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화
이르쿠츠크 요새에 백기가 걸리자 아이누 탐사대장은 어제 사절로 이르쿠츠크 요새를 방문했던 외무청 하급 관리에게 말했다.
“백기가 걸렸으니 자네가 가서 무장을 해제하라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다만 병사들이 아닌 주민들의 경우는 어쩔까요?”
이에 아이누 탐사대장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저곳도 아마 야쿠츠크 요새와 상황은 비슷할 거야. 싸울 수 있는 주민들은 모두 무장하고 우리와 싸우려 했겠지. 그러니 주민들도 무장을 해제시키도록 하게. 다른 것은 몰라도 화약 무기는 용납할 수 없어. 그 부분을 확실히 전하게.”
“알겠습니다. 그럼 정오까지 무장을 해제하라고...”
‘탕!’
“응?”
“어?”
멀리서 들려온 총성에 아이누 탐사대장과 외무청 관리는 움찔하며 급히 고개를 돌려 총성이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고.
“방금 총소리. 분명 요새에서 들렸지?”
“그런 것 같습니다만...”
‘타타타탕! 타타탕!’
요새 안쪽에서 다수의 총성이 들리자 아이누 탐사대장은 안색을 굳히고 명령했다.
“으음...일단 자네는 대기하고. 부관. 혹시 모르니 전투 준비를 하게.”
“알겠습니다.”
아이누 탐사대장의 명령에 따라 백기가 올라온 후 조금 풀어졌던 탐사대원들과 연합의 병사들은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지만, 총성은 곧 멎었고.
이르쿠츠크 요새의 문이 열리며 러시아인이 조그마한 백기를 들고 천천히 걸어 나오는 것을 확인한 아이누 탐사대장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어 조금 꺼림칙한 표정으로 외무청 관리에게 말했다.
“일단 가 보게. 다만 너무 요새에 접근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외무청 관리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아이누 탐사대장이 붙여준 탐사대원들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고 이르쿠츠크 요새에서 나온 백기를 든 사내와 대화하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누 탐사대장은 곧 외무청 관리가 돌아오자 급히 질문을 던졌다.
“그래. 뭐라던가?”
“이르쿠츠크 요새에 다른 거점 마을의 지원병들이 와 있었는데 이들이 항복에 반대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르쿠츠크 요새 사령관이 어떻게든 그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결국 설득하지 못했고 시간이 흘러 저희가 전투 준비를 하자 요새 사령관이 백기를 걸라고 명령한 모양이고요.”
“그래서 충돌이 일어났고?”
“비슷합니다. 백기가 오르는 모습을 본 지원병들은 자신들은 마을로 돌아가겠다며 문을 열어 달라고 요청했지만...백기를 들어 올리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문으로 일부 병력이 빠져나가면 저희가 오해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불가하다고 이야기한 모양입니다. 그러자 지원병들이 문을 열기 위해 사격을 시작했고 말입니다.”
이르쿠츠크에는 연합을 공격했다 패배하고 도망친 패잔병들이 있었고 이들을 통해 이르쿠츠크의 병사들과 주민들은 북미왕국의 작열탄이 얼마나 위력적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연합의 병력이 키렌스크에 나타났으며 곧 이르쿠츠크 요새에 나타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병사들과 주민들은 다들 패잔병들이 이야기했던 작열탄을 떠올리며 시간이 흐를수록 앞으로의 일을 은근히 걱정했고.
처음에만 하더라도 어떻게든 항전하려고 주변 거점 마을에 전령을 보내 지원 병력까지 요청했던 이르쿠츠크 요새 사령관은 그러한 분위기를 파악했기에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사령관은 북미왕국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알았기에 이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연합을 과연 상대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기에.
그렇기에 이고르의 조언과 연합의 사절이 방문해서 해준 이야기에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측근들을 불러 연합에 항복하기로 결정을 내렸고.
다만 사령관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바로 지원군이었다.
지원군들은 연합과 싸우겠다며 자신들을 불러놓고 갑자기 항복을 입에 올리는 이르쿠츠크 사령관의 행동에 황당할 수밖에 없었고.
서쪽의 발라간스크에서 왔던 지원군들은 괜히 이곳을 지키겠다고 왔다가 포로가 되어 더는 가족들을 만날 수 없게 된 상황이었기에 분노했고, 동쪽의 우딘스코예에서 왔던 지원군들은 이르쿠츠크 요새가 항복하면 자신들의 가족들이 있는 우딘스코예 역시 고립되어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반발했다.
이에 사령관은 어떻게든 이들에게 연합의 강력함을 설명하며 설득하려 했지만, 이들은 강하게 항의하며 사령관에게 항복할 생각을 하지 말고 최대한 맞설 것을 주문했고.
하지만 사령관이 끝끝내 백기를 들어 올리자 지원군들은 이대로 연합의 포로가 될 수는 없다는 생각에 탈출을 시도했고 사령관은 연합이 오해할까 우려해 이들을 저지하라고 명령을 내리면서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는 외무청 관리의 설명에 아이누 탐사대장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며 물었다.
“쯧쯧. 그래. 제압은 했다던가?”
“예. 사령관이 요새 병사들을 꽉 틀어쥐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저희야 다행이지요.”
외무청 관리가 살짝 안도의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사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굳이 무의미한 피를 흘릴 필요도 없고, 또 포탄도 아낄 수 있었으니 나쁠 것 없지. 그보다 저들에게 무장을 해제하라고는 이야기했지?”
“예. 방금의 일도 있고 해서 요새 안의 모든 무기를 넘기라고 요구했고 저들도 이미 예상했는지 별다른 반응 없이 저희의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좋군. 고생했네.”
“아닙니다. 대장님.”
아이누 탐사대장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외무청 관리의 어깨를 두드린 후 고개를 돌려 자신의 부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부관.”
“예. 대장님.”
“일은 잘 풀렸지만, 혹시 모르니 저들의 무기를 모두 수거하기 전까지는 긴장을 늦추지 말라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 * *
이르쿠츠크 요새가 항복한 후 연합의 원정대가 이르쿠츠크 요새로 들어온 지도 벌써 3일이 흘렀기에 이르쿠츠크 요새에 대한 각종 정보를 수집한 부관이 아이누 탐사대장에게 수집한 정보를 보고하기 시작했고.
부관이 이르쿠츠크 요새 주민들의 수가 대략 3500명 수준이라고 이야기하자 아이누 탐사대장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허. 이거 생각보다 주민들이 많은데?”
“예. 아무래도 남시베리아에서 중요 거점 중 하나로 각종 물자가 오가는 통로이기도 하고 저 안가라 강에는 물고기가 풍부하며 주변에 목초지가 있어 목축에 적합하다 보니 주민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에 아이누 탐사대장은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이들을 이주시키는 것도 일이겠는데?”
“아무래도 그렇지요. 거의 4500명 정도를 모두 이주시켜야 하니까요.”
이곳도 야쿠츠크 요새와 상황이 같았다.
병사와 더불어 남성들도 무장하고 대항하려 했다가 모두 포로가 된 만큼 여성, 노약자, 아이들만 이곳에 남겨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포로들뿐만 아니라 주민들을 모두 이주시켜야 하니 생각보다 고생할 것 같다는 생각에 아이누 탐사대장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일단 포로들을 잘 관리하도록 하게.”
“물론입니다. 혹시 몰라 탐사대원들이 지키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그리고 부랴트 족과는 접촉해봤나?”
부랴트 족은 원래 바이칼 호 근처에 살던 부족으로 이들은 러시아 차르국이 등장한 후 몇 번의 충돌로 여러 영역을 러시아 차르국에 넘겨주고 비옥한 땅에서 물러나야 했으며 러시아 차르국에 공물을 바쳐야 했다.
이를 포로들을 통해 알게 된 연합은 부랴트 족을 연합으로 끌어들일 생각이었고.
이는 부관도 잘 알고 있었기에 아이누 탐사대장의 말에 곧바로 대답했다.
“일단 이 요새에 부랴트 족 출신들이 좀 있어서 이들을 통해 부랴트 족과 접촉해볼 생각입니다.”
“으음...부디 우리 뜻대로 부랴트 족이 움직여줘야 하는데...”
평생 자신들이 이곳에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라 자신들이 철수했을 때 이곳을 장악할 친 연합 세력이 절실했기에 아이누 탐사대장이 중얼거리자 부관이 웃으며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부랴트 족 출신들과 이야기해보니 포로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이들도 러시아 차르국에 그렇게 좋은 감정이 많지는 않은 듯하더군요.”
그 말에 아이누 탐사대장은 러시아 차르국의 거만함과 원주민들을 무시하는 그 행동에 새삼 고마워하며 말했다.
“흐. 그거 다행이군. 그럼 부랴트 족과 접촉하면 곧바로 나에게 보고하게.”
“알겠습니다.”
* * *
연합은 부랴트 족과 접촉했고, 부랴트 족의 대족장 바하르는 새롭게 나타난 지배자인 연합의 사령관이 자신과 대화를 원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이르쿠츠크 요새로 향했다.
괜히 이 새로운 지배자에게 밉보일 이유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아이누 탐사대장은 이르쿠츠크 요새 사령관이 쓰던 집무실에서 바하르를 만났고.
간단한 통성명 후에 아이누 탐사대장은 커피를 내려 바하르에게 건넸다.
“이건...?”
“커피라는 일종의 차입니다.”
바하르는 이 검은 물을 보고 조금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이누 탐사대장이 먼저 한 모금 마시자 조심스럽게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후 표정을 살짝 찌푸렸다.
“음...향은 좋군요.”
맛은 없다는 말을 삼키는 바하르를 보고 아이누 탐사대장은 살짝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예. 향이 참 좋지요. 그리고 각성 효과도 있어 서양에선 꽤 인기 있는 차랍니다. 꽤 비싸기도 하고.”
“호오...”
바하르는 비싸다는 말에 다시 커피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지만, 쓴맛이 영 익숙하지 않아 표정을 찌푸리자 아이누 탐사대장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걸 넣어보시지요.”
“이건?”
“설탕입니다. 단맛을 더해줄 테니 마실만 할 겁니다.”
바하르는 아이누 탐사대장이 건네준 조그만 주사위만 한 결정을 받아 커피에 넣고 다시 한 모금 마셨고.
“허. 훨씬 낫군요.”
“그렇습니까?”
그렇게 아이누 탐사대장은 바하르와 커피를 마시며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의외로 바하르가 연합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듯 보였기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허어. 생각보다 연합에 대해 자세히 아시는군요.”
“새롭게 등장한 세력이니 당연히 관심을 보일 수밖에 없지요. 특히 강력한 코사크인들로 구성된 토벌대마저 연합에 패배해 고작 100명만이 돌아왔으니 그 강력함을 짐작할 수 있었고요. 그렇기에 언젠간 연합이 이곳에 나타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노력했었지요.”
부랴트 족은 현재는 약소 부족이나 다름없었기에 생존을 위해서라도 정보 수집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쓴웃음을 머금고 바하르가 중얼거리자 아이누 탐사대장이 눈을 빛내며 질문을 던졌다.
“그럼 저희가 여러 부족의 연합체라는 것도 아시겠군요?”
“물론입니다.”
“허면 부랴트 족도 저희 시베리아 부족 연합에 합류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말에 바하르는 신음을 흘리며 아이누 탐사대장에게 되물었다.
“으음...그건 조공을 바치라는 뜻입니까?”
“아니요. 연합의 일원이 되라는 뜻입니다.”
“연합의 일원이라고요?”
바하르가 놀란 표정으로 아이누 탐사대장을 바라보자 아이누 탐사대장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설명을 시작했다.
“예. 저희는 러시아 차르국을 이 시베리아 지역에서 최대한 몰아낼 생각입니다. 허나 이들을 한 번 몰아낸다고 끝나는 것은 아니지요. 저희가 장악한 지역을 계속 지키지 않는다면 러시아 차르국은 이전처럼 코사크인들을 내세워 다시 이곳을 장악하려 들 겁니다.”
“으음...그건 그렇겠지요.”
“허나 연합의 주요 부족들은 이곳과는 무척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지금 이 이르쿠츠크 요새를 지키는 병사들의 출신 부족 역시 저 북쪽이지요. 그런 만큼 저희는 언제까지 이곳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아이누 탐사대장이 여기까지 말하자 바하르는 아이누 탐사대장이 왜 자신을 찾았는지 확실히 이해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 저희 부랴트 족이 연합에 들어와 이 땅을 지켜라...이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바하르는 아이누 탐사대장의 말에 자신의 결정에 따라 부족의 미래가 결정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복잡한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고.
커피잔을 모두 비웠을 때 입을 열었다.
“혹시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일대는 원래 우리 부랴트 족의 영역이었습니다.”
“예. 대충은 들었습니다.”
“헌데...20년 전에 서쪽에서 코사크인들이 나타나면서 상황이 바뀌었지요. 이곳에 야영지를 건설한 코사크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저희 부랴트 족은 코사크인들과 맞서 싸웠습니다만...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저희가 다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투에서 제 아버지도 돌아가셨고요. 그래서 이 일대를 러시아 차르국에 넘겨주고 북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지요.”
아이누 탐사대장은 바하르의 말에 즉각 끼어들었다.
“제가 생각하기엔 코사크인들이 강하고 부랴트 족이 약해서 그러한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코사크인들은 화약 무기로 무장했고 부랴트 족은 그렇지 않았으며 화약 무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에 그러한 안타까운 결과가 나왔을 뿐이지요.”
그 말에 바하르는 눈을 빛내며 아이누 탐사대장을 바라보았다.
“허면...?”
“예. 연합에 합류하신다면 저들처럼 화약 무기로 무장할 수 있을 겁니다. 더불어 연합에서 화약 무기를 잘 다룰 수 있도록 철저히 훈련시킬 생각이고요. 그러니 그 부분은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연합에 합류한다면 화약 무기로 무장할 수 있다는 말에 바하르가 눈을 빛내자 아이누 탐사대장은 덧붙였다.
“그리고...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희 연합은 북미왕국과 동맹을 맺고 있습니다.”
“아. 북미왕국이라는 이름을 듣기는 했습니다만...”
러시아인들이 종종 북미왕국에 관해 이야기했던 것을 들었지만 자세한 것은 잘 모른다는 바하르의 대답에 아이누 탐사대장은 입을 열었다.
“북미왕국은 대국이고, 강국이며, 각종 산물이 넘쳐나는 부국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까?”
“그리고 부랴트 족이 연합에 합류하면 북미왕국과 교역할 수 있을 겁니다. 북미왕국과의 교역은 부랴트 족을 부유하게 만들어 줄 테고요.”
처음 바하르는 연합의 사령관이 왜 연합도 아니고 북미왕국을 저렇게 극찬하는 건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교역을 통해 부유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자 눈이 번쩍 떠졌다.
이 남쪽에는 여러 몽골 부족들이 있는 만큼 연합에 합류에 화약 무기로 무장하고 북미왕국의 물품을 이용해 중개무역을 한다면 막대한 이득을 챙길 수 있을 것 같았고.
해서 바하르는 결정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연합에 합류하도록 하지요.”
이에 아이누 탐사대장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현명하신 선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