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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512화 (512/850)

512화

런던에 머물며 런던에 상주하는 북미왕국 대사와 협상을 진행하던 러시아 차르국의 외교관 예브게니는 본국에서의 독촉과 시베리아의 상황을 전해 받고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본국에서는 시베리아 부족 연합을 북미왕국의 괴뢰국이나 속국 정도로 여기고 있어 북미왕국과 협상을 끝내면 연합의 움직임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여겼지만, 그동안 북미왕국 대사와 협상을 진행하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어본 결과 그렇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실제로는 연합이 북미왕국의 괴뢰국이나 속국이라고 해도 북미왕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동등한 동맹국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상 북미왕국과 협상을 끝낸다고 연합의 확장이 멈출 것 같지 않았기에.

다만 미개한 시베리아 원주민들이 용맹하기로 소문난 코사크인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빠르게 남하해 이르쿠츠크 요새까지 함락시킨 것은 분명 북미왕국의 지원 때문인 것은 확실해 보였기에 일단 북미왕국이 요구하는 조건을 모두 수락하는 선에서 협상을 마무리한다면 북미왕국에서도 연합에 지원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까 싶었다.

아무르 강에서의 일로 지금까지 협상한 결과 북미왕국은 크게 4가지를 요구하고 있었는데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금, 북미왕국을 공격한 알바진 요새 사령관의 처벌과 함께 북미왕국은 배상금의 액수가 못마땅하다는 것을 빌미로 러시아 차르국과의 교역과 자국의 상인들이 러시아 차르국에서 자유롭게 상행위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러시아 차르국은 외국 상인들의 권리를 제한하는 무역법이 존재했고, 이 무역법에 따라 외국 상인들은 러시아 차르국 내에서는 상행위가 불가능해 국경 지대에서 러시아 차르국의 상인들에게 대량으로 물건을 넘겨야만 했는데 당연히 러시아 차르국 상인들은 물건값을 제대로 쳐주지 않았고, 헐값에 이를 매입해 자국 내에 팔면서 이득을 챙겼으니 북미왕국은 러시아 차르국과 교역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된 이상 직접 러시아 차르국 내에 상인들을 파견하진 못하더라도 이러한 권리를 얻어두어 러시아 차르국의 상인들을 압박할 필요가 있다고 여긴 것이다.

해서 이를 요구하고 있었고 본국의 명령처럼 북미왕국이 요구하는 조건을 모두 수락하게 되면 북미왕국은 러시아 차르국 내에서 자유롭게 상행위를 할 수 있는 권리까지 얻게 되는 만큼 연합의 확장은 곧 러시아 차르국의 영토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은 이번 협상으로 얻게 되는 북미왕국의 이득을 줄이게 되는 셈이었으니 북미왕국에서 연합의 확장을 제지하거나 최소한 지금처럼 연합에 지원하는 것은 멈추리라 믿었다.

그리고 이르쿠츠크 요새가 함락되어 이르쿠츠크 요새를 기준으로 동쪽 지역은 모두 잃은 셈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알바진 요새 사령관의 처벌은 이미 러시아 차르국의 손을 떠난 문제였으니 더는 협상에 걸림돌이 될 요소도 없었고.

해서 예브게니는 본국에서 전해진 편지를 품 안에 넣은 후 자리에서 일어나 런던에 있는 북미왕국의 대사관을 방문했고.

대사관의 집무실에서 북미신문을 읽고 있던 북미왕국 대사는 갑자기 러시아 차르국의 외교관이 방문했다는 이야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하면서 예브게니를 불러들였고.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북미왕국 대사가 집무실을 들어오는 예브게니에게 자리를 권한 후 커피를 건네면서 갑작스레 방문한 용건을 묻자 예브게니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협상한 내용들을 계속해서 본국에 보내고 있었는데 이번에 본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저처럼 경험 많은 외교관이 부족한 터라 빠르게 협상을 마무리하고 다른 업무를 맡으라고요. 그리고 분명 아무르 강에서 북미왕국의 배를 선제공격한 것은 사실이니 북미왕국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으로 협상을 마무리 지으라고 말입니다.”

그 말에 북미왕국 대사는 드디어 러시아 차르국에서 이르쿠츠크 요새가 항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의 귓가에 다시 예브게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서 이전에 협상하며 북미왕국이 요구했던 조건을 모두 수락하는 것으로 그동안의 협상을 마무리했으면 합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치 항복을 선언하는 모양새로 이야기하는 예브게니를 보고 북미왕국 대사는 알바진 요새 사령관의 처벌은 러시아 차르국의 손을 떠난 만큼 이를 빌미로 몇 가지 이권을 더 챙겨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흑룡강에서의 일로 북미왕국이 피해를 본 것은 없었고 고작 총알 수백 발을 사용한 대가로 50만 루블의 배상금과 러시아 차르국 내에서 자유롭게 상행위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은 만큼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알겠습니다. 허면 바로 조약문을 작성하도록 하지요.”

둘은 즉각 그동안의 협상 내용을 문서에 옮기며 조약문을 작성하기 시작했고 조약문의 문구를 몇 차례 수정한 끝에 완성된 2부의 조약문에 서명함으로써 협상을 마무리 지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던 협상이 순식간에 마무리되자 조금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예브게니는 북미왕국 대사가 잉크가 모두 마른 조약문을 조심스럽게 챙기는 모습을 보고 정신을 차린 후 입을 열었다.

“이것으로 양국 사이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은 모두 청산한 셈이지요?”

“그렇습니다. 이렇게 조약에 서명한 이상 흑룡강에서 있었던 북미왕국과 러시아 차르국 간의 충돌은 해결되었으니 이 문제를 거론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물론 조약에 따라 귀국은 배상금을 즉각 지불해야 합니다만...”

“아. 그건 걱정하지 마시지요. 이미 본국에서 배상금을 보내주었고, 이는 배에 보관되어 있으니 곧바로 넘기겠습니다.”

러시아 차르국은 런던에 나가 있는 예브게니에게 빠르게 협상을 마무리하라는 재촉과 함께 북미왕국에서 배상금으로 원하는 50만 루블에 해당하는 은 14톤을 함께 보냈기에 예브게니가 자신 있게 대답하자 북미왕국 대사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외무청 관리와 주재 무관을 불러 배상금을 받아오라고 지시했고.

커피를 마시며 이를 지켜보던 예브게니는 외무청 관리와 주재 무관이 집무실에서 물러나자 곧바로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북미왕국 대사에게 말했다.

“그리고...아무르 강에서의 일이 모두 청산된 만큼 북미왕국은 조약에 따라 아국에 대한 적대 행위를 그만둬주시길 바랍니다.”

그 말에 막 자리에 앉아 커피잔을 들어 올리던 북미왕국 대사는 짐짓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적대 행위라...아국이 딱히 귀국에 적대 행위를 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만...”

그런 북미왕국 대사의 능청에 예브게니는 인상을 찌푸리며 살짝 목소리를 높였다.

“시베리아 부족 연합 말입니다. 북미왕국에서 시베리아의 원주민들에게 화약 무기를 제공해 반란을 부추긴 덕분에 아국의 상황이 무척 곤란하단 말입니다.”

그 말에 북미왕국 대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너무 비약이라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허허허. 저희가 반란을 부추기다니요. 저흰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저 카무이 반도의 상인들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북쪽의 원주민들과 접촉했고 원주민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팔았을 뿐이지요.”

“원주민들이 화약 무기로 무장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몰랐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동안 여러 번 대화를 나누었기에 북미왕국 대사가 이를 인정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긴 했지만, 계속 저렇게 능청 떠는 모습에 내심 열이 받은 예브게니가 추궁하자 북미왕국 대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시베리아의 원주민들은 대부분 수렵이나 목축에 종사하는 만큼, 사냥과 해수의 위협을 물리치기 위해 더 좋은 무기가 필요해 화약 무기를 원했고, 북미왕국의 상인들은 그저 원주민들이 필요로 한 물품을 구해 건네주었을 뿐입니다. 뭐 화약 무기를 판매해 더 많은 모피를 얻을 생각도 없진 않았을 테고요.”

그 말에 예브게니는 눈을 빛내며 기회라는 표정으로 즉각 입을 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카무이 반도 북쪽은 명백히 아국의 영토였습니다. 즉 북미왕국 상인들은 무단으로 아국의 영토에 침범한 셈입니다. 그뿐입니까? 저희의 허락 없이 원주민들과 거래를 한 셈이니 아국의 무역법을 어긴 셈이지요.”

“그건...”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는 예브게니를 보고 북미왕국 대사가 무어라 반박하려 할 때 예브게니는 괜히 북미왕국 대사가 입을 열어봐야 그럴듯한 변명만 가득할 것 같아 모른척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 결과 시베리아 원주민들이 화약 무기로 무장하고 대규모로 봉기했으니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봉기에 북미왕국과 관계없다는 대사의 말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또한, 귀국은 시베리아 원주민들이 봉기해 시베리아 부족 연합을 결성하자마자 동맹을 맺고 최신 무기를 넘겨주지 않았습니까. 특히 연합은 아국과 적대 관계였는데 북미왕국은 연합과 동맹을 맺고 무기를 지원해주었으니 저희로선 북미왕국이 아국에 적대 행위를 한다고밖에 볼 수 없지 않겠습니까?”

예브게니의 말이 끝나자 북미왕국 대사는 조금 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일단 시베리아 지역이 귀국의 영토라는 주장에 대해 반박하고 싶습니다만 그러자면 이야기가 길어지고 어차피 시베리아의 원주민 부족들이 독립해 연합을 결성한 이상 시베리아는 연합의 땅이니 이에 대해 논의해봐야 영양가가 없을 것 같으니 일단 넘어가고...무기 지원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아국은 연합과 동맹을 맺었고 동맹국으로 연합의 무기 구매 요청을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헌데 이걸 귀국에서 적대 행위로 여기며 항의하는 것은 조금...”

이에 예브게니는 아직 탁자 위에 남아있는 한 부의 조약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조약문의 문구처럼 북미왕국이 정말 아국과 우호적이고 발전적인 관계를 위해 노력할 생각이라면 최소한 아국의 적국인 연합에 무기를 판매하는 일은 그만둬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만 되면 연합이 섣불리 아국을 공격하지는 못할 테니까요.”

조약문에 의례적으로 들어간 문구를 빌미로 이렇게 이야기하는 예브게니를 보고 북미왕국 대사는 난처한 미소를 짓자 예브게니가 덧붙였다.

“그리고 북미왕국도 연합이 확장하면서 아국의 영역이 줄어든다면 이번 조약으로 북미왕국이 확보한 권리의 가치가 줄어들잖습니까. 그러니...”

어차피 연합은 제대로 교역할 상대가 북미왕국뿐이었기에 연합의 땅이 넓어진다고 북미왕국이 손해를 보진 않았다.

시베리아의 땅이 러시아 차르국의 땅이든 연합의 땅이든 상인들이 물품을 팔 수 있었으니.

하지만 예브게니의 말처럼 이미 조약을 맺어놓고 뒤에서 러시아 차르국의 적국에 무기를 넘기는 것도 도의적으로는 맞지 않았기에 일단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일단 본국에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말입니까?”

예브게니가 무척 반색하자 북미왕국 대사는 혹시나 해 급히 덧붙였다.

“아. 다만 연합에 화약 무기를 추가로 판매하진 않더라도 화약의 경우는 계속해서 공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면 화약 무기를 전혀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데 그럴 수야 없는 노릇이니까요.”

“으음...그 부분은 이해하겠습니다만...”

화약 무기는 화약이 없다면 고철에 불과한 만큼 그 부분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한 예브게니였지만 내심 아쉽긴 했기에 이를 표정에 드러내었고, 그런 예브게니의 얼굴을 본 북미왕국 대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 연합에 이미 넘어간 무기가 꽤 됩니다. 특히 연합과는 동맹을 맺은 만큼, 그리고 본국에서는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처지에 공감하고 무척 안타까워했기에 후장식 화포나 작열탄 같은 무기도 넘긴 것으로 알고요.”

“끙..”

북미왕국의 신식 소총이나 후장식 화포, 작열탄 등은 유럽 내에 잘 알려진 만큼, 그리고 연합이 그런 북미왕국의 무기로 무장한 이상 북미왕국에서 추가로 무기를 제공하지 않는 정도로 과연 연합의 확장을 막을 수 있을까 싶어 예브게니는 앓는 소리를 냈다.

이에 북미왕국 대사는 커피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그런 예브게니를 보고 슬쩍 말했다.

“그러니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귀국이 연합을 인정하고 연합과 화친을 맺는 것이 나을 듯싶습니다. 물론 연합은 귀국에 대한 원한이 없지는 않은 터라 쉽지야 않겠습니다만...”

그 말에 예브게니는 눈을 빛내며 북미왕국 대사를 바라보았다.

“귀국에서 나서 주시면 안 됩니까?”

“예?”

“아. 북미왕국이 연합과 동등한 동맹 관계라는 것은 압니다만 북미왕국이 연합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는 것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북미왕국에서 나서서 아국과 연합의 평화협정을 중재해주셨으면 합니다.”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던 북미왕국 대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흐음...그건 확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만...일단 그 내용도 본국에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으음...알겠습니다.”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예브게니는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북미왕국 대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아국도 신식 소총을 구매할 수 있습니까?”

이미 유럽의 각국이 신식 소총 구매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이야 러시아 차르국에서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는 북미왕국과의 관계가 껄끄러워 언감생심 말도 꺼내지 못했지만, 이미 모든 일을 청산하기로 한 이상 괜찮지 않을까 싶어 예브게니가 조심스레 묻자 북미왕국 대사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워낙 많은 주문을 받아놔서...그 주문을 모두 해소하기 전까지는 아예 주문을 받지 말라는 훈령이 떨어졌습니다. 해서 덴마크를 비롯해 여러 국가의 구매 요구도 거절한 상황이고요.”

더불어 연합과 평화협정을 맺기 전까지 러시아 차르국은 일단 동맹인 연합과 적국인 만큼 당장 무기를 파는 것은 도의에 어긋난다고 덧붙이자 예브게니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끙...상황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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