 지역이 무척 넓다는 거야 알고 있으니까요. 그 점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포로 중에는 민간인들도, 정확히는 여인과 노약자들도 있는 만큼 이동하다 사망하면 곤란했기에 예브게니가 괜찮다면서 1년 안에만 이곳에 데려오면 된다고 이야기하자 투란이 웃으며 대꾸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평화 조약도 맺었고 대충 논의할 사항도 다 논의한 것 같으니...연회라도 여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에 투란이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물론 준비해두었습니다. 북미왕국산 술이 가득한 연회를 말입니다.”

“오! 그렇습니까? 북미왕국산 술이 무척 맛있던데...”

예브게니는 런던에 있을 때 북미왕국산 술을 접했었고, 나름 독하면서도 깔끔해 취향에 맞았기에 투란의 이야기에 화색이 돌자 투란이 껄껄대며 웃었다.

“하하하. 그러니 일어나시지요. 바로 연회를 시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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