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9화
‘타타타타탕!’
맨 앞 열의 병사들이 조총을 발사 후 무릎을 꿇자 그다음 열의 병사들이 조총을 들고 방아쇠를 당겼고.
‘타타타타탕!’
조총을 발사한 두 번째 열의 병사들마저 무릎을 꿇자 마지막으로 발사를 준비하던 병사들이 초관의 명령에 따라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타타탕!’
그렇게 3단 사격을 마친 조선의 병사들은 재빠르게 재장전을 시작했고 이렇게 병사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조정 대신들은 흡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허. 참으로 든든합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어영청 병사들이 저렇게 믿음직해 보인다니...”
“북미왕국에서 내어준 교범이 생각보다 대단한 모양입니다. 어영청의 병사들도 훈련도감 병사들에 못지않으니.”
절도 있는 동작으로 움직이는 병사들을 보고 공조판서가 입을 열자 병조판서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북미왕국의 훈련 방식이 효과적이기도 하겠지만...그보다는 어영청 병사들도 훈련도감 병사들처럼 직업군인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확실히...그 영향도 없지 않겠지요. 제대로 된 급료를 받을 수 있으니 용력에 자신 있는 장정들도 상당수 지원했고.”
어영청은 조선의 5군영 가운데 하나로 후금에 대응하기 위해 설치한 군영이었기에 북벌을 외치던 효종 시절에는 그 규모가 대폭 늘어나 2만 명이 넘는 대규모 군영이었다.
훈련도감과는 달리 어영청은 번상군 중심이었지만 이런 규모의 군영은 조선 정부에 막대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고, 특히 당시에는 왜란과 호란에 의해 조선의 재정이 고갈된 상황이었기에 그 부담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해서 효종이 죽은 후 어영청은 급속도로 규모가 줄어들었고, 훈련도감이 개편되면서부터는 아예 북미왕국처럼 상비군 위주로 운용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하에 다른 군영들도 규모를 축소하고 있었고.
조선의 조정 대신들은 훈련도감을 점진적으로 확대해 북미왕국의 군사청처럼 만들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다만 갑자기 청나라에서 출병을 요구하며 청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조금 빠르게 훈련도감의 규모를 늘려야겠다는 생각에 북미왕국에 신식 소총을 구매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현재 유럽의 각국이 신식 소총을 구매한 터라 당장은 어렵다는 이야기에 조정 대신들을 고민했고.
아무리 북미왕국에서 도와준다 한들 조선도 어느 정도 대비할 필요가 있었는데, 훈련도감 병사 5천 명만 믿기엔 불안했던 조정 대신들은 훈련도감을 키워 신식 소총과 조총으로 무장한 혼성 부대로 만드는 대신 어영청을 개혁해 번상군 중심의 어영청을 상비군으로 바꾸었고, 북미왕국의 교범과 훈련도감 병사들을 교관으로 삼아 어영청 병사들을 훈련시킨 결과 최소한 훈련 모습만 보자면 훈련도감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어영청 병사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비록 조총으로 무장한 상황이기는 했지만, 군기가 가득하고 기세가 남달라 다른 군영의 병사들과는 확연히 달랐기에 병조 참판이 흡족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
“저 어영청의 병사들을 보자면 다른 군영들도 개혁하는 것도 괜찮아 보입니다. 일단 개혁한 후 상황을 봐서 신식 소총으로 무장시킨 후 훈련도감과 통합하는 거죠.”
그 말에 일부 대신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호조참판이 학을 떼며 고개를 저었다.
“어휴. 이번에 어영청을 개혁하는 것만으로도 여유 자금을 상당수 털어 넣은 셈 아닙니까. 물론 북미왕국에 더 많은 차관을 요청하면 될 것 같기야 한데...”
“북미왕국에 너무 손을 벌리는 것도 조금은 그렇지요. 물론 상황이 급박하다면야 체면 차리는 것도 우습긴 합니다만...”
그때 호조판서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조금 불안하긴 합니다. 아무리 어영청 병사들이 잘 훈련받았다고는 하나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훈련도감 병사들의 사격 속도와 비교해보면 현저히 떨어지잖습니까. 그 말은 청나라 기병을 상대하긴 어렵다는 뜻인데...”
지금 눈앞에서 한창 사격 훈련 중인 어영청 병사들이 비록 군기가 남다르긴 했지만, 조총으로 무장한 탓에 사격 속도는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단점을 최대한 메우기 위해 어영청 병사들은 3열 사격, 지금은 다시 대열을 조정해 5열로 서서 사격하며 사격 간격을 최대한 좁히고는 있었지만,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훈련도감 병사들의 사격 모습과 비교하면 아무래도 불안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호조판서의 이야기에 다른 대신들이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다른 군영의 병사들보다야 믿음직하긴 한데 또 조총의 한계가 있으니...”
“어쩌겠습니까. 하필이면 유럽에 대전쟁이 벌어져서 신식 소총의 물량이 부족할 줄은...”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대량으로 도입하는 건데 그랬습니다.”
그런 조정 대신들을 보고 유철이 쓴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괜찮을 겁니다. 북미왕국에서도 지원 병력을 보내주겠다고 약조했으니까요.”
이에 호조판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북미왕국의 지원을 믿기는 합니다만...북미왕국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생각하면 조금...”
“으음...”
유철이 직접 포로나이를 방문해 투로시노에게 확답을 받아온 후로 조선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요구를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조선을 믿지 못하겠다며 지휘권조차 내어주지 않겠다는 이야기는 1만 명의 총병을 총알받이로 사용하겠다는 뜻과도 같았으니까.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이전의 치욕을 갚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고, 이전과는 달리 북미왕국의 도움이 있다면 충분히 해 볼만 하다고 판단한 탓이다.
다만 북미왕국의 요청대로 시간을 끌기 위해 단칼에 청나라의 요구를 거부하지 않고 어떻게든 협상을 질질 끌고 있었는데, 그러는 사이 청나라가 주나라와의 전쟁에서 계속해서 승리하고 있다는 소리가 들려오자 조정 대신들은 다시 불안해하기 시작했고.
그렇기에 호조판서의 불안에 동조하는 조정 대신들이 꽤 많아 보이자 유철이 목소리를 높였다.
“예. 저도 그 부분이 조금 걱정되기는 했습니다.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한다면 이전처럼 기동력을 최대한 활용해 단기간에 승부를 보려 할 텐데 북미왕국에서 이곳까지 거리가 먼 편이라 침공 소식이 알려지고 북미왕국에서 지원 병력을 파견한다 해도 조선에 도착하는 데만 한 세월이 걸리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해서 포로나이를 떠나기 전 사석에서 투로시노에게 이런 말을 하자 투로시노가 그러더군요. 딱 10일 만 버티라고.”
그 말에 조정 대신들은 눈을 번쩍 뜨며 유철을 바라보았다.
“예? 10일이요?”
“그렇게 빨리 지원군을 보내줄 수 있다는 겁니까?”
그때 병조판서가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아. 설마 북미왕국에서 조선으로 보낼 지원군을 포로나이에 배치하기로 약조한 겁니까?”
이에 유철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다만 아이누 섬 인근에 배치된 병력은 즉각 보내줄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 말에 반색하던 조정 대신들은 살짝 기운 빠지는 표정을 지었고, 병조판서가 약간 투덜거리듯 입을 열었다.
“으음...고마운 일이기는 한데 그래 봐야 지원 병력의 규모가...”
이에 유철은 의미심장한 미소로 조정 대신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략 1만 명정도 된답니다.”
당연히 북미왕국의 군사 배치는 기밀에 해당했기에, 조선의 조정 대신들은 아이누 섬을 비롯한 북미왕국의 영토에 배치된 병력이 얼마인지는 정확히 몰랐고 그렇기에 유철의 이야기에는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기에 북미왕국 전체로 따지면 저들이 이야기하는 극동아시아 지역의 영토는 머나먼 변방에 불과했는데 1만 명에 달하는 병력이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기도 했고, 변방에 1만 명을 배치할 정도면 북미왕국이 얼마나 많은 수의 병력을 운용하는지 새삼 궁금할 정도였다.
특히 이번에 어영청을 상비군으로 변경하면서 1만 명에 달하는 어영청 병사들에게 들어가는 급료가 무시 못 할 정도라 북미왕국처럼 전군을 상비군으로 변경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느냐는 이야기도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허...아이누 섬에 배치된 병력이 그렇게 많답니까?”
“아니...무슨 변방에 배치한 병력이...”
놀라는 조정 대신들을 보고 유철이 슬쩍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아시다시피 바로 남쪽에 왜국이 있는 터라 병력 규모가 적지 않답니다.”
“아...”
왜놈들을 믿기 어렵다는 것은 조정 대신들도 다들 알고 있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유철이 덧붙였다.
“그리고 이 1만 명 가운데는 탐사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에 병조판서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탐사대라면...그 연발 단총으로 무장한 정예 기병대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투로시노는 조선의 병사와 이 지원 병력이 합세하면 청나라 군대를 물리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하더군요.”
그 말에 병조판서는 당연한 것 아니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아무리 청나라 기병이 날래다고 해도 신식 소총보다 더 좋다는 갑오 소총과 연발 단총으로 무장한 북미왕국의 병사 1만 명이라면야...”
그리고 이런 병조판서의 말에 조금은 불안감을 호소하던 다른 조정 대신들의 얼굴도 조금은 밝아졌고, 그러한 분위기를 느낀 유철이 쐐기를 박듯 입을 열었다.
“그리고 상황을 봐서 추가로 지원 병력을 파병할 계획도 있다고 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이에 다른 조정 대신들의 얼굴은 확실히 밝아졌고 앞장서서 불안감을 호소하던 호조판서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야...”
* * *
‘퍼퍼퍼펑!’
이동형 60mm 화포가 불을 내뿜었고.
‘콰콰콰쾅!’
포탄이 크라스니야르 요새 벽에 명중해 폭발했으며, 몇 번의 포격을 버텼던 크라스니야르 요새는 결국 무너지기 시작했다.
‘우르릉!’
그 모습을 지켜보던 부랴트 족 대족장 바하르는 감탄사를 토해냈다.
“허. 저 커다란 요새도 결국은 무너지는군요.”
이에 크라스니야르 요새를 지켜보던 아이누 탐사대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포탄의 위력이 생각보다 강하니까요. 이르쿠츠크 요새 사령관은 그것을 알기에 기꺼이 항복했지만 저 크라스니야르 요새 사령관은 포탄의 위력을 잘 몰랐거나...혹은 애국심이 대단한 자인 모양입니다.”
“무너진 곳에 즉각 병력을 증원한 것을 보면 정말 결사 항전할 생각인 모양인데...”
바하르가 손을 들어 요새가 무너진 곳을 가리키자 바하르의 말처럼 러시아인들은 무너진 잔해 뒤에 숨어 혹시 시베리아 부족 연합이 무너진 곳을 향해 진격하는 것을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내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후우...이런 무의미한 피를 흘리고 싶지는 않은데 말이지요.”
그 광경에 아이누 탐사대장이 한숨을 내쉬었을 때 포격을 지휘하던 탐사대원이 아이누 탐사대장에게 다가왔다.
“대장님. 어쩔까요?”
이에 아이누 탐사대장은 표정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곳에 주둔해야 하니 완전히 요새를 박살 내기는 조금 그런데...”
그때 크라스니야르 요새 위쪽에 보이는 러시아 차르국의 대포가 포연을 내뿜었고.
‘퍼퍼펑!’
‘퍼퍼퍽!’
이동형 60mm 화포를 노렸지만 여전히 사거리는 닿지 않아 질퍽한 땅에 떨어지는 포탄을 보고 아이누 탐사대장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단 적 화포는 모두 침묵시켜야겠어. 저항할 수단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백기를 들어 올리겠지.”
“알겠습니다.”
포격을 지휘하는 탐사대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누 탐사대장에게 멀어지자 바하르가 슬쩍 아이누 탐사대장에게 말을 걸었다.
“북미왕국은 적에게도 무척 관대한 것 같습니다. 저 무너진 부분에 몰려있는 러시아인들을 향해 포격하면 결국 백기를 들어 올릴 텐데요.”
“물론 그 방법을 사용해도 되겠지요. 하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많은 피를 보는 것이 썩 좋은 방책은 아니라서요.”
“그렇습니까?”
아이누 탐사대장은 바하르를 보고 조곤조곤 설명했다.
“예. 전에 이야기했지만, 러시아 차르국이나 청나라는 인구가 무척 많지 않습니까. 이들의 발전 속도를 따라가려면 인구는 많을수록 좋습니다.”
이에 바하르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저들은...적이고 결국 포로로 취급될 것 아닙니까?”
“평생 포로로 만들 생각은 없으니까요. 후에는 결국 백성으로 맞이해야지요. 이곳의 인구가 넘쳐나면야 굳이 이럴 필요는 없습니다만 그게 아니니까요.”
“으음...”
솔직히 바하르는 연합의 힘이라면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다.
인구가 부족하면 주변 부족을 점령해 부족민을 끌고 오면 그만 아닌가 싶었기에.
그게 초원의 방식이었고.
이런 기색을 눈치챈 아이누 탐사대장이 웃으며 말했다.
“이게 연합의 방식이고, 대족장과 부랴트 족도 이제 연합의 일원이니만큼 이러한 연합의 방식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흐음...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