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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510화 (510/850)

510화

슬슬 날이 더워지기 시작해 정성국이 냉방 장치를 가동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조용한 곰이 집무실을 방문해 시베리아 부족 연합의 일을 보고했고, 정성국은 이를 듣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허. 시베리아 부족 연합이 다시 서쪽으로 향했다고?”

이전에 연합이 남하해 바이칼 호 인근의 이르쿠츠크 요새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좀 놀라긴 했다.

레나 요새에서 이르쿠츠크 요새까지의 거리를 생각해보면 단기간에 이르쿠츠크 요새까지 진격해 점령한 것은 놀랄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르쿠츠크 요새는 레나 강 상류에서 육지로 200km가량 떨어져 있는 터라 보급도 쉽지 않기에 각종 보급 물자가 이르쿠츠크 요새에 쌓이기 전까지 연합의 확장은 일단 멈출 것으로 판단했고.

헌데 이르쿠츠크 요새를 점령한 지 반년도 되지 않아 연합의 병력을 나누어 다시 서쪽으로 진군했다는 이야기에는 정성국도 기가 질릴 수밖에 없어 되묻자 조용한 곰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연합의 족장들은 러시아 차르국에서 시베리아 지역에 추가로 지원 병력을 보내기 전에 최대한 러시아 차르국 세력을 약화시키길 원했고...아이누 탐사대장도 그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아니. 보급은 어쩌고?”

“이르쿠츠크 요새가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함에 따라 총알이나 포탄, 화약 등은 넘쳐나니까요. 식량이야 거래를 통해 현지 주민들에게 어느 정도 구할 수 있고요.”

물론 현지에서 식량 가격이 싸지야 않겠지만, 최근 개발한 연합의 금광에서 꽤 많은 금이 나오고 있다는 보고를 접한 정성국은 확실히 보급 문제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겠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래도 이르쿠츠크 요새만 점령한 거지 동쪽으로는 거점들이 꽤 남아 있잖아? 근데 병력을 나누고 서쪽으로 진군했다고?”

“그 규모가 크지는 않으니까요. 그리고 러시아 차르국과의 보급로가 끊긴 이상...고사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도 하고요.”

“그렇긴 한데...”

조용한 곰의 설명에 정성국이 일단 수긍하면서도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조용한 곰이 덧붙였다.

“거기에 이르쿠츠크 요새 주둔군이 순순히 항복해서 요새를 이용해 방어할 수도 있고...부랴트 족이 연합에 합류함에 따라 이들도 한 손 보탤 테니 이르쿠츠크 요새를 지키는 데는 큰 문제 없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부랴트 족이라...”

“일부는 바이칼 호 인근에 정착해 농사를 짓고 살고 있긴 하지만...기본적으론 유목 민족이라 기마에 능숙하답니다. 해서 아이누 탐사대장의 보고로는 이르쿠츠크 요새를 공격하기 이동하는 러시아 차르국 병사들 정도는 부랴트 족 선에서 처리할 수도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이미 부랴트 족에도 머스킷을 일부 넘겼으니까요. 더불어 이들에게 마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신식 소총 정도만 쥐어주면...넓은 연합의 영역을 관리하는 것은 전혀 문제없어 보인답니다.”

부랴트인은 몽골 계열의 민족이었고, 몽골인들이 다 그렇듯 유목 민족에 가까워 기마나 활에 능숙해 전투력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부랴트인들이 코사크인들에게 패배한 것은 화약 무기의 유무 때문이라 부랴트인들도 머스킷으로 무장한 만큼, 충분히 제 몫을 해줄 것이라는 이야기와 차후 연합에 신식 소총을 넘겨줌으로써 이들을 탐사대처럼 이용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아이누 탐사대장의 보고에 정성국은 매끈한 턱을 매만지면서 중얼거렸다.

“뭐 기병의 기동력을 극대화하려면 머스킷보단 신식 소총이 낫긴 한데...”

원래 연합에 신식 소총을 넘기는 것은 최대한 미룰 생각이었다.

다만 동아시아의 상황이 바뀌었고 청나라도 유럽을 통해 북미왕국의 무기체계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고,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하는 순간 북미왕국의 무기가 얼마나 대단한지야 확실히 체감할 수 있을 것이 뻔한 만큼 연합에 신식 소총을 못 풀 이유가 없었다.

다만 정성국은 조금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었고, 이를 보고 조용한 곰이 정성국의 속내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여 전하께서는 이로 인해 연합의 확장이 가속화될 것을 우려하시는 겁니까?”

“아무래도 그렇지. 지금도 연합의 확장세가 대단한데 여기에 신식 소총까지 넘겨주면...”

고작 아이누 탐사대 일부와 화포를 지원해준 것만으로 연합의 영역이 미친 듯이 늘어나고 있는데 여기서 신식 소총을 대량으로 넘겨주면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연합이 주변 지역을 정복하지는 않을까 우려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정성국이 연합을 지원한 것은 러시아 차르국에 타격을 주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시베리아 지역에서 살아왔던 원주민들이 침략자인 러시아인들에게 핍박받는 상황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특히 러시아인들의 가혹한 통치와 그들이 가져온 각종 질병으로 인해 수많은 원주민이 죽어 나간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던 정성국은 시베리아 원주민들이 이러한 굴레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마음에 겸사겸사 그들을 지원한 것이고.

다행히 지금까지 연합은 러시아 차르국의 세력만 공격함으로써 시베리아 지역 내에서 정복자라고 불리기보다는 일종의 구원자나 해방자로 불리고 있었지만, 신식 소총으로 무장해 주변의 부족들보다 무력이 월등히 강해진다면 연합의 행동이 변할 수도 있기에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연합의 부족 대부분은 수렵 민족이나 유목 민족이라 묘하게 거친 면이 있기도 했고 타 부족을 힘으로 정복하는 것이 나쁜 일이라는 자각도 옅을 것이 분명했기에.

정성국은 이러한 고민을 슬쩍 조용한 곰에게 이야기하자 조용한 곰이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그 부분은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어차피 연합도 저희가 연합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이유가 러시아 차르국의 견제와 더불어 러시아 차르국의 압제에 고통받는 원주민 부족을 해방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으니까요.”

“흐음...”

“그리고 연합의 백성들이 이전과는 달리 여유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다 저희와의 교역 때문입니다. 그걸 연합의 족장들도 모르지 않는 만큼 연합은 저희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그런 만큼 연합이 주변 부족을 정복할 것을 굳이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연합이 남하해 이르쿠츠크 요새를 점령함으로써 중개 무역을 통해 더 많은 부를 쌓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상황이니만큼, 괜히 주변 부족을 정복해 약탈하기보다는 북미왕국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며 교역으로 막대한 이득을 챙기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연합의 족장들도 잘 알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조용한 곰이 덧붙이자 정성국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뭐 당장이야 신식 소총의 물량이 부족한 판국이라 어쩔 수 없지만, 상황이 나아지면 연합에도 신식 소총을 판매하도록 하지. 그보다 우리도 예상보다 빠른 연합의 확장에 놀랐으니...러시아 차르국은 무척 기겁하겠군.”

이에 조용한 곰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아무래도 그럴 겁니다. 지금 러시아 차르국의 사정상 시베리아 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파병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아마 이 소식을 듣게 되면 런던에 있는 북미왕국 대사에게 매달리지 않겠습니까.”

정성국도 외무청을 통해 유럽 내의 사정을 어느 정도 보고받았기에 현재 러시아 차르국이 우크라이나의 지배권을 두고 오스만 제국과 분쟁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조용한 곰의 말에 조금은 고민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흠...러시아 차르국을 견제하려면 오스만 제국과 접촉하는 것도 나빠 보이지는 않은데...”

“그렇긴 합니다. 물론 오스만 제국과 접촉한다면 다른 유럽 국가들이 썩 달가워하지 않을 공산이 크긴 합니다만...러시아 차르국의 견제와 유럽의 균형을 위해서라도 오스만 제국과 접촉해 신식 소총을 판매하는 것이 괜찮아 보입니다.”

“유럽의 균형이라...”

“일단 신성로마제국과도 신식 소총 판매 계약을 맺지 않았습니까. 당장은 프랑스와 전쟁 중이기야 합니다만 전통적으로 신성로마제국은 오스만 제국과 앙숙이니...”

오스만 제국은 15세기 동로마 제국의 심장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이후 계속해서 서쪽으로 진군해 발칸 반도를 점령하고 유럽의 정중앙이자 유럽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빈을 노렸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신성로마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사이는 무척 험악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사실을 모르지 않은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렇군. 프랑스와의 전쟁이 엄청나게 길어지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신성로마제국의 병력은 오히려 대오스만 전쟁에 투입될 가능성이 더 크겠어.”

“그렇습니다. 그리고 2만 자루의 신식 소총이라면 전황을 바꾸기엔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만큼, 그리고 에스파냐도 합스부르크의 일원인 만큼 에스파냐까지 가세한다면 오스만 제국은 크게 타격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러시아 차르국은 기뻐하며 더욱 남하하려 들겠지요.”

조용한 곰의 말처럼 신식 소총 2만 자루로 무장한 병력이라면 전황을 바꾸기엔 충분했다.

거기에 에스파냐에도 2만 자루의 신식 소총을 추가로 판매하기로 했고, 에스파냐 역시 일단은 합스부르크의 일원인 만큼, 그리고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가 썩 좋지 않은 만큼 신성로마제국을 지원할 수도 있었고.

그렇게 되면 오스만 제국은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병력을 감당하지 못할 테고 오스만 제국이 약세를 보이면 다른 국가들도 벌떼같이 달려들 것이 분명했으며, 그중에는 분명 러시아 차르국도 있을 것이 뻔했기에 정성국은 한숨을 내쉬었다.

“끙...그건 곤란하긴 한데...오스만 제국도 보통 호전적인 국가가 아니다 보니 신식 소총을 대량으로 넘기기가 조금...”

특히나 현 오스만 제국은 한창 중흥기를 맞아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고, 베네치아, 폴란드, 러시아 차르국과 연달아 전쟁을 치르며 영토를 확장하고 자신감을 얻은 오스만 제국은 옛 쉴레이만 1세가 점령하지 못했던 빈마저 이번에는 기필코 점령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헝가리의 개신교도들이 오스트리아에 저항해 반란을 일으키며 오스만 제국에게 오스트리아를 공격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 쉴레이만 1세도 점령하지 못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공격하는 것을 오스만 제국의 다른 수뇌부들은 꺼렸지만, 호전적인 군주인 메흐메트 4세는 이를 반겼다.

더불어 오스만 제국의 실권자인 카라 무스타파 파샤 역시 느슨해진 제국의 기강을 다잡고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반기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을 완전히 박살 내고 헝가리를 완전히 손에 넣어 서유럽에 진출하기 위해 빈을 목표로 전쟁을 벌이는데 이게 1683년에 있었던 일이고.

물론 북미왕국의 존재로 유럽의 역사도 조금은 바뀐 터라 어쩌면 이 침공이 더욱 빨라질 수도 있고, 혹은 신식 소총의 이야기를 듣고 침공을 재고할 수도 있었는데, 북미왕국에서 오스만 제국과 접촉해 신식 소총을 판매한다면, 호전적인 메흐메트 4세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테고, 북미왕국에서 원하는 것처럼 러시아 차르국을 견제하기보다는 서유럽에 진출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를 공격할 것은 뻔했기에 정성국이 한숨을 내쉬자 조용한 곰이 입을 열었다.

“예. 물론 그 점이 우려되기는 합니다만 유럽에 풀린 신식 소총을 고려하면 오스만 제국에도 판매하긴 해야 합니다.”

유럽에 풀릴 예정인 신식 소총이 11만 정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확실히 오스만 제국에도 판매해야 하긴 했지만, 오스만 제국이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너무 대량으로 넘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정성국이 잠깐 생각한 후에 입을 열었다.

“흠...일단 오스만 제국과 접촉은 해보게. 교역을 빌미로 접촉해서 상황을 보고 신식 소총을 일부 판매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전하. 그리고...”

“그리고?”

또 보고할 것이 남았느냐는 표정을 짓는 정성국을 보고 조용한 곰이 입을 열었다.

“투로시노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청나라 예부에서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접했다고 합니다.”

그 말에 정성국은 표정을 굳혔다.

“청나라 예부에서? 결국, 청나라 황제가 투로시노를 찾는단 소리 아닌가?”

이전에도 강희제는 청나라 예부를 통해 투로시노를 찾아 대화를 나누었던 만큼 정성국이 이를 언급하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지금 청나라 황제가 투로시노를 부르는 이유라면...”

“아마 조선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함이겠지요. 특히 국영 상단을 통해 저희 북미왕국과 조선이 동맹을 맺기로 했다는 소문을 퍼트리기도 했고요.”

그 말에 정성국은 한참을 고민했지만, 지금 고민해봐야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머리를 흔들고는 조용한 곰에게 말했다.

“흐음...알겠네. 북경을 방문한 투로시노가 이에 관련된 보고를 올리면 즉각 알려주게.”

“알겠습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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