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3화
조용한 곰은 정성국의 집무실을 찾아와 쿠나킨이 보낸 보고서를 건네며 시베리아 부족 연합의 분위기를 설명했고, 정성국은 패잔병들이 시베리아 원주민 부족을 약탈한 일이 커져 상황이 이렇게 변했다는 조용한 곰의 설명에 그가 건넨 쿠나킨의 보고서를 읽으며 중얼거렸다.
“흐음...일부 부족이 강하게 주장하기는 하지만 다른 부족들도 대부분은 동의한다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아이누 탐사대장이나 현지를 방문한 외무청 관리의 판단으로는 이런 연합의 행동을 강력히 반대하는 것이 북미왕국에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고 덧붙였습니다.”
그 말에 정성국은 보고서에서 눈을 떼고 조용한 곰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연합의 족장들이 우리에게 보이는 신뢰가 사라질 수 있다?”
“그렇습니다. 연합의 행동을 막기는 쉽습니다. 애당초 이동형 60mm 화포는 저들에게 빌려준 것이니 이를 회수하면 그만이지요. 다만 이렇게 되면...저들은 우리도 완전히 믿지는 못할 겁니다. 물론 굳이 저희가 저들에게 질질 끌려갈 필요는 없는데...”
“그렇다고 러시아 차르국을 위해 손해를 볼 필요는 없다는 거겠지?”
정성국의 말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인 후 정성국의 책상 위에 펼쳐진 보고서에 보이는 시베리아 지도를 조심스럽게 가리키며 말했다.
“예. 그리고 레나 강 동쪽에 한정한다 하더라도...야쿠츠크 남쪽, 그러니까 레나 강 상류는 서쪽으로 뻗어있는 만큼 나중에 레나 강 동쪽을 모두 장악한다 하더라도 연합의 영역은 서남쪽으로만 확장하게 됩니다. 그러니 굳이 레나 강을 경계로 영역을 정할 필요가 있느냐고...”
레나 강의 수원지는 바이칼 호 인근이었고 이곳에서 동쪽으로 흐르다 북쪽으로 꺾이면서 바다로 흘러나간다.
그리고 야쿠츠크 요새나 레나 강에 세운 연합의 거점은 모두 레나 강이 바이칼 호 인근에서 발원해 동쪽으로 흐르다 북쪽으로 꺾인 지점 근처에 자리했고.
그렇기에 레나 강을 경계로 동쪽 지역만 확보하려 해도 연합의 영역은 남서쪽으로 거의 1000km 가까이 늘어나게 되는데 영역이 이렇게 되면 오히려 방어하는 것이 더 불편해질 테니 레나 강을 경계로 영역을 정할 필요가 있느냐는 쿠나킨의 말에 정성국은 볼을 긁적였다.
“가뜩이나 인구가 적은 연합인데 영역이 넓어져 봐야 오히려 인구가 분산되어 연합의 발전이 느려질 것을 우려해 레나 강을 경계로 동쪽만 장악하자...뭐 이런 생각이었네. 그리고 지금 레나 강에 건설 중인 거점을 기준으로 남서쪽은 아예 비워둘 생각이었고. 하지만 연합이 레나 강 서쪽의 원주민 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 영역을 확장하겠다는데 우리가 이를 막는 것도 웃긴 노릇이지.”
그 말에 조용한 곰은 눈을 형형히 빛내며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그럼...”
“무기와 식량을 지원해주게. 연합이 패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지니까 말일세.”
정성국의 말처럼 연합이 러시아 차르국의 요새를 공격하다 큰 피해를 보고 막힌다면 시베리아의 상황이 또 변할 수 있었다.
그때 가서 추가로 연합을 지원하는 것보다야 지금 적당히 연합을 지원해 연합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러시아 차르국에 공물을 바치고 있는 시베리아 원주민 부족들을 해방시키고 연합에 합류시키는 것이 나아 보였고.
그건 조용한 곰도 같은 생각이었기에 정성국의 지원 결정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하. 그리고 국영 상단을 통해 아이누 탐사대를 용병 자격으로 연합에 추가 합류시키는 것도 괜찮을 듯싶습니다만...”
현재 아이누 탐사대장과 아이누 탐사대가 직접 시베리아 지역에 파견되어 있기는 하지만 전부가 파견된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국영 상단의 호위 명목으로 시베리아 지역을 드나들었고,
일부는 카무이 항에서 대기 중이거나 아이누 섬, 홋카이도 섬에 배치된 상태였고.
조용한 곰은 이들을 거론하자 정성국은 잠깐 고민하다 답했다.
“어차피 연합을 지원해 러시아 차르국을 시베리아 지역에서 몰아낼 거라면야 아이누 탐사대를 추가로 연합에 보내는 것도 나쁠 것은 없지. 다만 전부는 너무 많고...지금 연합에 용병 자격으로 합류한 아이누 탐사대가 200명이지?”
“그렇습니다.”
“일단 추가로 보내 2천 명으로 맞추게. 그 정도면 괜찮을 듯싶군.”
지금도 발언력이 강한 편인데 탐사대를 전부 보내면 연합의 균형이 어그러질 수 있다는 우려에 정성국이 이렇게 이야기하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하.”
“그리고 런던에 주재 중인 북미왕국 대사가 러시아 차르국의 외교관과 협상 중이지 않나.”
러시아 차르국은 토벌대가 연합에 대패해 거의 전멸했다는 보고를 접한 후 북미왕국과 협상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런던에 외교관을 보냈고.
이에 대한 보고를 최근에 받았었기에 정성국이 이를 거론하자 조용한 곰은 이전에는 북미왕국을 무시했지만, 지금은 저자세로 북미왕국과 협상 중인 러시아 차르국을 떠올리며 씩 웃었다.
“그렇습니다. 이전과는 달리 흑룡강에서의 일을 사죄하면서 이에 대한 배상 문제부터 협상 중이지요.”
러시아 차르국은 연합을 북미왕국이 세운 일종의 괴뢰국으로 판단했기에 북미왕국과 협상해서 분쟁을 마무리 짓고 연합이 영역을 확장하는 것을 막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런던에 있는 북미왕국 대사는 자신은 시베리아의 상황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유럽의 일은 자신이 결정할 권한이 있어도 시베리아의 일은 권한 밖의 일이라며 자신이 협상할 수 있는 일은 예전 흑룡강에서 러시아 차르국이 북미왕국을 공격했던 일 뿐이라고 답했다.
러시아 차르국 역시 북미왕국과 협상하게 되면 분명 북미왕국이 이 아무르 강에서의 일을 언급하며 배상을 요구하리라고 짐작했기에 러시아 차르국의 외교관은 일단 아무르 강에서의 일을 북미왕국 대사와 협상하면서 북미왕국에서 훈령이 오기를 기다리는 상황이었고.
이에 정성국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런던에 나가 있는 북미왕국 대사에게 현 시베리아의 상황을 알리고 적당히 시간을 끌라고 하게.”
“아. 연합이 남하하면 저들은 더욱 급해질 테니...”
“그래. 더 많은 이득을 챙길 수 있겠지. 그리고 저들은 우리와 협상이 끝나기 전까지는 함부로 시베리아 지역에 병력을 파병하기도 어려울 거야. 잘못하면 우리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테니. 그러니 우리가 협상을 질질 끌수록 연합은 손쉽게 영역을 확장할 수 있겠지.”
정성국의 말에 조용한 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곧바로 런던에 연락을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유럽의 국가들이 계속해서 신식 소총 구매 요청을 하는데 어쩔까요.”
“끙...”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네덜란드 육군이 프랑스 육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이후 그 원인이 신식 소총이라는 것이 알려지며 유럽 각국은 북미왕국에 신식 소총 구매 의사를 타진했고.
정성국은 갑작스러운 이 신식 소총 구매 요청에 놀랐지만, 유럽의 사정과 암스테르담 전투의 결과를 듣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생각보다 여러 나라에서 신식 소총을 구매하려 했기에 정성국은 신식 소총을 판매해야 하는지로 고민이 많아 잠시 대답을 미루었는데 조용한 곰이 슬슬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이야기하자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지금까지 들어온 구매 요청이 정확히 얼마나 되지?”
“에스파냐 2만 자루, 네덜란드 1만 자루, 덴마크 1만 자루, 잉글랜드 1만 자루, 신성로마제국 2만 자루, 프랑스 4만 자루, 도합 11만 정입니다. 더불어 총알을 모두 합치면 거의 3천만 발 정도가 되고요.”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보고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와. 이렇게 들으니 정말 수량이 어마어마하구만. 그 비싼 신식 소총을 저렇게 대량 주문할 줄은...헌데 아무리 무기 제조 공방을 확장했다고 해도 단기간에 저 많은 수량을 모두 생산할 수 있나?”
“알아보니 갑오 소총 생산량을 줄인다면야 3년 안에 생산할 수는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이 경우엔 민간에 푸는 신식 소총 물량까지 모두 수출로 돌려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총알은 큰 문제 없다고 합니다.”
“그래? 어차피 갑오 소총이야 비축된 물량이 꽤 있으니 주문한 물량을 3년 안에는 생산할 수 있다는 소린데...이번 전쟁이 그렇게 길어지려나?”
정성국의 질문에 조용한 곰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지금 주문해도 몇 년 후에 받을 수 있다고 알렸는데도 상관없다며 제발 신식 소총을 팔아달라며 주문한 만큼 그 부분은 저희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네덜란드 육군은 프랑스 육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헌데 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네덜란드 육군이 큰 피해 없이 프랑스 육군을 물리쳤으니 당연히 유럽의 각국은 후장식 소총으로 알려진 신식 소총을 어떻게든 확보하기 위해 런던으로 외교관을 급파했고.
그런 상황이라 유럽 각국은 당장 신식 소총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주문을 취소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를 조용한 곰이 설명하자 정성국은 그건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다만 다른 나라는 몰라도 프랑스의 주문은 거부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만...”
조용한 곰은 현재 유럽에서 진행 중인 전쟁은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유럽 각국이 연합한 형태다 보니 프랑스에 신식 소총을 팔게 되면 프랑스를 지원해주는 모양새라 조금 꺼려졌기에 이렇게 이야기하자 정성국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글쎄. 우린 지금까지 유럽의 일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해왔네. 헌데 프랑스의 주문만 거부한다면 반프랑스 동맹을 지지하는 셈이라 오히려 그게 더 문제 아닌가. 그리고 위그노들을 생각하면 노골적으로 프랑스와 적대하기도 조금 그렇지.”
“음...”
이미 대다수의 위그노들은 박해를 피해 북미왕국으로 이주했기에 최근엔 위그노들의 수가 좀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이주민의 수가 적지는 않은 편이었다.
이렇게 위그노들이 계속 프랑스를 탈출하고 있었지만, 루이 14세는 오히려 이들이 남아봐야 분란만 일으킬 거라는 생각에 이를 모른 척하고 있었고.
덕분에 누벨 프랑스 지역, 이로쿼이 지역, 일리노이 지역을 빠르게 개발할 수 있었다.
그런 만큼 괜히 프랑스를 노골적으로 적대했다가 프랑스가 국경을 통제하면 지금 유입되는 프랑스인 이주민들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을 상기시키자 조용한 곰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양 진형에 다 판매하면 나중에 외교적으로 고립될 우려가 있긴 한데...”
정성국이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조용한 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생각하기엔 프랑스에 신식 소총을 판매한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다른 나라라면 몰라도 지금까지 저희와의 무역으로 막대한 이득을 보고 있는 에스파냐, 네덜란드, 잉글랜드는 저희를 강하게 비난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리고 덴마크도 상황은 비슷할 테고...뭐 신성로마제국에서나 투덜거릴 수 있겠군요.”
“그런가. 흐음...”
조용한 곰의 말에도 정성국은 계속 고민했다.
‘이걸 허락하면 유럽에 12만 자루 가까이 풀리는 셈인데...뭐 상관은 없으려나? 어차피 바다로 가로막혀 있고 비행기에 장갑차까지 개발 중이니...’
그때 정성국의 귓가에 조용한 곰의 진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문을 거부하던가 모든 주문을 받아들이는 것 중에서 선택한다면...차라리 후자가 낫지 않겠습니까.”
정성국이 생각이 많은 눈치였기에 조용한 곰이 슬쩍 입을 열자 정성국은 생각을 멈추고 조용한 곰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먼저 신식 소총과 총알 대금만 해도 어마어마하잖습니까. 굳이 이걸 포기할 이유가 있습니까? 특히나 최근 내륙 지역의 개발로 막대한 자금과 자원이 소모되고 있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흐음...”
확실히 최근엔 내륙 지역을 개발 중이라 막대한 자금이 소모되고 있었다.
그것을 고려하면 팔 수 있는 것은 팔아 조금이라도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 나쁠 것은 없었기에 정성국이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조용한 곰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들이 신식 소총을 운용하면 주기적으로 총알을 사들일 수밖에 없으니...저들이 저희의 총알을 복제하기 전까지는 저희를 공격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겁니다. 특히나 지금 신식 소총을 구매하겠다는 나라들은 유럽의 강국이며 이들 정도가 우리 북미왕국을 공격할 수 있는 나라들이잖습니까.”
“아하. 이들을 신식 소총으로 무장시켜 족쇄를 채우겠다?”
“그렇습니다. 더불어 저들이 신식 소총으로 무장하면 할수록 지출이 늘어날 테니 저들의 발전을 조금이나마 늦출 수도 있고요. 그러니 저들이 더 많은 신식 소총으로 무장하는 것이 오히려 저희에게는 이득입니다.”
신식 소총과 총알 가격을 처음부터 무척 비싸게 책정한 탓에 조용한 곰의 말대로 유럽의 각국이 신식 소총으로 무장할수록 그만큼 경제적인 부담은 커지게 된다.
유럽의 각국도 이를 모르지야 않을 테지만 생존이 걸린 문제였기에 어쩔 수 없이 신식 소총으로 무장할 수밖에 없었고.
더불어 이렇게 대거 신식 소총을 팔아 너도나도 신식 소총으로 무장하게 되면 신식 소총으로 무장해 보는 이득은 거의 없고 경제적인 부담만 커지니 장기적으로 유럽의 발전이 늦어질 수도 있었다.
‘아니면 어떻게든 돈을 벌기 위해 식민지 건설에 더 열을 올릴 수도 있겠네. 슬슬 다른 지역에도 신경을 좀 써야 하나.’
“흐음...알겠네. 신식 소총을 판매하도록 하게. 그리고 유럽 각국에 미리 알리도록 하게. 우리는 유럽의 일에 개입할 마음이 없는 만큼 차별하지 않고 신식 소총을 판매할 생각이라고 말이네.”
“나중에 뒷말이 나오지 않도록 미리 이야기하라는 뜻이군요.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