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화
투로시노가 제물포를 방문했다는 장계가 올라오자 조선 조정에서는 투로시노와 친분이 있는 유철을 제물포로 파견했다.
지금 같은 시기에 투로시노가 직접 조선을 방문한 것이 예삿일이 아니라 판단한 탓이었다.
유철 역시 별다른 기별도 없이 투로시노가 조선을 방문한 것이 의아했기에 마음을 졸이며 발걸음을 재촉했고.
그렇게 제물포에 도착해 투로시노가 머물고 있다는 북미왕국의 배에 오르자 투로시노는 갑판 위에서 평온한 얼굴로 유철을 반겼다.
“요새 자주 뵙는군요.”
그런 투로시노의 표정에 별일이 아닌가 싶어 조금 안도한 유철이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헌데 아무런 기별도 없이 무슨 일로 공께서 조선에 오신 겁니까?”
“급히 논의할 것이 하나 있어서 말입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급히 논의할 것이 있다고 하자 다시 안색이 침중해지며 즉시 질문을 던지는 유철을 보고 투로시노는 빙긋 웃으며 괜찮다는 듯 손짓하고 말했다.
“일단 더운데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지금은 한창 더운 여름이었고, 저 북쪽에 사는 아이누인들은 아무래도 조선의 더위에 익숙하지 않을 것 같아 일단 유철은 고개를 끄덕인 후 투로시노를 따라 선실 안으로 들어갔고.
“어?”
유철이 선실에 들어서자마자 놀란 표정으로 발걸음을 멈추자 투로시노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십니까?”
“어째 이 안이 무척 서늘한 것 같은데...”
아무리 햇볕이 들어오는 창문이 조그맣다고는 해도 한여름의 낮에 이런 기온은 이상하다 싶어 유철이 중얼거리자 투로시노가 웃으며 설명했다.
“아. 하도 더워서 냉방장치를 가동했기에 그렇습니다.”
“냉방장치요? 아. 이게 그 냉장고의 원리를 이용했다는 그...”
북미신문의 애독자인 유철이 냉방장치를 모를 리 없어 투로시노의 이야기에 감탄사를 토해내며 주위를 둘러보자 투로시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병사들의 건강을 위해 군함에도 냉방장치를 설치해서 다행이지요. 물론 평상시에는 거의 가동하지는 않는 편인데 조선은 워낙 덥다 보니...”
초기에만 하더라도 3함대의 병사 대다수는 조선 출신이었지만, 시간이 많이 흐르면서 아이누인의 비율이 올라갈 수밖에 없었고, 이들은 체모가 많아 추위에는 비교적 강했지만, 더위에는 약해 조선을 방문하자 연료의 소모를 감수하고 냉방장치를 가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투로시노 역시 더위에 약한 것은 마찬가지라 제물포의 관리가 편히 머물 수 있도록 관사를 내어주겠다고 이야기했었지만, 이를 거절하고 배 위에서 지내는 것도 다 냉방장치 때문이었고.
이를 이야기하자 유철은 신기하다는 듯 찬바람이 솔솔 흘러나오는 선실 천장의 구멍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허허. 참으로 신기하기 짝이 없습니다. 한여름에 찬바람이라니. 저 냉방장치를 대전에도 설치하면 참 좋을 텐데...냉방장치도 결국 전기로 돌아가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끙...”
북미왕국이 전기와 관련된 기술을 철저히 함구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유철은 새삼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런 유철의 표정에 투로시노는 빠르게 화제를 돌릴 필요가 있다고 여겨 입을 열었다.
“제가 청나라에 다녀온 것은 편지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투로시노는 강희제를 만난 후 청나라와 조선의 전쟁은 기정사실이라고 판단하고 포로나이로 돌아와 본국에 보고서를 올리면서 유철에게도 편지를 보냈었다.
유철도 이를 받고 조정 신료들과 이야기를 나눴었기에 유철은 표정을 바꾸고 투로시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랬지요.”
“이를 본국에 보고했더니 본국에서도 조선의 상황이 정말 심상치 않다고 느낀 모양입니다. 헌데 현재 조선에는 철도 부설 공사를 위해 파견된 아국의 기술자들이 많은 상황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요. 어?! 설마...?”
유철은 고개를 끄덕이다 순간 안색이 굳어졌고 그런 유철의 반응에 투로시노가 아니라는 듯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 걱정하지 마세요. 조선이 안전해질 때까지 기술자를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온 것은 아니니.”
“휴우.”
훗날을 생각해서라도 하루라도 빨리 철도를 부설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조정 대신들은 전쟁 준비를 하는 것과는 별개로 조선의 철도 부설 공사에 최대한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북미왕국에서 안전을 이유로 기술자를 철수시킨다면 공사가 중단되는 만큼 순간 긴장했던 유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투로시노가 입을 열었다.
“다만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한다면 자연스레 조선에 파견된 아국 기술자들의 안전도 위협받을 수밖에 없지요. 아. 물론, 아국은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하는 즉시 지원 병력을 파견할 생각입니다만 현실적으로 병력이 이동하는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잖습니까.”
“해서 아국은 압록강이 얼기 전에 훈련도감과 어영청, 지방군을 북방으로 올려보내 북미왕국에서 추가로 병력을 지원해주기 전까지 북방에서 청나라군을 막을 계획이고 이것은 전에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이에 투로시노는 조금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본국에서는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훈련도감은 몰라도 조총으로 무장한 어영청이나 지방군을 믿기는 좀 어려운 모양입니다.”
물론 조선 조정에서도 지방군에는 별다른 기대를 하지는 않았고 어영청도 개혁한 후 훈련을 열심히 시키긴 했지만, 조총으로 무장했기에 과연 청나라군을 막을 수 있을지는 의문을 품고 있었기에 유철은 투로시노의 지적에 신음을 흘렸고.
“으음...”
그런 유철을 보고 투로시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해서 본국에서는 병력을 미리 조선에 파견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예? 미리 병력을 파병하시겠다는 겁니까?”
유철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투로시노를 바라보자 투로시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물론 조선에서 허락한다면 말이지요. 그리고 아국의 병력은 일단 무장을 해제하고 기술자의 신분으로 평양-의주 구간 철도 공사 현장에 파견될 겁니다.”
“아.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면 무장을 하겠다는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아무리 조선과 북미왕국의 관계가 특별하다고는 하나 당장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타국의 군대가 자국에 진주하는 것은 아무래도 정치적인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세계신문을 통해 조선인들 상당수는 북미왕국을 진정한 형제국처럼 인식하고 있었고, 어지간한 선비라면 현재 청나라와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이 북미왕국의 제안에 크게 반대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헌데 조선 조정의 정치적인 부담을 최대한 줄여주기 위해 북미왕국에서는 군대가 진주하는 것이 아닌 민간인을 파병하는 형식으로 병력을 파견하겠다고 제안했고, 이들은 평양 북쪽에 배치될 거라고 하니 유철은 아마 조선 조정에서 이 제안을 받아들일 거로 생각하면서도 신중히 대답했다.
“으음...어차피 전쟁이 예정되어 있고 북미왕국군이 조선에 미리 파병된다면 그만큼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줄어드는 저는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만...일단 제 선에서 결정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조당에서 논의한 후에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야 당연하지요. 그러시지요.”
투로시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은 돌아갈 테니 의논 후 10월 전에 개항장에 나가 있는 외무청 관리에게 답을 주었으면 한다고 덧붙이자 유철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의문이 생겨 질문을 던졌다.
“헌데 아국에서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병력을 얼마나 파병하실 생각이십니까? 이전에 이야기했던 1만 1천 명을 모두?”
이에 투로시노는 어깨를 으쓱했다.
“최대한 많은 병력을 파견했으면 좋겠지만 그건 조선에서도 부담스럽지 않겠습니까? 해서 일단 본국에서는 최소 5천 명 정도를 생각하고 있더군요. 그래야 훈련도감 병사들과 함께 청나라군을 저지할 수 있지 않겠느냐면서요.”
“흐음. 알겠습니다. 허면 최대한 빠르게 의논해 답을 드리겠습니다.”
* * *
정성국은 연구청장의 보고에 들고 있던 보고서를 던지듯 내려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드디어 자동 교환기의 개량이 완료되었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허면 드디어 민간에 통신망을 개방할 수 있는 건가?”
지혜로운 나무와 연구원들이 자동 교환기의 초기형을 개발함에 따라 이 자동 교환기를 제대로 써먹을 수 있을 정도로 개량하기 전까지는 민간에 통신망을 개방하는 것을 미루고 곳곳에 통신망을 설치하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만큼, 자동 교환기의 개량이 완료되었다는 연구청장의 보고는 드디어 민간에 통신방을 개방할 수 있다는 뜻과도 같았다.
해서 정성국이 반색하며 이를 묻자 연구청장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가능할 것 같습니다. 물론 당장은 어렵습니다만...”
“어? 왜?”
“일단 자동 교환기와 신형 전화기를 생산하고 사용하고 있던 수동 교환기와 기존의 전화기를 교체하는 것이 우선이니까요.”
“아...그건 그렇겠군.”
연구청장의 대답에 정성국은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이자 연구청장이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통신망을 민간에 개방하게 되면 수요가 굉장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런 만큼 전화기 제조 공방도 더욱 크게 키울 필요가 있어서 당장은 어렵고...올해 안에 기존의 전화기와 수동 교환기를 모두 교체하고 내년에 민간에 통신망을 개방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 정도면 뭐...”
내년 정도면 그렇게 지체되는 것도 아니었기에 정성국은 만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떠오른 의문이 있어 질문을 던졌다.
“그보다 신형 전화기의 개발은 이미 끝난 건가?”
“그렇습니다. 기존의 전화기에다 자동 교환기로 신호를 보내는 장치를 추가한 것이 다라서 신형 전화기의 개발은 쉬웠다더군요.”
“그래?”
“예. 그리고 외관도 기존의 전화기와 별반 차이는 없습니다. 저기에 자동 교환기로 신호를 보내는 숫자가 새겨진 원판이 부착된 형태랄까요?”
연구청장이 집무실 책상에 올라와 있는 전화기를 가리키며 신형 전화기의 모습을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하자 정성국은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 일전에 지혜로운 나무의 연구실에서 봤던 그 장치를 그대로 사용하는 모양이군. 원판을 회전시켜 자동 교환기를 조작하는 거지?”
“어? 아시는군요. 맞습니다. 그렇기에 전화를 걸기 위해선 상대방의 회선번호를 알 필요가 있지요.”
“회선번호? 아...”
전생의 전화번호를 일단 회선번호라고 이름 붙인 것 같아 정성국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질문을 던졌다.
“그래. 그 회선번호는 어떻게 부여할 생각인가?”
“회선번호는 결국 자동 교환기와 연결되어있는 터라 연구가 조금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그러고 보면 이번에 개량을 끝냈다는 그 자동 교환기의 회선은 몇 개나 되나?”
이전에 그가 보았던 자동 교환기의 경우 기껏해야 10회선만 연결할 수 있었던 초기 제품이라 정성국이 궁금하다는 듯 질문하자 연구청장이 대답했다.
“자동 교환기 1대가 수용할 수 있는 회선은 총 5천 회선입니다.”
“5천 회선이라...”
전생의 기계식 자동 교환기인 스트로저 교환기가 교환기 하나에 1만 회선을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생각보다 용량이 큰 편이었기에 정성국은 나쁘지 않다고 여기며 중얼거릴 때 연구청장이 급히 덧붙였다.
“다만 자동 교환기를 증설해 계속 5천 회선씩 증가시킬 수 있으니 회선이 부족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에 정성국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허면 자동 교환기와 신형 전화기가 생산될 때까지는 회선번호 체계부터 연구하면 되겠군.”
“회선번호 체계요?”
“그래. 처음부터 회선번호를 발급하는 체계를 잡아둬야 나중에 회선을 추가하더라도 별다른 혼란이 없지 않겠나.”
“아. 그건 그렇겠군요.”
수긍하는 연구청장을 보고 정성국은 전생의 전화번호 체계를 넌지시 이야기해주었다.
지역 번호와 국번, 사번으로 구성된 정성국에게 익숙한 전화번호 체계를.
이를 듣고 연구청장은 너무 과한 것 아니냐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흐음...자릿수가 너무 많은 것 아닙니까? 회선번호가 무려 11자리라니...”
하지만 정성국이 고개를 저었다.
전생처럼 전화를 사용하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계속해서 전화번호의 자릿수가 늘어나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이렇게 정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탓이다.
“그 정도는 되어야 할 거야. 나중을 생각해야지. 인구가 늘어나 회선번호의 자릿수가 계속 늘어나는 것보다야 처음부터 체계를 그렇게 잡는 것이 나아. 그리고 일부 회선은 막아둘 필요도 있고.”
이런 정성국의 설명에 연구청장이 수긍하자 정성국이 슬쩍 덧붙였다.
“그리고 회선번호보다는 전화번호라고 부르는 것이 더 직관적일 것 같네.”
“전화번호라...흠. 확실히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명칭이야 크게 상관없었고 정성국의 말처럼 회선번호보다는 전화번호가 더 직관적으로 들렸기에 연구청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성국은 아까 연구청장이 설명한 신형 전화기에 관해서도 슬쩍 이야기했다.
“그리고 신형 전화기의 원판에도 구멍을 뚫게.”
“구멍을요?”
“그래. 자네의 설명을 들어보니 내가 이전에 보았던 실험실의 원판과 똑같은 것 같은데...내가 이야기한 것처럼 전화번호 체계를 완성하면 전화번호의 자릿수가 긴 만큼 원판을 여러 번 회전시켜야 하잖나. 그러니 원판을 회전하기 편하도록 외곽에 구멍을 여러 개 뚫어 손가락을 넣고 회전시킬 수 있도록 말이네.”
정성국이 실험실에서 보았던 원판의 경우 회전시키는 것이 꽤 불편해 보여 이를 지적하자 연구청장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원판을 쉽게 회전할 수 있도록 원판에 막대를 붙여두긴 했습니다만...차라리 전하의 말씀대로 구멍을 뚫는 게 낫겠군요. 알겠습니다. 바로 이야기해 바꾸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