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8화
겨우 9월 말이었지만, 듣던 대로 이 시베리아 지역의 기온은 무척 싸늘했고 바람은 매서웠기에 예브게니는 몸을 부르르 떨며 빠르게 시베리아 부족 연합이 내어준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고.
숙소의 문을 열자 흘러나오는 따뜻한 공기에 예브게니는 안도하면서 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난로에 장작을 넣던 보좌관은 예브게니를 보고 남은 장작을 내려놓으면서 예브게니를 반겼다.
“협상이 끝나셨습니까. 대표님.”
“아닐세. 협상이 지지부진해서 잠시 휴식을 선언하고 이렇게 온 걸세.”
그러면서 예브게니가 한숨을 내쉬자 보좌관이 얼굴을 찌푸렸다.
“설마 저들은 오비 강을 경계로 영토를 정해야 한다는 원안을 고수하고 있는 겁니까?”
톰스크 요새에서 기다리고 있던 예브게니를 비롯한 러시아 차르국 사절단은 크라스니야르 요새에 연합의 협상 책임자가 도착했으니 협상을 시작하자는 이야기에 생각보다 연합의 보고 체계가 신속하다고 감탄하며 다시 크라스니야르 요새로 향했고, 그곳에서 연합의 협상 책임자라는 투란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협상에 들어갔는데 처음 투란은 협상에 긍정적으로 반응했기에 예브게니는 무척 다행이라고 여겼고 실제 평화 협상은 비교적 빠르게 진행되었기에 예브게니는 잘만 하면 새해는 모스크바에서 보낼 수 있겠다며 좋아했지만, 양국의 국경이 명확해야 충돌이 없을 거라면서 투란이 오비 강을 경계로 국경을 정해 영토를 분할하자고 주장하니 예브게니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들이 주장하는 데로 영토 협상을 맺어버리면 러시아 차르국은 그동안 개척해온 시베리아 지역 대부분을 잃게 되는 셈이었으니까.
해서 예브게니는 그 땅은 이전부터 러시아 차르국이 개척해서 영토로 만든 땅이라 그러한 영토 협상은 불가하다고 외쳤지만, 투란은 한티 족과 만시 족 등을 거론하며 그 지역은 원래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땅이고, 그들은 러시아 차르국의 통치에 계속해서 반발하고 있으니 시베리아 지역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러시아 차르국이 오비 강 서쪽으로 물러나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영토 협상 문제로 일주일 넘게 대립했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자 투란은 이번 주 안에 협상을 완료하지 못한다면 그냥 협상을 종료하겠다고 선언했고, 당연히 예브게니는 필사적으로 의견 차이를 좁히기 위해 노력했다.
그 덕분에 약간의 성과가 있었기에 예브게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한 발자국 물러났지.”
“어?!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오비 강을 경계로 한다는 뜻은 그동안 개척한 시베리아 땅 대부분을 내줘야 한다는 건데 그러한 조약을 모스크바에서 절대 인정할 리 없다는 것을 계속해서 설명했고 연합의 협상 책임자도 드디어 이를 이해한 것 같더군.”
일단 예브게니가 이번 협상에서 전권을 가진 것은 맞지만, 시베리아 지역 대부분을 넘기는 조약을 체결해 모스크바로 가져가 봐야 모스크바에서는 그 조약을 인정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더불어 그런 조약에 서명한 예브게니는 사형장으로 직행할 테고.
그렇기에 예브게니는 투란에게 이러한 조약을 맺어봐야 양국의 평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피력했고, 투란 역시 이 정도로 압박했으면 충분하다는 생각에 한 발자국 물러났다.
“허면...?”
“연합의 협상 책임자는 한 발자국 물러나 오비 강과 예니세이 강 사이에 국경선을 긋자고 하던데...그게 문제네.”
예니세이의 대답에 보좌관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질문을 던졌다.
“음...저들이 원하는 국경선이 서쪽으로 치우친 겁니까?”
“비슷하네. 저들은 최소한 예니세이 강 유역은 모두 연합의 영역으로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
그 말에 보좌관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차피 연합이 크라스니야르 요새를 점령한 이상 예니세이 강 유역이 연합의 영토로 설정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싶어서.
“그 정도야...”
그런 보좌관의 반응에 예니세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뭐 그 정도야 이해할 수 있지. 문제는 국경선을 긋는 방법일세.”
“예?”
예니세이는 탁자 위에 시베리아 지역의 지도를 펼치며 말했다.
“예니세이 강이 곧게 흐르는 강도 아닌데 예니세이 강에서 서쪽 100km를 경계로 국경선을 긋자고 한다면...국경선이 꽤 복잡해지겠지?”
“음...그건 그렇지요.”
“그래서 저들은 예니세이 강 하류를 기준으로 바로 수직으로 선을 그어 영토를 나누자고 주장하는데 그게 문젤세.”
그러면서 예브게니는 지도에 하나의 선을 그었고, 이 선을 보고 보좌관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 이렇게 선을 그으면 톰스크에서 물러나야 하는 겁니까?”
“그래. 니름 마을도 포기해야 하고, 천상 수르구트까지 철수해야 할 판이지.”
이에 보좌관은 선이 그어진 시베리아 지역의 지도를 바라보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으음...이 넓은 영역을 그냥 넘겨주기는 조금 아쉽긴 한데...이걸 넘겨줌으로써 연합과 평화 조약을 맺을 수 있다면 괜찮아 보이는데요?”
“흠.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나?”
예브게니가 보좌관의 생각을 묻자 보좌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차피 이번 협상이 깨지면 지금 이 크라스니야르 요새에 있는 연합의 병력이 다시 서진할 텐데...톰스크에서 항전한다 한들 과연 연합의 서진을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라서 말입니다.”
“후우...그렇긴 하지.”
예브게니가 강하게 반발하지 못한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예브게니가 투란과 협상하는 사이 다른 러시아인들은 이 크라스니야르 요새 곳곳을 살폈고, 북미왕국의 무기로 무장한 이들이 생각보다 많았으며, 북미왕국의 후장식 대포로 보이는 물건까지 있었으니까.
원주민들의 공격을 막는데 요새는 절대적인 위력을 자랑했지만, 북미왕국의 후장식 대포를 상대로 러시아 차르국의 요새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몇 번의 전투에서 확실히 깨닫게 되었으니 후장식 대포로 무장한 연합의 병력이 무척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저들이 처음에 오비 강을 경계로 영토를 나누자고 이야기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저들은 톰스크를 함락한 후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서진할 텐데, 본국에서 오스만 제국과 평화 협정을 맺은 후 남쪽에 파견한 병력을 다시 시베리아까지 파견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겁니다. 그리고 저들이 한티 족과 만시 족을 거론한 것을 생각해보면 오비 강 유역의 상황을 뻔히 알고 있다는 뜻인데...”
“그래. 연합은 오비 강을 따라 쭉쭉 진격할 테고 한티 족과 만시 족을 비롯한 시베리아 원주민들은 연합의 편에 서서 반기를 들겠지. 젠장.”
보좌관의 말에 예브게니가 막막한 표정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자 보좌관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이야기를 계속했다.
“예. 그렇게 되면 정말 쭉쭉 밀릴 겁니다. 어쩌면 본국에서 시베리아 지역에 병력을 배치하기도 전에 오비 강 동쪽을 모두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보면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영토 협상을 맺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예브게니 역시 보좌관과 비슷한 생각이기는 했다.
다만 이대로 영토 협상을 맺는다면 지도상으로 너무 많은 영토를 연합에 넘기는 셈이라 자신의 입지가 위험할 것 같았기에 한숨을 내쉬며 그러한 속내를 보좌관에게 슬쩍 밝혔다.
“끙...그렇지만 전투 한번 없이 이 많은 땅을 내어주면 모스크바에서 한소리 할 것 같은데...”
이에 보좌관은 예브게니가 망설이는 이유를 깨닫고 조심스럽게 조언했다.
“물론 지도상으로 보면 꽤 넓은 땅이기는 합니다만 저희 러시아 차르국이 실제로 통치하는 영역은 톰스크 주변 지역 정도인데...평화 협상을 위해 이곳을 포기한다고 모스크바에서 대표님을 문책할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만...”
“으음...”
보좌관의 말대로 오비 강 유역의 상류 부근의 톰스크요새와 그 주변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거의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기껏해야 오비 강 중류의 수르구트와 톰스크 사이에 있는 니름 마을 정도인데 이곳은 조그마한 거점 마을이었기에 큰 의미가 없었고.
해서 예브게니가 심각한 표정으로 탁자에 놓인 지도를 바라보며 고민하고 있을 때 보좌관이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런던에 있는 북미왕국 대사가 이야기한 것처럼 꽤 많은 연합의 병사들이 북미왕국의 무기로 무장한 것을 확인했으니 이를 모스크바에 알린다면 차르께서도 대표님의 결정을 충분히 이해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보좌관의 말에 예브게니는 마음을 정했다.
어차피 투란이 이야기한 기간은 내일까지였던 터라 최대한 빠르게 협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니까.
“후우. 그래. 현재 아국의 상황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지. 마지막까지 설득해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그냥 협정을 체결해야겠군.”
* * *
“흐음...도저히 톰스크를 포기하기는 어렵다는 뜻입니까?”
투란의 물음에 예브게니는 마지막으로 설득해볼 심산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시베리아 지역에 제대로 된 거점이 많지 않다 보니 우리 러시아 차르국은 톰스크 지역을 개발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헌데 톰스크 지역을 포기한다는 영토 협상을 체결하게 되면 제 안위가 위태롭습니다. 그러니 조금 양해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어차피 국경선이야 적당히 조절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에 투란은 조금 고민했다.
처음 강하게 오비 강을 경계로 삼자고 주장하면서 협상을 진행한 탓에 계속 밀어붙인다면 예니세이 강 하류를 기준으로 선을 그을 수도 있을 것 같았기에.
특히 협상을 진행하면서 투란은 아이누 탐사대장에게 부탁해 아이누 탐사대원들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연합의 병사 대부분이 북미왕국의 무기로 무장했다는 인식을 심어주었고, 이 때문에 러시아 차르국은 연합의 서진을 두려워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던 만큼.
하지만 톰스크 지역까지 연합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연합의 발전이었기에 투란은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지요.”
“경청하겠습니다.”
투란이 탁자 위에 놓인 지도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이전처럼 예니세이 강 하류에서 국경선을 수직으로 긋되 이 위도 60도를 기준으로 해서 국경선을 동쪽으로 200km 옮기도록 하지요. 그럼 60도 밑으로는 국경선이 톰스크와 이 크라스니야르 요새 사이로 지나가게 되니 괜찮겠지요?”
“오! 그렇습니다. 이런 식의 국경선이라면 모스크바에서도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겁니다.”
예브게니는 투란의 말에 이게 웬 떡인가 싶었다.
엄살피우는 것이 정말 먹힐 줄은 몰랐으니까.
해서 예브게니가 활짝 웃으며 투란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조약문을 작성할 생각을 했을 때 투란이 예브게니를 보고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대신...귀국도 한티 족과 만시 족을 비롯한 시베리아 원주민들을 토벌하는 일을 그만둬주십시오.”
“예?”
갑자기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이야기가 왜 나오나 싶어서 예브게니가 당황한 표정을 짓자 투란이 말했다.
“우리는 러시아 차르국에 핍박받은 기억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헌데 귀국이 오비 강 유역의 원주민들을 탄압한다면...연합 내의 많은 이들이 이들에게 감정을 이입하며 분노하겠지요. 당연히 여론은 왜 러시아 차르국과 화친을 맺었느냐며, 러시아 차르국을 공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질 테고. 그럼 이번 협정을 체결한 제 자리가 위험해집니다.”
“으음...”
협상을 진행하면서 예브게니는 투란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고, 연합 내의 정치 구조를 어느 정도 알게 되었기에 투란의 말에 예브게니가 신음을 흘리며 생각에 잠기자 투란이 입을 열었다.
“제가 귀하의 처지를 고려해 준 만큼, 귀하도 제 처지를 조금 고려해주셨으면 합니다만...”
이에 예브게니는 투란이 원하는 것을 확인하고자 질문을 던졌다.
“그럼 조약문에 시베리아 지역의 원주민들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문구라도 넣어달라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시베리아 지역의 원주민 부족들을 절대 공격하지 말아 주셨으면 하고요.”
투란의 대답에 예브게니는 고개를 저었다.
조약문에 문구 정도 넣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원주민을 절대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들어주기 어려웠기에.
“그건 조금 어렵습니다. 아국의 통치에 반발하는 이들을 그냥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예브게니의 말에 투란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애써 고민하는 표정을 하다 입을 열었다.
“흐음...그럼 이렇게 하지요. 저희가 시베리아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원주민들과 접촉해 귀국의 통치를 반대하는 부족을 설득하겠습니다.”
“설득이라면...?”
“귀국의 통치가 싫다면 연합으로 이주하라고 말입니다.”
연합의 입장에선 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구수였다.
그렇기에 아이누 탐사대장이 따로 오비 강 유역의 원주민들과 접촉해 이들을 연합으로 이주시키려고 하는 중이었고.
하지만 투란이 생각할 때 계속해서 원주민들이 연합의 땅으로 이동하게 되면 러시아 차르국이 이를 막을 수도 있다고 보았다.
원주민들이 다 도망치면 모피를 구해올 노예가 사라지는 셈이니.
그러니 투란은 공식적으로 시베리아 원주민들을 연합으로 데려올 수 있도록 협정을 맺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해서 이렇게 이야기하자 예브게니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 그러니까 반란분자들을 설득해 데려가시겠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귀국은 시베리아 지역이 안정될 테니 좋고, 저희 연합은 같은 처지의 원주민들을 도울 수 있어서 좋을뿐더러 귀국이 더는 원주민들을 핍박하지 않으니 사이좋은 이웃으로 남을 수 있겠지요.”
“으음...”
예브게니는 투란의 이야기를 듣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예브게니도 오비 강 유역의 상황을 모르지 않았기에 지금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원주민 상당수가 연합으로 이주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만 예브게니가 생각하기에도 반항적인 원주민들이 계속 오비 강 유역에 남아있어 봐야 러시아 차르국에 좋을 것이 없었고, 이들을 토벌하다 연합과 마찰이 빚어지면 그것도 문제였다.
그리고 원주민들의 수가 그리 많은 것도 아닌데 이들을 지키겠다고 저 넓은 땅을 포기하는 것도 수지가 맞지 않았고.
해서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시지요.”
예브게니의 대답에 투란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애써 감추면서 말했다.
“크흠. 좋습니다. 그럼 바로 조약문을 작성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