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5화
슬슬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라 정성국이 급한 업무를 마치고 이번에 개발된 아이스크림을 맛보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조용한 곰이 들어왔다.
정성국은 아이스크림을 떠먹다가 조용한 곰을 보고 티테이블로 오라며 손짓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뒤쪽에 있던 냉동실에서 아이스크림을 담아놓은 접시를 꺼냈고.
“오. 젤라토로군요.”
“이번에 왕실 숙수가 젤라토를 참고해 만든 후식일세. 보기엔 젤라토와 비슷해 보이는데 맛은 좀 다르지.”
“어? 그렇습니까?”
정성국의 설명에 조용한 곰은 붉은빛이 감도는 아이스크림을 수저로 떠서 한입 먹고 입안에 감도는 달콤함과 부드러움에 미소를 지었다.
“오. 확실히 젤라토와는 맛이 다르군요. 훨씬 부드럽다고 해야 할까요?”
“그렇지? 젤라토와 비교하면 크림을 더 많이 넣어 부드럽더군. 해서 난 아이스크림이라고 이름 붙였고.”
“아이스크림이라...조만간 아이스크림 전문점도 많이 들어서겠군요. 그리고 젤라토 전문점을 차리려던 백성들은 고민 좀 하겠군요.”
정성국은 왕실 숙수들이 새로 개발된 음식들을 왕실에서 독점하기보다는 국영 상단이나 왕실 상단을 통해 백성들이 싼값에 맛볼 수 있도록 음식점이나 매장을 차리곤 했다.
그리고 작년에 에스파나 대사관의 숙수에 의해 젤라토를 맛보게 된 정성국은 곧바로 왕실 상단에 젤라토만 전문적으로 파는 상점을 차려 북미왕국 백성들도 맛볼 수 있게 하라고 명령을 내렸기에 올봄부터는 북미왕국 곳곳에 젤라토 전문점이 들어서며 백성들도 이 차갑고도 맛있는 후식을 맛볼 수 있었고.
그리고 이 젤라토가 돈이 될 것으로 생각한 일부 백성들은 젤라토 전문점에 취직해 열심히 기술을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조용한 곰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이야기하자 정성국이 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그렇겠지.”
그렇게 정성국은 조용한 곰과 아이스크림을 맛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난 후에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보다 무슨 보고 때문에 온 건가?”
정성국의 물음에 조용한 곰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새진주에서 좋은 소식이 올라왔습니다.”
“좋은 소식?”
“예. 미주리 족과 아이오와 족의 추장들이 타마로아로 찾아와 북미왕국에 합류할 뜻을 밝혔답니다.”
“뭐?! 그게 정말인가?”
정성국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조용한 곰을 바라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미시시피 강 서쪽에 자리한 미주리 족, 아이오와 족, 오세이지 족은 북미왕국을 무척 경계했기에 그동안 별다른 교류도 없었으니 말이다.
헌데 갑자기 두 부족의 추장들이 일리노이 지역의 거점 중 한 곳인 타마로아로 몰려와 북미왕국으로 합류할 뜻을 밝혔다니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고.
이런 정성국의 반응에 조용한 곰은 웃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런 중요한 문제를 거짓으로 보고할 리가 없잖습니까.”
“아니...그렇긴 한데...대체 갑자기 왜? 혹시 두 부족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가끔은 가뭄이나 홍수 같은 자연재해로 원주민들이 피해를 보는 경우가 있었기에 정성국이 묻자 조용한 곰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고 혹시 오토 족을 기억하십니까?”
“오토 족? 아. 기억나네. 그 미시시피 강의 지류 중 한 곳을 탐사하다가 만난 부족 말이지?”
오토 족은 미시시피 강의 지류이자 서쪽의 대평원에 수많은 지류와 연결된 미주리 강 중류에 사는 부족으로 전생의 미주리 주, 네브레스카 주, 켄자스 주의 경계에 자리한 부족이었다.
그리고 이 부족은 북미왕국을 무척 경계하는 미시시피 강 서쪽의 부족들과는 달리 북미왕국을 심하게 경계하지도 않았고 탐사대가 가지고 온 각종 생필품과 철제 제품을 보고 눈이 돌아가 다음에는 더 많은 들소 가죽을 준비해놓을 테니 꼭 다음에도 와달라고 신신당부했었다는 보고에 잘만하면 이 오토 족을 북미왕국에 합류시킴으로써 주변 부족을 북미왕국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으로 여겨 기억해 두었기에 정성국이 곧바로 아는체하자 조용한 곰이 입을 열었다.
“기억하시는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오토 족은 아이오와 족과 미주리 족과 인접한 부족이지요. 그리고 오토 족은 부족의 규모가 적어 지금까지는 두 부족에 치여 살았고요.”
“어라? 설마...우리와 교역한 오토 족이 우리에게 구한 무기로 무장하고 자신들을 침공할 거라 여긴 건가? 그래서 이를 피하고자 우리에게 합류한 거고?”
예전 위네치 족이 북미왕국을 통해 확보한 철제 무기를 통해 주변 지역을 정복하려 했었기에 북미왕국에서는 북미왕국에 합류하지 않은 북미 대륙의 원주민들에게는 철제 무기조차 수량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었다.
그러니 미주리 족과 아이오와 족은 지레 겁먹고 자신들에게 합류했다는 뜻이었기에 정성국이 조금 황당한 표정을 짓자 조용한 곰이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그 부분도 없지는 않았을 겁니다. 다만 타마로아에 있던 외무청 관리의 보고로는 그 부분보다는 오히려 비교적 세가 약했던 오토 족이 저희와 교역하면서 점차 부족의 사정이 나아지면 근처의 부족들이 흔들릴 것이 불 보듯 뻔했고 이것이 우려스러웠던 모양입니다.”
“호오. 오토 족의 발전을 보고 각각의 소부족들이 우리와 교역하거나 우리에게 합류하게 될 상황을 예측하고 이것을 두려워한 건가?”
북미왕국에서 오토 족과의 교역에 관심을 두는 이유를 미주리 족과 아이오와 족의 추장들이 눈치챘다는 이야기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은 정성국의 반응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습니다. 해서 미주리 족의 일부 추장들이 이러한 문제를 언급하며 추장들이 모여 부족의 앞날을 고민해봐야 한다고 이야기한 모양입니다.”
“그 회의에서 우리 북미왕국에 합류하겠다고 결론을 내린 거고?”
“그렇답니다. 그리고 회의에 참여한 추장들 가운데는 타마로아가 어떻게 발전해가고 있는지, 옛 타마로아 족이 어떻게 생활하는지를 옆에서 지켜본 추장들도 있었기에 이를 잘 모르던 다른 추장들도 타마로아의 변화에 놀라며 격론이 오간 모양입니다. 그러한 토론 끝에 북미왕국과의 교류를 완전히 틀어막지 않는다면 차라리 미주리 족 전체가 북미왕국에 합류하는 것이 훗날 북미왕국에서의 발언력에도 낫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미주리 족은 자신들을 경계하고 날을 세운 것 치고는 의외로 자신들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눈치라 정성국은 새삼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뭐 그렇기야 하지. 헌데 미주리 족은 그렇다 치고 아이오와 족은?”
“아이오와 족과 미주리 족은 나름대로 교류하고 있었고 미주리 족의 부족 회의가 꽤 오랫동안 진행되었기에 아이오와 족도 미주리 족의 추장들이 무엇 때문에 저렇게 모여 회의하는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는군요.”
그 말에 정성국은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속담을 떠올리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아이오와 족의 추장들도 모여서 부족 회의를 한 거고?”
“예. 그렇답니다. 그리고 아이오와 족의 추장들도 미주리 족의 추장들과 비슷하게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꽤 컸던 모양입니다. 또한, 처음에야 멋모르고 북미왕국에 적대하고 날을 세웠지만...알고 보니 저희가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들을 정복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더욱 말이지요.”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흠. 아무래도 일리노이 지역에 배치한 탐사대가 꽤 위협적으로 느껴졌나 보군.”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말을 타고 화약 무기로 무장한 탐사대가 일리노이 지역에만 무려 7천 명이나 배치되어 있는데요.”
타마로아 족이 처음 북미왕국에 합류하면서 그동안은 약간의 호기심과 경계 섞인 눈초리로 북미왕국을 바라보던 두 부족은 북미왕국이 타마로아 족 영역에 세운 거점을 방어하기 위해 탐사대를 일부 보내면서 북미왕국을 경계하기 시작했고.
이 탐사대를 보고 타마로아 족이 북미왕국에 합류하고 시간이 흐르자 모인궤나 족을 비롯해 범 일리노이 족이 하나둘 북미왕국에 합류하기 시작하면서 극도로 북미왕국을 경계하면서 자연스럽게 미시시피 강의 분위기는 꽤 험악해졌다.
그러다 보니 그동안 이들에게 당하고만 살았던 타마로아 족이나 모인궤나 족은 이런 분위기에 꽤 불안해하는 눈치였기에 정성국은 탐사대를 전부 미시시피 강 유역에 배치했고.
그렇게 1만 명의 탐사대 가운데 3천 명은 남쪽의 치카소 주변에, 그리고 7천 명은 타마로아에 배치되었고 이들의 존재로 불안해하던 타마로아 족이나 모인궤나 족은 안도했지만 이젠 반대로 아이오와 족이 불안해하면서 북미왕국이 자신들을 공격할까 봐 내심 걱정했었다는 이야기에 정성국이 조금 입맛이 써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을 때 조용한 곰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아무튼, 그래서인지 미주리 족보다 늦게 회의를 시작한 아이오와 족의 결정이 오히려 한발 빨랐답니다.”
그 말에 생각을 정리한 정성국이 입을 열었다.
“뭐 원인이야 무엇이든 간에 미주리 족과 아이오와 족이 북미왕국에 합류하기로 결정을 내렸다니 참 잘된 일이로군.”
“그렇습니다. 북미왕국의 영역이 처음으로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 확장된 셈이니까요.”
조용한 곰이 활짝 웃으며 대답하자 정성국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미주리 족과 아이오와 족이 합류한 이상 미시시피 강 서쪽의 다른 부족들도 점차 이들처럼 우리에게 합류할 가능성이 크고.”
전생의 미국 학자들은 북미 대륙의 원주민들을 총 10개의 부족으로 분류했다.
북극, 냉대, 북동부, 남동부, 대평원, 대분지, 북서부 고원, 북서부 해안, 캘리포니아, 남서부 부족이 바로 그것인데 지리적인 특성으로 인해 비슷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고 판단해 분류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수많은 원주민 부족들이 북미왕국에 합류했지만, 대평원에 사는 부족과 대분지에 사는 부족은 북미왕국에 합류한 적이 없었고.
헌데 이제 대평원 부족으로 분류되는 미주리 족과 아이오와 족이 북미왕국에 합류하게 되었고, 두 부족의 추장들이 외무청 관리가 되면 실적을 내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그동안 알고 지내던 주변 부족들을 잘 회유해 하나둘 북미왕국으로 합류시킬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북미왕국의 영토가 대평원 지역까지 확장될 테니 정성국은 정말 자신이 죽기 전에 북미 대륙을 어느 정도 장악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미소짓다 문득 질문을 던졌다.
“아. 그러고 보면 오세이지 족은? 오세이지 족도 미주리 족과 아이오와 족과 함께 행동하지 않았나?”
미주리 족 남쪽에 자리한, 전생의 아칸소 주를 영역으로 둔 오세이지 족은 세 부족 중 가장 강성한 편이었기에 정성국이 질문을 던지자 조용한 곰이 입을 열었다.
“미주리 족의 대추장이 이야기하길 아이오와 족과는 다르게 오세이지 족과는 그리 활발히 교류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오세이지 족도 자신들과 함께 저희 북미왕국을 경계했던 만큼 부족 회의가 끝난 후 오세이지 족에 자신들의 결정을 알리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오세이지 족도 상황을 파악하고 고민하거나...어쩌면 이들도 추장들을 불러 모아 회의를 열 수도 있겠지요.”
“어째 오세이지 족이 태도를 바꾸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소리로 들리는데?”
“하하하. 솔직히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보다 갑작스레 저들이 합류하고 영토가 넓어진 셈이니...개발청과 행정청, 교육청은 죽어 나가겠군.”
“그렇지요. 두 부족의 영역만 해도 꽤 넓으니까요. 그나마 다행이라면 범 일리노이 족 가운데 일부는 저들의 말을 할 줄 안다는 점이겠지요. 그러니 이들을 관리로 대거 채용하면 그나마 빠르게 두 지역을 통치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조금 걱정되는 부분을 언급했다.
“흐음...미시시피 강 서쪽 원주민들의 언어를 할 줄 안다는 뜻은 결국 미시시피 강 유역에 살았던 옛 타마로아 족이나 옛 모인궤나 족 출신이라는 뜻이잖아? 그들을 두 지역의 관리로 보내도 될까?”
정성국의 지적에 조용한 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관리들의 출신을 알면 미주리 족이나 아이오와 족이 조금 꺼림칙하긴 할 겁니다만...감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언어가 다른지라 당장 통치하기는 어려운데요.”
“끙...그것도 그렇군. 알겠네. 다만 외무청에서 미주리 족 추장과 아이오와 족 추장들에게 잘 설명하도록 하게. 다른 의도는 없다는 것을.”
이에 조용한 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리고 이를 잘 설명하면 저들도 기를 쓰고 북미왕국 말을 배우려 할 테니 나쁠 것 없고요.”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