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0화
집무실을 방문한 조용한 곰에게 냉장고에서 시원한 냉차를 꺼내 건네주던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이야기에 입을 열었다.
“흠. 조선에서 파병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청나라가 침공하는 즉시 봉화가 올라 청나라의 침공 소식이 한양까지 알려진다 하더라도 이 소식을 다시 아이누 섬까지 알리는 데만 하더라도 시간이 꽤 걸리잖습니까.”
“해서 군사청에서는 아예 연락선으로 이용할 인급 전선 한 척을 제물포에 대기시켜둘 생각이라던데...”
조용한 곰의 말대로 연락을 조선에 맡기면 북방에서 온 연락을 다시 개항장까지는 전달하는데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아직 도로 상황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으니 육로를 이용해도 시간이 걸렸고, 해로의 경우 조선의 배는 느리고 원상이 대신 전해준다 하더라도 원상의 배 역시 범선이다 보니 바람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렇게 빠르게 소식을 전할 수 없었으니.
해서 군사청에서는 빠르게 연락을 주고받기 위해 제물포에 연락선을 한 척 대기시켜 둘 예정이었기에 정성국이 이를 언급하자 조용한 곰이 냉차를 한 모금 마신 후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도 그 계획은 들었습니다. 그리고 계획된 대로 일이 잘 흘러갔을 때 10일이면 병력을 북방에 상륙시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만...여러 변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해서 조선의 조정 대신들은 겉으로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내심 불안하긴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인지 아국의 제안을 반겼다더군요.”
물론 모든 일이 다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봉화만 하더라도 왜란 당시 봉화가 도중에 끊겨 한양에서 왜군이 쳐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은 것은 침공 후 4일 후였으며, 호란 당시에도 긴급 통신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조선 조정에서는 청나라군의 침공을 인지한 것이 늦었고, 덕분에 크게 당황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최근에는 이상 기후가 만연해 이전에는 기록이 거의 없던 가을 태풍, 겨울 태풍도 간간이 발생했고, 아무리 북미왕국의 배가 대단하다고 한들 태풍이 불어오고 바다가 거친데 이동하지 못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조선의 조정 대신들은 북미왕국이 병력을 지원해주면 청나라군을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도, 10일 정도면 북미왕국의 병력이 조선에 상륙해 도울 수 있다는 이야기에는 회의적이었다.
헌데 북미왕국에서 먼저 만약을 대비해 병력을 파병하겠다고 했으니, 조선 조정에서는 반길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평양 이북에 민간인으로 위장해 배치한다고 하니 부담도 거의 없었고.
이러한 설명에 정성국은 상황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조정 대신 중에는 호란을 경험했던 인물들도 있을 테니...”
“예. 그래서인지 조선에서는 오히려 더 많은 병력을 파병해달라고 요청했답니다.”
“음? 더 많은 병력을?”
“예. 저희가 파병하는 병력은 모두 경비대 소속이잖습니까.”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조선 조정의 뜻을 눈치채고 입을 열었다.
“아. 조선은 탐사대를 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이전처럼 청나라군이 조선의 병력을 우회하려 들면 기병으로 이를 막아야 하는데 조선의 기병만으로는 청나라 기병을 막기는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기병을 중시했던 조선군은 임란 이후 보병 중심, 정확히는 총병 중심의 편제로 선회했다.
물론 호란이 임박하면서 다시 기병을 키우려 했지만, 애써 키우던 기병은 이괄의 난으로 대부분 사라졌고 효종 시절에도 다시 북벌을 위해 기병을 키우긴 했지만, 그 규모가 크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조선 조정에서는 무려 연발이 가능한 회전 단총으로 무장했다는 북미왕국의 탐사대가 청나라 기병들의 우회 기동을 막아주길 원했고,
해서 탐사대를 추가로 파병해달라고 요청했다는 말에 정성국은 냉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입을 열었다.
“헌데 탐사대는 말 때문이라도 민간인으로 위장하기는 어렵잖아?”
“그렇지요. 해서 조선에서는 탐사대는 따로 조선의 섬에 임시로 병영을 세워 주둔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답니다.”
“섬이라...어느 섬?”
“조선에서는 압록강에서 가까운 가도에 탐사대가 주둔하는 것이 괜찮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답니다.”
“가도? 예전 모문룡이 머물던 거기?”
“그렇습니다.”
가도는 평안북도의 서해에 위치한 섬으로 한때는 이곳에 말을 사육하는 목장이 있기도 했지만, 후금의 기세가 커지면서 명나라의 장수 모문룡이 후금을 견제하겠다며 명군과 난민 1만 명을 데리고 와 눌러앉은 섬이기도 했다.
이를 떠올린 정성국이 매끈한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가도라...모문룡이 세운 동강진은 이미 무너졌을 테니 무인도에 가까우려나?”
애당초 호란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가 바로 가도에서 설쳐댄 모문룡 때문이었고, 비록 모문룡은 원숭환에 의해 처형당했지만, 일부 명나라 병사는 가도에 계속해서 남아 있었기에 청나라는 조선을 굴복시킨 이후 가도를 공격해 남아 있는 명나라 병사들을 모조리 죽이고 동강진을 불태워 버렸다는 것을 기억한 정성국의 의문에 조용한 곰이 답했다.
“아예 무인도는 아닌 모양입니다. 백성들이 일부 살긴 한다는군요.”
물론 명군이 세웠던 동강진은 이미 폐허가 된 만큼, 탐사대가 가도에 머물게 된다면 다시 병영을 건설해야 하고, 조선에서도 이를 위해 백성들을 동원해 도울 것이라는 이야기를 덧붙이자 정성국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흠...그래서 투로시노는 뭐라고 대답했다던가?”
“조선의 제안을 마다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받아들였답니다.”
애당초 정성국이 5천 명가량을 보내겠다고 제의한 것도 조선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였고, 미리 병력을 많이 보내둘수록 청나라군의 침공에 대응하기 쉬워지고 수송 부담도 덜어지는 터라 투로시노는 조선의 제안을 마다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 이를 받아들였다는 설명에 정성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미 조선에 기관총을 장착한 검차까지 보낼 예정인 만큼 굳이 탐사대를 보내지 않더라도 청나라군을 막는 것은 큰 지장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병력이야 많을수록 좋았고 탐사대를 파병함으로써 조선 조정을 안심할 수 있는 만큼 나쁠 것은 없겠다 싶었다.
“그럼 남은 건 경비대 3천 명뿐이니 3함대의 수송 부담이 줄어들겠군. 알겠네. 더 보고할 것 있나?”
“예. 동녕국에 파견한 외무청 관리가 돌아왔답니다.”
조용한 곰이 대만에 있는 동녕국을 입에 올리자 정성국이 흥미를 보였다.
“그래? 동녕국이 우리를 알긴 한다던가?”
“물론입니다. 동녕국은 왜국과 활발히 교역한 덕분에 저희 북미왕국의 존재를 예전부터 인지하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2년 전에는 저희 북미왕국과 접촉하기 위해 사절을 보내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이에 정성국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응? 2년 전? 그런 보고는 못 받은 것 같은데?”
“예. 알고 보니 홋카이도를 방문하기 위해 배로 이동하다가 풍랑에 휘말렸던 모양입니다. 겨우 목숨은 부지해 왜국의 도움으로 귀환한 것이 작년이었고요.”
“그것참...”
정성국이 동녕국 사절단의 고생에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을 때 조용한 곰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때문에 동녕국에서는 올해 다시 사절을 파견할 예정이었답니다. 헌데 저희가 먼저 사절을 보내자 무척 기뻐했다는군요. 그리고 곧바로 동녕국의 국왕을 만날 수 있었고요.”
“무척 기뻐했다라...대체 왜?”
물론 동녕국의 현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북미왕국의 사절을 환대할 이유는 없었기에 정성국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조용한 곰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신식 소총 때문이랍니다.”
이 대답에 정성국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급히 질문을 던졌다.
“뭐? 신식 소총? 동녕국에서 신식 소총의 존재까지 알고 있다고?”
“이들은 예전부터 잉글랜드와 무역 협정을 체결하고 꽤 오랫동안 교역을 하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신식 소총의 존재를 파악한 모양입니다.”
“아...”
대만을 장악하고 있던 세력은 네덜란드였고, 정성공은 네덜란드 세력을 몰아내고 대만을 장악한 후 동녕국을 세웠기에 네덜란드와의 관계는 험악했고, 근처에 식민지를 보유한 에스파냐 역시 이런 동녕국을 좋게 바라보지 않았다.
그렇기에 정성국은 막연히 동녕국은 유럽과의 교류가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아시아에서 세력이 가장 빈약한 잉글랜드는 자신들이 손해 본 것도 아니고 동녕국의 세력이 강해져도 자신들이 불이익을 당할 것은 없는 만큼 동녕국과 꾸준히 교역해왔다는 이야기에 정성국이 상황을 이해하고 나지막하게 탄성을 지르자 조용한 곰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이번에 동녕국을 방문했던 외무청 관리의 말에 따르면 동녕국의 상황이 썩 좋지는 못하다고 합니다. 삼번의 난이 일어났을 때만 하더라도 복건성 남부를 대부분 점령했었다고 하는데 복건성을 장악하고 있던 정남왕 경정충이 청나라에 항복하면서 청나라군이 복건성으로 진군했고, 그 결과 연안 지역 일부를 제외하면 복건성 남부 지역 대부분은 잃은 상황이랍니다.”
“으음...”
“그런 상황에서 동녕국을 방문한 잉글랜드의 상인에게 북미왕국의 신식 소총 이야기를 듣고 저희와 접촉해 신식 소총을 구매해 현 상황을 반전시킬 생각이었던 겁니다.”
그 말에 정성국은 북미왕국의 배가 항구에 도착하자 동녕국 관리들이 무척 기뻐하며 즉각 자신들의 왕에게로 안내한 까닭을 깨닫고 피식 웃었다.
“그럼 무척 실망했겠군.”
“그렇지요. 동녕국의 국왕은 외무청 관리를 환대한 후 곧바로 신식 소총 구매를 타진했지만, 물량이 없어 불가능하다는 대답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답니다.”
정성국은 그런 조용한 곰의 대답에 혹시나 해서 말했다.
“혹시 모르니 이야기하는데 일단 아시아에서는 유럽처럼 신식 소총을 판매할 생각이 없네. 그러니 이를 투로시노에게도 전하도록 하게.”
유럽에 신식 소총을 판매했다가 각국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골치를 썩인 만큼, 조선이나 시베리아 부족 연합을 제외하면 현 상황에서 섣불리 아시아에 신식 소총을 판매할 생각은 없었기에 정성국이 이를 이야기하자 조용한 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교역 협상은? 설마 신식 소총을 판매하지 않았다고 협상을 거부한 것은 아니겠지?”
이에 조용한 곰은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실망스럽더라도 저희와의 교역으로 막대한 이득을 챙길 수 있는데요.”
“막대한 이득?”
물론 교역을 하면 양국에 이득이 되겠지만, 막대한 이득이라고 표현할 것이 있나 싶어서 정성국이 고개를 갸웃하자 조용한 곰이 설명했다.
“동녕국은 아직 복건성의 항구를 몇 개 소유하고 있고 청나라 상인들과 대규모로 밀무역을 하고 있습니다. 해서 저희와의 교역을 통해 확보한 물건을 다시 밀무역으로 청나라 상인들에게 넘기는 중개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챙길 수 있지요.”
“어? 그래? 청나라와는 전쟁 중일 텐데도?”
어차피 해안가에서의 밀무역이 생각보다 활발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청나라야 동녕국을 견제하기 위해 해금령을 선언했지만, 청나라 수군을 통해 해안가를 철저히 관리하는 것이 아닌 방치에 가까웠던 탓에 상인들이 활개 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고.
그 때문에 유럽의 상인들도 밀무역을 통해 청나라의 물품들을 사들이고 있었고, 원상도 한때는 밀무역을 이용해 돈을 벌어들였으니.
다만 동녕국은 청나라의 반란세력이었고, 최근에도 전쟁 중인데 청나라 상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동녕국과 접촉하느냐고 묻자 조용한 곰이 당연한 것 아니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청나라 상인들은 돈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청나라 관리들에게도 적당히 뇌물을 먹인 덕분인지 청나라에서도 어느 정도 눈감아준 탓에 밀무역은 꾸준히 해왔다는군요.”
“그러면...”
생각보다 대규모로 밀무역을 진행 중이라는 이야기에 정성국은 기대 어린 눈초리로 조용한 곰을 바라보았고 조용한 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희의 예상과는 달리 청나라로 넘기던 물량 상당수를 동녕국에서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생사도 어느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것 같고. 덕분에 저희는 청나라와의 무역이 단절되었어도 큰 손해를 입지 않을 것 같고요.”
“휴우. 다행이군. 꽤 걱정했는데.”
그 말에 정성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북미왕국의 이득만 생각하자면 청나라와 손을 잡는 것도 나쁠 것은 없었다.
그리고 정성국은 북미왕국의 왕이니만큼 북미왕국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했고.
다만 정성국은 전생의 기억이 있는 만큼, 그리고 자신의 존재로 전생에는 일어나지도 않았던 전쟁이 다시 조선에서 일어날 수 있었기에 조선을 그냥 내버려 두지 못했고, 덕분에 북미왕국이 큰 손해를 입게 되었으니 조금 걱정스러웠는데 이 손해의 상당수를 동녕국과의 교역으로 메울 수 있다고 하니 새삼 다행스러웠다.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조용한 곰은 웃으며 냉차를 한 모금 마셔 목을 축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주나라와는 아직 접촉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거리도 거리고 송상을 통해 외교문서를 전달하다 보니 답신을 받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이전이었다면 동녕국보다야 주나라와의 교역이 더 중요했겠지만, 동녕국과의 무역 규모가 생각보다 컸기에 정성국은 괜찮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흠...뭐 동녕국과의 교역이 생각보다 대규모이니만큼 상관없겠지. 알겠네. 주나라와의 접촉은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다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