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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516화 (516/850)

516화

정성국은 땀을 뻘뻘 흘리는 연구청장과 그 옆에서 무거워 보이는 상자를 들고 있는 호위대장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음? 그건 무슨 상자인가?”

“전에 통조림을 개발하면서 통조림으로 만든 전투 식량을 개발해보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거?”

김신철이 알루미늄을 비교적 손쉽게 양산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면서 정성국은 연구청에 알루미늄을 이용한 통조림을 만들어보라고 지시했었다.

지금까지는 주로 병조림을 사용하긴 했는데 병조림의 경우 파손되기 쉬워 널리 쓰이긴 어려웠기 때문이다.

다만 그동안 병조림을 가장 많이 쓰던 곳이 바로 장기 항해를 하는 선박이었는데, 최근에는 장기 항해가 가능한 큰 배들엔 발전기가 설치되어 냉장고, 냉동고를 이용할 수 있게 된 만큼 병조림이든 통조림이든 그 필요성은 줄어들었고.

해서 연구청에서는 통조림을 이용해 운반하기 쉽고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전투 식량 개발에 착수하겠다고 보고한 적이 있었기에 정성국이 아는 체하자 연구청장은 호위대장에게 상자를 내려놔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호위대장이 상자를 내려놓자 연구청장은 상자를 열어 안에서 각종 통조림을 꺼내 티테이블 위에 올려두기 시작했고 정성국은 호기심에 자리에서 일어나 상자를 보고 탄성을 질렀다.

“어휴. 이게 다 전투 식량이 들어있는 통조림인가?”

“그렇습니다.”

상자 안에는 통조림 수십 개가 있었기에 정성국은 그제야 연구청장이 왜 땀을 뻘뻘 흘렸는지 짐작하고 고개를 흔들며 냉장고에서 시원한 냉차를 꺼내 연구청장에게 건네주었다.

“엇? 감사합니다. 전하.”

“집무실까지는 자네가 들고 왔나 보군? 그냥 입구에 있는 호위대원이나 시종들에게 부탁하지.”

“하하하. 제가 나이는 있어도 이 정도 상자를 드는 것쯤은 가뿐합니다.”

아직은 자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자랑하는 연구청장을 보고 정성국은 피식 웃은 후 티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통조림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창문을 통해 내리쬐는 강렬한 햇볕을 반사해 무척 반짝거리는 통조림을 들어 살펴본 정성국은 위아래가 똑같다는 것을 깨닫고 중얼거렸다.

“어...이거 그냥 열지는 못하겠네?”

“그렇지요. 이 전용 통조림 따개를 이용하면 비교적 쉽게 열 수 있고...그게 아니면 총검이나 연장을 이용해 따야겠지요.”

전생에야 업소용 통조림이 아닌 다음에야 편의를 위해 원터치 통조림이 대세를 이루었지만, 이 원터치 오픈 방식을 채용한 통조림의 경우 여러 차례의 정밀금형가공을 거쳐 만들어지다 보니 당장 이를 만들어내긴 어렵긴 했다.

해서 정성국은 전생에서 아주 어렸을 적에 과일 통조림을 따기 위해 아버지가 사용했었던 것과 같은 ㄱ자로 된 전용 통조림 따개를 보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줘 보게.”

“여기 있습니다. 전하.”

정성국은 전용 통조림 따개를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가장 앞에 있는 통조림을 잡고 따기 시작했다.

“오. 그래도 쉽게 딸 수는 있네.”

“그럼요.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해 쉽게 딸 수 있도록 연구한 녀석인걸요. 헌데 전하께선 설명도 듣지 않으셨는데 잘만 사용하시는군요?”

“아. 뭐 딱 보니 이렇게 사용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

정성국이 대충 얼버무리면서 통조림 윗부분에 손을 대려 하자 연구청장이 급히 소리쳤다.

“어! 조심하십시오. 통조림 윗부분은 무척 날카롭습니다!”

이에 정성국은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렇겠지. 딱 봐도 날카롭게 보이는군. 조심할 테니 걱정 말게.”

정성국은 통조림 따개를 이용해 통조림의 뚜껑 부분을 완전히 따버리고 통조림 안의 내용물을 살폈다.

“그리고 내용물은...흠. 이거 죽인가?”

“예. 고기와 야채를 듬뿍 넣은 죽입니다.”

정성국이 티스푼을 집은 후 통조림 안의 죽을 뜨자 호위대장이 즉각 입을 열었다.

“전하. 안전을 생각하면...”

이에 정성국은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설마 연구청에서 여기에 독이라도 풀었을까?”

“그렇진 않겠지만 만약을 대비...”

통조림을 개봉할 때 음식의 냄새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고, 어딘가가 찌그러져 있거나 부풀어 오르지 않을 것을 보면 통조림에는 큰 이상이 없다는 뜻이었기에 정성국은 괜찮다고 손짓한 후 곧바로 티스푼을 입에 가져갔다.

“흐음...”

정성국이 죽의 맛을 음미하자 호위대장은 한숨을 쉬며 다시 물러났고 연구청장은 자신과 연구청을 굳게 믿는 정성국을 보고 미소 지으며 질문했다.

“맛은 어떠십니까?”

정성국은 조금 의외란 표정으로 통조림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이거 데우지 않아도 먹을 만은 한데?”

“그렇지요?”

정성국의 평가에 연구청장이 히죽거리며 웃자 정성국은 다시 티스푼으로 죽을 떠서 오물거린 후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다만 조금 짠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전투 식량이다 보니 전반적으로 염도를 높게 잡았습니다.”

“아. 병사들이 전투를 치르면서 땀을 흘릴 테니 이를 보충하기 위해서?”

“그렇지요.”

전시에는 미각이 무뎌지는 병사들을 위해 전투 식량 대부분은 간과 맛을 강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떠올린 정성국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티스푼으로 다른 통조림들을 가리키고 물었다.

“이것들. 다 죽은 아니지?”

“그럼요. 종류는 여러 가지입니다. 매일 죽만 먹을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다양한 음식들을 넣었습니다. 그렇기에 보존성이 그리 긴 편은 아니긴 한데...”

그러면서 연구청장은 옆에 어떤 음식이 들어가 있는지 밑바닥에 펜으로 표시해두었다고 이야기하자 정성국은 죽이 들어있는 통조림 옆에 있는 통조림을 들어 밑부분을 살피고 물었다.

“13? 13은 뭐야?”

“아. 13번은 아마 스파게티일 겁니다.”

“스파게티? 서양식도 넣었어?”

정성국이 의아해하자 연구청장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북미왕국 백성들이 즐겨 먹는 음식들을 선정해 다양하게 넣었습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정성국은 스파게티 소스도 아니고 스파게티 소스와 면까지 모두 넣었다는 이 통조림의 맛이 궁금해 즉각 통조림을 땄고.

다과를 먹기 위한 자그마한 포크를 들어 스파게티 면을 돌돌 말아 입에 넣고 곧바로 표정을 구겼다.

“끙...차가운 스파게티는 영 아닌데...? 거기에 겨울에는 더 심할 것 아닌가.”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연구청장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게...좀 그렇긴 하죠. 다만 해결책은 있습니다.”

“아. 불 위에 올려놓고 통조림을 가열하라고?”

“예. 캔을 따고 5분 정도 가열하면 적당히 따뜻해지거든요. 그러면 먹을 만은 합니다. 해서 급할 때는 그냥 먹고, 그 외에는 데워 먹으면 괜찮을 거라고 봅니다.”

현대의 통조림들이야 안쪽의 식품과 닿는 부분을 합성수지 등으로 코팅하기에 통조림에 열을 가하면 환경 호르몬이 나올 수 있어 가열하면 안 되지만, 이 통조림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정성국은 조금 미심쩍은 얼굴로 스파게티가 들어있는 통조림을 바라보았다.

“흐음...헌데 이거 데운다고 맛이...좋아질까?”

“데우면 그래도 먹을 만은 합니다.”

미심쩍은 얼굴을 지우지 못하는 정성국이었지만 연구청장이 직접 먹어봤고 맛있다고 이야기하지는 못해도 먹을 만은 하다고 하니 정성국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병사들의 혀를 위해서라도 연료 보급에 더욱 힘써야겠군.”

“하하하. 그러면 병사들의 불만도 줄어들 겁니다.”

“근데 저 작은 통조림들은 뭐야?”

연구청장이 티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통조림은 크기에 따라 2종류로 나뉘었고 몇 개 안 되는 작은 통조림은 한쪽에 놓여 있었기에 정성국이 작은 통조림들을 가리키며 묻자 연구청장이 답했다.

“아. 이 큰 통조림들이 주식이 담긴 통조림이고, 이 작은 통조림들은 부식이 담긴 통조림입니다.”

“부식?”

“예. 주로 사탕, 말린 과일, 견과류, 초콜릿, 쿠키 등등이 들어있지요.”

부식까지 준비했다는 말에 정성국은 그래도 병사들의 입장을 여러모로 생각했구나 싶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러면 병사들은 주식이 담긴 통조림과 부식이 담긴 통조림 하나씩 받아서 먹게 되는 건가?”

“일단은 그렇습니다.”

현대의 전투 식량이 주로 주식과 부식, 음료수 분말로 이루어진 것을 보면 생각보다 구성은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구성은 괜찮네.”

정성국의 평에 연구청장은 히죽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렇지요? 여기에 후식으로 곁들일 커피까지 있으면 딱 좋을 것 같아서 여러모로 연구 중이긴 한데 유럽인들이 주로 마신다는 터키식 커피를 피하기 어려워서 일단 고민 중입니다.”

북미왕국 건국 초기에 원주민들이 술을 워낙 좋아해 잘못하면 수많은 알코올 중독자가 탄생할 것 같아 정성국은 의도적으로 술을 대신해 커피를 마시도록 적극적으로 밀었고.

덕분에 북미왕국 백성들은 이제 술보다는 커피를 즐겨 마셨다.

그런 만큼 커피를 함께 제공하면 병사들의 심신도 안정시킬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커피를 내리려면 각종 장비가 필요한 탓에 연구 중이라는 이야기에 정성국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음? 아. 커피 가루를 동봉하는 식으로? 그것만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당장 커피 믹스를 만들자니 만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고 캔커피를 만들자니 원터치 캔이 아니라 저 통조림 따개로 열어야 하는 만큼 마시기 불편할 것 같았기에 차라리 커피 가루를 동봉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정성국이 긍정적으로 반응하자 연구청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까요? 그거 맛이 좀 그렇던데...”

“그렇다고 전쟁터에 저 도구들을 모조리 가져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면서 정성국이 티테이블 한쪽에 놓여 있는 각종 도구를 가리키자 연구청장은 피식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요. 알겠습니다. 허면 모든 부식 통조림에 커피 가루를 추가하도록 하지요.”

“아. 공간이 되나?”

“그럼요.”

연구청장이 부식이 들어있는 통조림을 흔들자 속이 비어있는 듯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기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인 후 손을 내밀었다.

“아무거나 하나 줘 보게.”

“여기 있습니다. 전하.”

연구청장이 건넨 통조림을 다시 통조림 따개로 열자 안쪽에는 통조림 크기만 한 커다란 원형 쿠키들이 보였다.

해서 정성국은 이를 조심히 꺼내 입에 가져갔고.

“오. 이거 맛은 또 괜찮은데?”

전투 식량이다 보니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쿠키가 바삭하니 맛있었기에 정성국이 놀란 표정을 짓자 연구청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설탕을 듬뿍 넣었으니까요.”

“헌데 그냥 먹으면 목이 좀 멜 것 같네.”

“예. 주로 쿠키나 케이크류는 커피 없이 먹긴 좀 그래서 고민했었던 거죠. 그리고 커피 가루만 동봉하면 쉽게 해결될 것 같고요.”

정성국은 연구청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쿠키를 마저 먹고 말했다.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네. 통조림 공방은 이미 건설이 끝났지?”

이전에 통조림 공방 건설을 완료했다는 개발청의 보고서를 기억하고 있던 정성국이 묻자 연구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금은 각종 설비를 설치하는 중이고...아마 일주일 안에 공방을 가동해 통조림을 생산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정성국은 최대한 빠르게 생산해 병사들에게 보급할 생각으로 말했다.

“북방 항로가 닫히기 전까지 얼마나 생산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일단 최대한 생산해서 아이누 섬으로 보내게.”

“알겠습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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