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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505화 (505/850)

505화

북방 항로가 열리고 투로시노의 보고서를 확인한 조용한 곰은 급히 정성국을 찾았고 집무실에서 한창 각종 보고서와 씨름하던 정성국은 평소와는 달리 안색이 딱딱히 굳은 얼굴의 조용한 곰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며 무슨 일인지 질문을 던졌고.

“뭐? 청나라가?!”

유철이 포로나이를 방문한 이유를 설명하며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을 요구했다는 이야기에 정성국은 기겁하며 그게 정말이냐는 표정으로 조용한 곰을 바라보자 조용한 곰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답니다. 전하.”

“으음...”

이에 정성국은 신음을 흘리며 계속 이야기하라는 듯 손짓했고 조용한 곰은 다시 입을 열었다.

“다만 조선에서는 이 출병 요구를 받아들여야 하는지 의견이 분분한 모양입니다. 다만 청나라가 생각보다 강경한 분위기다 보니 출병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청나라가 다시 조선을 공격할 수도 있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조선의 이조판서가 직접 투로시노를 만나 만약 청나라가 조선을 공격할 경우 북미왕국에서 정말 조선을 도와줄 수 있는가를 물었고요.”

다른 상황이라면 청나라가 굳이 조선을 공격하진 않겠지만 이 경우는 상황이 달랐다.

청나라 황제가 직접 조선과 반란군의 연계를 의심하며 결백을 증명하라며 출병을 요구한 만큼 조선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청나라는 이전처럼 조선을 침공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불안한 조선에선 북미왕국의 확답을 듣고 싶어 했고 그 때문에 유철이 포로나이를 방문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한 정성국이 질문을 던졌다.

“해서 투로시노는 뭐라고 대답했다던가?”

“청나라가 조선을 강하게 압박하는 수준을 넘어 만약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하기라도 한다면 즉각 도울 것이라고 약조했다는군요. 그 말을 들은 조선의 이조판서는 안도하며 조선의 철도 부설 문제를 비롯해 여러 문제를 논의한 후 돌아갔다고 합니다.”

비록 북미왕국이 청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얻고 있었기에 청나라와의 전쟁은 북미왕국의 국익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진 않았지만, 정성국은 청나라가 다시 조선을 침공하는 것을 그냥 지켜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렇기에 투로시노가 부정적인 대답을 했으면 어쩌나 했지만, 외무청이나 투로시노는 정성국이 조선을 각별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잘 아는 만큼 북미왕국의 국익과는 상관없이 조선을 돕겠다고 약조했다는 대답에 정성국은 안도하며 입을 열었다.

“이전에 주나라에서 사절을 보냈다는 얘기를 듣고 조금 싸하기는 했는데...정말 우려했던 대로 일이 흘러갈 줄은 몰랐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리고 청나라가 갑작스레 조선에 출병을 요구하는 것도 무척 의외고요.”

조용한 곰이 청나라의 출병 요구를 입에 올리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 그래. 갑자기 청나라가 이렇게 나오는 게 조금 의아한데...혹시 청나라가 또 대패라도 당한 건가?”

정성국은 청나라의 사정이 정말 급박하게 돌아가 조선에 출병을 요구한 것이 아닐까 싶어 질문을 던졌지만 돌아온 대답은 달랐다.

“전혀요. 오히려 현재는 청나라가 유리하답니다.”

“어? 그래?”

“예. 이전까지는 청나라가 어떻게든 단기간에 주나라를 토벌하려다 오삼계의 용병술에 의해 패배했다면, 최근에는 청나라도 단기간에 주나라를 토벌할 생각을 버린 모양입니다.”

청나라의 뛰어난 지휘관들은 이미 은퇴하거나 이런저런 숙청에 휘말려 죽은 지 오래였기에 경험이 많은 노회한 오삼계를 상대할만한 이가 없었다.

거기에 반란군이 직접 나라까지 세우자 청나라 지휘관들은 북경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내심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계속 오삼계의 용병술에 휘말려 패배했고.

이를 인지한 강희제가 직접 지휘관들에게 명령을 내려 전략을 바꾸었다는 조용한 곰의 이야기에 정성국이 흥미를 보였고.

“호오...그래?”

“예. 그래서인지 우월한 병력 수를 최대한 이용해 전선을 늘려가며 주나라의 부담을 가중시켰고 최근에는 이 전략에 성과가 있어 주나라의 영역을 갉아먹고 있다고는 들었습니다. 해서 주나라 내에서도 이대로는 위험하다며 천도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고는 합니다.”

“천도? 본거지인 곤명으로?”

“그렇습니다. 곤명으로 천도한다면 방어선을 새로 구축할 수 있고 청나라군을 막기도 편하니까요. 물론 오삼계야 절대 그럴 수 없다며 호북과 호남을 사수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고 합니다만...”

현재 주나라의 수도는 호북성 형주에 두고 있었지만, 청나라가 조금씩 호북, 호남의 영역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계속해서 주나라의 수도를 호북성 형주에 두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했다.

그렇기에 신하들은 천도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오삼계의 입장에선 이러한 선택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가뜩이나 불리한 상황에서 중원의 변방인 운남성의 곤명으로 천도하게 되면 호북, 호남뿐만 아니라 운남을 제외한 귀주, 광서, 사천까지도 모두 포기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었기에 오히려 주나라 전체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릴 수도 있었고.

그렇기에 천도는 없다고 선언하기는 했지만, 현 중원의 사정을 보면 천도를 하긴 할 것으로 보인다는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흐음...주나라 내부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올 정도면 정말 상황이 안 좋다는 소리긴 한데...”

“그렇지요. 그래서 청나라가 조선에 요구한 총병 1만 명은 오로지 조선을 압박하기 위한 술수라는 것이 투로시노의 의견입니다.”

정성국은 그 말에 의아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조선을 압박하기 위해서? 굳이 가만히 있는 조선을 압박할 이유가 있나?”

“투로시노는...저희와 조선과의 관계 때문에 청나라가 조선을 경계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더군요.”

“음? 그게 무슨 소린가?”

정성국이 투로시노의 판단에 흥미를 보이자 조용한 곰이 입을 열었다.

“현재 조선이 청나라를 상국으로 모시며 조공을 바치고야 있습니다만...그렇게 된 과정이 썩 매끄럽지 않았잖습니까? 그러다 보니 조선 사람들은 내심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라고 생각하며 적대했고 청나라도 그런 조선의 분위기를 모르지 않았기에 은근히 경계 했었고요.”

어차피 정성국도 조선 출신이라 이 부분은 간단히 설명하자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잘 알지. 하지만 북벌을 공공연히 외치던 조선의 전대 왕이 죽으면서 양국의 관계가 거의 정상화되었잖아?”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다시 상황이 바뀌었잖습니까. 청나라의 내부 사정은 복잡한 반면, 조선은 꽤 안정된 상태고 그 때문인지 북벌을 주장하는 소리가 공공연히 흘러나오고 있지요.”

“하지만 민간에서 북벌을 주장하더라도 현 조선 조정에서 감히 청나라를 공격하지 못할 거라는 것쯤은 청나라가 모를 리 없을 텐데? 근데 가만히 있는 조선을 압박한다? 아직 주나라를 멸망시키지도 않고?”

“청나라의 판단은 조금 다른 것 같았습니다.”

“음?”

정성국이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표정으로 조용한 곰을 바라보자 조용한 곰은 투로시노가 국영 상단을 통해 알게 된 청나라 내부의 분위기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먼저 청나라는 우리 북미왕국과 조선이 무척 가깝게 지낸다는 사실과 전하께서 조선 출신이라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기야 하겠지. 물론 아직까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았지만 말이네.”

북미왕국의 국왕이 조선 출신이고, 북미왕국의 건국에 조선 유민들이 개입되었었다는 것을 청나라도 뒤늦게 알게 되긴 했지만, 청나라의 고위 관리들과 강희제는 이 이야기의 진위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서양인 신부들이나 서양인 상인들을 통해 획득한 정보로 알게 된 북미왕국은 신대륙의 패자였고 청나라와 견줄만한 강국이었는데 이 북미왕국을 건국한 것이 조선인이라는 조선 내의 소문은 허무맹랑해 보였고.

그래서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다가 유럽에도 조선과 북미왕국의 관계가 알려지며 실제 조선인들이 북미왕국의 건국에 관여했다는 것을 서양인 신부를 통해 알게 되었지만, 이때는 한창 청나라 내부가 복잡해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상황이 아니었고.

특히 북미왕국은 청나라의 북방을 안정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었을뿐더러 강희제는 북미왕국을 끌어들여 러시아 차르국을 견제하려 했기에 더더욱 이 문제를 섣불리 거론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용한 곰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청나라 황제는 서양인 신부들과 가끔 이야기를 나눈다고 알려졌지요. 그런 만큼 청나라 황제는 유럽에 널리 퍼진 우리 북미왕국에 대한 소문도 접할 수 있었을 겁니다.”

“으음...그 말은...”

“예. 청나라 황제는 작열탄, 후장식 소총, 연발 단총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청나라는 우리 북미왕국과 무척 가깝게 지내면서 나라를 정비하고 군을 재정비하는 모습을 보이는 조선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리고 이런 조선을 견제하는 것이 늦어질수록 청나라에 불리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기에 주나라와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자마자 주나라의 일을 명분 삼아 조선을 견제하고자 무리한 요구를 한 것 같다고 투로시노가 보고했습니다.”

만약 북미왕국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청나라가 조선을 강하게 경계하는 일 따위는 없었겠지만, 북미왕국의 존재로, 그리고 조선이 북미왕국과 가깝게 교류하면서 점차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자 청나라가 이를 경계하는 것 같다는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전생에도 청나라가 조선을 대하는 태도가 유화적으로 변한 것은 1697년 자신들에게 대항한 준가르까지 멸망시켜 동아시아의 패권을 완벽히 장악하고 조선은 아무런 변수도 되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과 조선이 감히 자신들에게 덤비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든 이후라는 것을 떠올리고 속으로 혀를 찼다.

‘이것 참...그럼 조선이 발전할수록 청나라는 조선을 경계할 수밖에 없으니 정말 한판 붙기는 해야 한다는 건데...’

“결국, 조선이 우리의 무기로 무장하면 자신들을 공격할 수 있으니 그 전에 강하게 압박해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면 1만 명의 총병은 지휘권도 청나라에 귀속되며 이들의 보급품까지 조선에서 감당해야 하는 조건입니다. 조선이 이를 받아들인다면 타격이 심하겠지요.”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이야기에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엥? 보급품도 그렇지만 지휘권까지 넘기라고? 그건 그냥 총알받이로 쓰겠다는 소리잖아?”

“그렇습니다. 그 때문에 이 요청을 거부해야 한다는 여론이 큰 편이고요. 다만 이전의 기억이 있는 일부 인사들은 그래도 청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저희 북미왕국에서 돕겠다고 약조한 이상 조선은 결국 청나라의 요구를 거부하리라는 것이 투로시노의 예측입니다.”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상황은 알겠지만 이거 시기가 너무 공교로운데. 신식 소총을 추가 지원하기도 어려운 상황이고 아이누 탐사대 일부는 이미 시베리아 지역으로 올라간 상황이니...”

청나라의 요구는 곧 청나라 황제의 명령이었고, 청나라 황제의 명령을 조선에서 거부한 순간 청나라는 조선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결국은 전쟁이라는 뜻이었는데 현재 무기 제조 공방에서 생산하는 신식 소총은 전량 유럽으로 가야 하는 터라 조선에 지원해 줄 신식 소총도 없었고, 직접 조선에 병력을 지원해주자니 아이누 탐사대들도 상당수 시베리아 지역으로 나가 있는 만큼 그 수가 많지는 않아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짓자 조용한 곰이 말했다.

“허면 곧바로 조선과의 동맹을 선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시간을 끌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조선과의 동맹을 선포하라고? 청나라에 전쟁을 선포하자는 뜻으로 들리는데?”

정성국이 표정을 찌푸리며 그렇게 반문했지만 조용한 곰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청나라는 무척 불쾌해할 겁니다. 그래서 투로시노도 일단 조선에 청나라와 협상하면서 시간을 끌라고 요구한 거고요. 다만 청나라도 저희 북미왕국의 국력을 어느 정도 아는 만큼 조선과 동맹을 맺고 이를 공표한다면 섣불리 조선을 공격하지는 못할 겁니다. 더불어 저희는 시베리아 부족 연합과도 동맹을 맺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시베리아 부족 연합은 한창 남하해 바이칼 호 인근까지 도달했다는 보고까지 올라왔고요.”

“아?! 그래?”

정성국이 반색하자 조용한 곰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예. 그러니 이 사실까지 모두 청나라에 흘린다면...청나라도 섣불리 조선을 침공하진 못할 겁니다. 잘못하면 동북면 전체가 위험해질 테니까요.”

조선을 침공하면 북쪽의 시베리아 부족 연합과 북동쪽의 북미왕국이 함께 움직인다는 것을 알게 되면 청나라도 조선을 공격하기보다는 협상을 통해 일을 해결하지 않겠느냐는 조용한 곰의 의견에 정성국은 한참을 고민하다 결정을 내렸다.

“그래. 국영 상단을 통해 이 사실을 청나라에 널리 퍼트리도록 하게. 그래서 청나라가 섣불리 조선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더불어 조선에도 따로 이를 알리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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