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2화
정성국은 산아구스틴에 도착한 다음 날 왕실 가족들과 함께 산아구스틴 곳곳을 돌아다녔다.
에스파냐가 건설한 산아구스틴의 요새를 둘러보기도 하고, 개발청에서 건설한 70m 높이의 고층 건물을 방문해 주변의 풍경을 감상하기도 했으며, 한 시간 거리에 있다는 농업 연구소 분소를 방문해 연구원들을 격려하고 분소의 농장에서 재배 중인 여러 열대작물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고.
그러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을 때 관사로 돌아왔고 조금은 피곤함을 느꼈지만, 푸른 안개가 아까부터 응접실에서 정성국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보고를 호위대원을 통해 듣고 다시 응접실로 나왔다.
응접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창문 밖의 풍경을 바라보던 푸른 안개는 정성국이 응접실로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나 정성국을 보고 밝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전하. 농업 연구소 분소에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예. 후추 열매가 맺힌 후추나무를 실제로 보니 꽤 신기하더군요. 아이들도 무척 흥미로워했고. 거기에 각종 작물을 키우고 있는 터라 볼거리도 많았습니다. 식물원과는 또 느낌이 달라서 말입니다.”
“호오. 그렇습니까?”
“예. 장인어른께서도 함께 방문했었으면 좋았을 텐데...”
푸른 안개는 전아라나 정안문과의 사이도 무척 좋은 편이었다.
왕실 가족이 얼마 되지 않기도 했고, 전아라와 하얀 들꽃이 친자매처럼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 가족처럼 지내게 되었달까.
특히 전아라는 고아였고, 정성국 역시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기에 딱히 웃어른이 없었기에 정안문과 정나리와 시간을 보내면서 세상이 돌아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는 푸른 안개를 친가족처럼 여겼고.
그렇기에 푸른 안개가 외무청과 연락을 할 것이 있다면서 오늘 일정에서 빠지자 정성국을 비롯한 가족들은 산아구스틴 곳곳을 돌아다니면서도 푸른 안개가 없어서 아쉽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고 덧붙이자 푸른 안개가 빙그레 웃었다.
“허허허. 이거 다음부터는 꼭 일정에 합류하도록 하지요.”
이에 정성국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후 푸른 안개가 지금까지 여기서 자신을 기다린 이유가 궁금해 질문을 던졌다.
“그보다 외무청에서 좋은 소식이라도 들으셨습니까? 표정이 무척 밝으신데요?”
정성국의 물음에 푸른 안개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웅크린 늑대에게서 아주 좋은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대체 무슨 소식이길래 그러십니까?”
“미시시피 남부 지역에 커다란 가뭄이 들었고 이곳에 사는 원주민들이 가뭄으로 인한 피해를 볼 것을 우려해 전하께서 아직 아국에 합류하지 않은 원주민들에게도 접촉해 식량을 지원하라고 명령을 내리셨잖습니까.”
“아. 그랬지요.”
올여름부터 미시시피 지역에 가뭄이 들어 광범위한 지역에 가뭄으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그나마 수로 시설을 정비한 북미왕국과는 달리 원주민들은 그 피해가 무척 클 것으로 예상된다는 외무청의 보고에 정성국은 즉각 가뭄으로 피해를 보게 될 원주민들을 지원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해서 외무청은 미시시피 지역 내의 원주민들과 접촉해 식량 지원 의사를 밝히고 내년까지 식량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미시시피 지역에 사는 원주민 부족들은 예상하지도 못한 북미왕국의 지원에 무척 감사하면서 이를 받아들였고.
그동안 북미왕국과 묘하게 날을 세웠기에 북미왕국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고 우려했던 오세이지 족 역시 피해가 큰 편이라 결국 북미왕국의 지원을 받아들이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는 이야기와 미시시피 남부 지역의 원주민들이 모두 북미왕국의 식량 지원을 받아들임에 따라 수송선을 통해 비축 중이던 식량을 대거 수송 중이라는 이야기를 새한성을 떠나기 전에 외무청장인 조용한 곰에게 보고 받았기에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이자 푸른 안개가 말했다.
“덕분에 키우던 작물이 모두 말라비틀어졌음에도 내년까지 굶주릴 걱정 없이 지낼 수 있게 된 각 부족의 대족장들은 수송선을 타고 치카소나 새진주를 방문해 다시 한번 감사의 뜻을 표하고 앞으로 자신들이 도울 일이 있다면 기꺼이 돕겠다고 약속했다는군요.”
“하하하. 그거 고마운 일이로군요.”
“그리고 여러 부족 가운데 쿼포 족과 키오와 족은 아국에 합류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답니다.”
“어? 그게 정말인가요?”
푸른 안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이야기하자 정성국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물론 아직 북미왕국에 합류하지 않은 원주민들에게 식량을 지원한 이유는 이 기회에 이들에게 호의를 얻어 우호적으로 교류하고, 차츰 이들을 북미왕국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포석이기는 했는데, 이들의 반응이 너무 빨랐던 탓이다.
특히 치카소 맞은 편에 자리하고 있는 쿼포 족과는 달리 키오와 족과는 교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해서 정성국이 되묻자 푸른 안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키오와 족의 족장은 이번 일로 우리 북미왕국의 국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확실히 깨달은 모양입니다.”
푸른 안개의 말처럼 키오와 족은 북미왕국에서 갑자기 사람을 보내 가뭄으로 인해 앞으로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한다면서 내년까지 자신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충분한 식량을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처음엔 무척 당황하고 이들의 저의를 의심하면서도 당장 부족의 상황이 좋지 않았기에 일단 북미왕국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얼마 후 북미왕국에서 커다란 수송선을 보냈고, 이 수송선에서 식량이 끝없이 나오기 시작하자 북미왕국이 얼마나 부유한지를 확실히 깨닫게 되었고.
더불어 이렇게 식량을 지원해주면서도 북미왕국은 딱히 요구하는 것도 없다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해서 키오와 족은 이전과는 달리 외무청 관리와 선원들에게 북미왕국에 대해 꼬치꼬치 묻기 시작했고, 이미 저 동쪽의 원주민들을 대부분 북미왕국에 합류해 북미왕국의 백성으로 잘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자연재해가 닥쳤어도 미리 어느 정도 대비를 해 두었기에 큰 피해를 보지도 않고, 비축해둔 식량이 많아 한두 해 예기치 못한 자연재해가 닥쳐 농사를 망치더라도 큰 문제는 아니며 북미왕국의 땅은 워낙 넓어 어느 한 곳이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다른 지역에서 생산한 식량을 가져오면 그만이라는 이야기에는 새삼 놀랍고 부러울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북미왕국의 정보가 키오와 족 내부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키오와 족 일부는 동쪽의 다른 부족들처럼 북미왕국에 합류하자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고작 이웃 부족에게도 이렇게 막대한 식량을 지원해줄 정도라면 북미왕국의 백성이 된다면 더 큰 혜택을 누릴 수 있지 않겠느냐면서.
해서 키오와 족은 곧바로 부족 회의를 개최해 여러 족장들을 불러모아 부족의 미래를 의논하기 시작했고, 이 회의에서 거의 다수가 부족의 미래를 생각하면 북미왕국에 합류하는 것이 맞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키오와 족의 대족장은 식량을 모두 내리고 다시 새진주로 돌아가려는 북미왕국의 배에 올라탔고.
새진주에서 웅크린 늑대를 만나자 자신들을 도운 것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그동안 북미왕국에 합류한 다른 부족들처럼 키오와 족도 북미왕국에 합류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이를 전화로 웅크린 늑대와 통화하면서 전해 들은 푸른 안개가 정성국에게 자세히 설명한 후 커피로 목을 축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쿼포 족은 치카소 지역 역시 가뭄이 닥쳤지만, 수로 시설을 미리 마련해둔 덕분에 가뭄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한 것을 보고 아국에 합류하면, 자신들도 수로 시설이 마련된 논밭을 가질 수 있다고 여기고 합류한 모양이고요.”
이에 정성국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당분간 개발청에서 조금 고생하긴 해야겠군요. 아무튼, 키오와 족도 그렇고 쿼포 족도 그렇고 조그마한 부족들은 아닌데 이들 부족이 북미왕국에 합류한다니 정말 좋은 소식이군요.”
쿼포 족도 그렇지만, 키오와 족이 합류함에 따라 전생의 오클라호마 주까지 북미왕국의 영역이 확대된 터라 정성국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이야기하자 푸른 안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그리고 다른 부족들도 이번 일을 계기로 아국에 무척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만큼 외무청에서는 계속해서 이들 부족과 교류를 하면서 이들 부족을 모두 북미왕국으로 합류시킬 계획이라더군요.”
“그보다 키오와 족까지 아국에 합류했으면...오세이지 족은 저희에게 갇힌 셈이나 다름없군요.”
오세이지 족의 동쪽과 남쪽은 북미왕국의 영역이었고, 북쪽은 미주리 족의 영역이었는데 이들이 북미왕국에 합류하면서 북쪽 역시 막혀버렸다.
그리고 이들의 서쪽에 있는 키호아 족까지 이번에 북미왕국에 합류하면서 오세이지 족은 현 영역에서 막힌 셈이었기에 정성국이 묘한 표정을 짓자 푸른 안개는 북미왕국에 예민하게 굴었던 오세이지 족의 예전 행동을 떠올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렇지요. 거기에 이번 일로 오세이지 족 내부에서도 말이 많긴 한 모양입니다. 이런 일이 또 발생하면 그때도 북미왕국만 바라봐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그럴 바에는 미주리 족과 아이오와 족처럼 북미왕국에 합류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주장하는 족장들이 꽤 늘어난 모양이라더군요. 해서 웅크린 늑대는 다른 부족은 몰라도 오세이지 족은 조만간 북미왕국에 합류하지 않겠느냐고 예상하더군요.”
묘하게 북미왕국을 경게하고 적대했던 오세이지 부족도 오래 버티지는 못할 거라는 이야기에 정성국은 반색했다.
“오.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군요. 물론 아국에 합류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크게 상관은 없긴 한데...”
“오세이지 족의 영역이 큰 편이라 그러면 불편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오세이지 족의 영역은 무척 넓었다.
전생의 아칸소 주와 오클라호마 주를 거의 반씩 차지하고 있었으니.
그런 만큼, 이들이 북미왕국에 합류하지 않는다면 여러모로 불편할 수밖에 없긴 했다.
그리고 이번 미시시피 남부 지역의 가뭄으로 오세이지 족과의 관계도 풀리게 되었으니 정성국은 만족해하면서 머릿속으로 북미 대륙 내륙의 지도를 떠올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미 키호와 족과 쿼포 족이 합류했고, 외무청의 예상처럼 식량을 지원받은 부족들이 하나둘 북미왕국에 합류하기 시작한다면 북미왕국의 영역은 전생의 오클라호마 주, 캔자스 주, 거기에 콜로라도 주 인근까지 확대되는 만큼 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 정성국이 푸른 안개를 진지한 얼굴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 일로 생각보다 내륙 진출이 더 가속화되겠군요. 미리 각 청에 이를 알려 준비해야겠습니다.”
“그래야지요. 외무청을 통해 각 청으로 공문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한 푸른 안개는 다시 커피로 목을 축인 후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건 조금 다른 보고이기는 한데...에스파냐 세비야의 공사가 오스만 제국을 방문해 오스만 제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습니다. 더불어 교역 협정을 맺었고 신식 소총을 판매하기로 합의했다는군요.”
이에 정성국은 눈을 빛내며 급히 질문을 던졌다.
“아. 오스만 제국과 드디어 접촉한 겁니까? 신식 소총을 판매한다면 몇 자루나 팔기로 했답니까?”
“3만 자루라고 합니다.”
“3만 자루라...”
정성국이 잠시 머릿속에서 계산하고 있을 때 푸른 안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더 많은 신식 소총을 원했지만, 저희가 원하는 것은 적당한 균형이지 오스만 제국이 유럽을 점령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해서 줄이고 줄여 3만 자루로 합의한 모양입니다. 물론 오스만 제국에서는 너무 적다고 불만이 조금 컸다고는 하는데...”
이미 북미왕국이 유럽에 풀기로 한 신식 소총이 대략 12만 자루에 달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체급을 생각하면 3만 자루는 적은 편이기는 했다.
다만 프랑스는 자신들의 확장을 방해하는 주변국을 견제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 우호적으로 지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리고 프랑스에 배정한 신식 소총 4만 자루라는 것을 고려하면 더 줄였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고.
해서 정성국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뭐 오스만 제국 단독으로 보면 적긴 하지요. 하지만 오스만 제국과 프랑스의 관계도 있고, 둘 사이에 낀 신성로마제국을 생각해보면 3만 자루도 많은 편입니다. 아무리 에스파냐가 어느 정도 돕는다 쳐도...”
“예. 그렇긴 하지요. 하지만 이 이상은 반발이 심해 더 줄이기는 어려웠다는 것이 세비야 공사의 보고입니다. 외무청에서도 최대 3만 자루까지 생각했었기에 세비야 공사는 그냥 합의한 모양이고요.”
“흐음...뭐 이미 합의한 사항이니 어쩔 수 없군요.”
정성국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푸른 안개가 세비야의 공사가 파악한 오스만 제국의 분위기를 보고했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을 직접 방문한 세비야 공사의 이야기로는 오스만 제국이 현 유럽의 상황을 파악하고 유럽 진출을 노린다고 하더군요.”
“유럽 진출이라...결국 신성로마제국과 전쟁을 벌이겠다는 뜻이로군요.”
오스만 제국의 유럽 진출이라면 결국 전쟁을 의미했기에 정성국이 미간을 찌푸리자 푸른 안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프랑스에서도 오스만 제국에 외교관을 보내 이를 부추기고 있다더군요. 다만 신성로마제국에 있어서 다행인 점이라면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저희가 예물로 보낸 신식 소총을 직접 사용해 본 후 그 위력이 놀라 아국에 구입한 신식 소총으로 병력을 무장하기 전까지는 군사 행동을 보류한 모양입니다.”
“허. 그나마 다행이군요. 지금 오스만 제국이 신성로마제국을 공격하면 유럽의 상황이 엉망이 되어 버릴 텐데 말입니다.”
“그렇지요. 최소한 4년을 미룬 셈이니...”
“4년이라...그안에 유럽의 전쟁이 끝났으면 좋겠는데 어찌 될지 모르겠군요.”
정성국은 복잡한 유럽의 상황을 떠올리고 골치 아픈 듯 한숨을 내쉬었고,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푸른 안개가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잘 풀리겠지요. 그리고 너무 과도하게 유럽에 신경을 집중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끙...그렇긴 하지요. 그리고 지금은 일종의 휴가나 다름 없으니 이 문제는 나중에 고민하도록 해야겠습니다.”
“허허허. 그러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