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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547화 (547/850)

547화

이정운과 대화를 마무리한 정성국은 곧바로 보스턴 항의 여러 관리를 만나 매사추세츠 지역의 현황을 보고 받았다.

매사추세츠 지역은 북미 동해안 지역 중에서 핵심적인 지역이었기에 그 보고는 생각보다 길어졌고.

그래서 해가 질 때쯤에 대략적인 보고가 끝나 정성국이 한숨을 내쉬며 슬슬 관사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호위대장이 굳은 얼굴로 정성국에게 다가와 매사추세츠 지역의 목사들이 대거 관사 주변으로 몰려와 정성국을 알현하기 위해 아까부터 바깥에서 기다리며 계속 호위대원들의 귀를 괴롭히는 중이라고 전했다.

정성국이 종교를 그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은 아니었기에 종교의 자유를 명목으로 이들을 견제하기 위한 갖가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터라 목사들과 만난다는 것이 조금 껄끄럽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이들 역시 북미왕국의 백성인데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한숨을 내쉬며 이들을 식당으로 불러들였고.

저녁 식사를 먹으며,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 목사들과의 접견을 계속한 정성국은 깊은 밤이 되어서야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관사로 돌아왔다.

“아. 오셨네요? 오라버니.”

“고생하셨어요. 전하.”

그리고 티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나누던 전아라와 하얀 들꽃은 정성국이 방으로 돌아오자 활짝 웃으며 일어나 정성국을 반겨주었고.

“어? 아직 안 자고 있었어?”

정성국은 목사들과의 이야기가 길어지자 호위대장을 통해 아내들에게 먼저 자라고 말을 전했었기에 의외라는 듯 묻자 전아라가 배시시 웃으면서 대답했다.

“오라버니가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지 어떻게 잘 수 있겠어요.”

그리고 전아라의 말에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하얀 들꽃을 보고 정성국은 목사들을 상대하며 생겼던 피로가 풀리는 것을 느끼며 방안을 슬쩍 둘러보고 질문을 던졌다.

“애들은?”

“방금 자러 들어갔는데...불러올까요?”

이에 정성국은 고개를 저으며 전아라와 하얀 들꽃이 대화를 나누었던 티테이블의 의자에 앉아 남아 있는 쿠키를 보고 커피가 생각나 하얀 들꽃을 바라보았다.

“혹시 커피 한잔 내려줄 수 있을까?”

“상관은 없는데...안 주무시려고요?”

하얀 들꽃이 걱정하자 정성국은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아. 난 하도 마셔서 커피 마신다고 잠을 못 자거나 하진 않으니까.”

정성국이 커피를 달고 사는 거야 하얀 들꽃도 모르지 않았기에 하얀 들꽃은 쓴웃음을 지으며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고, 커피 향이 방안에 퍼지자 정성국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런 정성국을 보고 하얀 들꽃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많이 지쳐 보이셔요. 전하.”

“음. 개신교 목사들이 하도 집요하게 굴다 보니 조금 지치네. 아. 고마워.”

정성국이 하얀 들꽃이 건네주는 커피잔을 받아들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을 때 옆에 있던 전아라가 상황을 짐작하고 물었다.

“종교 문제 때문에요?”

“그렇지. 은근슬쩍 포교할 수 있게 각종 제한을 풀어달라거나, 지금 보스턴 항 외곽에 짓고 있는 절의 규모가 너무 큰 것 아니냐고 투덜대거나, 곧 신설되는 불교학과를 굳이 하버드 대학에 만들어야 하느냐, 원주민들이 믿고 있는 종교는 제대로 된 종교가 아니니 북미왕국에서 공식적으로 이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 교과서에 적힌 지동설이나 자연선택설 같은 잘못된 내용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서는 안 된다, 신자들이 내는 헌금에도 세금을 붙이는 것은 너무한 것 같다 등등. 어휴. 처음에만 하더라도 엄청 얼어붙어 있길래 부드럽게 대우해줬더니 아주 그냥...”

정성국이 북미 동해안 지역을 방문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목사들은 이것을 기회라고 보았다.

분명 북미왕국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지만, 워낙 제약이 많아 제대로 포교하기조차 어려웠으니까.

해서 정성국이 방문할 것으로 예상되는 보스턴 항에 모여있다가 정성국이 예상대로 보스턴 항을 방문하자 무작정 정성국이 머무는 관사로 이동해 정성국을 알현하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덕분에 정성국을 만날 수 있었지만 처음 관사로 몰려와 호위대원들에게 막무가내로 알현을 요청했던 것과는 달리 바짝 얼어붙어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북미왕국에서 그들은 대단한 종교 지도자가 아닌 일반 백성에 불과했고, 정성국은 이 강력하고 부유한 북미왕국의 통치자였으니까.

또한, 이들도 북미왕국의 백성이 되면서 기본적인 교육을 받고 북미왕국의 역사를 배웠기에 정성국이 일반적인 왕이 아니라 건국왕이자 정복왕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며 정성국의 행동은 아무리 보아도 종교에 우호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으니 당연히 정성국과 식당 안쪽에서 꽤 살벌한 기세를 발하는 호위대원들을 보고 얼어붙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목사들의 반응에 정성국은 혀를 차면서 호위대장에게 명령해 호위대원 일부를 식당에서 내보내고, 웃는 얼굴로 대화를 주도해 분위기를 풀었고.

이런 정성국의 노력 덕분에 분위기가 많이 풀리고, 정성국이 생각보다 온화하다는 인상을 받은 목사들은 그제야 하나둘 정성국에게 말하고자 했던 내용을 전달했다.

물론 목사들의 요청 대부분은 정성국으로서는 절대 받아줄 수 없는 요청이었기에, 그렇다고 단칼에 잘라내기엔 정성국과 대화를 나누는 목사들은 매사추세츠 전역에서 모인 이들의 대표와 같았기에 그 영향력을 아예 무시하기는 어려워 이들을 잘 설득해 목사들의 불만을 최소화하는 데 집중했고.

그러다 보니 이야기는 길어져 이렇게 12시에 가까운 시간에 관사로 들어오게 되었고, 전아라와 하얀 들꽃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하며 조금 전 목사들과의 대화를 떠올린 정성국은 다시 열이 오르는지 투덜거리자 전아라가 웃음을 터트려다.

“호호호. 그래서 어쩌셨어요?”

“뭘 어째. 좋게좋게 얘기했지. 일부는 이미 법으로 정해진 사항이라 어쩔 수 없고, 그 외도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설득하느라 이렇게 늦게 온 거야.”

이에 전아라가 조금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히려 단호하게 끊으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오라버니께서 계속 저들의 영향력을 견제하신 덕분에 지금 저들의 영향력은 예전만 못하잖아요?”

“예. 잉글랜드 식민지 시절에야 왕이나 다름없었지만, 지금은 교회를 다니는 이들도 목사보다는 아국 관리의 말을 더 따를 텐데...”

하얀 들꽃은 정성국을 도와 여러 보고를 받으며 북미 동해안 지역의 상황에 더욱 정통했기에 그렇게 이야기하자 정성국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긴 하지. 그래도 종교 세력과 너무 척을 질 필요는 없잖아? 그리고 북미 동해안 지역이 아국에 합류했을 때 기독교 목사 중 일부는 불안해하는 잉글랜드인들을 안정시키기도 했고.”

“그렇긴 한데...전하께서 목사들을 너무 너그럽게 대해주셔서 목사들이 이를 오해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운데요?”

“괜찮아. 목사들이 법을 어기면 가차 없이 처벌하라고 관리들에게 이야기해 둘 테니까.”

“그렇다면야...”

정성국의 이야기에 하얀 들꽃이 수긍하자 정성국은 어느 정도 식은 커피를 내려놓고 말했다.

“후. 살겠네. 그럼 슬슬 자자. 내일부터 또 일정이 꽤 많으니까.”

* * *

“허. 생각보다 넓군.”

지금 정성국이 방문한 곳은 바로 하버드 종합 대학교였다.

북미왕국의 단 2개뿐인 종합 대학교이기도 하고 전생의 하버드 대학교의 명성을 기억하는 정성국은 당연히 매사추세츠 지역을 방문하면서 이 하버드 대학교를 방문하고 싶어했고.

해서 정성국은 일정을 조정해 보스턴 항 인근에 있는 하버드 대학교를 방문했고, 전생의 비교적 아담한 정문과 비교되는 화려하고 커다란 대학교 정문에 한글로 국립 하버드 종합 대학교라고 쓰여 있는 모습을 보고 정성국은 잠시 기묘한 얼굴로 그 정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하버드 대학교의 학장과 교육청 관리의 안내로 이동하면서 하버드 대학교 내부를 둘러보고 생각보다 넓은 부지와 듬성듬성 지어져 있는 건물을 바라보며 정성국이 감탄하자 뒤에서 따라오던 교육청 관리가 입을 열었다.

“훗날을 생각해 대학교 면적을 꽤 크게 잡았기에 넓은 편입니다. 전하.”

“대학교 외곽에 있는 저 공원들, 그리고 대학교 내부 건물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저 공원들이 훗날 하버드 대학교가 확장하게 되면 결국 건물이 들어설 장소라는 소리지?”

“그렇습니다. 전하. 공원들 일부가 사라지고 건물이 들어서게 된다면 새한성 대학교처럼 정원을 8천 명까지 늘릴 수 있겠지요. 물론 꽤 오랜 시일이 흐른 뒤에나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

교육청 관리의 말에 옆에 있던 하버드 대학교의 학장이 무척 아쉽다는 표정을 지우지 못했고, 정성국은 이를 눈치채고 피식 웃었다.

“다른 지역에 새로운 종합 대학교 건설되면 하버드 대학교의 확장이 밀릴까 봐?”

“아무래도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선생들은 한정되어 있다 보니...”

학장이 조심스럽게 정성국에게 반문하자 정성국은 발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글쎄? 지금 사범 대학교를 건설한 후에나 새로운 종합 대학교를 건설할 예정이고, 지금도 새한성 대학교를 졸업한 인재들이 열심히 구르며 학문을 배우고 실무를 익히고 있으니...그때쯤 되면 상황이 많이 나아지겠지.”

“그럴까요?”

“그래. 그리고 한가지 말해주자면...지금도 유럽에서 꽤 많은 학자가 외무청을 통해 공식적으로 이주하고 있다네.”

정성국의 말에 학장이 자신도 잘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아. 예. 그건 들었습니다. 아국에서 대학교 선생들의 연구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준다는 이야기가 유럽에 알려지고, 새로운 종합 대학교 건설 계획이 북미신문에 실리면서 그 자리를 노리고 많은 학자와 지식인들이 이주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지. 문제는 새로운 종합 대학교를 건설하고, 또 문을 열 때까지 꽤 시간이 걸릴 거란 말이지? 헌데 그동안 이들을 놀리기는 좀 그렇잖아?”

정성국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눈치챈 교육청 관리와 학장이 눈을 빛내며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허면...?”

“그러면...”

둘의 반응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서 교육청장과 하버드 대학교를 확장하는 문제를 논의 중이네. 교육청장이야 하버드 대학교를 확장하면 더 많은 학생을 교육할 수 있으니 나쁠 것 없다는 반응이고.”

“오오! 그렇습니까?”

하버드 대학교가 확장되면 더 많은 인구가 유입되는 만큼, 학장이나 교육청 관리뿐만 아니라 정성국을 따라 하버드 대학교를 방문했던 다른 관리들도 눈을 빛내며 정성국을 바라보았고.

그런 관리들의 반응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은 교육청장이 나서서 개발청과 일정을 조율 중이네. 아마 일정이 결정 나면 교육청과 개발청에서 공문을 보낼걸세.”

“알겠습니다. 미리 준비를 해두어야겠군요.”

개발청 관리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을 때 정성국은 멀리서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학생들을 확인하고 손을 흔들어 주면서 입을 열었다.

“저들이 다 아국의 백성은 아니지?”

“그렇습니다. 외국인들이 1/3 정도는 될 겁니다.”

학장의 대답에 정성국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기억하기로 처음 하버드 대학교가 재단장을 마치고 입학생을 받았을 때는 외국인의 비율이 절반이 넘었기에.

“호오? 그래도 생각보다 비율이 낮아졌네?”

“그렇습니다. 전하. 처음에는 외국인들의 비율이 높았습니다만...최근에는 아국의 백성들도 많이 입학하는 터라 상대적으로 외국인들의 비율이 줄어들었지요.”

“그래? 전에는 의학, 법학, 건축학, 생물학, 경제학을 제외하면 대다수 학문은 인기가 무척 낮아 결국 외국인들을 입학시켰는데...상황이 달라졌나 보군?”

아직 북미왕국에선 실용적인 학문을 높게 평가하고 그 외의 학문은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강했다.

그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의학 계열, 자연과학 계열, 공학기술 계열의 학과에 입학하지 못하면 곧바로 일자리를 구하는 편이었고.

덕분에 인문사회 계열이나 예체능 계열의 경우 사람이 없었는데 상황이 조금 달라진 것 같아 정성국이 관심을 보이자 옆에 있던 교육청 관리가 입을 열었다.

“그런 편입니다. 전하. 아무래도 백성들의 생활이 여유롭다 보니 학문에 관심 있는 친구들은 성인이 되면 곧바로 일자리를 찾기보다는 고등학교, 대학교로 진학하려는 경향이 강해져서 말입니다. 물론 아직 다수는 곧바로 일자리를 구하긴 합니다만...최소한 다른 학과들의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일은 사라졌습니다.”

“흐. 나쁘지 않군.”

교육청 관리의 이야기에 정성국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물론 당장은 나라의 사정 때문에 실용적인 학문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나라가 안정적으로 발전하려면 다양한 학문이 골고루 발전할 필요성이 있었으니까.

특히 인간의 근원 문제를 탐구하는 인문학이나, 인간을 둘러싼 사회적 현상을 탐구하는 사회과학의 경우 백성들이 너무 관심이 없는 탓에 이런 풍조를 바꾸기 위해 정안문과 정나리가 대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면 아이들을 철학과나 사회학과 같은 곳에 입학시켜야 하나 고민도 했을 정도였으니.

“그렇습니다. 다양한 학문의 발전은 북미왕국을 더욱 발전시킬 테니 말입니다.”

학장의 대꾸에 고개를 끄덕인 정성국은 발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돌려 정면에 보이는 붉은 벽돌로 지은 유럽식 3층 건물을 보고 감회가 새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보다...이곳이 바로 하버드 대학교의 원형이 되는 건물인가?”

“그렇습니다. 예전엔 저 건물뿐이었지요. 해서 개발청에서도 저 건물을 본떠 다른 건물들을 지었고요.”

“아. 그게 그 이유에서였나? 난 그냥 유럽식 건물을 지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 저 건물이 유럽식 건물이니 그것도 맞는 이야기지요.”

그게 그거라는 개발청 관리의 말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학장을 바라보았다.

“저 건물도 사용하는 거지?”

“그렇습니다. 저 건물은 신학과가 사용하고 있지요.”

“뭐 저 건물을 짓는데 기부한 이가 존 하버드였으니 어쩌면 그게 맞는 거겠지. 아. 혹시 존 하버드의 초상이 남아 있다면 잘 보관해두게. 나중에 저 건물 안에 전시하든, 아니면 초상을 보고 근처에 동상이라도 만들든 하게.”

정성국은 옛 하버드 칼리지 건물을 보고 전생의 하버드 대학교의 상징물 중 하나인 존 하버드 동상을 다시 세우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다만 전생의 존 하버드 동상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고, 동상을 만들 때 존 하버드의 초상이 없어 임의로 다른 교수의 얼굴을 본떠 만들었다는 일화를 떠올리고 그렇게 지시하자 학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오. 그러면 좋겠지요. 알겠습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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