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6화
조용한 곰이 집무실을 나간 후로 정성국은 다시 보고서를 처리하려 했지만, 마음이 소란해 들고 있던 보고서의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커피 향이 피어오르며 집무실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마음이 조금 진정된 정성국은 드리퍼에서 똑똑 떨어지는 커피 방울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제 막 전성기를 맞이하려는 청나라와의 전쟁이라니...이거 영 부담스러운데? 아니지. 어떻게 보면 지금 청나라와 결판을 내는 게 나은가?’
정성국이 판단하기에 청나라가 발전하는 속도보다는 북미왕국이 발전하는 속도가 더욱 빠른 만큼 최대한 늦게 충돌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오히려 지금 청나라와 결판을 내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나라는 삼번의 난을 진압해 중국 남부를 확실히 장악한 후, 시선을 청나라 밖으로 돌려 청나라에 위협이 될만한 세력들을 공격해 철저히 굴복시켰으니까.
물론 전생에서야 조선은 한창 골골대던 시기라 청나라는 조선을 위협적인 세력으로 생각하지는 않았고, 조선 역시 내부가 안정되고 외부를 정복하는 청나라의 국력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임으로써 별다른 분쟁 없이 관계를 지속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조선은 조금씩이나마 변화하면서 발전하고 있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조선은 더욱 발전하며 제 목소리를 내려 할 테고 그런 조선을 청나라가 가만히 놔둘 것 같지는 않을 테니까.
그것을 고려하면 아직 내부도 제대로 정리 못 한 이 시기에 청나라와 분쟁이 발생하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아직 오삼계가 살아있는 덕에 주나라도 꽤 버티고 있었고 동녕국도 건재했으며, 몽골도 아직 청나라에 완전히 복속되진 않았고 준가르 역시 한창 기세를 올릴 시기였으니.
‘시베리아 부족 연합이 바이칼 호까지 영역을 넓혔으니 몽골과 준가르와 접촉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테고...이들을 뒤에서 지원해 아예 청나라의 확장을 철저하게 막아버리면...’
이전까지 중국의 영역은 만리장성 이남에 국한되었다.
그러다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우고 중원을 정복하면서 중국의 영역이 만주까지 확대되었고, 청나라를 위협할만한 주변 세력을 하나씩 굴복하면서 영역이 점점 넓어져 종래에는 명나라 시절의 영역보다 2배 넘게 확장되고 이 넓어진 영역이 중국의 영역으로 기억되는 만큼, 그리고 이 지역들이 인구는 적은 편이라도 여러 자원은 많은 편이라 중국이 계속해서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만큼 청나라의 영토 확장을 막는 것이 조선과 북미왕국의 미래를 위해도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정성국은 한참 동안 어떻게 청나라를 요리해야 하는지 생각에 잠겼고.
그때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집무실 문을 두드린 후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정성국은 한참 생각에 잠겨있다가 정신을 차린 후 고개를 들어 집무실을 들어오는 군사청장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아. 왔나. 앉게.”
그러면서 정성국은 내려진 커피를 커피잔에 따라 군사청장에게 건네며 질문을 던졌다.
“지금 극동아시아에 있는 배치된 병력이 2만이 좀 못되던가?”
군사청장은 커피잔을 받아들며 갑자기 정성국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렇습니다. 육군 1만 5천 명과 해군 4천 명, 총 1만 9천 명이지요. 헌데 갑자기 그건 왜...?”
이에 정성국은 방금 보고받은 내용을 그대로 군사청장에게 설명했고, 군사청장은 이를 듣고 점차 안색이 심각해지다가 정성국의 설명이 끝나자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허. 전하께서 걱정하신 대로 일이 흘러갔군요.”
“그러게 말일세. 일단 조선과 동맹을 맺고 이에 관한 소문을 청나라에 알려 최대한 전쟁을 막아볼 생각이지만...청나라가 이를 무시하고 곧바로 조선을 침공할 수도 있어. 그러니 만약을 대비할 필요가 있어서 자네를 부른 걸세.”
정성국이 한참을 고민해봤지만, 청나라의 확장을 막기 위해서 곧바로 청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것은 하책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몽골이나 중가르, 동녕국과 접촉해 청나라가 어느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일단은 조용한 곰에게 이야기한 것처럼 최대한 전쟁을 막으며 시간을 끌 생각을 굳혔지만, 청나라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기에 이를 대비해야겠다 싶어서 군사청장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자 군사청장은 진지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고.
군사청장이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정성국은 커피를 홀짝거렸고, 커피를 절반 정도 마셨을 때 군사청장이 입을 열었다.
“흐음...일단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한다 해도 당장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진 못할 것 같습니다만...”
“그렇긴 하지. 주력 병력은 주나라와 대치하고 있으니까.”
“예. 그리고 조선도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정예 병력 5천 명도 있고 조총으로 무장한 다른 군사들도 꽤 많은 만큼...여기에 아이누 경비대와 아이누 탐사대가 합류하면 조선을 침공하는 청나라 군세를 물리치기엔 충분할 것 같습니다만.”
군사청장의 말에 정성국은 고개를 저었다.
“상황을 너무 낙관하는 것 아닌가? 솔직히 조선의 군사 중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훈련도감 병사 5천 명은 믿을 수 있지만, 그 외의 다른 군사들을 믿기에는 조금...어려울 것 같은데? 그리고 과연 조선 조정에서 현재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정예 병력인 훈련도감 병사들을 북쪽으로 올려보낼까 싶기도 하고.”
훈련도감은 신식 소총으로 무장해 조선에서 가장 전투력이 강력한 부대라 할 수 있었고 이를 조선의 국왕과 조정 대신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정성국은 조선에서 만약을 대비해 이들을 어떻게든 한양 인근에 묶어두려 할 것으로 생각했다.
특히나 이전의 호란에서 청나라 군대가 신속하기 이동하는 것을 막지 못한 기억이 있는 조선으로서는 청나라와 전쟁이 벌어졌을 때 믿을 수 있는 훈련도감을 과연 북방으로 올려보낼까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청나라 군대를 저희 단독으로 막을 수야 없는 노릇 아닙니까.”
군사청장의 말대로 청나라는 조선을 공격했는데 조선은 뒤로 물러서고 북미왕국만 먼저 나서서 피를 흘리며 청나라와 싸울 수야 없는 노릇이었기에 정성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흠...그 부분은 외무청에서 나서긴 해야겠군. 그보다 우리가 당장 지원할 수 있는 병력은 아이누 탐사대 3천 명과 아이누 경비대 5천 명 정도려나?”
“왜국과의 관계가 나쁘지 않은 만큼 작년에 모집한 2천 명을 제외한, 아이누 경비대 8천 명을 모두 동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작년에 주나라의 사절이 조선에 당도했다는 보고를 접한 이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이누 경비대를 추가로 모집했고 이들의 훈련이 막 끝난 만큼,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동원하겠다는 군사청장의 이야기에 정성국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왜국과의 관계가 나쁘진 않은데...왜놈들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병력과 물자를 수송해야 하는 만큼 3함대는 꽤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하고 북미왕국이 이에 개입하면 왜국도 이를 모를 리 없을 테니 딴마음을 품을 수도 있을 것 같아 고작 2천 명만 남겨두는 것이 꽤 불안한 정성국이었고.
“괜찮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왜국 북부의 번주들은 저희와의 교역으로 먹고사는 만큼 절대 딴마음을 품지는 않을 테고 현 막부 역시 저희에게 우호적인 편이니까요.”
그러면서 군사청장은 군사청에서 자체적으로 부리는 정보원들을 통해 파악한 왜국 내의 사정을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고 왜국에서 필요로 하는 면직물이나 식량 등은 모두 북미왕국 본토에서 생산해 가져오는 만큼 기회를 틈타 옛 에조치 지역을 탈환한다 하더라도 별다른 실익은 없다는 것과 왜국도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 북미왕국에 관한 정보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만큼 북미왕국을 공격했다간 그 뒷감당이 어렵다는 사실도 모르지 않기에 3함대가 자리를 비우고 병력 상당수가 빠진다 하더라도 결코 왜국은 북미왕국을 공격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자 정성국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럼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총 1만 1천 명인가?”
“그렇습니다. 더불어 작년에 주나라가 밀사를 보냈다는 정보를 접한 후 이런 경우를 대비해 이동형 60mm 화포 50문을 추가로 생산해 포로나이로 보냈으니 동원할 수 있는 화포만 해도 80문에 달합니다. 그러니 조선에서 어느 정도 보조만 해준다면야 큰 피해 없이 청나라 군대를 격퇴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리고...”
“그리고?”
“3함대를 조금 공격적으로 이용한다면 청나라에 큰 타격을 주어 협상장으로 불러들이는 일쯤은 크게 어려울 것 같지도 않고요.”
“3함대를 공격적으로? 설마...”
정성국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군사청장을 바라보자 군사청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3함대로 북경의 외항인 천진을 공격한다면 청나라는 즉각 저희와 화친을 논의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흐음...”
천진은 북경의 외항이라 천진이 함락되면 북경으로 흘러 들어가는 물자 대부분을 차단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천진이 함락되고 천진에 병력이 상륙하기라도 한다면 청나라의 수도인 북경도 직접 공격받을 수 있는 만큼, 3함대가 발해만으로 진입하기만 해도 청나라 수군은 필사적으로 이를 막으려 들 테고, 이를 격파하고 천진을 공격하면 청나라는 곧바로 화친하자고 나설 것이 분명했고.
해서 정성국은 꽤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때 군사청장이 짓궂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게 아니면 청나라 해안가를 돌며 청나라 수군 기지를 공격하는 것도 괜찮겠지요.”
청나라의 해안가를 돌며 청나라 수군을 격파한다면 계속해서 동녕국이 청나라의 해안가를 공격할 테니 이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긴 정성국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흐. 확실히 나쁘지 않게 들리는군. 알겠네. 만약을 대비해 작전을 짜두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 * *
“흠...역시 손해가 막심하군.”
정성국은 관리청장이 가져온 대청무역과 관련된 보고서를 살펴보고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리자 관리청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대청무역의 규모는 계속해서 커졌으니까요.”
청나라와 공식적으로 교역을 시작한 이후 북미왕국에서는 청나라 시장을 겨냥해 청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해삼, 건전복을 비롯해 각종 교역품의 생산을 늘렸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청무역의 규모는 점차 커졌다.
해서 어느덧 대청무역은 북미왕국의 대외 무역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런 만큼 청나라와 조선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를 접한 관리청장이 기겁하며 보고서를 들고 정성국을 방문한 것이고 말이다.
이에 정성국은 북미왕국의 손해를 줄이기 위해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청나라와 정식으로 교역하기 전에는 일부 청나라 상인들과 밀무역을 하지 않았나? 그들과 다시 접촉해 손해를 줄일 수는 없을까?”
“물론 청나라 상인들과 접촉해볼 수는 있습니다만 너무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이들을 통해 막대한 양의 생사를 구하기도 쉽지 않고 저희의 막대한 교역품을 감당하지도 못할 겁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청나라와 우호적으로 지내는 것이 북미왕국의 국익에도 도움이 될 텐데...”
관리청장이 간절한 눈빛으로 정성국을 바라보았지만, 정성국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조선을 버릴 수야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긴 하지요.”
관리청장이 한숨을 내쉬자 정성국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상황을 봐서 동녕국이나 주나라와도 접촉할 생각이네. 이들과 교역해서 손해를 조금이나마 만회하는 것도 괜찮을 거야.”
“아...그렇군요. 어라? 동녕국은 몰라도 주나라는 제대로 된 항구가 없어서 교역은 어려울 텐데요?”
청나라에 주로 수출하는 품목을 생각하면 동녕국과의 교역은 큰 이득이 되지 않을 것 같았고 그나마 주나라와 교역하는 것이 괜찮을 것 같았는데 주나라와 교역하려면 거리도 거리였지만 당장 주나라는 제대로 된 항구도 없다는 것을 떠올린 관리청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정성국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주나라도 다른 나라와의 교역을 마다할 상황이 아니니 우리가 접촉해 정식으로 교역하겠다고 한다면야...어떻게든 항구를 확보할 거야.”
“아. 그렇긴 하군요.”
주나라가 해안가를 탈환할 정도의 능력은 된다고 생각한 관리청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성국이 덧붙였다.
“그리고...시베리아 부족 연합이 바이칼 호까지 영역을 확대했네. 그러니 몽골과 중가르와도 교역할 길이 열린 셈이고.”
“으음...확실히 그들과도 교역하게 되면 손해를 조금은 만회할 수 있겠군요. 알겠습니다. 유목민들에게 팔만한 물품의 생산량을 대폭 늘려야겠군요.”
"그래. 그러도록 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