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화
정성국은 배 위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며 오랜만에 생긴 여유를 즐겼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새진도를 떠난 이후에는 묘하게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해서 정성국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아침 식사 후 매일같이 대사들을 불러 티타임을 갖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오늘도 정성국이 이용하는 방 옆에 붙어 있는 커다란 응접실에서 대사들을 불러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동승한 시종이 아이스크림이 듬뿍 담긴 도자기들을 쟁반에 담아 들고 정성국과 푸른 안개, 대사들에게 하나씩 내려놓기 시작했다.
이에 다른 대사들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숟가락을 들었지만, 잉글랜드 대사는 숟가락을 들기보다는 조금 미묘한 표정으로 아이스크림이 담긴 도자기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정성국이 의아한 표정으로 잉글랜드 대사에게 말을 걸었다.
“음? 왜 그러십니까? 혹시 아이스크림이 입에 맞지 않는다면 냉차나 커피를 가져오라고 할까요?”
“아. 아닙니다. 국왕 전하. 그저...이 아이스크림을 보니 제가 북미왕국을 방문하기 위해 대서양을 횡단했을 때의 열악한 선상 생활과 너무 비교되어서 말입니다.”
이에 네덜란드 대사는 잉글랜드 대사의 심정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배가 크다 보니 흔들림도 적은 편이라 지내는 것이 크게 불편하지도 않았고, 배에서도 전기를 이용할 수 있는 터라 해가 지더라도 전등을 켜고 책을 볼 수도 있고 신선한 과일이나 채소, 고기 등이 매 끼니 제공되었으니 육지에서의 생활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기에.
“아. 확실히 그렇지요. 저도 북미왕국으로 오기 위해 처음으로 대서양을 횡단했을 때 계속되는 흔들림과 열악한 식사 때문에 정말 죽을 맛이었는데, 이 배의 선상 생활은 전혀 다르군요. 목욕하기 어렵다는 것만 빼면 육지에서의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입니다.”
그리고 에스파냐 대사 역시 범선을 타고 이곳으로 온 만큼 네덜란드 대사의 말이 끝나자 맞장구쳤다.
“예. 북미왕국의 배를 타고 나니 더는 범선을 타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요. 덕분에 언젠가 본국으로 돌아갈 때가 참으로 걱정입니다. 걱정.”
그 말에 다른 대사들도 범선을 타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한 것인지 일제히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고, 정성국은 그런 대사들의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럼 그때도 외무청에 이야기하도록 하세요. 어차피 정기적으로 유럽을 오가는 배편들이 있으니 그 배에 오르면 이 배보다야 못하겠지만 꽤 쾌적하게 선상 생활을 즐길 수 있을 겁니다.”
“어? 다른 배들도 전기를 이용할 수 있는 겁니까?”
잉글랜드 대사가 눈을 빛내며 질문을 던지자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아무래도 전기가 없으면 여러모로 불편해 선원들의 고생이 커서 말입니다. 해서 장기간 항해를 해야 하는 배들의 경우는 모두 전기를 이용할 수 있도록 조처를 해 두었지요.”
“아...그동안 혹시 본국에서 귀환 명령을 내리면 어떻게 돌아가야 하나 걱정이었는데 그렇다면 안심이로군요.”
잉글랜드 대사는 안도하면서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정성국의 대답에 문득 의문이 들어 다시 질문을 던졌다.
“하온데 국왕 전하. 혹시 동인도...아. 동남아시아 지역에는 관심이 없으십니까?”
“음?”
북미왕국의 교과서에서는 동인도 제도를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명명하고 있었기에 잉글랜드 대사가 말을 정정하며 묻자 아이스크림을 먹던 정성국은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잉글랜드 대사를 바라보았고, 이에 잉글랜드 대사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북미왕국은 이미 호주까지 진출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호주의 북쪽이 바로 동남아시아이고요. 헌데 북미왕국에서 지금까지 동남아시아에 직접 진출하지 않는 것이 조금 의아해서 말입니다.”
동남아시아는 향신료를 재배할 수 있었기에 유럽 각국은 어떻게든 동남아시아 지역을 장악하고 이곳에서 나오는 향신료를 가져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헌데 북미왕국은 이미 호주까지 진출해 거점 항구마저 세운 터라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동남아시아로 진출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북미왕국은 의외로 동남아시아 지역에 무관심했고, 향신료조차 에스파냐를 통해 구입하고 있었기에 의아하다는 듯 질문을 던지자 정성국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그렇지 않아도 최근 남태평양 탐사대에서 호주 북쪽의 바다를 탐색하면서 일부 섬들을 발견하고 현지 원주민들과 접촉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그러니 이미 동남아시아 지역에 진출한 셈이지요.”
일단 남태평양 탐사대는 새로운 지역을 탐사하기보다는 주로 5함대의 눈과 귀의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 작년 호주 북쪽에서 일부 선박이 남하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받고 혹시 해적이 아닌가 싶어서 급히 출동한 적이 있었다.
헌데 이들은 해적이 아니라 북쪽의 뉴기니 섬의 원주민들로, 이들도 호주의 존재를 모르지 않았기에 호주 북쪽의 원주민들과 교역하기 위해 가끔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남태평양 탐사대는 뉴기니 섬을 탐사하겠다는 보고가 올라왔었고.
그렇기에 정성국이 이미 북미왕국은 동남아시아로 진출한 셈이라고 이야기하자 잉글랜드 대사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실제 동남아시아에 식민지를 보유한 네덜란드 대사와 에스파냐 대사는 아이스크림을 먹다 말고 급히 입을 열었다.
“어...그렇습니까?”
“호주 북쪽이라면...”
“아. 뉴기니 섬입니다.”
뉴기니 섬은 동남아시아에서는 남동쪽에 위치해 있었고, 유럽인들이 가장 관심을 두는 향료 제도라 불리는 말루쿠 제도 동쪽에 위치한 터라 서쪽에서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와야 하는 유럽인들은 이 뉴기니 섬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에 호주 북쪽의 섬이라는 말에 북미왕국이 혹시 말루쿠 제도의 원주민들과 접촉한 것이 아닌가 싶어 살짝 긴장했던 네덜란드 대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아...그 동쪽에 있는 커다란 섬 말이로군요.”
그런 네덜란드 대사의 반응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또한, 호주의 원주민들과 협상해 호주 북쪽에 새로운 거점 항구를 건설 중이고 이곳이 건설되면 국영 상단이 직접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배를 보낼 예정이고요.”
지금까지 정성국은 동남아시아로의 진출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동아시아 무역의 규모가 커지고, 호주에서도 금을 캐내면서 이를 이용해 북미왕국의 각종 물자를 사들이기 시작했고, 북미 서해안 내륙의 물자 이동도 활발해짐에 따라 새남포나 새김포 등 북미 서해안 지역에 위치한 조선소들에서 건조하는 배들은 모두 이 항로들에 투입되었으니까.
그러다 최근에 사정이 좀 나아졌기에 슬슬 호주에서 가까운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할 생각으로 호주 북서쪽에 새로운 거점 항구를 만들라고 5함대에 명령을 내렸고.
5함대 사령관 역시 5함대와 남태평양 탐사대 모두 호주 동해안 지역에만 배치되어 있어, 다른 세력이 호주 서쪽이나 북쪽으로 진출한다 해도 꽤 오랫동안 모를 수밖에 없는 만큼 호주의 방비를 위해서라도 새로운 거점을 추가로 세우고 남태평양 탐사대 일부를 배치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해 새로운 거점을 만들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기에 정성국의 명령이 전해지자 일단 호주 북쪽에 새로운 항구를 건설하고 그 후 호주 서쪽에도 추가로 새로운 항구를 건설하겠다고 답신을 보내왔고.
5함대 사령관이 결정한 호주 북쪽에 새롭게 세울 항구의 위치는 전생의 다윈 항의 위치였기에 훗날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하기에 가까웠고, 호주 서쪽에 새로 건설하겠다는 항구의 위치는 전생의 퍼스 항의 위치였고, 이곳에서는 아프리카 지역으로도 진출할 수 있는 만큼 정성국은 새로운 항구의 위치 선정을 만족해하면서 5함대 사령관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최대한 빠르게 두 항구를 건설하라는 명령을 내렸었고.
해서 정성국이 이를 떠올리며 네덜란드 대사를 바라보고 이야기하자 네덜란드 대사는 잠시 고민했지만, 북미왕국의 성향상 자신들이 장악한 향신료 제도를 장악하겠다고 달려들 것 같지도 않았고, 북미왕국이 동남아시아 지역에 진출하면 아무래도 미친 듯이 날뛰던 해적들이 위축될 수밖에 없는 만큼 약간의 영향력이 감소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고 판단해 즉각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 그렇습니까? 북미왕국의 배가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한다면 동남아시아의 바다도 조금은 안전해지겠군요.”
이에 정성국은 점차 녹기 시작하는 아이스크림을 빠르게 먹어 치우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요...아국의 상선 몇 척이 드나드는 것으로 바뀌어봐야 얼마나 바뀌겠습니까. 뭐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동남아시아의 해적들이 아국의 상선을 노리다 침몰할 수야 있겠습니다마는...”
“그래도 북미왕국의 해군을 두려워해 도망친 서인도 제도의 해적들이 인도양과 동남아시아로 이동했으니 북미왕국의 배가 동남아시아 지역을 돌아다니면 조금 주춤하지 않겠습니까?”
네덜란드 대사의 이야기에 에스파냐 대사가 맞장구쳤다.
“맞습니다. 그리고 북미왕국의 무장을 생각하면, 상선이라 하더라도 해적을 상대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 처음에야 북미왕국의 배를 습격하기 위해 달려드는 현지의 동남아시아 해적들이라도 계속해서 호되게 당하면 자연스럽게 위축되겠지요.”
에스파냐 대사마저 그렇게 이야기하자 정성국은 꽤 의외라는 듯 두 대사를 바라보고 중얼거렸다.
“허. 동남아시아의 해적들이 꽤 말썽인 모양이군요? 잉글랜드는 그렇다고 쳐도 네덜란드나 에스파냐에는 동남아시아의 식민지를 지키기 위해 해군을 배치하지 않았습니까? 헌데도 해적에 의한 피해가 큰 겁니까?”
이에 에스파냐 대사가 동남아시아 지역의 상황을 떠올리고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동남아시아의 바다에는 수많은 섬이 있어 해적들을 완전히 소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식민지에 배치된 해군들은 식민지 인근의 바다를 지키는 데만 집중할 수밖에 없어서 해적들은 그 바깥 영역에서 무척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예. 해서 최근 상선들은 대규모 선단을 구성해 움직이고 있습니다만...해적들도 이에 맞춰 함께 연합해 공격하는 터라 꽤 피해가 큰 편입니다.”
네덜란드 대사의 말에 잉글랜드 대사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자 정성국은 북미왕국 상선들도 해적들에 의해 피해를 보지 않을까 조금 걱정하기는 했다.
내륙을 항행하는 상선이 아닌 다음에는 기본적인 무장은 갖추어두긴 했지만, 해적의 규모가 생각보다 큰 편이다 보니 워낙 많은 해적이 덤벼들면 이를 다 상대하기는 어려웠으니까.
해서 정성국은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하는 상선에는 기존의 화포와 더불어 이번에 새로 개발한 기관총도 몇 자루 장착시켜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이것으로 될까 싶어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흐음...허면 상황을 봐서 아국이 동남아시아 항로의 안전을 위해 해군을 파견해도 되겠습니까?”
정성국의 말에 북미왕국이 서인도 제도로 진출한 이후 해적이 완전히 사라져서 에스파냐가 이득을 챙긴 것을 항상 부러워했던 네덜란드 대사가 반겼다.
“오! 물론입니다. 필요하다면 북미왕국의 해군이 거점으로 삼을만한 항구도 내어드리겠습니다.”
“예. 북미왕국의 해군이 동남아시아에 진출한다면 아국도 환영이지요. 아마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께서도 기꺼이 거점 항구를 건설할 땅을 내어주실 겁니다.”
에스파냐 대사 역시 북미왕국이 서인도 제도로 진출한 후 해적들로 인한 피해가 극단적으로 줄어들어 엄청난 이득을 본 만큼, 북미왕국이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북미왕국은 부유한 터라 땅값도 제대로 지급할 테니 말이다.
이런 두 대사의 반응에 정성국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그럼 이번에 파나마 운하에서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을 만나게 되면 이 문제를 논의해봐야겠군요.”
그렇지 않아도 정성국은 이번에 파나마 운하에서 에스파냐 부왕을 만나면 마리아나 제도의 일부 섬을 매입하거나 아니면 장기간 조차할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동남아시아와의 무역 규모가 커지면 호주를 경유하는 항로보다는 직접 동남아시아로 향하는 항로를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으니까.
다만 하와이에서 곧바로 동남아시아까지 항해하기엔 거리가 너무 멀어 중간에 제대로 된 거점 항구가 필요했고, 그렇기에 정성국은 마리아나 제도, 정확히는 괌을 떠올렸다.
더불어 괌에 5함대의 분함대를 일부 배치하면 하와이 서쪽의 바다도 더욱 안전해질 것 같았고 말이다.
‘원래는 괌 정도만 매입하거나 조차할 생각이었는데...동남아시아의 항로 안전을 이유로 필리핀의 섬 한두 개 정도 추가로 매입하거나 조차하는 것도 괜찮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