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화
투로시노는 집무실에서 수많은 보고서를 살피고 있을 때 누군가가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예. 들어오세요.”
어차피 하급 관리가 보고서 더미나 가져왔을 거로 생각해 심드렁한 표정으로 슬쩍 고개를 들었던 투로시노는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조선의 한복이 보이자 고개를 갸웃했고.
얼굴을 확인한 뒤론 화들짝 놀라며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이게 대체 얼마 만입니까!”
그런 투로시노의 반응에 투로시노를 만나기 위해 포로나이까지 방문한 유철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이거 오랜만입니다. 투로시노 공.”
투로시노는 오랜만에 보는 유철에게 다가가 악수하며 그를 집무실 한쪽에 마련된 티테이블로 안내했다.
“자. 일단 앉으시지요.”
유철이 앉자 투로시노는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고, 방 안에 가득 퍼지는 커피 향에 유철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허. 향이 무척 좋군요.”
“그렇지요? 최근 왕실 상단에서 운영하는 커피 농장에서 나온 커피인데 맛과 향이 무척 뛰어납니다. 전하께서도 이 커피를 무척 즐기신다는 이야기에 겨우 구한 귀한 녀석이지요.”
“아. 그렇습니까? 이거 기대되는군요.”
투로시노는 빙긋 웃으며 커피가 담긴 커피잔을 유철에게 넘겼고 유철은 커피를 조심스럽게 맛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허. 좋군요.”
“그렇지요?”
투로시노는 커피를 홀짝이며 유철과 그동안의 회포를 풀기 시작했지만, 곧 유철의 얼굴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질문을 던졌다.
“무슨 근심이 있으십니까? 공께서 연락도 없이 갑자기 이렇게 포로나이까지 방문하신 것도 그렇고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것도 영 신경이 쓰이는군요.”
“허허...”
이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나누던 유철은 자신이 그렇게 티를 냈나 싶어 살짝 멋쩍은 표정을 짓다가 회포는 나중에 풀어도 되고 일단 자신이 이곳에 방문한 목적부터 달성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 투로시노를 바라보았다.
“제가 투로시노 공을 찾은 것은 확답을 받기 위해섭니다.”
“확답이오?”
투로시노가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유철을 바라보자 유철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예. 그동안 북미왕국은 항상 무슨 일이 있을 때 우리 조선을 돕겠다고 이야기했었지요.”
“그렇습니다. 조선과 우리 북미왕국은 꽤 특별한 관계니까요.”
투로시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유철이 무척 강렬한 눈빛으로 투로시노를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그 말. 믿어도 되겠습니까?”
“예?”
“만약...우리 조선에 전쟁이 벌어지면 북미왕국이 우리 조선을 도울 거라고 믿어도 되겠느냐는 뜻입니다.”
유철의 말에 투로시노는 입가에 머물던 웃음을 지우고 심각한 표정으로 유철에게 질문을 던졌다.
“...전쟁? 대체 어느 나라와 말입니까?”
이에 유철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청나라입니다.”
“예?! 청나라라고요? 아니. 갑자기 왜요?! 설마 주나라와 손을 잡고 북벌이라도 하실 생각이십니까?”
유철이 아무런 기별도 없이 이곳까지 직접 방문했기에 무슨 중요한 일을 논의하기 위해 왔으리라고는 짐작했지만, 뜬금없이 청나라와의 전쟁을 거론하자 투로시노가 기겁하며 급히 질문을 쏟아냈고 유철은 그런 투로시노의 질문에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후우. 믿을 수 없는 주나라와 손을 잡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만...상황이 여러모로 곤란해졌습니다.”
“대체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달라는 투로시노의 재촉에 유철을 커피를 한 모금 마셔 목을 축인 후 입을 열었다.
“작년에 주나라가 밀사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이는 원상을 통해 북미왕국에서도 이미 알고 있는 사항이었지만 괜히 조선의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광고할 필요야 없기에 투로시노는 일부러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그렇습니까?”
“예. 아마 주나라의 상황이 곤란해지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밀사를 보낸 거겠죠. 그렇기에 주나라의 밀사는 여러 감언이설을 늘어놓았고요. 허나 지금 조선은 청나라를 공격할 상황이 아니잖습니까.”
“예. 조선은 한창 개혁 중이니까요. 역량을 분산시켜봐야 좋을 것이 없지요.”
“그렇습니다. 해서 별다른 답을 주지 않고 밀사를 돌려보냈고요. 헌데 주나라에서 수작을 부린 모양입니다.”
유철이 표정을 구기며 이야기하자 투로시노는 그제야 상황을 대충 짐작하고 질문을 던졌다.
“아. 설마 주나라에서 소문을 퍼트린 겁니까?”
“그렇습니다. 곧 조선이 북경을 공격할 테니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주나라로선 청나라의 주의를 돌리고 일부 병력을 회군시키기 위함이었겠지만...저희로선 날벼락 같은 이야기지요.”
주나라가 그런 소문을 퍼트린 이유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주나라까지 건국했지만, 내부 결속을 조금 다졌을지언정 반전을 꾀하지는 못했으니까.
덕분에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계속해서 방어에만 전념해야 했고.
하지만 투로시노는 자신이 만났던 강희제를 떠올리고 조금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니. 그래도 청나라가 그 소문을 믿었다는 말입니까? 뻔히 속셈이 보이는 소문인데?”
그 말에 유철은 안색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청나라도 주나라가 의도적으로 소문을 흘렸다는 것쯤은 분명 짐작했을 겁니다. 헌데 청나라 황제는 대체 무슨 생각인지 이번에 청나라를 방문한 사절단에게 이를 거론하며 조선이 주나라와 손을 잡은 것은 아닌지 추궁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조선은 청나라에 정기 사행을 보내고 있었고, 동지사로 북경을 방문한 사절단의 정사는 강희제를 알현했다가 이런 강희제의 추궁에 기겁할 수밖에 없었고.
“허어...그래서 뭐라고 답했답니까?”
“당연히 정사는 펄쩍 뛰었지요. 절대로 아니라고. 하지만 청나라 황제는 말만으로는 조선을 믿기 어렵다면서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출병하겠다면 믿겠다고 했습니다.”
투로시노가 보기에는 지금 조선은 청나라와 전쟁을 벌이기보단 하루라도 빨리 개혁을 통해 국력을 키울 시기였다.
그런 만큼 청나라가 원하는 대로 일부 병력을 청나라로 파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입을 열었다.
“병력을요? 그럼...”
그리고 유철은 투로시노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한다는 듯 곧바로 덧붙였다.
“무려 1만 명의 총병을 요구하더군요.”
“으음. 1만 명이라니...”
투로시노는 1만 명의 총병을 요구했다는 이야기에 신음을 흘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가 강희제를 몇 번 알현하며 받았던 인상은 꽤 뛰어난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강희제와 조선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청나라 대신들이 조선의 총병 1만 명을 요구하다니.
‘대체 의도가 뭐지? 전황은 청나라에 비교적 유리할뿐더러...병력 규모를 생각하면 1만 명의 총병은 크게 의미가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지금 청나라가 반란군을 제압하기 위해 동원한 병력이 약 40만으로 알려져 있었으니 아무리 조총으로 무장한 조선의 총병이 강력하다 하더라도 전황에 크게 의미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몇 번의 패배로 청나라는 전략을 바꾸어 전선을 최대한 늘렸고 청나라보다 병력 규모가 적은 주나라는 이를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최근엔 정세가 청나라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니 더더욱.
그러다 1만 명이나 되는 병력을 출병시킨다면 조선이 받는 부담이 막대하다는 것을 청나라가 모를 리 없다는 생각이 들자 투로시노는 청나라의 속셈을 어느 정도 짐작했다.
‘하. 이제 승기를 잡아가니 조선을 견제하려 드는 것인가?’
청나라가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근 7년 동안 반란군과 드잡이질을 하는 사이 조선은 북미왕국과 교류하며 착실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청나라가 이를 모를 리 없었고, 청나라의 입장에선 조선이 성장해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그러니 승기를 어느 정도 잡았다는 생각에, 그리고 감히 조선이 자신들에게 덤비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에 강하게 조선을 압박할 생각으로 이런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이 아닐까 하며 투로시노가 유철을 바라보고 질문을 던졌다.
“허면 조선에서는 청나라로 파병하기보단 청나라의 요구를 거절하고 맞설 생각인 겁니까?”
이 질문에 유철은 안색을 흐리며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저었다.
“그 부분에서 이견이 많습니다. 일부는 전쟁은 피해야 한다면서 1만 명의 총병을 청나라로 파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일부는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훈련도감의 병사들이라면 청나라의 기병도 능히 상대할 수 있다면서 차라리 이 기회에 군비를 더 증강해 청나라와 한판 붙자는 사람들도 있고요.”
이건 소위 개화파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개화파는 기본적으로 반청에 가깝긴 한데 지금은 청나라와 척을 질 때가 아니라 개혁에 매진할 때고 이대로만 조선이 발전한다면 10년 후에는 군비 증강을 통해 청나라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며 일단은 청나라의 출병 요청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는 인사들도 있었고, 아무리 조선이 개혁을 통해 발전한다고 해도 청나라와는 체급이 다른 만큼 주변을 정리한 청나라와 맞서는 것보다는 지금 청나라에 맞서 주나라가 조금이나마 더 버틸 수 있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하는 인사들도 있었고.
다만 유철은 투로시노처럼 청나라가 조선을 견제하려고 출병을 요청했다고 판단했기에 괜히 출병했다가 1만의 총병을 모두 잃을 수도 있다고 보았기에 전자보다는 후자가 낫지 않겠나 싶었고.
“그래서 유철 공께서 직접 저를 찾아오신 거군요. 만약 청나라와 전쟁이 벌어지면 우리 북미왕국이 정말 조선을 도울 것인지에 대한 대답을 듣기 위해.”
“그렇습니다.”
조선의 조정 대신들도 북미왕국이 청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얻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조선과 청나라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과연 북미왕국이 이 이득을 포기하면서까지 조선을 도울까 우려하는 조정 대신들도 꽤 있었고.
유철은 북미왕국을 믿긴 했지만, 다른 조정 대신들의 걱정도 일리는 있었고 북미왕국의 도움 없이 청나라와 맞서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기에 북미왕국의 확답을 듣고자 방문했다고 덧붙이며 무척 긴장한 얼굴로 투로시노를 바라보자 투로시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예. 만약 청나라가 조선을 공격한다면 저희도 조선을 도울 겁니다.”
투로시노의 확답에 유철은 안색이 무척 밝아지면서 탄성을 질렀다.
“오오! 그게 참입니까?!”
“예. 국왕 전하께서도 조선의 어려움을 그냥 두고 보시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 말에 유철은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휴우. 참으로 다행입니다. 다행이에요. 하지만...괜찮겠습니까? 손해가 클 텐데...”
유철은 미안한 표정으로 투로시노를 바라보았지만, 투로시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 정도야 감수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는 청나라의 요구를 거부할 생각이더라도 최대한 시간을 끌었으면 합니다.”
“시간을요?”
“예. 최대한 준비를 해 둬야 최소한의 피해로 청나라 군을 격퇴할 수 있을 테니까요.”
투로시노의 말도 일리는 있었기에 유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투로시노가 덧붙였다.
“그리고 현 조선의 상황에서 전쟁은 딱히 이득이 없습니다. 그러니...조선이 청나라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아예 정식으로 저희 북미왕국과 동맹을 맺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북미왕국은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 때문에 정식으로 동맹을 맺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조선이 청나라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이 기회에 조선과 동맹을 맺는 것이 낫다고 보았고.
더불어 조선이 북미왕국과 정식으로 동맹을 맺고 이를 널리 알린다면 청나라도 섣불리 조선을 침공하지는 못하리라 보았다.
청나라도 북미왕국의 국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고, 북미왕국과의 관계가 틀어지면 북방의 지원이 끊겨 북방에도 추가로 신경을 써야 했으니까.
“동맹이라...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