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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523화 (523/850)

523화

행정청장이 집무실을 나간 후 정성국은 일단 밀린 보고서를 처리하기 위해 다시 집무실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한참 보고서를 확인하다가 누군가가 집무실을 열고 들어오자 고개를 들고 조용한 곰을 확인한 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 마침 잘 왔군. 자네를 부르려 했는데.”

“예? 무슨 일로...”

정성국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조용한 곰을 보고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티테이블에 앉힌 후 냉장고에서 냉차를 꺼내 건네며 질문을 던졌다.

“혹시 미시시피 남부 지역에 가뭄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나?”

“아. 저번부터 계속 비가 오지 않아 원주민들이 걱정하고 있다는 보고는 들었습니다만...”

아직 행정청장과 만나지는 않은 것처럼 보였기에 정성국이 미시시피 지역 남부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가뭄이 생각보다 심한 모양일세. 그나마 우리야 관개시설을 정비해둔 덕분에 큰 타격은 없고, 설사 미시시피 남부 지역의 농사가 모조리 망하더라도 다른 지역에서 식량을 가져오면 그만이니 그나마 버틸 수 있는데 우리 북미왕국에 합류하지 않은 다른 원주민들의 경우는 상황이 다르지 않나.”

“그건 그렇지요. 허면 식량을 지원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럴 생각이네. 어차피 식량이야 넘쳐나지 않는가. 이를 통해 원주민들의 환심을 사고 기근을 막을 수 있다면 나쁜 것은 아니겠지. 해서 행정청장에게 쿼포 족과 오세이지 족에 식량을 지원하라고 이야기하기는 했는데 이들 말고 미시시피 강 서쪽에 사는 다른 부족들도 분명 가뭄으로 인해 피해를 보았을 것 같단 말이지?”

그 말에 당연하다는 듯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분명 그럴 겁니다. 오세이지 족 서쪽에 있는 키오와 족이라던가, 그 북쪽에 있는 칸사 족, 포니 족, 아라파호 족은 가뭄으로 인해 피해를 봤을 수도 있을 겁니다. 이들 부족의 경우 비가 오지 않아 걱정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적이 있었으니까요.”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말에 조금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조용한 곰이 말한 부족들의 영역은 미시시피 강 서쪽에서 로키 산맥 동쪽에 해당하는, 전생으로 치자면 와이오밍 주, 콜로라도 주, 네브레스카 주, 캔자스 주에 해당하는 무척 넓은 지역이었는데 이곳이 모두 비가 오지 않아 문제라는 이야기에 새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 것이다.

해서 정성국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러니 외무청에서 미시시피 탐사대와 함께 이들 부족의 영역을 탐사하고, 상황이 좋지 않다면 식량을 지원 의사를 밝히도록 하게.”

이에 조용한 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잘만하면 이들 부족을 북미왕국으로 합류시켜 북미왕국의 영역을 대폭 확장할 수 있어 보였기에.

물론 정성국은 아무런 대가나 조건 없이 식량을 지원하라는 이야기인 만큼, 식량을 미끼로 이들 부족을 북미왕국에 합류시키지는 못하겠지만, 식량을 지원함으로써 이들 원주민 부족에 우호적인 인상을 각인시키고, 이를 물꼬로 이들 원주민 부족과 교역한다면 생각보다 수월하게 북미왕국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고.

해서 조용한 곰은 생각을 멈추고 자신을 바라보는 정성국을 향해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전하.”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후 그동안 이야기를 나누느라 어느덧 차가운 기운이 사라진 냉차를 들어 단번에 마신 후 조용한 곰을 바라보았다.

“그보다 자네는 무슨 일로 온 건가?”

“아...그게 유럽에서 다시 흑사병이 도는 모양입니다.”

이에 정성국은 기겁한 표정을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흑사병?!”

흑사병은 강력한 전염력이나 강력한 치사율 때문에 인류 역사상 가장 커다란 피해를 준 범유행 전염병이었다.

그리고 이 흑사병은 중세 시절, 유럽에 대유행해 유럽의 인구 1/3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고, 그 후로도 이렇게 간헐적으로 유럽에서 발병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

약 30년 전에는 에스파냐의 세비야에서 흑사병이 창궐해 세비야의 인구 절반이 희생되기도 했고, 약 20년 전에는 나폴리와 로마에서 흑사병이 돌아 15만이 죽었으며, 15년 전에는 런던에서 흑사병이 발병해 런던 인구의 25프로가 사망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흑사병은 증상이 나타난 뒤로는 병이 빠르게 진행되어 사망에 이르는지라 증상이 나타나면 즉각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흑사병을 치료할 수 있는 항생제는 김의원을 비롯해 새한성 대학교의 의대 선생들이 정성국의 조언을 받아 계속해서 연구하고는 있었지만, 아직 개발이 요원했고.

그렇기에 정성국은 혹시라도 흑사병이 북미 대륙으로 넘어와 유럽처럼 주기적으로 퍼지며 토착화된 질병이 될까 봐 일부 항구만 개방하고, 외국인들의 출입을 정말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다.

헌데 최근 유럽과의 교역이 늘어나고, 아카디아 항까지 추가로 개방한 상황에서 다시 흑사병이 창궐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정성국이 기겁하자 정성국이 유럽의 전염병들을 무척 경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조용한 곰이 유럽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예. 세비야의 공사관에서 보고하길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다시 흑사병 환자들이 나타났답니다.”

“그래서 유럽 각국의 대처는?”

그나마 항구 도시가 아니라는 것에 조금은 안도한 정성국이었지만, 흑사병의 전염력 때문에 주변으로의 전파가 무척 빠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즉시 질문을 던지자 조용한 곰이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표정으로 살짝 웃음을 지으며 세비야의 공사관에서 전한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북미왕국의 의학 서적이 많이 풀린 상태고 유럽의 지식인들도 이 의학 서적을 꽤 많이 읽은 모양인지 이전보다 흑사병에 대응하는 대처는 나쁘지 않다고 합니다.”

“어? 그래?”

“예. 깨끗한 천으로 호흡기를 가리고, 흑사병이 발생한 지역을 철저히 통제하며, 흑사병으로 죽은 시신을 매장하거나 강물에 던지기보다는 불태우고 있다는군요. 더불어 쥐를 비롯한 설치류를 보이는 족족 잡고 있고요.”

북미왕국의 국력과 기술력이 유럽 내에 알려지면서 유럽의 지식인들은 북미왕국의 서적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북미왕국에서 내어 준 의학 서적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처음에야 자신들의 상식과는 다른 내용이 많아 이 책의 내용이 정말 맞느냐고 의문을 표시하기도 했지만, 북미왕국에서 보낸 현미경 등을 통해 여러 미생물을 관찰하면서 북미왕국의 의학 서적에 적힌 내용들이 거짓이 아니라고 판단한 유럽의 학자들과 의사들은 의학 서적의 내용을 외우고 연구하고 탐험했고.

덕분에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흑사병 환자가 발생한 직후 레오폴트 1세는 왕실 의사의 조언대로 즉각 흑사병이 발생한 지역을 격리하고 통제했으며 일부 의사들은 피부를 모두 둘러싼 옷을 입고 마을로 들어가 시체를 불태웠으며, 나오는 즉시 이 옷들을 소각하고 깨끗이 씻어 전염을 막았다.

그리고 의사들이 흑사병에 걸리지 않고, 흑사병이 다른 지역으로 퍼지지도 않자 레오폴트 1세와 지식인들은 더욱 확신을 갖고 처음 흑사병을 발병한 마을 전체를 포기하는 대신 쥐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는 조용한 곰의 설명에 정성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허. 그나마 다행이네.”

그런 정성국을 보고 조용한 곰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게 다 전염병으로 인해 허무하게 죽어가는 유럽인들을 안타까워한 전하께서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분명 유럽도 계속된 전염병을 겪으며 격리의 필요성이라던가 전염의 메커니즘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다만 이 지식이 정확하지도 않았고, 아직 의학 수준이 낮아 치료는 온몸의 피를 빼거나 불로 몸을 지지는 것이 유일한 치료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이 문제였고.

덕분에 정성국이 북미왕국의 의학 서적을 유럽에 넘기지 않았다면, 분명 유럽은 이번 흑사병 발병으로 꽤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생각한 조용한 곰이 정성국을 바라보며 이렇게 이야기하자 정성국은 피식 웃었다.

“아부는...아무튼, 저들의 대응이 이전보다는 낫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기는 한데 그래도 흑사병의 전염을 완전히 막기는 어려울 수도 있어. 그러니 유럽의 배들이 정박하는 새진주, 아카디아, 세인트존스 항의 통제에 더욱 신경 쓰도록 하게. 배가 정박하기 전에 선원들을 확인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겠고.”

이에 조용한 곰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 흑사병이야 잠복기가 그리 긴 편은 아니고 서양의 배들은 몇 달 동안에 걸쳐 항해해 와야 하는 만큼, 출항 전 흑사병에 걸린 환자가 승선했다면 어차피 북미왕국의 항구에 도착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그렇긴 하지요. 알겠습니다. 전하.”

* * *

정성국은 밝은 얼굴로 자신의 집무실을 찾아온 개발청장을 보고 무슨 일로 저러나 싶었는데 개발청장의 말을 듣고 정성국이 탄성을 질렀다.

“어? 파나마 공사가 거의 끝났다고?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그렇습니다. 전하. 중간에 폭우가 쏟아져 공사가 조금 지체되기도 했습니다만...앞으로 약 한 달 후면 모든 공사가 완료될 것 같다는 보고입니다.”

개발청장의 이야기에 정성국은 새삼 감탄스러운 표정으로 개발청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허어...정말 3년 만에 운하 건설을 끝내다니...정말 고생했네. 고생했어.”

전생의 미국도 운하를 건설하기까지 약 10년 가까이 걸린 것을 생각하면 아무리 인력과 건설 장비를 어마어마하게 투입했다고 해도 3년 만에 운하를 건설한 것은 분명 개발청의 역량이 대단하다는 뜻이었기에 정성국이 감탄하며 개발청의 노고를 위로하자 개발청장은 입꼬리가 귀에 걸린 채로 예의상 손을 내밀었다.

“아닙니다. 전하.”

정성국은 그런 개발청장을 보고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아니야. 이건 정말 대단한 위업이나 다름없네. 그러니 파나마 운하 공사가 끝나면 자네를 비롯해 파나마 지역에 파견되었던 관리들과 기술자들에게 특별 상여금을 내리도록 하지. 아. 물론 휴가도 충분히 제공해야겠지?”

“그러면 좋을 것 같습니다. 파나마 운하 공사에 참여한 관리들은 3년 동안 파나마 지역에서 공사에 전념하느라 가족들을 만나지도 못했으니까요.”

그 말에 정성국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허. 그럼 못해도 반년 정도는 줘야겠군.”

“그러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정성국은 개발청장과 함께 개발청 관리들의 포상 문제에 대해 논의한 후 이번에 새로 완공된 파나마 운하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파나마 운하를 가동하기 위한 설비들도 다 들어가 있는 거지?”

“물론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파나마 운하 공사에 성실하게 임한 원주민 가운데 영특하고 저희 북미왕국에 무척 호의적인 인물들을 선발해 운하를 운영하는 방법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갑문이나 증기기관이 장착된 예인선을 운용하는 방법같은?”

“그렇습니다.”

개발청장의 대답에 정성국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흠...그럼 다음 달부터는 곧바로 운하를 사용할 수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운하가 개장하기 전에 시범 운항도 할 생각이고요.”

그 말에 정성국은 시선을 뒤로 돌려 집무실에 걸려 있는 북미왕국의 지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허. 다음 달이면 드디어 서해안과 동해안이 뱃길로 연결되는 셈이군.”

“그렇지요. 헌데 전하. 파나마 운하 개통식은 어떻게...”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은 자신의 치적을 자랑하기 위해 파나마 운하 건설이 끝나면 파나마 운하 개통식을 열기로 했고, 당연히 북미왕국에서도 고위급 인사가 와주길 원했다.

그리고 정성국은 개발청이 고생해 건설한 파나마 운하를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었기에 겸사겸사 이 개통식에 참석할 수도 있다고 개발청장에게 이야기했었고.

그리고 파나마 운하의 완공이 한 달 후로 예정되었고, 이곳에서 파나마 운하까지 이동하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슬슬 결정을 내려야 했기에 개발청장이 질문하자 정성국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아. 그게 있었지? 흠...왠만하면 가보고 싶긴 한데...”

개발청장은 그런 정성국의 중얼거림을 듣고 입을 열었다.

“조선 문제가 걸리시는 겁니까?”

“그렇지. 조선에 전쟁이 발생할 수 있는데 장기간 자리를 비우기는 좀 그렇잖아?”

이에 개발청장이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크게 상관은 없다고 봅니다. 어차피 청나라군은 압록강이 얼어붙는 겨울에 침공할 텐데 그때는 이미 북방 항로가 얼어붙은 상황이라 자세한 보고는 천상 내년 봄 이후에나 받을 수 있잖습니까.”

“아? 그건...그렇군.”

“그러니 조선 문제를 신경 쓰지 마시고 전하의 뜻대로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만...”

이에 정성국은 한참을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래. 자네 말마따나 이곳에서 조선 일을 걱정하는 것도 쓸모없는 일이겠지. 어차피 조선 문제야 투로시노와 조선 지원군 사령관에게 전권을 맡겼으니. 그러니 파나마 운하 개통식엔 내가 직접 참석하지.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의 얼굴도 한번쯤 보고 싶기도 했고.”

“알겠습니다. 전하. 곧바로 준비하도록 하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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