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9화
“후우. 드디어...드디어 도착했군요.”
저 멀리 이르쿠츠크 요새가 보이기 시작하자 아이누 탐사대장 옆에 있던 부관은 이동 중 찬 바람을 막기 위해 뒤집어썼던 두툼한 모직물로 만든 복면을 벗으며 약간은 벅찬 표정으로 입을 열자 추운 겨울에 이곳까지 병력을 이끌고 이동하느라 무척 고생했던 아이누 탐사대장도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전에 야쿠츠크 요새를 공격했을 때도 느꼈지만...확실히 이곳 시베리아 지역의 추위는 장난이 아니군.”
“그렇죠. 추위 때문에 해가 떴을 때만 이동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누 섬에서는 해가 떨어졌을 때보다도 더 추운 것 같으니 원...아마 본국에서 각종 방한 장비를 충분히 지원해주지 않았더라면 원주민 출신 병사들은 몰라도 탐사대원들은 낙오했을 수도 있을 것 같긴 합니다.”
아이누 섬도 꽤 추운 편이었고, 카무이 반도는 그보다 더 추운 편이었다.
그리고 카무이 반도에서 겨울을 지냈던 아이누인들은 이제 시베리아의 추위에는 익숙하다면서 강한 자신감을 보였고.
하지만 그냥 외부 활동을 하는 것과 찬바람을 맞아가며 썰매를 타고 몇 시간 동안 이동하는 것은 상황이 전혀 달랐다.
아이누인들은 얼굴을 때리는 칼날 같은 찬바람과 폐를 얼어붙게 만드는 찬 공기에 기겁하며 불편하다는 이유로 배낭에 처박아 두었던 각종 방한 장비를 모조리 꺼내 챙겨 입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시베리아의 강추위를 겨우 버티며 이동할 수 있었고.
“그래. 확실히 그랬을 거야. 그리고 난 이 개고생을 다시 하고 싶진 않으니...여기까지 온 김에 러시아 차르국에 최대한 타격을 줘야겠고.”
일단 이번 원정대의 총지휘관은 아이누 탐사대장이 맡게 되었다.
이번 원정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기에 다른 족장들은 이번 원정에 참여하고 싶어도 부족을 장기간 비우기 어려워 모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이누 탐사대장은 이미 능력을 증명한 뛰어난 지휘관이었을뿐더러 실제론 북미왕국의 고위 지휘관이었으니 레나 요새에 있던 족장의 대리인들도 아이누 탐사대장이 원정대를 지휘하는 것에 별다른 이견을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기에 아이누 탐사대장은 탐사대원 1천 명과 머스킷으로 무장한 연합의 병사 4천 명으로 구성된 원정대의 지휘관이 되어 원정을 지휘했고 이번에 러시아 차르국 세력을 완전히 일소하지 못한다면, 나중에 또 이 고생을 해야 할 수도 있었기에 이르쿠츠크 요새를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쥐고 다짐하듯 말을 내뱉자 부관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거야 저 이르쿠츠크 요새만 함락시켜도 충분히 타격을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포로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저 이르쿠츠크 요새는 시베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이라니까요. 그리고 저 이르쿠츠크 요새만 함락시킨다면...이곳에서 동쪽에 있는 몇몇 거점들은 자연스레 러시아 차르국과의 연결이 끊기는 셈이니 동쪽의 러시아 차르국 세력은 자연스럽게 소멸할 테고요.”
이르쿠츠크 요새는 남시베리아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기에 남시베리아의 동서를 잇는 무척 중요한 거점이었다.
그렇기에 이르쿠츠크 요새를 함락하기만 하면 이르쿠츠크 요새와 이 동쪽은 러시아 차르국에서 떨어져 나가는 셈이었고 그것만 하더라도 막대한 타격을 주는 것 아니겠냐는 부관의 말에 아이누 탐사대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품에서 망원경을 꺼내 저 멀리 보이는 이르쿠츠크 요새를 주의 깊게 살피고 입을 열었다.
“그보다 시베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이라서 그런지 확실히 야쿠츠크 요새보다는 크군.”
“그러네요. 거의 2배는 되어 보이는데...이러면 생각보다 저항이 격렬할 수도 있겠는데요?”
부관 역시 망원경을 꺼내 이르쿠츠크 요새를 살펴보고 요새 위에서 자신들을 가리키며 허둥대는 러시아인들이 생각보다 많았기에 조금 걱정스럽다는 듯 이야기했지만, 아이누 탐사대장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봐야 후장식 화포를 버틸 수야 있겠나.”
“하하하. 뭐 그렇긴 하지요. 허면 어쩔까요. 바로 공격할까요?”
“흐음...시간이 조금 애매한데...”
아이누 탐사대장은 고개를 들어 해의 위치를 확인하고 조금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안전하게 가지. 일단 오늘은 야영지를 만들고 내일 공격하지. 그리고 사절을 보내 항복을 권유해 보고.”
“알겠습니다.”
* * *
이르쿠츠크 요새 사령관은 시베리아 부족 연합의 병사들이 보인다는 이야기에 급히 집무실을 뛰쳐나와 요새 위에서 망원경을 통해 연합의 움직임을 살폈고.
연합의 병사들이 요새로 접근하기보다는 야영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고 안도하며 중얼거렸다.
“휴우. 아무래도 지금 바로 공격할 생각은 없는 것 같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그래도 곧 공격하겠지?”
“아마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런 날씨에 밖에서 야영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니...아마 내일 바로 공격할 수도 있겠지요.”
부관이 조금 어두운 얼굴로 대답하자 사령관은 생각보다 빠른 연합의 움직임에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끙...브라츠크와 바르구진에서 곧바로 지원 병력과 물자를 보내준다 하더라도 여기까지 도착하는 데는 못해도 일주일은 더 걸릴 텐데...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발라간스크와 우딘스코예에서 일부 병력을 보내주었고, 이 이루크츠크의 주민들도 무장하고 나선 만큼 충분히 방어할 수야 있을 것 같습니다만...”
이르쿠츠크 북쪽의 키렌스크에서 연합이 레나 강을 따라 남하하고 있다는 전령을 보낸 후로 사령관은 곧바로 주변의 거점 마을에 전령을 보냈다.
해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한 발라간스크와 우딘스코예에서 지원 병력을 보내주었고, 그보다 멀리 있는 브라츠크와 바르구진에선 아직까지 연락이 없었는데 연합이 먼저 도착했기에 사령관은 아쉬움의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브라츠크와 바르구진도 작은 마을이라 이곳에서 지원 병력을 보내줘 봐야 얼마 되지도 않겠지만, 없는 것보다야 나으니까.
그때 누군가가 사령관과 부관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들이 머스킷으로만 무장한 병사들이라면 방벽과 대포를 이용해 충분히 물리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북미왕국의 후장식 대포와 작열탄을 가져왔다면...하루를 버티기도 어려울 겁니다.”
그 말에 사령관과 부관은 고개를 돌렸고 한 사내를 보고 부관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고르? 감히 어디서 입을 함부로...”
“됐네.”
사령관은 부관을 제지했다.
이고르는 이제 모든 직위를 박탈당한 유배된 죄인에 불과했지만, 연합과 전투를 벌인 경험이 있었기에 이고르의 말에 무게감이 있었던 것이다.
해서 사령관은 이고르에게 가까이 다가오라고 손짓한 후 조금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작열탄이 그 정도로 위력적이라고?”
사령관은 이고르가 작열탄을 가져왔다면 하루도 버티지 못할 거라는 이야기가 못내 걸려 질문을 던지자 이고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말 그대로 자그마한 화약통이 날라와 터지는 셈이니까요.”
“으음...하지만 우리도 대포가 있네. 저들이 대포를 쏘는 동안 우리도 저들의 대포를 조준한다면...”
“전에도 보고한 것 같지만 북미왕국 대포의 사거리는 생각보다 깁니다. 우리의 대포는 저들에게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할 겁니다.”
“으음...”
계속된 비관적인 예측에 사령관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을 때 부관이 소리쳤다.
“어?! 사령관님! 저길 보십시오!”
“음?”
이고르와 이야기하던 사령관은 고개를 돌려 백기를 들고 이르쿠츠크 요새로 접근하는 무리를 보고 중얼거렸다.
“백기라...사절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만...어쩔까요?”
“무슨 얘기를 할지 짐작은 가지만...일단 불러오게.”
“알겠습니다.”
부관이 요새 위에서 내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사령관은 고개를 돌려 분노와 공포가 뒤섞인 얼굴로 멍하니 연합 쪽을 바라보는 이고르를 보고 물었다.
“혹시 더 하고 싶은 말 있나?”
그 말에 이고르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합에 대항했던 야쿠츠크 요새가 폐허가 되었다는 것을 상기하십시오.”
“흐음...”
* * *
“항복하면 목숨은 보장하겠다?”
“그렇습니다.”
부관이 연합의 사절을 데려오자 사령관은 사절을 집무실로 불러들인 후 모두를 내보내고 사절과 독대했다.
그리고 사령관의 예상대로 사절은 항복하라고, 그러면 목숨은 보장해주겠다고 이야기했고.
“그걸 어떻게 믿나. 자네들이 우리에게 원한이 깊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데. 그리고 자네들은 야쿠츠크 요새를 초토화하고 그곳에 살던 주민들을 모두 죽이지 않았나.”
사령관의 말에 사절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음? 설마요. 저희는 야쿠츠크 요새에 살던 주민들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보호하고 있지요.”
“보호? 포로 신세라는 건가?”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야쿠츠크 요새의 생존자들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사령관이 눈을 빛내며 급히 질문을 던지자 사절이 답했다.
“당시 상황을 간략히 설명하자면 야쿠츠크 요새도 이곳과 같았습니다. 병사들뿐만 아니라 주민들도 모두 무장하고 요새를 방패 삼아 버텼지요. 물론 저희 연합의 공격을 버티지는 못했고 이들은 결국 저희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포로?”
“예. 민간인이긴 하지만 무장하고 전투에 참여했으니 일종의 병사로 간주한 겁니다. 그렇기에 포로 대우를 한 거지요. 그렇게 야쿠츠크 요새에 살던 남성들이 모두 포로가 되자 남은 여성, 아이, 노인들이 문제였지요. 사령관님의 말처럼 야쿠츠크 요새 주변의 원주민들은 러시아인들에게 원한이 없지 않았으니 그냥 이들을 내버려 두면 보복받을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포로와 함께 포로수용소로 보냈을 뿐입니다.”
사절의 대답에 사령관은 생각이 복잡한 듯 한참을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으음. 포로수용소라...그럼 만약에 말이네. 우리가 저항하지 않고 바로 항복해도 포로수용소로 가는 건가?”
사절은 사령관의 질문에 눈을 빛냈다.
사령관의 말은 항복하면 제대로 대우해 줄 것이냐고 묻는 것이었으니.
“아시다시피 연합의 구성원인 시베리아 원주민 부족들은 러시아 차르국에 강한 원한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이 원한 때문에 복수라는 명분으로 불필요한 학살을 하지는 않겠지만...항복했다고 해서 당장 당신들을 연합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그 말에 사령관은 어두운 얼굴로 사절을 보고 말했다.
“결국, 항복하더라도 포로수용소로 갈 수밖에 없다는 건데 그럼 항복할 이유가 없지. 저항해도 죽고, 항복해도 죽는다면 난 저항하는 쪽을 택하겠네.”
연합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뜻은 포로로 삼겠다는 뜻이고, 그 이야기는 평생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로 지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러시아 차르국이 연합과 협상하면서 배신자인 자신들을 요구할 수도 있었고.
그렇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해 나름대로 비장하게 말했지만 그런 사령관을 보고 사절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제 말을 오해하셨군요. 항복한다고 평생 포로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연합은 항복한 이들을 협상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을 거고요.”
“아니라고?”
“예. 순순히 항복한 자들을 협상을 통해 러시아 차르국에 돌려보낸다면, 항복한 자들이 어떤 대우를 받을지 충분히 짐작하니까요. 그렇기에 순순히 항복한 러시아인들은 포로수용소에서 일정 기간 노역에 종사한 후 풀려나게 될 겁니다.”
“풀려난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인들이 지낼 땅도 마련해줄 생각이니 그곳에서 땅을 일구며 살아가면 되겠지요.”
“으음...”
사절의 말에 사령관은 생각이 많아진 듯했다.
항복하면 목숨은 건질 수 있겠지만 지금 누리는 이 지휘는 사라지는 셈이고, 이곳에선 원주민들에게 조공을 뜯어내 풍족하게 살 수 있었지만 항복하게 되면 그런 것은 불가능해지는 만큼 고민이 클 수밖에 없었고.
해서 한참을 고민하던 사령관은 사절을 보고 말했다.
“후우. 잘 들었네. 다만 이 자리에서 바로 결론 내리기는 어렵군.”
그 말에 사절은 조금 아쉬워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생각할 시간을 많이 드릴 수는 없어서요. 저희는 내일 해가 뜨면 공격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그 전에 항복하실 생각이라면 백기를 내거십시오. 아. 물론 전투가 시작된 후에도 항복하고 싶으시다면 백기를 내가시면 될 겁니다. 물론 그 경우는 처우가 좀 달라질 테니 그 점은 고려하시고요.”
* * *
다음날, 아이누 탐사대장은 하늘을 바라본 후 다시 이르쿠츠크 요새를 살피고 말했다.
“흠. 해가 뜬지도 상당히 지났는데 백기가 올라오지 않는군.”
이에 어제 이르쿠츠크 요새를 방문했었던 외무청의 하급 관리가 못내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대화를 나눴을 때는 항복할 의사가 없지 않았던 것 같은 데 결국 저항하기로 결정을 내렸나 보군요.”
“쯧쯧. 좀 쉽게 가나 했더니 어쩔 수 없지. 바로 후장식 화포를 전진 배치하게. 배치가 끝나면 곧바로 포격을 시작하고.”
아이누 탐사대장의 명령에 부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고 이르쿠츠크 요새의 대포 사거리 바깥까지 접근한 후 가져온 후장식 화포를 배치하기 시작했고.
곧바로 포격 준비를 시작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아이누 탐사대장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을 때 외무청 하급 관리가 탄성을 질렀다.
“어?! 대장님!”
“음?”
“저기...저거 백기 아닙니까?”
아이누 탐사대장은 사절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 이르쿠츠크 요새를 바라보았고 이르쿠츠크 요새에서 백기가 천천히 올라오는 모습에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허. 그렇네? 뭐지?”
“일단 포격부터 중지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 그러도록 하지. 부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