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4화
정성국은 입구를 지나자마자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뜨겁고도 습한 공기에 순간 멈칫하며 중얼거렸다.
“으. 이거 엄청 덥군.”
이런 정성국의 반응에 이전에도 몇 번 들렸었던 연구청장이 익숙하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그렇지요? 아무래도 온실이다 보니 온도나 습도가 조금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정성국이 지금 방문한 곳은 식물원 내에 있는 거대 유리 온실이었다.
미술관을 개관하고 교육청장에게 박물관을 설립하라고 지시하면서 정성국은 이 박물관들이 개관하고 나면 후에는 동물원과 식물원도 만들 생각이었다.
헌데 유럽에는 이미 의대에서 약용식물을 재배하는 정원을 운영하거나 일반 대학에서 식물을 연구하기 위해 정원을 운영한다는 것을 알게 된 연구청장이 북미왕국 식물학의 발전을 위해 거대한 정원을 만들었으면 한다고 건의했고 정성국은 기꺼이 승낙했다.
식물원과 동물원도 일종의 박물관이라 교육청에 맡길 생각이었지만 연구청장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 두 시설은 교육청보다는 산하에 농업 연구소와 축산 연구소가 있는 연구청에 맡기는 것이 적합하다고 판단하기도 했고.
해서 식물원과 동물원이 건설되기 시작해 최근 두 시설 모두 완공되었고, 동물원의 경우는 아직 확보한 동물이 많지 않아 개관하려면 아직 멀었지만, 식물원은 나름대로 확보한 식물들로 잘 꾸며두어 조만관 개관할 거라는 보고를 받고 호기심에 바람도 쐴 겸 식물원을 방문한 정성국이었다.
그리고 연구청장의 보고대로 새한성에서는 흔히 보기 어려운 여러 식물로 잘 꾸며두었기에 정성국은 나중에 가족들과 함께 방문할 생각을 하면서 열대 식물들을 모아두었다는 식물원 중앙에 존재하는 거대한 유리 온실에 들어갔고.
지금이 6월의 낮이다 보니 한창 기온이 올라가 있어 숨이 막힐 정도였기에 정성국이 새삼 고개를 저으며 옆에서 웃고 있는 연구청장을 보고 입을 열었다.
“그거야 알고 있었지만 이건 생각보다 심하네. 한여름에는 들어오기도 힘들겠어. 이거 식물원이 개관하면 수많은 관람객이 몰려올 테고 이국적인 식물은 이 유리 온실 안에 많다는 것을 고려하면 가을쯤에나 개관해야겠는데?”
확실히 북미왕국의 백성들은 여유로웠기에 자주 여행을 다니는 편이었고 덕분에 미술관은 북미왕국 전역에서 몰려든 백성들로 인해 항상 사람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연구청장이 정성국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흠...생각해보면 그렇군요. 허면 개관을 조금 미루도록 하지요.”
연구청장의 대답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고 온실에 들어온 지도 시간이 지나 조금은 익숙해진 기분이 들었기에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각종 이국적인 식물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묘하게 익숙한 열매가 맺혀있는 식물을 보고 정성국이 발걸음을 멈췄다.
“오. 저건...”
정성국이 바라보고 있는 식물을 확인한 연구청장이 입을 열었다.
“아. 저건 최근에 남태평양에서 가져온 식물 중 하나입니다. 남태평양의 일부 원주민들은 저기 나무 가운데에 맺힌 기다란 열매들을 주식으로 먹는다고 하더군요. 해서 연구원들이 꽤 관심을 두고 연구하는 식물 중의 하나이고요.”
연구청장의 대답에 정성국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건 바나나일세.”
“바나나요?”
정성국의 대답에 연구청장은 어떻게 아느냐는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자 정성국은 슬쩍 둘러댔다.
“그래. 동남아에도 흔한 과일이라고 하더군, 예전에 서양의 식물도감에서 본 기억이 있네. 이렇게 보니 식물도감에 그려져 있는 모습과 똑같군.”
이러한 정성국의 변명에 연구청장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조금은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 그런가요? 과일이라기보단 작물로 생각했는데...”
그 말에 정성국은 바나나의 품종이 여러 개이고 전생에서도 아프리카나 남미에서는 그가 흔히 먹었던 후식용 바나나가 아닌 요리용 바나나를 주식으로 먹기도 한다는 것을 떠올리고 입을 열었다.
“아. 원주민들은 저걸 익혀 먹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도 한번 먹어봤는데 과일이라는 느낌보다는 감자나 고구마 같은 느낌이어서 말입니다. 다만 열대 식물이다 보니 남태평양의 기후에는 잘 자랄 것 같아서 저 식물을 잘 연구하고 개량해 남태평양 지역에 보급할 생각이었지요.”
식량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고 식량이 넘쳐나면 결국 자연스럽게 인구가 증가한다는 것을 잘 아는 연구청장이 이렇게 대답하자 정성국은 괜찮은 생각이라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그럼 품종이 조금 다른 모양이야. 내가 본 식물도감에는 바나나의 종류가 여럿 있다고 쓰여 있었거든.”
그러면서 바나나의 맛이 괜찮다는 것과 후식용 바나나와 저 요리용 바나나를 모두 재배해 요리용 바나나는 원주민들이 먹고 후식용 바나나는 일종의 교역품으로 사용하면 될 것 같다고 이야기하며 다른 품종의 바나나도 구해보라는 듯 이야기하자 연구청장은 빙긋 미소지으며 답했다.
“동남아에 그러한 바나나가 있다면 곧 입수할 수 있을 겁니다.”
“음?”
“여러 지역의 각종 식물을 수집해야 하는 만큼 해군 탐사대로는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해서 외무청을 통해 그동안 저희와 거래하던 에스파냐, 잉글랜드,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넌지시 북미왕국에서 식물원에 관한 이야기를 흘렸습니다.”
이곳에 있는 식물 중 절반은 북미왕국 각지에 존재하는 농업 연구소의 연구원들이 보내온 것이라면 절반 정도는 해군 탐사대가 곳곳에서 가져온 식물들이었다.
하지만 해군 탐사대의 활동 범위는 한정되어 있었기에 전 세계의 수많은 식물을 직접 확보하기엔 어려웠고 이 때문에 유럽의 상인들을 이용할 생각으로 식물원의 정보를 흘렸다는 연구청장의 이야기에 정성국은 피식 웃었다.
“아하. 식물을 가져오면 사례하겠다고?”
“그렇지요. 그리고 만약 가져온 식물이 식물원에 없는 품종이라면 추가 사례를 하겠다고도 이야기했고요. 그러니 동남아를 장악하고 있는 네덜란드의 상인이나 필리핀을 통치하고 있는 에스파냐의 상인이라면 언젠간 전하께서 보신 식물도감에 나온 과일 품종의 바나나를 가져오지 않겠습니까.”
북미왕국의 상인들이 주로 내륙과 아시아 일부 지역에서만 활동하는 것과 달리 에스파냐, 네덜란드 상인들은 정말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만큼 이들의 도움이라면 생각보다 손쉽게 세계 각지의 식물을 확보할 수 있겠다 싶은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혹시나 해서 당부했다.
“그렇겠지. 다만 조심해야 할 걸세. 전 세계의 식물을 수집하는 것은 좋은데 잘못하면 전 세계의 병해충도 유입될 수 있으니까.”
이러한 정성국의 지적에 연구청장은 입가의 미소를 지우고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물론 그 점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해서 농업 연구소는 새김포와 새진주에 온실을 세우고 유럽의 상인들이 가져오는 식물은 일단 이 온실에서 어느 정도 관찰한 후 이곳에 가져올 생각입니다.”
연구청장의 대답에 정성국은 전생의 수입 식물 검역 절차를 떠올리고 그가 딱히 세세하게 신경 쓰지 않더라도 이미 이러한 문제를 인지하고 어느 정도 조치를 취했다는 것에 만족하며 입을 열었다.
“격리재배라...나쁘지 않네. 아. 이건 북미왕국으로 들어오는 동물들도 비슷한 절차를 거쳤으면 하는데?”
“물론입니다. 이미 축산 연구소에서 새김포와 새진주에 동물을 임시로 사육할 공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청장의 대답에 정성국은 만족하면서도 전생에 인간에게 피해를 주었던 수많은 질병 중 상당수가 동물이 옮겼다는 것을 기억했기에 다시 한번 당부했다.
“그래. 특히 동물의 경우 사람에게도 해를 끼칠 수 있는 병균을 옮길 수도 있으니 격리 기간이 조금 길었으면 하네. 그리고 동물들을 관리해야 하는 축산 연구소의 연구원들의 위생과 건강도 철저히 관리하도록 하고.”
“흐음...알겠습니다. 뭐 당장 동물원을 개관하는 것이 급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렇게 이야기를 끝낸 정성국은 다시 발걸음을 옮겨 땀을 흘리면서도 열심히 온실을 돌아다니며 식물을 살펴보다가 주변을 둘러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보다 내 생각보다 온실의 규모가 큰 편이네?”
“아무래도 열대 식물 중엔 크기가 큰 식물들도 꽤 있다 보니 개발청에 온실을 최대한 크게 만들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덕분이지요.”
“흐음. 어째 이국적인 식물보다는 이 건물을 보기 위해 식물원을 찾을 것 같은데...”
이 거대한 유리 온실은 철제 골조와 유리만으로 만들어져 있었기에 정성국에겐 비교적 익숙했지만, 북미왕국 백성들이 보기엔 무척 이국적이면서도 독특한 건물처럼 보일 것이 분명해 보였다.
정성국이 이 유리 온실을 처음 봤을 때는 전생의 1851년 런던 엑스포의 박람회장이었던 크리스털 팰리스를 떠올리기도 했었으니.
덕분에 이 유리 온실의 사진이 신문에 실린다면 이 독특한 형태의 건물을 구경하겠다고 올 사람들이 더 많아 보여 정성국이 중얼거리자 연구청장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군요. 저도 처음 봤을 때는 이 유리 온실이 독특해 눈을 떼지 못했으니까요.”
“헌데 생각보다 식물이 많은 느낌인데...”
이에 연구청장은 고개를 저었다.
“곧 개관할 생각인데 텅 비워둘 수야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래서 잘 꾸며두긴 했지만, 식물의 종류가 다양하진 않습니다.”
“아. 그래? 식물이 몇 종류나 되는지 혹시 알고 있나?”
“제가 전에 보고받기로는 약 2천 종의 식물 표본이 존재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성국은 연구청장의 대답에 조금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알기로 전생에서 세계 최대 식물원이라는 잉글랜드의 큐 왕립 식물원의 경우 약 3만 종 이상의 다양한 식물 표본들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으니 이와 비교해보면 빈약한 편이었기에.
“흐음...확실히 갈 길이 멀긴 하군. 하지만 단기간에 전 세계의 모든 식물을 수집할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으니...연구청에서도 꾸준히 식물원을 지원해주도록 하게.”
“물론입니다. 세계 각지의 다양한 식물을 수집하고 연구해 이를 자원화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으니까요.”
연구청장의 대답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덧붙였다.
“그리고 새한성에 있는 여러 박물관이 개관하고 나면 다른 지역에도 박물관이 설립되리라는 것은 알지? 마찬가지로 식물원과 동물원도 다른 지역에 설립할 준비를 하게. 다만 그냥 똑같이 만들지는 말고...일종의 주제를 정해서 특화하도록 하고.”
“주제라면...?”
이에 정성국은 전생의 수많은 식물원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뭐 이 국립 새한성 식물원이 세계 최대의 식물원을 목표로 한다면 다른 지역의 식물원은 주로 아름다운 꽃을 위주로 전시한다던가, 아니면 이곳처럼 열대 식물만 전시한다던가, 혹은 나무들을 심어 일종의 공원처럼 꾸며놓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일세.”
“흐음...하긴. 그편이 낫긴 하겠군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농업 연구소에서는 식물원을, 축산 연구소에서는 동물원을 운영하기로 했으니 어업 연구소도 시설을 하나 운영해야 하지 않겠나?”
정성국은 수족관을 나중에 건설할 생각이었지만 이 거대한 유리 온실을 설계하고 건축한 개발청이라면 수족관도 충분히 건설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을 하고 이야기하자 연구청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예? 아. 어류를 전시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뭐 거대한 수조 한쪽 면을 유리로 만든다면 다양한 해양 생물을 손쉽게 관찰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이를 통해 해양 생물의 기초적인 지식도 습득할 수 있을 테고.”
“흐음...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어업 연구소와 개발청과 논의해보도록 하지요.”
* * *
이르쿠츠크 요새 사령관은 야쿠츠크로 떠났던 이고르가 거지꼴로 돌아왔다는 보고에 즉각 집무실을 나섰고 허겁지겁 스튜를 마시는 이고르의 모습에 입을 벌렸다.
“허. 이게 대체...”
사령관의 목소리에 한참 스튜를 먹고 있던 이고르는 고개를 들어 사령관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꿀꺽. 사령관님. 그게...”
사령관은 이고르의 추레한 모습과 3달 전과는 달리 홀쭉한 볼살을 보고 손을 내저었다.
“쯧쯧. 많이 굶주린 것 같은데 내 눈치 보지 말고 일단 먹게.”
“감사합니다. 사령관님.”
그렇게 굶주렸던 이고르가 배를 채우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던 사령관은 이고르가 어느 정도 배를 채운 것처럼 보이자 다시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연합에 패배한 모양이군.”
“면목이 없습니다.”
사령관의 이야기에 이고르는 고개를 숙였고 그런 이고르의 반응에 사령관은 혀를 찬 후 가장 궁금한 질문을 던졌다.
“보아하니 지금 자네와 함께 온 100명 정도가 다인 것 같은데...그렇게 연합의 병사들이 강력했나?”
“그게...”
이고르가 사령관에게 자신이 겪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이를 듣던 사령관은 기겁하며 입을 열었다.
“포탄이 터졌다고?! 그건...”
“예. 연합의 뒤에 북미왕국이 있었던 겁니다.”
이고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령관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허. 시베리아 원주민들이 어디서 머스킷을 대량으로 구했나 싶었더니...그래서 살기 위해 레나 강을 뛰어들었고 고작 이것만 남은 건가?”
“그것이...”
이고르는 레나 강을 건넌 코사크인들이 보급 문제 때문에 대립했고 일부는 자신과 함께 내륙으로, 일부는 레나 강을 따라 움직였다는 것을 이야기하며 덧붙였다.
“당시에 레나 강 하류에서 북미왕국의 거대한 배가 갑자기 나타났었습니다. 이 때문에 레나 강을 따라 이동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몇 번이고 병사들에게 이야기하며 어떻게든 설득하려 했지만, 내륙의 지리를 잘 모르고 보급품도 없는 터라 병사들 태반은 왔던 길로 회군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상황이 상황이라 이들을 강제하기도 어려웠지요.”
이고르의 이야기에 사령관은 상황을 짐작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흠. 그럼 레나 강 유역으로 퇴각했던 병사들도 이곳에 도착할 수도 있겠군.”
“예. 저도 부디 레나 강 유역으로 퇴각했던 병사들이 안전하게 이곳에 도착했으면 합니다.”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고르를 보고 사령관은 슬쩍 입을 열었다.
“헌데 제대로 된 지리도 알지 못한 자네가 이곳까지 용케 도착한 것을 보면...중간에 원주민 마을이라도 만난 모양이지?”
“그렇습니다. 3곳의 원주민 마을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약탈했고?”
분명 사령관은 훗날을 위해 최소한 예전에 야쿠츠크 요새에 비교적 협조적이었던 레나 강 서쪽의 부족들은 함부로 약탈하지 말라고 이야기했었다는 것을 떠올린 이고르는 사령관의 매서운 시선을 슬쩍 피하며 대답했다.
“저희가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아. 비교적 협조적인 부족마저 약탈했으니 저 동부 시베리아 지역을 다시 장악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겠군. 아니. 북미왕국이 뒤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저들이 이곳으로 몰려올 것을 걱정해야 하나...”
이러한 사령관의 한탄에 이고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사령관은 그런 이고르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다가 명령을 내렸다.
“일단 자세한 보고서부터 작성하도록 하게. 곧바로 모스크바에 연락을 보내야 할 테니.”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