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7화
정성국은 집무실에서 방금 올라온 보고서를 빠르게 확인하고 있다가 집무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에 슬쩍 고개를 들었고.
이상돈이 호위대원들과 함께 커다란 무언가를 들고 집무실로 들어오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음? 네가 웬일이냐? 그건 또 뭐고?”
이에 이상돈은 이동 중 먼지나 흠집이라도 날까 물건을 씌워두었던 두꺼운 천들을 치우기 위해 손을 놀리면서 말했다.
“축음기입니다. 장인들이 만든 축음기. 어휴. 무거워.”
그 말에 정성국은 읽고 있던 보고서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축음기? 아. 축음기 제조 공방 건설이 완공된 지도 꽤 되었으니 슬슬 공방에서 축음기가 생산될 시기긴 하겠구나.”
“예. 그렇지요. 해서 처음으로 생산한 최고급 축음기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면서 이상돈이 마지막 매듭을 풀고 축음기를 감싸고 있던 천을 치우자 정성국은 이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와...뭐가 이렇게 화려해?”
정성국은 개발청에서 봤었던 축음기를 생각했었는데 눈앞에 놓인 축음기는 이전에 봤던 축음기와는 전혀 달랐기에 정성국이 당황했지만, 이상돈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표정으로 자신의 스승을 바라보고 말했다.
“주문 제작으로만 파는 최고급 축음기니 화려하지요.”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일단 개발청에서 본 것과는 다르게 본체도 컸고 본체를 지탱하는 기다란 다리도 4개 달려있어 마치 협탁과 같은 느낌이 들었고, 흑단목으로 만들어진 본체와 저 다리는 귀금속으로 장식해 아름다운 가구라는 느낌이 물씬 풍겼기에 정성국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이상돈을 바라보고 물었다.
“야. 이거 대체 얼마냐?”
“500원입니다.”
“뭐?! 500원?”
이상돈의 대답에 정성국은 황당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냉장고가 50원인데 축음기가 500원이라니.
물론 전생에서도 최고급 음향기기의 경우 가격이 어마어마했지만, 이건 경우가 조금 달랐다.
어차피 최고급 축음기나 일반 축음기나 음향은 큰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돈은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도 당당한 얼굴로 대답했다.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최고급 축음긴데 그 정도는 받아야지요.”
“아니. 아무리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했다고 해도 너무 비싼 것 같은데? 그리고 그 가격에 이걸 누가 사겠어? 아무리 북미왕국 백성들이 부유하다고는 해도...”
그런 정성국의 이야기에 이상돈은 다 믿는 구석이 있다는 듯 씩 웃으며 대답했다.
“누가 사겠습니까. 돈 많은 유럽 귀족들이 사겠지요.”
“아...”
북미왕국의 백성들이 부유하다고 알려져 있고 북미왕국을 방문한 일부 유럽인들은 북미왕국 백성들이 마치 유럽의 귀족들처럼 생활한다고 이야기하곤 이들이 이야기하는 유럽의 귀족들은 기껏해야 하급 귀족들 수준이지 유럽의 고위 귀족들의 부는 어마어마했다.
그들이 여태까지 쌓아 올렸던 부가 있었기에.
그리고 최고급 축음기는 그런 유럽의 고위 귀족들을 노리고 최대한 화려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한 이상돈이 덧붙여 말했다.
“아시잖습니까. 요새 유럽 귀족들은 북미왕국산 물품에 환장한다는 것을요.”
전생이었다면 유럽은 한창 청나라에 환상을 품고 귀족들은 청나라산 물품을 높이 평가하며 청나라산 물품을 사들이기 위해 애를 썼을 시기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달랐다.
분명 유럽은 아시아 교역을 통해 조금씩 청나라에 환상을 품기 시작했지만, 북미왕국의 등장 이후 그 관심은 아시아에서 북미대륙으로 옮겨졌고, 북미왕국에 관한 각종 소문이 이 관심을 더욱 증폭시켰으며, 실제로 북미왕국과 교류하면서 제대로 된 정보를 얻게 되면서 일부 날조된 소문이라고 여겼던 소문들이 진실이었고, 북미왕국의 국력이나 기술력이 자신들의 예상보다 월등하다는 것이 유럽에 널리 알려지게 되자 이전과는 달리 유럽의 귀족들은 북미왕국에 환상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유럽의 귀족들은 주변에 자랑하기 위해서라도 북미왕국산 물품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최근 유럽의 연회에서는 북미왕국의 복식을 입는 것이 유행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정성국은 무척 당황하기도 했었고.
그런 만큼 유럽 귀족들은 새로 나온 이 축음기에도 무척 관심을 보이고 비싸더라도 주변에 자신의 부를 자랑하기 위해 기꺼이 축음기를 구매할 것이라는 이상돈의 말에 정성국은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했고.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이상돈이 덧붙였다.
“그리고 외무청장님을 통해 유럽 대사들에게 축음기를 보여줬었는데 유럽 대사들의 반응이 장난 아니었습니다.”
“그래?”
“예. 소리를 기록해 재생하는 장치라니. 신기하잖습니까. 거기에 곡이 기록되어 있는 원통만 바꾸면 다른 곡을 들을 수도 있고. 그래서인지 외무청장님께 축음기는 언제 파느냐며 계속 묻는답니다. 그리고 독점 판매권을 내어줄 수 있겠느냐고 묻기도 하고.”
그 말에 정성국은 매끈한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돈이 될 거라 여긴다 이거군?”
“그렇지요. 아시다시피 사진기가 유럽에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축음기도 불티나게 팔려나가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니까요.”
지금 유럽에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물품이 바로 사진기였다.
그리고 정성국은 유럽에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사진기가 정말 의외라고 생각했고.
물론 사진기가 개발된 지도 시간이 꽤 흘렀고, 연구청에서 사진기를 계속 개량한 덕분에 최근에는 잠깐의 노출로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기는 했다.
다만 이러한 신제품의 경우는 아직 생산량이 많지도 않고 북미왕국 내에서도 수요가 커 전량 국내에 유통되는 만큼 유럽에 팔리고 있는 사진기는 모두 재고에 가까운 구형 사진기들이었고.
이러한 구형 사진기들은 촬영도 불편하고 촬영하는데 들어가는 비용도 큰 편이라 얼마 팔리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 유럽의 상인들은 사진기를 왕창 사 가는 터라 의아해 외무청을 통해 알아보았고.
그 결과 조금 당황스러운 대답을 들을 수 있었는데 유럽인들은 북미왕국에서 만든 여러 발명품들에 무척 흥미를 갖고 있었지만, 이 발명품 중 상당수는 전기로 작동하는 물건이다 보니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었고, 그런 유럽인들에게 사진기는 유럽인들이 북미왕국에 품는 환상을 채워주는 신기한 기계라 유럽 귀족들이 하나 정도는 산다는 이야기에 정성국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고.
그리고 축음기 역시 사진기와 비슷하게 신기한 기계였고 사진기보다 더 쓸모 있었으니 유럽 귀족들이 무척 환영할 거라는 이야기에 정성국은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가격을 그렇게 비싸게 책정한 거군?”
“그렇죠. 그리고 대청무역이 끊기는 바람에 더는 비단을 만들어 유럽에 팔 수도 없으니 그 손해를 조금이나마 만회하기 위해 가격을 좀 높게 잡은 것도 있고요.”
그 말에 정성국은 피식 웃고 질문을 던졌다.
“헌데 최고급 축음기의 가격이야 그렇다고 치고. 일반 축음기의 가격은 얼마로 책정했어?”
“일단 일반 축음기의 가격은 20원으로 책정했습니다.”
“20원이라...”
정성국이 생각하기에 조금 비싸기는 한데 축음기는 생활에 꼭 필요한 물품은 아니었기에 상관없겠다 싶었을 때 이상돈이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원통은 개당 1원에 판매할 예정이고요.”
“음? 곡이 기록된 원통뿐만 아니라 빈 원통도 개당 1원에 판매한다고?”
정성국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되묻자 이상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어쩔 수 없습니다. 원래는 빈 원통은 싸게 판매할 예정이었는데 그렇게 되면 복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서 말입니다.”
“복제 문제?”
“예. 축음기 2대를 이용해 축음기에서 나오는 소리를 그대로 기록하면 품질이 떨어지긴 해도 소리가 복제되는 터라...”
일단 현재 판매하는 축음기는 소리를 기록하는 기능도 들어가 있는 만큼, 이를 이용하면 소리를 복제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정성국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럼 가격이 많이 차이 나면 곡이 기록된 원통을 사기보다는 빈 원통을 사서 녹음하려는 사람이 많겠구나.”
“예. 해서 일단은 원통 가격을 통일해서 특별히 무언가를 녹음하려는 사람이 아니라면 곡이 기록된 원통을 사도록 유도할 생각입니다.”
벌써 불법 복제를 걱정해야 한다는 이야기에 정성국은 조금 황당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다만 이전보다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만큼, 미리 백성들의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정성국이 입을 열었다.
“그래. 뭐 어쩔 수 없긴 한데...그것과는 별개로 공익 광고를 계속 싣긴 해야겠네.”
“공익 광고요?”
“그래. 네가 말한 복제 문제는 결국 저작권을 침해하는 행위니까.”
“아...”
북미왕국에서 헌법을 제정할 때 정성국은 이에 개입해 과학과 유용한 기술의 발달을 촉진하기 위해 저작자와 발명자에게 그들의 저술과 발명에 대한 독점적인 권리를 일정 기간 국가에서 인정한다는 조항을 삽입했고, 이를 기반으로 특허법과 저작권법도 만들어두긴 했다.
그리고 최근 상단이나 공방을 창업하는 백성들이 많아지면서,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기보다는 다른 상단이나 공방에서 판매하는 인기 있는 제품을 그대로 베껴 판매하는 경우가 늘어 특허법과 저작권법을 제대로 알릴 필요가 있다고 느끼기도 했고.
해서 정성국이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은 빈 원통과 곡이 기록된 원통의 가격이 같은 만큼 네 말처럼 사람들은 어지간해선 곡이 기록된 원통만 살 것 같긴 한데...이 원통을 제작하는 것이 대단한 기술력이 필요로 한 것도 아니라 개인이 이 원통을 만들어 원통을 복제할 수도 있고 또 기술이 발전하게 되면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만큼 미리미리 특허법과 저작권법을 제대로 알려 발명자와 저작권자의 권리를 보호할 필요가 있어.”
“음...확실히 그렇겠네요. 허면 연구청장님께 보고하고 연구청 이름으로 공익 광고를 계속해서 싣도록 할게요.”
“그래. 그리고 아직 북미신문에 축음기와 관련된 기사가 나지 않을 것으로 아는데 원통을 구매함으로써 곡을 작곡하고 연주한 음악가들을 후원하는 셈이고, 이 후원으로 음악가들은 생계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 음악에만 매진해 더 좋은 곡과 연주로 보답할 거라고 알리란 말이지.”
이런 정성국의 조언에 이상돈은 손뼉을 치며 대꾸했다.
“아. 그거 좋네요. 다음 주에 기사가 나갈 예정인데 바로 추가해야겠어요.”
“그리고 녹음에 협조한 음악가들에게 충분한 대가를 지급했겠지?”
정성국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질문을 던지자 이상돈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물론이죠. 그리고 곡마다 돈을 지급하고 판매량에 따라 또 돈을 지급할 예정이라 아마 이번 녹음에 협조한 음악가들은 평생 돈 걱정할 필요 없을걸요?”
이상돈의 대답에 정성국은 만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그것도 북미신문을 통해 알려. 어차피 북미신문은 조선과 유럽에도 많이 흘러 들어가잖아?”
정성국의 이야기에 잠깐 어리둥절하던 이상돈은 정성국의 속셈을 눈치채고 슬쩍 미소를 지었다.
원래 어느 나라건 간에 예인들은 비교적 빈곤한 편이었으니 이를 널리 알려 북미왕국으로 끌어들일 생각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아. 조선과 유럽의 음악가들을 더 끌어모으실 생각이시군요?”
이에 정성국인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리고 그렇게 음악가들이 대거 아국으로 몰려들면 이들을 선생으로 고용해 학생들을 교육할 수도 있고.”
정성국은 학생들에게 악기를 가르치고 싶었지만, 현재는 사람이 워낙 부족해 그게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유럽의 음악가들을 초청해 대학교에서 음악가들을 키워내고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걸릴 수밖에 없었고.
그러니 축음기를 통해 외국의 음악가들을 모두 흡수하고 이를 통해 북미왕국의 음악이 더욱 발전할 계기를 만들 생각을 한 정성국이었고.
“교육청장님이 좋아하겠군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