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화
개발청장이 조선철도공사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확인 후 정성국의 집무실을 방문해 조선의 철도 부설 공사에 관해 보고하자 정성국은 이를 듣고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철도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정성국이 왜 저러한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한 개발청장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저도 최근 이런저런 일로 조선이 뒤숭숭해서 공사에 차질이 생기지 않을까 우려했는데...오히려 북방에서 긴장감이 조성되면서 조선 조정에서는 이 철도 부설 공사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터라 공사는 큰 문제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물론 공사가 시작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조선 조정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해준 덕분에 생각보다 많은 일꾼을 고용할 수 있었고, 여기에 북미왕국에서 보낸 각종 건설 장비가 합쳐져 빠르게 기초 공사를 하며 철도를 부설하고 있고, 동시에 수많은 강에서 교량을 건설 중이라 예정대로 3년 안에 철도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는 개발청장의 설명에 정성국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조선 조정에서 전폭적으로 철도 부설 공사를 지원한다? 지금 조선이 그럴 상황이 아닐 텐데?”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의외로 조선 조정의 분위기는 꽤 차분한 편이랍니다.”
“허어. 그래?”
물론 지금 조선의 왕인 이연은 꽤 온화하고 현명한 왕이고 조정을 장악한 개화파 역시 현실도 모르고 입으로만 떠들어대는 인사들이 아니라는 것은 정성국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호란이 끝난 지 채 반백 년이 되지 않았기에 아직 조정 신료들 가운데는 호란을 경험한 인물들도 없지는 않았고, 그런 만큼 우왕좌왕하거나 불안해하면서 청나라의 침공을 대비하는 일에만 몰두할 거라고 여겼는데 개발청장의 보고는 정성국의 예상과는 달랐기에 흥미를 보이자 개발청장은 조선에 파견된 여러 개발청 관리들이 보낸 보고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정성국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예. 처음에 청나라의 요구를 알게 된 조선의 조정 대신들은 서로 의견이 엇갈리며 무척 혼란스러운 분위기였다고 합니다만...조선의 이조판서가 포로나이를 방문해 투로시노의 약조를 받아낸 후로는 상황이 조금 바뀌었답니다.”
이연은 청나라의 출병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하들과 요구를 거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하들 사이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할아버지였던 인조가 청나라에 저항했다가 치욕을 당한 것을 생각하면 청나라의 출병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감자와 고구마가 조선 전역에 퍼져 기상 이변이 발생해도 백성들이 굶지 않고 배불리 먹을 수 있어 일부 양반들은 태평성대를 논할 정도로 조선의 사정은 나아졌으며 적게나마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믿음직한 병사들이 있었고, 우호적인 북미왕국까지 있으니 이 기회에 청나라의 요구를 거절하고 아버지였던 효종의 숙원인 북벌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대관계를 청산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다만 북미왕국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는데 물론 북미왕국이 조선이 힘들었을 당시 흔쾌히 도운 것은 무척 고맙게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그저 식량을 지원하는 것과 전쟁이 발생했을 때 지원병을 파견하는 것은 전혀 달랐고 북미왕국을 믿고 청나라의 요구를 거절했는데 북미왕국에서 발을 빼버리면 할아버지가 당했던 치욕을 다시 자신이 겪을 수도 있다는 것이 영 마음에 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때 한참 침묵하고 있던 유철이 이연을 알현해 자신이 직접 포로나이를 방문해 북미왕국의 확답을 받아오겠다고 이야기하자 이연은 기꺼이 이를 수락했고.
유철이 만약 전쟁이 벌어지면 북미왕국은 즉각 조선을 도울 것이라는 확답을 받아오자 청나라의 요구를 거부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더불어 유철이 투로시노를 만나 나누었던 이야기를 알리자 조정 신료 대다수도 청나라의 요구를 거절하자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는데 어차피 조정의 다수는 개화파였고 개화파는 기본적으로 반청이었으며, 조선을 개혁하고 힘을 키워 언젠가는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이야기했던 만큼, 비록 청나라에 비견될 정도로 조선을 발전시키지는 못했지만, 청나라는 아직 내부가 정리되지 않았고 북미왕국이 돕겠다고 약속한 만큼 이 기회에 조선이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우뚝 서야 한다고 여겼고.
해서 이연부터 조정 대신들은 한마음으로 청나라의 침공에 대비해나가기 시작했고 개발청장이 이를 자세히 설명하려 하자 정성국이 입을 열었다.
“아. 그건 군사청장에게 들었네. 청나라의 요구를 거절하기로 마음먹고 전쟁에 대비해 어영청을 개혁하고 다른 군영도 재정비 중이며 북쪽의 산성들도 다시 정비하느라 정신없다고. 해서 다른 곳엔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고 당연히 철도 부설 공사도 차질이 생기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그렇기에 철도 부설 공사에 더욱 신경을 쓰는 모양새입니다.”
“음?”
정성국은 개발청장의 말에 이게 무슨 소린가 싶은 표정을 지었다가 전생에서도 일제가 러일전쟁에 활용하기 위해 경부선과 경의선의 완공을 서둘렀다는 것을 떠올리고 설마 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이번 전쟁에서 철도를 이용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하하하. 아무리 조선에서 최대한 지원을 해준다고 해도 그렇게 단기간에 철도를 부설하는 것이 어디 가능하겠습니까. 물론 조선 조정에서는 더 많은 인원을 고용해 최대한 빠르게 철도를 부설할 수 없는 거냐고 묻기야 했습니다만...아무리 많은 인부를 고용하더라도 극단적으로 시간을 단축할 수는 없다는 기술자들의 설명에는 결국 수긍했고요.”
조선도 전생의 일제처럼 어떻게든 전쟁에서 철도의 도움을 받아 보려 했지만, 불가능하다는 북미왕국 기술자들의 대답에 결국 포기했다는 개발청장의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왜?”
이에 개발청장은 묘한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조선은 전쟁 이후를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전쟁 이후?”
“예. 조선의 조정 대신들은 북미왕국이 도와준다면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한다 하더라도 충분히 이를 막아낼 수 있다고 확신하더군요.”
일단 북미왕국은 실전 경험이 풍부했다.
유럽의 강대국이라는 에스파냐와 프랑스와의 전쟁을 치렀고 승리까지 거두었으니.
거기에 북미왕국의 병사들은 신식 소총보다 좋다는 갑오 소총이나 장전 없이 여러 번 발사할 수 있는 회전 단총, 빠르게 재장전이 가능한 후장식 화포나 작열탄 등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 조정 대신들이 판단하기엔 아무리 대단한 청나라 기병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무기로 무장한 북미왕국의 병사들을 상대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보았고.
그런 북미왕국이 조선을 돕겠다고 약조한 이상 청나라의 침공을 막아내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았고 그 이후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청나라의 침공을 한번 막아낸다고 끝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개발청장의 말에 정성국은 강희제가 남방의 반란을 모두 진압한 후 주변의 위험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차근차근 주변 세력을 정복한 것을 떠올리고 말했다.
“화친을 맺더라도 청나라가 주나라를 완전히 토벌하게 되면 다시 조선을 침공할 수도 있다는 거지?”
“예. 그러니 신속하게 북방으로 지원 병력과 각종 물자를 올려보낼 수 있는 철도가 절실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인지 조선 조정에서는 철도 부설 공사에 각별히 신경 쓰고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고 있습니다.”
“뭐 의외긴 한데 나쁘진 않네. 난 철도 부설이 꽤 지체될 거로 생각했는데.”
일단 철도를 부설하는데 3년을 예상했지만, 청나라와의 전쟁이 벌어지면 당연히 일정이 밀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럴 것 같지는 않아 보여 정성국이 다행이라는 표정을 짓자 개발청장이 조금 근심 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요. 헌데 전하.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하는 것은 기정사실처럼 보이던데...조선에 파견된 우리 북미왕국의 백성들과 장비들을 위해 병력을 파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조선의 병력이 압록강에서 청나라군과 대치하며 청나라군의 남하를 완전히 틀어막으면 모를까 그렇지 못한다면 개발청장의 말처럼 조선에 파견된 개발청 관리와 기술자들, 그리고 건설 장비를 다루기 위해 파견된 수많은 북미왕국인들의 안전이 위협받을 수도 있었다.
특히 청나라군은 병자호란 때처럼 최대한 빠르게 한양을 공격하기 위해 최단거리로 남하하려들 텐데 이 경로와 철도 노선이 겹칠 확률이 높았으니.
“흐음...그 부분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 다른 구간은 몰라도 평양-의주 구간은 확실히 위험하겠어. 평양-한양 구간도 그렇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청나라 기병은 빠르게 움직일 테니 미리 병력을 파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이 문제는 조선과 논의한 후에 결정하도록 하겠네.”
“알겠습니다. 전하.”
* * *
“왔나? 앉게.”
정성국은 자신의 집무실을 방문한 군사청장과 조용한 곰에게 개발청장이 걱정한 부분을 이야기했고, 이를 듣고 군사청장이 신음을 흘렸다.
“으음...확실히 그게 문제군요. 조선군이 국경에서 청나라군을 막아 주면 상관없는데 그게 아니면...”
“그래. 특히 이전 호란의 경우 조선은 청나라군의 남하를 막지 못했잖나. 물론 이전과는 상황이 조금 다르긴 할 텐데...”
최소한 훈련도감과 어영청은 북미왕국의 교범을 따라 철저히 훈련시키고 있었기에 잘만 하면 북방에서 청나라군의 남하를 막을 수도 있어 보이긴 했다.
그리고 북미왕국에서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조선은 만약을 위해 훈련도감을 틀어쥐고 있기보다는 가을 정도에 북방으로 올려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더더욱.
다만 아무리 훈련을 철저히 했더라도 실전은 또 달랐고, 여러 변수가 있을뿐더러 조선군의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기에 만약을 대비하는 차원에서 미리 병력을 파견하는 것도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한 군사청장이었다.
더불어 조용한 곰도 병력을 미리 파견하면 조선의 피해를 더 줄일 수 있을뿐더러 조선 조정을 안심시킬 수 있었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허면 조선에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개발청장에게 듣자 하니 처음엔 건설 장비를 보기 위해 많은 조선인이 철도 부설 공사 현장에 모여든 탓에 공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들었네. 그나마 지금은 관에서 구경꾼들을 어느 정도 막아 주어 공사에 크게 지장은 없지만, 소문이 퍼지면서 건설 장비를 구경하려는 조선인들이 전국 팔도에서 몰려들어 꽤 곤욕을 치르고 있다 하니...이를 빌미로 통제 인원을 파견하겠다고 하면 모양새도 괜찮겠지.”
“아. 그럼 아예 시베리아에 배치된 아이누 탐사대처럼 조선철도공사에서 용병을 고용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것도 괜찮겠지. 일단 용병의 신분으로 조선에 파견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편제를 바꾸면 그만이니.”
“헌데 얼마나 파견하실 생각이신지...”
조용한 곰의 질문에 정성국은 막상 전쟁이 벌어졌을 때 수송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많은 인원을 보내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못해도 절반에 가까운 5천 명가량은 보내고 싶은데?”
생각보다 많은 병력이었지만, 현 조선의 상황이 상황이고 평양 북쪽에 배치한다고 하면 조선도 크게 부담스러워할 것 같지는 않다고 판단한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그리고 군사청장.”
“말씀하시지요.”
“외무청에서 조선의 허락을 받으면 병력을 수송하면서 최대한 많은 장비를 보내두게.”
이에 군사청장은 씩 웃으며 답했다.
“물론입니다. 이동형 60mm 화포 80문과 포탄, 총알, 방한 장비, 식량을 비롯한 각종 물자를 미리 보내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리하도록 하게. 아. 그리고 총알이나 방한 장비, 식량 등은 우리가 사용할 것뿐만이 아니라 조선군이 사용할 것도 계산해 충분히 보내도록 하게.”
함께 싸우는데 물자 보급에서 차별을 받는 것도 좀 그랬고 전생에서도 미군의 장비나 보급을 부러워하는 한국군을 떠올린 정성국이 덧붙이자 군사청장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