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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511화 (511/850)

511화

투로시노는 환관의 안내를 받아 자금성 안을 걷는 동안 꽤 긴장해 있었다.

현재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관계는 빈말이라도 좋다고 말하긴 어려운 상황이었고 국영 상단을 통해 북미왕국이 곧 조선과 동맹을 맺을 수도 있다는 소문을 퍼트리자마자 청나라 예부에서 자신을 찾은 것을 생각해보면, 아마 청나라의 황제는 북미왕국과 조선의 관계를 제대로 확인하고자 자신을 부른 것이 뻔했으니까.

해서 어떻게 대답해야 최대한 매끄럽게 대답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이전에도 강희제를 만났던 그 후원이 보이자 투로시노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기 시작했고.

후원에서 경치를 살피고 있던 강희제에게 다가간 투로시노는 예를 취했다.

“황제 폐하.”

“아. 왔나? 꽤 오랜만에 보는군. 한 5년 만에 자네 얼굴을 보는 것 같은데?”

강희제가 몸을 돌려 투로시노를 보고 퍽 친근하게 타박하듯 말하자 투로시노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소신이 바빠 그동안은 자주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송구합니다.”

그런 투로시노의 반응에 강희제는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하. 괜찮네. 자네도 이 지역의 외교 관계를 총괄해야 하니 일이 많기야 하겠지.”

“소신의 사정을 헤아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그렇게 잠깐 인사를 나눈 강희제는 주변을 향해 손짓했고, 일부 어전 시위를 제외한 환관과 다른 시위들이 멀찍이 떨어지자 투로시노에게 말했다.

“그보다 내가 자네를 찾은 건 개인적으로 북미왕국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 부른 걸세.”

“예?”

강희제가 주변에 사람을 물리자 곧 본론으로 들어갈 것 같아 내심 긴장하고 있던 투로시노는 예상하지 못한 강희제의 말에 당황해 고개를 들어 강희제의 얼굴을 살피자 강희제가 그런 투로시노를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동안 자네들이 북방에 식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해준 덕분에 북방이 많이 안정되었거든.”

“아...”

그동안 북미왕국은 흑룡강을 이용해 북방에 있는 청나라 병영에 식량과 소금, 철 등 각종 물자를 충분히 공급했고, 러시아 차르국과 대치 중인 청나라군의 지휘관은 북경의 명령대로 이 물자를 이용해 주변 부족들과 거래하며 주변 부족들을 장악함으로써 흑룡강 이남의 상황을 안정시켰다.

그런 만큼 청나라의 북방을 안정시킨 것에는 분명 북미왕국의 지분도 없지 않았고.

다만 강희제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기에 투로시노가 잠깐 놀라고 있을 때 강희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특히 최근에 올라온 장계에 따르면 아라사인들의 기세가 확연히 줄어들었다더군. 이전처럼 흑룡강을 넘기는커녕 우리가 흑룡강을 넘어 자신들을 공격할까 전전긍긍한다고 하니...이게 다 자네들 덕분이지. 그 점 꽤 고맙게 생각하네.”

그 말에 정신을 차린 투로시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희야 그저 거래에 따라 식량을 운반했을 뿐이니까요. 북방이 안정된 것은 저희보다야 저 추운 북방에서 아라사의 병사들과 싸운 용맹한 청나라 병사들의 공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투로시노는 단순히 의례적으로 이렇게 대답했는데 그 말을 기다리기라고 한 듯 강희제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그저 거래일뿐이다라...그렇게 이야기해주니 한결 편하게 그다음 이야기를 할 수 있겠군.”

“예?”

다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 투로시노를 보고 강희제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북방이 안정된 이상 더는 자네들이 식량을 공급해주지 않아도 된다는 뜻일세.”

“허면 생사 교역 물량은...”

“그동안 자네들에게 생사 교역 물량을 대폭 늘려준 것은 자네가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일종의 거래였지. 그리고 거래가 끝났으니 당연히 생사 교역 물량도 대폭 줄어들어야 하지 않겠나?”

“으음...”

그제야 투로시노는 강희제가 북방의 일을 먼저 언급한 이유를 깨닫고 신음을 흘렸고, 강희제는 그런 투로시노를 보고 쐐기를 박아 넣겠다는 듯 덧붙였다.

“더불어 북미왕국에 민간 무역을 허락한 것 역시 북방에 물자를 공급한 보상 중 하나였으니 민간 무역도 대폭 축소될 테고.”

“그건...”

물론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하고 북미왕국이 조선의 편을 들면 교역은 중단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북미왕국에선 인지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대만의 동녕국이나 저 남쪽의 주나라와 접촉해 손해를 최대한 메꾸려 했던 북미왕국이었다.

하지만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하려면 압록강이 얼어붙은 겨울에나 가능한 만큼, 아직까진 시간이 있다고 보았는데 청나라에서 먼저 이 교역의 축소를 빌미로 북미왕국을 위협하려 할 줄은 몰랐기에 투로시노가 표정을 찌푸리고 있을 때 강희제가 그런 투로시노의 얼굴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다만 새로운 거래를 한다면 이를 유예시켜줄 수도 있네. 아니. 오히려 생사 교역 물량을 더 늘려주고 민간 무역의 활성화를 위해 항구도 개방해줄 수 있네.”

이에 투로시노는 속으로 생각했다.

‘채찍을 휘둘렀으니 이젠 당근을 내밀어 우리를 회유하겠다는 건가? 아니지. 이 경우는 채찍과 당근을 동시에 보여주고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를 묻는 것에 가까운가?’

투로시노는 방금의 대화에서 청나라가 정말 조선을 침공할 생각이라는 것과 청나라가 북미왕국을 내심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을 깨닫고 강희제가 자신을 부른 것은 북미왕국에 손을 내밀기 위함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일단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새로운 거래라고 하시면?”

“북방이 안정되며 한숨을 돌리나 싶었는데 동방에서 흉흉한 소리가 들려와서 말이네.”

“동방이라...”

자신이 동방을 거론하자 투로시노의 안색이 조금은 어두워지는 것을 본 강희제는 이를 못 본척하며 고개를 돌려 후원의 풍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아직 남방의 반란도 완전히 진압하지 못한 상황에서 최근 동방의 변경이 심상치 않다는 소리가 들려오니 참으로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네. 해서 동방의 변경을 안정시키기 위해 병력을 파견할 생각인데...자네들이 조금 도와주었으면 하네. 어떤가?”

대답을 요구하는 강희제를 보고 투로시노는 일단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잠시 시간을 끌 요량으로 질문했다.

“동방의 변경을 안정시키기 위해 병력을 파견한다면...만주에 병력을 파견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렇네. 정확히는 봉황성에 병력을 파견할 생각이지.”

“봉황성이라면...조선과의 국경이로군요.”

“호오. 아는 모양이군.”

봉황성은 요동에 있었던 고구려의 옛 성으로 한때는 오골성으로도 불렸으며, 현재는 조선에서 요동으로 들어가는 관문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 봉황성에 병력을 파견한다는 뜻은 조선에 국경에 파견한다는 뜻이고, 동방의 변경이 심상치 않다는 말을 하면서 조선의 국경에 병력을 파견하겠다는 뜻은 동방의 변경을 안정시키기 위해 조선을 침공하겠다는 말과 동일했기에 투로시노는 잔뜩 굳은 얼굴로 강희제를 바라보며 물었다.

“...조선과의 국경에 병력을 파견한다는 뜻은 조선을 침공하시겠다는 뜻입니까?”

“글쎄? 그건 조선의 결정에 달렸네.”

“조선의 결정이라고 하시면...”

이에 후원을 바라보던 강희제는 다시 투로시노를 바라보며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말했다.

“최근 조선이 저 남방의 역도들과 손을 잡았다는 소문이 파다하다네. 해서 정초의 조회에 참석한 조선의 사신들에게 조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 조선에서 1만 명의 총병을 출병시켜 역도들의 토벌에 한 손 보탠다면 조선의 결백을 믿겠다고 이야기했네. 그러니 조선이 정말 결백하다면 병력을 출병시킬 테고 그렇지 않고 소문대로 남방의 역도들과 손을 잡았다면 우리 대청의 요구를 거부하지 않겠나.”

“하오나 황제 폐하. 조선이 청나라의 요구를 거부한다고 꼭 남방의 역도들과 손을 잡았다고 단언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판단이 아니 올지요. 조선의 사정상 1만 명이나 되는 총병을 출병시키기가 쉽지는 않을 터인데...”

강희제는 투로시노의 조심스러운 반박에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북미왕국과 교역을 시작하면서 조선의 사정이 생각보다 많이 나아졌다는 것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기에.

“아. 물론 조금 무리한 요구일 수도 있겠지. 허나 아예 불가능한 요구도 아니지 않나. 그리고 조선이 우리 대청을 진정 상국으로 생각한다면,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그 정도 요구는 들어주겠지.”

“으음...”

생각보다 강경한 강희제의 반응에 투로시노가 신음을 흘리고 있을 때 강희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만 소문처럼 조선이 정말 다른 마음을 먹고 있다면 우리의 출병 요구를 거절할 테고 그러면 이전처럼 조선을 징치할 생각이네. 그러니 북방에서처럼 자네들이 우리를 도왔으면 하네만?”

어차피 청나라도 북미왕국이 조선과 밀접한 관계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을 텐데도 이렇게 이야기하자 투로시노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도우라고요? 조선을 침공하는데?”

한창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투로시노가 당황하자 강희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물론 북미왕국이 조선과 각별한 사이라는 것을 아니 직접 병력을 파견하라는 뜻은 아니네. 일단은 배를 이용해 북방에 식량을 보급한 것처럼 봉황성에 식량을 공급해주고 만약 조선과의 전쟁이 벌어지면 날짜에 맞춰서 정해진 곳에 식량을 가져오면 되네. 그렇게만 해주면 향후 10년간 생사 교역 물량을 더욱 늘리고 항구를 개방해주지. 어떤가.”

조건에 비하면 그 대가는 무척 후했다.

대만의 동녕국 때문에 해금령을 유지하고 있고 대외무역도 공식적으로는 허락하고 있지 않은 현 청나라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파격에 가까웠고.

이건 그만큼 청나라에서 북미왕국의 국력을 높이 평가한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여러 이권을 제시하며 북미왕국에 손을 내밀고, 조선과 잡았던 손을 놓고 이 손을 잡으라는 설득하는 셈이었으니.

하지만 이 제안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투로시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아국의 국왕 전하께서는 조선 출신이신 만큼,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투로시노의 거절에도 강희제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물론 북미왕국의 국왕이 조선 출신이라는 것은 아네. 하지만 이전에 자네 대신 연경을 방문해 예부의 관리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외무청 관리는 북미왕국의 건국에 조선인 일부가 관여했을 뿐이지 북미왕국은 엄연히 북미 대륙의 원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건국된 나라이지 조선의 유민들이 세운 나라가 아니고 그렇기에 조선과는 별개의 국가라고 이야기하던데?”

북미왕국의 국왕이 조선 출신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북미왕국이 조선의 속국이 아닌가 의심하는 나라들이 있었기에 북미왕국에서는 항상 저렇게 이야기해온 만큼 투로시노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투로시노가 무어라 이야기하려 할 때 강희제가 손을 들어 투로시노의 말을 막고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니 북미왕국의 국익을 위해서라면 내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나?”

정말 북미왕국이 조선의 속국이 아니라면, 이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느냐는 강희제의 말에 투로시노는 쓴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저었다.

물론 눈에 보이는 국익만 따지자면 강희제의 말처럼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맞긴 했다.

대청무역의 규모는 컸고, 추가로 항구를 개방한다면 그 규모는 더욱 커져 막대한 이득을 볼 수 있을 테니까.

다만 정성국이 조선을 생각하는 마음이 각별할뿐더러, 북미왕국의 백성 가운데 조선 출신이 5프로는 넘었고, 이들이 비록 조선을 떠나 북미왕국에 정착했고, 현재 북미왕국에서의 생활에 무척 만족하고 있기야 하지만 조선이 고향이라는 것과 조선을 그리워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헌데 청나라가 고향인 조선을 침공했는데 북미왕국이 청나라를 돕는다는 것이 알려지면 조선 출신의 백성들이 북미왕국을, 그리고 북미왕국 왕실을 어떻게 바라보겠는가.

특히나 이들은 주로 북미왕국의 수도인 새한성과 그 주변에 정착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수도의 민심이 흉흉해질 수밖에 없었고.

더불어 조선에 북미왕국이 널리 알려지면서 북미왕국으로 이주하려는 백성들이 줄지 않았고, 조선도 북미왕국에 받은 것이 많은 터라 이를 함부로 제재하지 못해 지금도 꾸준히 조선인이 유입되고 있었고, 이 조선인들 덕분에 북미왕국 서부가 조금씩 발전하고 있었으니 청나라가 어떤 이권을 제시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해서 투로시노는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그동안 조선에 투자한 돈이 한두 푼이 아닌지라 조선과의 관계를 버리는 것이 북미왕국의 국익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투로시노가 다시 한번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자 강희제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고 서늘한 표정으로 투로시노를 바라보았다.

“그 선택. 후회하지 않겠는가?”

“그렇습니다.”

투로시노가 고개를 끄덕이나 강희제는 고개를 까닥하며 말했다.

“흐음...알겠네. 허면 오늘부로 더는 북방에 식량을 공급할 필요 없네. 당연히 오늘부로 교역도 대폭 축소될 테고.”

“알겠습니다. 황제 폐하.”

“아. 더불어 북미왕국의 배들이 흑룡강을 항해하는 것도 금지하겠네.”

그 말을 끝으로 강희제는 용건이 끝났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고, 투로시노는 강희제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취한 후 뒷걸음질로 후원에서 나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청나라 황제는 마음을 굳힌 것 같으니...결국, 전쟁이로군. 빨리 본국에 보고서를 보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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