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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501화 (501/850)

501화

정성국은 집무실을 찾아와 보고하는 조용한 곰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음? 그게 무슨 소린가? 유럽의 귀족들과 학자들이 북미왕국으로 이주하길 원한다고?”

지금까지 북미왕국으로 이주하는 유럽인들은 거의 평민이었다.

물론 위그노들 가운데는 교육 수준이 높거나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지닌 장인, 상인들이 있긴 했지만, 이들도 대부분은 평민 출신이었고.

기반이 거의 없는 평민 출신들은 북미왕국으로의 이주를 결정하기 쉬웠지만, 귀족은 상황이 달랐기에 어찌 보면 당연했다.

거기에 북미왕국은 왕실 이하는 모두 평등하다고 알려졌고, 귀족도 없었으니 북미왕국으로 이주한다면 귀족 신분을 버리는 셈이었으니 북미왕국으로 이주하려는 귀족은 거의 없었고.

헌데 갑자기 유럽의 귀족들과 학자들이 대거 북미왕국으로의 이주를 원한다는 이야기에 정성국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조용한 곰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전하. 일부는 이미 배를 타고 새진주에 도착해 북미왕국의 백성이 되기를 청하고 있고, 일부는 우리 북미왕국의 여객선이 드나드는 에스파냐의 바스크 지방이나 아일랜드의 리머릭 항으로 이동해 그곳의 관리들에게 북미왕국으로의 이주를 허락해달라고 요청하고 있으며, 또 일부는 각국의 대사관을 방문하거나 연락선의 함장에게 북미왕국으로 이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답니다.”

“아니. 대체 왜?”

“일단 북미왕국으로 이주를 원하는 귀족들은 주로 하급 귀족들입니다. 그게 아니면 차남들이라던가.”

그 말에 정성국은 최근 몰락 양반들도 유민들로 위장해 북미왕국으로 이주한다는 보고를 얼핏 들었던 것과 유럽의 하급 귀족이나 몰락 양반이나 처지는 같다는 것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유럽에 있어 봐야 출세하거나 여유롭게 살기는 쉽지 않으니 귀족 신분을 포기하더라도 북미왕국으로 오겠다?”

“비슷합니다. 저들은 하급 귀족이라도 평민보다야 북미왕국에 관한 정보를 더 많이 알고 있는 터라...북미왕국의 상황과 각종 정책이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잖습니까.”

“연금 제도 때문이겠군.”

정성국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리자 조용한 곰이 덧붙여 말했다.

“뭐 연금 제도도 매력적이겠지만...오히려 그보다는 북미왕국의 백성이라면 교육비가 전혀 들지 않는 것을 더 매력적으로 여기더군요.”

“음?”

“아시다시피 유럽의 대학교는 학비가 조금...비싸잖습니까.”

“뭐 살인적이긴 하지.”

유럽의 대학들은 나라에서 세운 것이 아닌 민간에서 필요에 의해 자체적으로 세운 사립 대학들이었다.

그런 만큼 학비는 모두 대학 교육을 원하는 학생들이 부담해야 했기에 학비도 무척 비쌀뿐더러, 생활비, 집세 등을 포함하면 교육비의 부담은 어마어마했다.

물론 유럽에도 근대 국민국가가 성립되기 시작하고, 대학을 순수한 학문 연구의 요람이 아닌, 국가에서 요구하는 고급 인력의 양성을 위한 교육 기관으로 변모하면서 대학 교육의 수익자는 학생이 아닌 국가로 바뀌고 자연스럽게 국가에서 등록금과 학비를 부담하게 되며 점차 등록금과 학비가 저렴해지고, 장학금 제도가 활성화되게 되지만 아직 그런 시기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라에서 모든 교육비를 부담하는 북미왕국의 교육 체계는 유럽인들의 눈에 무척 매력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고.

“예. 그렇기에 자식이 많을수록 교육비로 나가는 지출이 어마어마해 하급 귀족들은 이를 감당하기 어려워하는 경우도 꽤 있답니다. 헌데 북미왕국으로 이주해 북미왕국의 백성이 되면, 공부만 열심히 하면 대학교까지 졸업할 수 있고, 대학교만 졸업한다면 북미왕국에서 충분히 대우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으니 그게 무척 매력적으로 보이는 모양입니다.”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왠지 북미왕국으로 이주하려는 유럽인들에게 사기 치는 기분이 들었다.

유럽의 하급 귀족들은 유럽에서 적당한 교육을 받았으니 북미왕국의 백성이 되면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 같았지만 대학교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몇 년 전에는 문과 계열의 경우 가능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최근엔 문과 계열도 경쟁이 꽤 치열했기에 북미왕국의 말과 글에 익숙하지도 않고, 기본 교육도 받지 않은 유럽인들이 과연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고.

해서 정성국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흐음...그렇긴 해도 대학교에 입학하기가 쉽지는 않을 텐데...”

그 말에 조용한 곰은 정성국과 비슷한 생각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 그렇지요. 다만 중, 고등학교만 졸업하더라도 직업을 구하기는 쉽잖습니까. 더불어 원한다면 관리도 될 수 있고. 그러니 재산이 많지 않은 유럽의 하급 귀족들은 아예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 북미왕국으로 이주하려는 거지요.”

“허면 학자들은?”

이에 조용한 곰은 슬쩍 웃으며 말했다.

“뭐 학자들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북미왕국으로 이주하는 것이 학문을 연구하는 데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주를 원하는 거죠. 최근 새한성 대학교의 명성이 높아진 것도 하나의 원인이고 곧 다수의 종합 대학교를 추가 건설할 거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미리 북미왕국으로 이주해 자리를 잡고 이 선생 자리를 노리려는 학자들도 꽤 있는 모양입니다.”

처음으로 북미왕국 외무청의 제의를 받아 북미왕국으로 향한 학자들이 북미왕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하고 싶은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당연히 학자들은 북미왕국으로 이주하고 싶어했다.

다만 이미 새한성 대학교나 하버드 대학교에도 빈자리가 없었기에 학자들은 아쉬움을 삼킬 수밖에 없었고.

헌데 북미왕국에서 사범대학교들을 추가 건설한다는 것과 사범대학교 건설이 끝나면 새로운 종합 대학교를 건설한다는 기사 내용이 알려지면서 학자들이 새롭게 건설될 종합 대학교의 선생 자리를 노리고 일단 이주부터 하려 한다는 조용한 곰의 설명에 정성국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새로운 종합 대학교에서 선생을 모집하는 건 빨라야 3, 4년 후의 일인데 뭐가 그리 급해?”

“빨리 이주해 북미왕국에서 생활한다면 그만큼 북미왕국의 말과 글에 익숙해질 테니 나쁠 것은 없잖습니까.”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유럽의 하급 귀족들이나 학자들은 분명 고급 인력들이었고, 북미왕국은 아직 고급 인력이 부족한 만큼 이들이 이주한다면 무척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연금 제도를 시행한 이후 유럽 각국이 묘하게 자국의 백성들이 북미왕국으로 이주하는 것을 걱정하는 터라 북미왕국과 외교 관계를 맺은 국가의 백성들은 해당 국가의 동의 없이는 함부로 이주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이야기한 만큼 떨떠름한 표정으로 조용한 곰을 바라보았다.

“헌데 전에 우리가 유럽 각국에 했던 이야기가 있어 쉽게 받아들일 수도 없잖나?”

“유럽의 각국이 걱정하는 것은 평민들의 대량 이주로 노동력이 사라지는 것을 우려할 뿐이라 이들을 받아들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미 대사들이 유럽 각국과 이 문제를 논의했는데 유럽 각국은 그 수가 얼마 되지 않고 그 정도 교육 받은 자들이 부족한 것도 아니라 상관없다는 반응을 보였답니다. 뭐 약간의 기름칠은 필요했지만 말입니다.”

조용한 곰이 씩 웃으며 그렇게 대답하자 정성국은 반색하며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오! 그래? 그럼 다행이군. 그럼 모두 받아들이게. 이들이 북미왕국을 더욱 빠르게 발전시킬 테니까.”

“알겠습니다.”

* * *

정성국은 민심을 파악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변장하고 궁을 나가 새한성의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은 추위가 풀리지 않아 얼굴 전체를 대부분 가릴 수 있는 거대한 목도리를 둘렀기에 정성국을 알아보는 이는 없었고.

정성국이 잠행을 나가겠다고 말을 꺼내자 호위대장은 기겁하며 강력히 반대했지만, 북미왕국의 백성들이 어떻게 사는지 가까이서 확인하고 싶다는 정성국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고, 결국 호위대원 100명이 사복으로 갈아입고 정성국 주변을 따라다니는 것으로 합의 볼 수밖에 없었다.

정성국은 그렇게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군것질도 하며 백성들의 얼굴에 걸린 미소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웃음 짓고 있을 때 어디선가 함성이 들려왔다.

“음? 이게 뭔 소리야?”

이에 정성국 옆에서 함께 움직이던 호위대장이 고개를 돌려 함성이 들려온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 저 옆에 축구장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아마 그곳에서 경기가 있는 모양입니다.”

“오. 그래?”

정성국은 눈을 빛내며 함성이 들려온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그런 정성국을 보고 호위대장은 무척 불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축구장에 사람이 많으면 경호하기 어렵습니다만...”

“괜찮아. 괜찮아. 여태껏 날 알아본 사람 없었잖나. 그리고 사람이 너무 많으면 들어가지 않을 테니 걱정 말게.”

“으음...”

정성국의 이야기에도 불안했던 호위대장은 주변의 호위대원들에게 손짓했고, 사복 차림의 호위대원들이 움직이는 모습에 정성국은 혀를 차며 설렁설렁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골목을 지나 축구장을, 정확히는 축구장 외곽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와. 이 추운 날씨에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이건 뭐 보이지도 않네?”

그런 정성국의 투덜거림에 호위대장이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축구는 꽤 인기 있는 운동 경기 중 하나이니까요.”

“그래?”

“예. 공만 있으면 할 수 있으니 축구를 즐기는 사람도 많고 조금...거칠잖습니까. 해서 보는 맛도 있어서 말입니다.”

“끙...”

거친 것에 열광한다는 이야기였기에 정성국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석전보다야 나았기에 한숨을 내쉬며 물끄러미 인의 장막으로 둘러싸인 축구장을 바라보았다.

“흐음...”

그런 정성국을 보고 호위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들어가지 않으시는 겁니까?”

“저 인파를 뚫자고? 나야 좋은데 자네들이 질색할 거잖나. 그리고 내가 경기 좀 보겠다고 호위대원들을 동원해 저 사람들의 관람을 방해할 수도 없고.”

그 말에 호위대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렇긴 하지요. 헌데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이런 추운 날씨에도 축구 경기를 관람하겠다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린 것을 보면 제대로 된 경기장이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네.”

“제대로 된 경기장이요? 제가 알기로 저 축구장도 공식 규격에 맞게 건설된 축구장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에 정성국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고 손으로 저 축구 경기장 주변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관람객들이 축구 경기를 쾌적하게 볼 수 있도록 축구장 외곽에 관람석을 만드는 거지.”

“아...”

확실히 현재는 뒤편에 있는 사람들은 경기를 제대로 관람하지도 못했다.

일부는 뒤꿈치를 들며 어떻게든 보려 했지만 저래서야 제대로 된 경기를 관람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고.

해서 호위대장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 정성국이 경기장 한쪽에서 돈을 주고받는 일부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저기 저거. 보아하니 축구 경기의 승패를 가지고 내기를 하는 것 같은데 아닌가?”

“으음...그런 것 같습니다.”

“저것도 아예 양성화시켜야겠네.”

“예? 금지가 아니고요?”

정성국이 내기나 도박을 엄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호위대장이 멍한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자 정성국은 어깨를 으쓱했다.

“금지한다고 없어지겠나? 음지로 숨어들겠지. 차라리 양지로 끌어올려 관리하는 게 나아. 세금도 좀 떼고.”

“그렇긴 하지요.”

더불어 정성국은 이 정도 인기라면 제대로 된 축구팀, 아니, 각종 운동 단체들을 구성해 리그를 만드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일단 상황을 파악해야겠다는 생각에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 돌아가지.”

물론 궁을 나온지도 거의 두시간 가까이 흐르긴 했지만 이렇게 일찍 돌아가겠다고 이야기할 줄은 몰랐기에 호위대장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다만 정성국이 돌아가는 것은 오히려 환영이었기에 호위대장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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