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6화
러시아의 차르인 표도르 3세는 알현을 청해 이르쿠츠크에서 전령을 보냈다는 외무장관을 보고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런던에서 시베리아 부족 연합의 존재와 북미왕국이 연합과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표도르 3세가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뒤에 북미왕국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토벌대가 연합을 계속해서 공격하는 것은 일단 멈추라는 명령을 전하기 위해 급히 이르쿠츠크로 전령을 보내기는 했다.
다만 모스크바에서 이르쿠츠크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면 명령에 대한 보고가 올라오기는 이른 시기였기에 표도르 3세가 외무장관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르쿠츠크에서 보고가 올라왔다고? 벌써 말인가?”
“이전에 보낸 전령을 통해 명령서를 수신하고 보고서를 올린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이르쿠츠크 사령관이 따로 긴급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외무장관의 말에 표도르 3세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외무장관의 안색이 썩 좋지 않고 이르쿠츠크 사령관이 긴급 보고서를 올렸다는 이야기에 조금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허. 긴급 보고서라. 무슨 내용인가?”
“그...그게...”
“어허. 무슨 보고길래 그렇게 머뭇거리는 건가.”
표도르 3세가 이르쿠츠크 요새에서 올라온 보고서의 내용을 묻자 외무장관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흐렸고 그런 외무장관의 반응에 표도르 3세는 불길함을 느끼면서 외무장관을 다그쳤다.
이에 외무장관은 잠시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다 보고를 시작했다.
“이르쿠츠크 요새 사령관이 보고하기를 우리 러시아 차르국에 반기를 든 시베리아 원주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야쿠츠크 요새로 떠났던 토벌대가 시베리아 원주민 연합의 거점을 공격하다 대패하고 퇴각했다는...”
외무장관은 점차 표정이 험악해지는 표도르 3세의 얼굴에 말을 흐렸고 그런 외무장관을 보고 표도르 3세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짚었다.
“하아. 설마 했는데 토벌대는 그대로 이르쿠츠크 요새를 떠난 건가?”
“이르쿠츠크 사령관이 토벌대 대장인 이고르에게 야쿠츠크 요새의 상황을 설명했지만 이고르는 자신이 받은 임무는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진압이라 주변 상황이 조금 바뀐 것으로 임무 수행을 멈출 수는 없다면서 야쿠츠크 요새로 떠났다고 합니다.”
“끙...”
아직까지 토벌대로부터 별다른 보고가 올라오지 않았기에 혹시나 하긴 했다.
하지만 야쿠츠크 요새가 폐허가 된 이상 레나 강 중류와 하류는 적대 지역이나 마찬가지였고 보급도 어려운 만큼 토벌대의 지휘관인 이고르가 조금은 신중하게 움직이길 바랐는데 이고르는 하루라도 빨리 동부 시베리아 지역의 원주민 반란을 진압하고 모피를 얻어야 한다는 생각에 서둘렀고 그래서 대패한 것 같다는 생각에 혀를 차면서 외무장관에게 자세한 보고를 하라는 듯 손짓했다.
이에 외무장관은 이르쿠츠크 사령관이 첨부한 이고르가 작성한 보고서에 관련된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야쿠츠크 요새에 도착해 주변을 정찰한 일부터, 레나 강 동쪽에 새로운 연합의 거점을 발견하고 기습적으로 공격했지만 거점에 배치된 북미왕국 대포의 위력에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리고 거점에서 봉화가 오르며 원주민 기병들이 뒤쪽에서 나타났기에 어쩔 수 없이 레나 강을 도하 했고, 보급 물자를 대부분 잃었고 이미 기세가 꺾인 상태라 이르쿠츠크로 회군했지만, 원주민 기병들의 집요한 추적과 코사크인들이 살기 위해 탈영해 이르쿠츠크 요새에 도달했을 때는 고작 100명이 전부였다는 것까지.
표도르 3세는 외무장관에게 이 이야기를 들으며 이미 야쿠츠크 요새를 함락시킨 연합을 이고르가 너무 만만하게 보고 덤볐다가 이 사달이 났다고 생각해 계속해서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차다가 3천 명의 병력이 100명으로 줄어들었다는 외무장관의 보고에 결국 커다란 탄식을 토해냈다.
“하. 3천 명 중 이르쿠츠크 요새까지 도착한 병사가 고작 100명? 아무리 원주민들 뒤에 북미왕국이 있다고 해도 그렇지...그 코사크 기병들이 허무하게 패배했다고?”
이전에 러시아 차르국이 레나 강까지 진출한 후 거점을 세우고 다시 동진해 오호츠크 해안까지 진출했을 당시 자신들에게 반항하던 시베리아 원주민 부족들의 본거지를 불태워 러시아 차르국의 강력함을 확실히 보여주고 주변 부족들의 기꺼이 공물을 바치게 했던 것이 바로 코사크인들이었다.
그런 코사크인들이 연합의 병사들과 제대로 전투도 벌이지 못하고 너무나도 허무하게 죽어 나갔다는 사실에 표도르 3세가 도저히 믿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리자 외무장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르쿠츠크 요새 사령관은 함께 퇴각한 코사크인들과 대화를 나눠본 후 이고르가 시베리아 부족 연합의 존재를 너무 만만하게 판단하고 공을 세우기 위해 섣불리 공격했기에 벌어진 참사라고 평가했습니다.”
이르쿠츠크 요새 사령관도 자신의 판단과 같았기에 표도르 3세는 무능한 이고르를 속으로 욕하며 골치가 아픈 듯 머리를 부여잡고 중얼거렸다.
“참사라...그래. 아무리 북미왕국이 시베리아 원주민들에게 무기를 지원해주었다지만 이렇게 처참하게 패배한 것은 참사가 맞긴 하군.”
이미 표도르 3세는 즉위 직후 군대 개혁을 단행했고 그동안 일부 귀족 가문들만 독점하고 있던 지휘관을 개방해 능력만 있다면 가문에 구애받지 않고 지휘관이 될 수 있도록 개혁했다.
그러한 결과 대귀족 출신이 아닌 이고르도 이번에 토벌대의 지휘관이 될 수 있었고.
헌데 이고르가 공을 세우기 위해 서두르다 연합에 패배하고 병력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해 거의 전멸에 가까운 결과가 나온 만큼 귀족들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이 결과를 널리 알리며 다시 군대의 지휘관 임명권을 일부 가문들이 독점하기 위해 자신을 압박하려 들 것이 뻔해 보였기에 표도르 3세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짓자 외무장관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문제는 이고르를 비롯한 패잔병들이 식량이 없기에 이르쿠츠크 요새로 이동하면서 내륙의 원주민 마을을 약탈했고 이 소식이 주변에 알려지면 그동안 비교적 협조적이었던 레나 강 상류에 사는 원주민 부족들도 저희에게 등을 돌릴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더불어 그동안 시베리아 지역의 원주민들은 우리 러시아 차르국의 강력함을 의심하지 않았지만...연이은 패배로 인해 우리 러시아 차르국의 강력함을 의심하는 원주민들도 늘어날 수 있다는 것 또한 문제라고 하더군요.”
시베리아 지역에 배치된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넓은 시베리아 지역을 별다른 문제 없이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최소한의 하사품을 제공해 가죽의 대가를 치렀다는 것과 원주민들이 코사크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고.
헌데 북미왕국이 이 지역에 개입한 이상 상황은 변할 수밖에 없었다.
북미왕국산 물품이 뛰어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기에 북미왕국의 상인들이 시베리아 지역에 진출하게 되면 원주민들은 러시아 차르국에서 내어주는 하사품에 불만을 품을 것이 분명했고.
문제는 이러한 불만을 힘으로 억눌러야 하는 코사크인들이 연합과의 전투에서 몇 번이고 패배했으니 원주민들이 보기엔 러시아 차르국보다 연합이 더 대단하다고 판단할 여지가 있었고 어쩌면 연합에 공물을 바치며 보호해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다는 이르쿠츠크 요새 사령관의 걱정에 표도르 3세도 수긍하며 다시 한번 탄식을 터트렸다.
“하아. 주변 지역을 안정시키라고 토벌대를 보냈는데 오히려 이 토벌대 때문에 주변 지역이 불안해질줄은...”
“예. 분명 이에 관한 대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더불어 이르쿠츠크 요새 사령관은 추가로 대규모 토벌군을 조직해 연합을 아예 지워버리기 전에는 동부 시베리아 지역에서의 모피 수급은 불가능하고, 이르쿠츠크 요새의 모피 수급량도 줄어들 것이라고 보고했습니다.”
“으음...”
토벌대가 연합에 패배한 이상 동부 시베리아 지역에서의 모피 수급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짐작했지만 그 여파로 후방에 있는 이르쿠츠크 요새의 모피 수급량마저 줄어들 줄은 몰랐기에 표도르 3세는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가장 돈이 되는 검은담비의 모피는 주로 이 지역에서 나온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리고 모피 산업은 러시아 차르국 수입의 약 10프로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산업이었기에 생각보다 타격이 컸고.
“또한, 그동안 시베리아 부족 연합은 우리 러시아 차르국의 힘을 두려워해 방어에 전념했지만 몇 번의 승리를 거둔 이상 저희를 얕잡아 보고 남하할 수도 있으며 연합은 북미왕국의 작열탄을 사용하는 만큼 그렇게 되면 극동지역을 모두 잃을 수도 있을 거라고 이르쿠츠크 사령관이 무척 걱정했습니다.”
연합이 곧 남하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에 표도르 3세는 잘못하면 모피 산업이 극도로 축소될 수도 있다는 우려에 움찔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표도르 3세가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을 던졌다.
“시베리아 부족 연합이 남하한 다라...과연 가능할까? 아무리 연합의 뒤에 북미왕국이 있다고 해도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수가 그리 많지는 않지 않나.”
하지만 외무장관은 표도르 3세보다는 이르쿠츠크 사령관의 의견에 공감하는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흐음...제가 생각하기엔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그동안 유럽의 각국은 북미왕국과 동맹을 요청하고 북미왕국의 대포와 작열탄을 팔아달라고 수없이 요청했지만 절대 불가를 외쳤었지요. 이런 북미왕국이 연합과는 동맹도 맺고 작열탄마저 제공했습니다. 그러니 북미왕국의 후장식 소총 역시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외무장관이 북미왕국의 후장식 소총을 언급하자 표도르 3세는 작게 탄성을 질렀다.
“아...하긴. 동맹국이 아닌 네덜란드조차 북미왕국의 후장식 소총으로 무장했으니...”
“예. 그리고 네덜란드가 강력하기로 소문난 프랑스 육군을 격파한 것이 북미왕국의 후장식 소총 때문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원주민들의 수가 적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이미 서유럽은 한창 전쟁 중이었다.
프랑스-스웨덴 연합과 반프랑스 동맹 간의.
그리고 프랑스는 북미왕국의 전유물로 여겼던 작열탄을 선보이며 네덜란드-덴마크 해군 연합을 격파해 기세를 올리며 이번 전쟁에 끼어든 여러 나라 중 네덜란드를 다시 정복하기 위해 육군을 움직였고.
이에 여러 지식인은 이번엔 네덜란드가 버티지 못할 것으로 여겼다.
네덜란드 해군의 수호신인 라위터르는 이미 은퇴해 네덜란드를 떠나 북미왕국에 정착했고 프랑스 해군이 작열탄으로 무장한 이상 네덜란드 해군이 프랑스 해군을 감당하긴 어려워 보였기에.
프랑스가 해군을 움직여 네덜란드 해군을 격파하고 암스테르담으로 병력을 수송하면 네덜란드는 버티지 못하리라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프랑스의 해군은 재정비 후 암스테르담으로 향했고 네덜란드 해군은 필사적으로 방어했지만, 작열탄으로 무장한 프랑스 함대를 감당할 수 없었고.
그렇게 프랑스 해군은 이전의 치욕을 완전히 갚아주며 프랑스 육군 1만 명을 암스테르담에 수송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기에 프랑스 육군이 암스테르담을 점령해 네덜란드는 멸망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의외의 결과가 나타났다.
절반도 안 되는 네덜란드 육군이 프랑스 육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리고 이 승리는 북미왕국에서 들여온 신식 소총이라고 알려진 후장식 소청 2천 정 때문이었다는 것이 널리 알려졌고.
네덜란드는 북미왕국과의 협상을 통해 남태평양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신식 소총 1천 정을 얻을 수 있었고 프랑스 해군의 작열탄이 알려진 후에는 에스파냐와 협상해 에스파냐가 보유한 신식 소총 1천 정도 대여해 총 2천 정의 신식 소총을 확보했다.
이에 윌리엄 3세는 고르고 고른 병사들에게 신식 소총으로 무장시켰고.
아무리 신식 소총이 갑오 소총에 비해 재장전 시간이 더 걸린다 한들 머스킷에 비교될 정도는 아니었기에 전투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화력에서 밀린 프랑스 육군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수가 적은 네덜란드 군이 북미왕국의 신식 소총으로 빠른 재장전을 통해 총알을 퍼부어 프랑스 육군을 물리쳤다는 소식은 표도르 3세도 들었기에 원주민들의 수가 적은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외무장관의 이야기에 곤란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허면 최소한 극동지역에 추가로 병력을 지원해야 한다는 소리 아닌가.”
“아니면...북미왕국과 외교적인 협상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겠지요.”
“이제 와서?”
그 말에 표도르 3세는 외무장관을 째려보았다.
생각해보면 이전 아무르 강에서의 일로 북미왕국이 항의했을 때 원만하게 해결했다면 북미왕국도 시베리아 원주민 부족들을 지원하지 않았을 테고, 그러면 연합이 탄생할 리가 없었으니 당시 북미왕국에게 굽신거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던 외무장관을 보는 표도르 3세의 눈길이 고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표도르 3세의 반응에 외무장관도 자신의 죄를 모르지 않기에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차르시여.”
표도르 3세는 외무장관의 반응에 혀를 차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북미왕국과 협상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북미왕국의 동맹인 연합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그러면 동부 시베리아 지역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걸렸지만, 그렇다고 이미 적대적인 지역으로 변한 동부 시베리아 지역을 힘으로 정복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싶었다.
장거리 원정은 막대한 전비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이걸 과연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싶었기에.
“후우. 어쩔 수 없지. 북미왕국과 협상을 하는 수밖에. 북미왕국의 외교관들이 유럽에 상주한다지?”
“그렇습니다. 다만 암스테르담 앞바다는 아직 위험한 만큼 런던으로 외교관을 보내 협상하는 것이 나아 보입니다.”
외무장관의 말에 표도르 3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면 바로 외교관을 보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차르시여.”
표도르 3세는 고개를 숙인 외무장관을 보고 문득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이고르는 이르쿠츠크 요새로 무사히 돌아왔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모스크바로 소환할까요?”
외무장관의 말에 표도르 3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네. 오늘부로 이고르의 모든 직위를 박탈하고 시베리아 유배형에 처할 테니 이르쿠츠크 요새에서 평생 있으라고 하게.”
“알겠습니다. 곧바로 전령을 보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