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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519화 (519/850)

519화

“드디어 북미왕국과 협상을 끝냈다고?”

표도르 3세는 총신인 외무장관의 보고에 반색할 수밖에 없었다.

북미왕국과 마찰이 생긴 후 북미왕국이 뒤에서 시베리아의 원주민들을 지원한 덕분에 시베리아 부족 연합이 등장했고, 이 연합의 등장 이후 러시아 차르국은 계속해서 패배해 거의 100년에 걸쳐 개척하고 장악한 시베리아의 영토 절반 가까이를 잃어버린 상황이었으니 이 연합을 뒤에서 지원하고 조종하는 북미왕국과 평화 협상을 끝냈다는 사실이 못내 반가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무르 강에서의 일과 북미왕국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 엄청난 피해가 발생한 탓에 내심 죽을 맛이었던 외무장관 역시 표도르 3세와 비슷한 심정이었기에 시베리아나 북미왕국과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항상 어두운 표정을 짓던 평소와는 달리 활짝 웃으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차르시여.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브게니가 런던의 북미왕국 대사와 협상을 마친 후 서명한 조약문이옵니다.”

그러면서 외무장관이 표도르 3세에게 조약문을 건네자 표도르 3세는 조약문의 조항을 읽어보고 중얼거렸다.

“흠. 조약문에 연합과 관련된 내용은 없군?”

표도르 3세는 이번 조약문에 연합과 관련된 내용이 있을 거라 여겼는데 조약문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그러한 내용이 없었기에 표정을 조금 굳히며 중얼거리자 외무장관이 그런 표도르 3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 북미왕국과 맺은 조약은 아무르 강에서의 일로 생겨난 분쟁을 종식하기 위해 맺은 조약이다 보니...”

“그러니 연합의 일도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동안 북미왕국이 시베리아 원주민들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다가 우리와의 분쟁이 생기고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을 생각해보면?”

표도르 3세의 지적에 외무장관도 공감한다는 듯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북미왕국에서는 이를 철저히 부정하고 있으니까요. 그저 카무이 반도의 북미왕국 상인들이 시장 개척을 위해 근처의 시베리아 원주민들과 교역을 시작하면서 발생한 일이라고 주장하다 보니...”

“끙...”

러시아 차르국이 북미왕국과 대등한 수준이라면 모를까 북미왕국의 국력이 월등한 상태에서 협상하다 보니 저들의 억지 주장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외무청장의 말에 표도르 3세가 한숨을 내쉴 때 외무청장이 입을 열었다.

“다행인 점은 런던에 있는 북미왕국 대사와 협상한 예브게니가 북미왕국에 강력히 항의한 덕분에 북미왕국에서 더는 연합에 무기를 팔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아냈다는 것입니다.”

“오! 그게 정말인가?!”

외무청장의 말에 표도르 3세는 눈을 반짝였다.

그동안 연합에 계속 패배했던 것은 모두 북미왕국의 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은 시베리아에서 이따금 일어나는 원주민들의 반란을 손쉽게 제압하고 적은 병력으로도 수월하게 시베리아 지역을 통치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북미왕국이 연합에 더는 무기를 팔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상 어쩌면 잃었던 시베리아의 영토까지 다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표도르 3세가 기뻐하자 외무장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다만 북미왕국 대사가 이야기하기를 이미 많은 무기가 연합에 넘어갔다면서 이번 조치로 연합이 크게 곤란할 것 같지는 않으니 저희가 연합과 화친을 맺으라고 조언했다는군요.”

“허. 미개한 시베리아 원주민들이 화약을 만들어내지는 못할 텐데 대체 얼마나 많은 화약을 넘겼길래...”

표도르 3세가 조금 기운 빠진 얼굴로 중얼거리자 외무장관이 표도르 3세가 착각한 것을 깨닫고 급히 입을 열었다.

“아. 일단 북미왕국은 연합과 동맹 관계이고 연합이 전쟁 중인 상황에서 화약 무기를 팔아놓고 화약과 총알, 포탄 같은 소모품을 팔지 않는다면 연합이 불만을 제기할 수도 있기에 그런 소모품들은 계속 판매할 거라고 했답니다.”

“끙...아무르 강에서의 일을 사과하고 50만 루블에 교역권까지 내어준 것 치고는 영...”

외무장관의 설명에 표도르 3세가 손에 든 조약문을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외무장관도 저 협상에 책임이 없지 않은 터라 혹여 불똥이라도 튈까 즉각 입을 열었다.

“저들이 계속해서 연합을 지원하지 않겠다고 약조한 것으로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역권을 내어준 이상 북미왕국의 상인들이 우리 러시아 차르국을 방문하려면 스웨덴이나 연합의 영토를 통해 들어와야 하는데 스웨덴은 북미왕국을 썩 좋게 바라보지는 않을 겁니다.”

“덴마크와 거래한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북미왕국의 상인들은 천상 연합을 통해 이동해야 하는 만큼, 저희와 연합이 계속 대치하는 것이 달가울 리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에게 화친을 권유한 것 같고 말입니다.”

표도르 3세는 외무장관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중얼거렸다.

“흐음...그럼 우리가 연합에 화친을 제의하면 연합도 순순히 응하려나? 북미왕국이 화친을 원한다면 연합도 결국 이를 따를 수밖에 없지 않나?”

“아마 그렇지 않겠습니까? 물론 시간이...”

그때 시종장이 급히 알현실에 들어오며 소리쳤다.

“차르시여! 급보이옵니다!”

“음? 무슨 일인가.”

“톰스크에서 급히 전령을 보냈사온데...”

시베리아 지역의 거점 요새 중 하나인 톰스크에서 급히 전령을 보냈다는 시종장의 이야기에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든 표도르 3세는 머뭇거리는 시종장을 재촉했다.

“톰스크? 거기서 무슨 보고?”

시종장은 잠시 머뭇거리다 잔뜩 움츠러든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크라스니야르 요새가 함락당했다고...”

“뭐?!”

“헉!”

이르쿠츠크 요새가 함락된 후 시베리아 지역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한 크라스니야르 요새마저 함락되었다는 보고에 북미왕국과 조약을 맺어 이제 시베리아 지역에 덜 신경을 써도 되겠다고 생각한 둘은 순간 경악했다.

그러다 크라스니야르 요새로 지원 병력을 파견한 것을 떠올린 표도르 3세는 급히 시종장에게 질문을 던져댔다.

“크라스니야르 요새가 함락당했다고? 그럼 크라스니야르 요새로 보낸 지원 병력도 연합에 당한 건가?”

“그건 아닌 모양입니다. 전령의 보고에 따르면 시베리아로 보낸 지원 병력이 크라스니야르 요새에 도착하기도 전에 크라스니야르 요새는 이미 연합에 의해 함락된 상태였답니다.”

“허어...”

그나마 지원 병력마저 모두 잃은 것은 아니라는 시종장의 보고에 표도르 3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외무장관이 시종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지원 병력은 톰스크에서 대기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크라스니야르 요새의 함락 사실을 모르고 동쪽으로 향하던 지원 병력은 척후를 통해 크라스니야르 요새가 이미 함락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급히 후퇴했다고 합니다.”

“음? 크라스니야르 요새가 함락당한 사실을 몰랐다고?”

표도르 3세는 지원 병력이 톰스크에 도착했을 때 크라스니야르 요새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고 톰스크에 대기하면서 모스크바로 연락을 보낸 것으로 생각했는데 자세한 보고를 듣고 보니 그것이 아닌 것 같았다.

해서 표도르 3세가 입을 열자 시종장이 대답했다.

“전령에 이야기에 따르면 지원 병력이 톰스크에 도착했을 때 그런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한 모양입니다. 다만 크라스니야르 요새에서 전령이 도착할 때가 되었는데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고 투덜거리는 톰스크 요새 사령관의 이야기에 혹시나 하고 척후를 운용한 덕분에 크라스니야르 요새의 상황을 미리 파악하고 별다른 피해 없이 후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혹시 연합이 추격해온 건가?”

“예. 타타르인들로 짐작되는 기병들이 2, 3일 정도 추격하다 돌아갔다는 보고입니다.”

“타타르인이라고? 설마 타타르인들도 연합에 합류한 건가?”

표도르 3세는 순간 안색이 변했다.

러시아 차르국으로서는 예전 몽골에 당한 기억도 있었기에 타타르인들이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으며, 저 드넓은 시베리아 지역을 완벽히 통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만큼 기동력이 뛰어난 타타르인들이 연합에 합류했다면 연합의 공세를 막기는 더욱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더불어 북미왕국의 신식 소총은 장전이 편해 말 위에서 장전하고 사격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알려진 만큼, 북미왕국 무기로 무장한 타타르인들을 떠올리니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였고.

이런 표도르 3세의 반응에 외무장관이 급히 설명했다.

“아. 아마 이르쿠츠크 요새 주변의 부랴트 족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들도 타타르인들이거든요.”

“으음...”

이전에 이르쿠츠크 요새가 함락되면서 주변 원주민들이 연합에 합류했다는 보고를 떠올린 표도르 3세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현 시베리아 상황을 떠올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을 대비해 크라스니야르 요새로 지원 병력을 파병하기는 했지만, 표도르 3세는 연합이 서쪽으로 영역을 확장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겠는가 싶었다.

이르쿠츠크 요새를 함락한 이상 이르쿠츠크 요새를 기준으로 동쪽은 러시아 차르국과의 연결이 끊겼어도 병사들은 아직 남아있는 만큼 연합은 이들을 신경 쓰느라 서쪽으로 진군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여긴 탓이다.

헌데 연합은 예상을 깨고 다시 서쪽으로 진군해오고 있으니 과연 3천 명의 지원 병력으로 연합의 공세를 언제까지 막을 수 있을까 싶었고.

다만 언제까지 한숨만 내쉴 수는 없었기에 표도르 3세는 일단 시종장을 보고 더 전할 것이 있느냐고 물었고 시종장이 전할 것은 다 이야기했다고 이야기하자 시종장을 물렸다.

그리고 외무장관을 바라보고 들고 있던 조약문을 흔들며 말했다.

“이 조약문이 북미왕국 본토에 전달되고 북미왕국에서 연합에 무기 판매를 중단하겠다고 통보하기까지는 아무래도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

이러한 표도르 3세의 질문에 외무장관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물론 저들의 배가 빠르다고는 하나 대서양을 건너 미대륙을 횡단하고 다시 태평양을 넘어야 하니...”

외무장관이 말한 경로를 머릿속에서 그린 표도르 3세는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끙...그럼 못해도 반년 가까이 톰스크에서 연합을 막아야 한다는 소린데...”

시베리아의 요새들이 포격을 몇 달 정도 거뜬히 버틸 정도로 튼튼한 것도 아니었고, 지원 병력이 많은 편도 아니었기에 표도르 3세는 연합의 공세를 막기 위해 우크라이나 방면에 파견된 병력 일부를 빼서 시베리아 지역으로 보낼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외무장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의견을 제시했다.

“차라리 크라스니야르 요새로 사절을 보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음? 바로 연합에 사절을 보내자고?”

연합은 러시아 차르국에 원한이 깊은 편으로 알고 있고, 한창 연합이 우세한 상황에서 북미왕국의 중재나 개입이 없다면 과연 연합이 자신들과 평화 협상을 할까 싶었던 표도르 3세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외무장관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습니다. 더불어 연합에 우리 러시아 차르국이 북미왕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는 것과 북미왕국에서 연합에 화친을 제의하라고 권유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알린다면...”

“연합이 이를 무시하지는 못할 거란 말이지?”

일종의 블러핑을 통해 일단 연합의 확장을 막아보자는 이야기에 표도르 3세가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이자 외무장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일단 시간을 끌면서 북미왕국이 연합에 연락할 때까지 버티는 것이 최선일 것 같습니다만...”

잘만 하면 별다른 지원 없이 연합의 확장을 막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 표도르 3세는 외무장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도록 하지. 런던에서 북미왕국 대사와 협상한 외교관이 예브게니였던가?”

“그렇습니다.”

“허면 예브게니를 연합에 보낼 총 책임자로 임명하는 것이 어떻겠나.”

이왕 연합에 러시아 차르국과 북미왕국의 관계를 과장해서 이야기할 거라면 북미왕국 대사와 오랜 시간 협상하며 여러 북미왕국의 정보를 파악한 예브게니가 적임일 것으로 생각한 표도르 3세가 이렇게 묻자 외무장관도 적합한 인선이라고 판단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즉각 예브게니를 책임자로 사절단을 구성해 톰스크로 파견하겠습니다. 차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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