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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515화 (515/850)

515화

한창 보고서를 확인하던 정성국은 갑자기 단 것이 당겨서 잠깐 휴식을 취할 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떠먹기 시작했을 때 누군가가 집무실 문을 급하게 두드리며 벌컥 열었고.

“전하!”

정성국은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조용한 곰을 바라보았다.

“꿀꺽. 무슨 일인가?”

“포로나이와 런던에서 긴급 보고서가 올라왔습니다!”

“긴급 보고서?!”

“예.”

조용한 곰이 정성국에게 다가와 보고서들을 건넸고 정성국은 이를 받아 맨 앞에 있는 보고서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이건...투로시노의 보고서인가?”

“그렇습니다. 자금성에서 청나라 황제를 만나 대화를 나눴는데 청나라 황제는 교역을 빌미로 조선 침공을 도우라고 제안했답니다.”

“뭐?!”

정성국은 황당한 표정으로 보고서에서 시선을 떼고 조용한 곰을 바라보았다.

청나라도 자신이 조선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그런 제의를 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에.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조용한 곰은 어깨를 으쓱인 후 대답했다.

“아무래도 청나라는 저희를 다른 유럽의 국가처럼 생각한 모양입니다. 충분한 이권을 제의한다면 이를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한 거죠. 뭐 그동안 저희가 청나라에 보였던 행동을 생각하면 그렇게 판단할 수도 있겠지요.”

분명 북미왕국은 청나라와 접촉한 이후 시종일관 교역에 목을 매긴 했다.

청나라의 시장은 워낙 컸으니 어쩔 수 없었고.

이 때문에 북미왕국은 교역을 위해 러시아 차르국과의 충돌을 무릅쓰고 청나라 북방에 식량을 제공하기도 했고, 러시아 차르국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계속해서 북방에 식량을 제공하면서 청나라와 교역하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청나라에서는 국력이 대단하다는 그 북미왕국도 자신들과의 교역에 목을 매는 다른 유럽 국가와 별반 다를 바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는 이야기에 정성국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그래도...”

“투로시노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청나라는 우리 북미왕국이 상업을 중시하고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한다고 여겼기에 막대한 이권을 제시하면 충분히 회유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모양입니다. 특히나 저희는 북미왕국이 조선의 식민지나 속국으로 알려질 것을 우려해 북미왕국과 조선의 관계를 묻는 말에는 항상 북미왕국은 조선과는 별개의 국가라고 알려오지 않았습니까.”

“흐음...그래서 우리가 조선과의 유대가 깊지 않으리라고 판단하고 우리를 회유하기 위해 거부하기 힘든 제안을 한 거다?”

“그렇습니다. 엄청난 양의 생사 수출 약속과 더불어 항구의 개방은 정말 막대한 이권이잖습니까. 이를 잘만 이용하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이득을 볼 수 있겠지요. 헌데 고작 식량 조금을 운반해주는 조건으로 그런 이권을 약속한 것은...”

조용한 곰이 말을 흐리자 정성국은 보고서를 살피며 청나라 황제의 제안을 확인하고 혀를 내둘렀다.

“허. 그렇긴 하네. 육로든 해로든 청나라에서 직접 봉황성까지 식량을 운반할 수도 있고, 이전 호란 때를 생각해보면 굳이 우리가 청나라군에 보급 물자를 가져다주지 않더라도 보급엔 큰 지장이 없을 텐데 이런 조건으로 그러한 이권을 약속한 것은 결국 조선과 잡은 손을 뿌리치고 자신들과 손을 잡으면 그러한 이권을 주겠다는 뜻과도 같으니까.”

“예. 아마 다른 유럽 국가였다면 분명 거부하기는 어려운 조건이었을 겁니다.”

확실히 아직 해금령을 유지하고 있어 지방 관리들에게 뇌물을 먹여가며 밀무역을 하고 있는 다른 유럽 국가들이었다면 눈이 뒤집힐 조건이기는 했기에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투로시노가 작성한 보고서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아무튼, 전쟁은 확실한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조선은 출병 요구를 거절할 생각이고 청나라 황제는 출병 요구를 거절하면 조선을 징치하겠다고 선언했으니까요.”

물론 조선이 청나라와 협상 중이긴 한데 이 협상은 단순히 시간 끌기라는 것은 조선도, 청나라도 잘 알고 있었으니.

그렇기에 조선과 청나라와의 전쟁은 기정사실이었지만 정성국은 별걱정 없다는 표정으로 보고서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뭐 이미 전쟁이 일어날 거라고 가정하고 준비하고 있었기에 큰 상관은 없지만...청나라 황제가 직접 이런 제의를 할 정도라면 아무래도 청나라는 우리를 무척 경계하는 모양이군.”

조용한 곰도 투로시노가 보낸 보고서를 읽고 비슷한 인상을 받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투로시노의 이야기로는 유럽인 신부들에게 유럽의 정보를 얻다 보니 유럽의 평가가 그대로 전해져서 더욱 경계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는군요.”

“유럽의 평가라...”

유럽에서 북미왕국의 평가는 실제 국력보다 몇 배는 고평가 받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청나라로서도 북미왕국을 얕볼 수 없다는 이야기에 정성국이 피식 웃고 있을 때 조용한 곰이 덧붙여 말했다.

“아. 그리고 아이누 섬에서 직접 만주를 공격할 수도 있다 보니 청나라 귀족들이 이를 우려하고 있답니다.”

“음? 아. 탐사대를 보내면 만주를 공격할 수 있기는 하군. 뭐 그럴 생각은 없지만...”

일단 아이누 섬과 동만주는 무척 가까웠기에 배를 이용해 직접 동만주로 상륙해도 되고 겨울이 되면 동만주와 아이누 섬 사이의 해협이 얼어붙어 육로로 만주를 공격할 수도 있었다.

다만 만주를 공격하겠다고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가 봐야 보급만 힘들었고, 직접 청나라를 위협하려면 3함대를 움직여 천진이나 해안가를 공격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었기에 만주를 공격할 생각은 없었고.

“아무튼, 투로시노가 청나라 황제의 제의를 거절하자 청나라는 즉각 지금까지 해오던 모든 무역을 중단했습니다.”

그 말에 정성국은 살짝 표정을 찌푸렸다.

“쯧...예상보다 빠르게 무역이 단절되었으니 손해가 꽤 크겠는데?”

청나라와의 무역이 단절되리라는 것은 짐작했고, 이 때문에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다른 나라와 접촉할 계획이었는데 청나라가 한발 먼저 움직임으로써 다른 나라와 아직 접촉하지도 못했는데 무역이 단절되어 버렸기에 정성국이 혀를 차자 조용한 곰이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해서 투로시노는 3함대의 도움을 받아 급히 동녕국에 외무청 관리를 급파했답니다.”

하지만 정성국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동녕국은 섬나라라 건해삼, 건전복 등이 잘 팔리려나 모르겠군.”

“저희의 건해삼과 건전복은 품질이 월등하니 팔리긴 할거라는군요. 물론 저희가 생산하는 물량 전부를 감당하지는 못할 테지만요.”

“그건 그렇겠지.”

“그리고 원상의 도움을 받아 주나라에도 연락을 보냈답니다. 다만 주나라의 경우는 주나라가 항구를 언제 확보할 수 있을지 모르니 당분간은...”

“원상?”

주나라와 접촉하는 일에 원상이 도울 일이 뭐가 있나 싶어 정성국이 고개를 갸웃하자 조용한 곰이 답했다.

“정확히는 원상과 송상을 통해 주나라에 연락을 보낸 거죠.”

주나라에 제대로 된 항구가 없는 판국이라 동녕국처럼 북미왕국에서 직접 주나라에 외무청 관리를 보내긴 조금 어려웠다.

해서 간접적으로 주나라에 연락을 취하기로 했고, 송상은 주나라와 연줄이 있었기에 투로시노는 원상을 통해 송상과 접촉하고, 송상을 통해 주나라에 연락을 보내기로 했다는 설명에 정성국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송상은 어떻게든 우리의 연락을 주나라에 전하려고 애를 쓰겠군.”

“그렇습니다. 최근 주나라가 밀리고 있어 송상이 잔뜩 걱정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청나라의 출병 요구가 주나라 밀사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송상은 궁지에 몰린 만큼 어떻게든 북미왕국의 연락을 주나라로 전달할 거라는 이야기에 정성국은 다시 한번 피식 웃고 투로시노가 작성한 보고서를 내려놓고 런던에 나가 있는 북미왕국 대사가 작성한 보고서를 살폈다.

그리고 보고서 앞장을 넘기자마자 조약문으로 보이는 문서가 첨부되어 있었기에 정성국이 중얼거렸다.

“이건...”

“런던에 나가 있는 북미왕국 대사가 러시아 차르국 외교관과 협상 끝에 서명한 조약문입니다.”

정성국은 곧바로 조약문을 살펴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50만 루블? 푸하하. 총알값으로 엄청나게 뜯어낸 셈인데?”

물론 러시아 차르국을 견제하기 위해 연합에 투자한 비용을 생각하면 아직 손해이긴 했다.

다만 연합이 결성되며 새로운 시장이 열린 셈이고 연합에서도 금을 캐기 시작하면서 점차 교역 규모가 커지고 있었고 시간이 흐르면 연합에 투자한 비용을 모두 회수할 수 있었기에 크게 상관은 없었는데 은 14톤을 배상금으로 챙겨왔으니 공돈이 생긴 것 같아 정성국이 기뻐하자 조용한 곰이 웃으며 덧붙였다.

“그렇지요. 더불어 교역권도 얻었기에 러시아 차르국과의 교역으로 꽤 이득을 볼 수도 있을 것 같고요.”

“흐음...러시아 차르국도 제대로 된 항구가 없어서 대규모 교역은 어려울 것 같기는 한데...뭐 나중을 생각해보면 나쁠 것은 없겠지. 그보다 이 조약문에 서명한 것을 보면 러시아 차르국도 이르쿠츠크 요새가 함락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한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그 때문에 부랴부랴 저희가 요구한 것이 모두 들어간 조약문에 서명한 거지요. 그리고 조약문에 의례적으로 적힌 양국은 우호적이고 발전적 관계를 위해 항상 노력한다는 문구를 빌미로 더는 연합에 무기를 제공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답니다.”

이에 정성국은 묘한 표정으로 조용한 곰을 바라보았다.

“이미 연합에 무기는 다 제공했잖아?”

그러자 조용한 곰도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최근 머스킷을 넘겨줌으로써 시베리아 지역에 풀려고 했던 머스킷 2만 자루는 모두 넘겨줬지요. 그러니 러시아 차르국엔 긍정적인 대답을 해줘도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큭큭큭.”

정성국이 웃음을 참고 있을 때 조용한 곰이 보고서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러시아 차르국에서는 연합과의 협상에서 아국이 중재해주기를 원하고 있답니다.”

이에 정성국은 보고서에 첨부한 조약문을 넘겨 북미왕국 대사가 작성한 보고서를 모두 읽고 조금은 고민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중재라...”

아마 북미왕국이 중재에 나선다면 연합도 이를 받아들일 것이 분명했다.

일단 북미왕국이 이런저런 명목으로 지원해주는 것이 꽤 되는 만큼.

다만 이미 연합이 이르쿠츠크 요새를 점령한 후 서쪽으로 진군했기에 정성국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연합이 이르쿠츠크 요새를 점령한 것으로 만족했다면야 즉각 중재에 나서 이르쿠츠크 요새를 기준으로 영토를 나누어 양국의 전쟁을 끝내면 그만인데 연합이 서쪽으로 진군했으니 혹시 중재를 미루면 연합이 계속 서쪽으로 진격해 러시아 차르국의 세력을 우랄 산맥 서쪽으로 몰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러시아 차르국의 성장에는 우랄 산맥 동쪽의 서시베리아 자원이 꽤 많은 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정성국이었고, 인구가 적은 연합의 미래를 생각하면 최대한 러시아 차르국의 성장을 막는 것이 최선이었었기에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직은 러시아 차르국이 우랄 산맥 동쪽으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아 우랄 산맥을 넘은 지 100년이 더 되었음에도 우랄 산맥 동쪽에는 인구도 많지 않고 큰 도시도 몇 개 없었으며 러시아 차르국은 당장 우크라이나 지역을 신경 쓰느라 동쪽에 신경을 분산할 여력이 없으니 지금이 러시아 차르국을 우랄 산맥 서쪽으로 몰아낼 마지막 기회인 것 같기도 했고.

해서 정성국이 한참을 고심하고 있을 때 조용한 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이 정도에서 러시아 차르국과 연합을 중재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예. 물론 연합의 구조는 저희와는 다르기에 영역이 넓어진다고 통치에 지장이 생길 것 같지야 않습니다만...거리가 너무 멀어 보급이나 교역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솔직히 지금도 이르쿠츠크 요새까지 보급하기도 쉽지 않다고 국영 상단에서 하소연 중이지 않습니까.”

그나마 수로로 연결되어 있으면 상관없는데 레나 강의 상류까지 거슬러 올라온 뒤 물자를 모두 하역해 육로로 200km가량 수송해야 이르쿠츠크 요새에 도착할 수 있었기에 아무래도 보급이 번거로웠다.

이르쿠츠크 요새까지의 물자 보급도 그런데 여기서 우랄 산맥까지 연합이 진출하면 수로와 육로를 번갈아가면서 이동해야 하는 터라 보급 문제에 더욱 골머리를 앓아야 하는 만큼 정성국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끙...그건 그렇지. 알겠네. 그럼 연합에 외무청 관리를 보내 러시아 차르국에서 협상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게. 우리도 이에 긍정적이라는 것도 알리고.”

“알겠습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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