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3화
정성국은 밝은 표정의 조용한 곰을 보고 무슨 일인가 싶었고, 조용한 곰이 전해준 시베리아 소식에 반색했다.
“오?! 큰 피해 없이 시베리아를 장악하러 왔던 러시아 차르국 병사들을 물리쳤다고?”
“그렇습니다. 아이누 탐사대장이 거점에 배치된 이동형 60mm 화포와 연합의 병사들을 잘 지휘한 덕분이라고 합니다.”
조용한 곰은 정성국의 반응에 웃으면서 자세한 사정을 보고하기 시작했고.
“와. 모스크바에서 토벌대로 3천 명씩이나 보냈다고? 생각보다 토벌대 규모가 크네?”
당시의 모스크바에서는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뒤에 북미왕국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데도 3천 명 규모의 대규모 토벌대를 보냈다는 이야기에 놀라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확실히 예상보다 많았지요. 해서 자세히 파악해본 결과 동부 시베리아 지역의 장악력을 잃어버리면서 모피 수급량이 대폭 줄었기에 모피 산업에 손을 대고 있던 귀족들이 난리를 친 모양입니다. 그래서 빠르게 자신들에게 반항한 원주민들을 제압하기 위해 최대한 많은 코사크인을 병사로 고용해 보낸 모양인데 오히려 그게 패착이었습니다.”
“아하. 보급 문제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들이 보급 거점으로 생각했던 야쿠츠크 요새는 이미 파괴되었고 그나마 가까운 보급 기지인 이르쿠츠크는 1800km 넘게 떨어져 있다 보니 레나 강 유역에 저희가 건설한 거점을 발견하자 눈이 돌아간 모양입니다.”
이러한 조용한 곰의 이야기에 정성국은 당시 전투의 진행 상황이 훤히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아 피식 웃었다.
“거점을 빠르게 점령하겠다고 덤볐다가 화포를 맛보고 항복한 모양이군.”
“아쉽게도 순순히 항복하진 않았답니다. 코사크인들도 이곳의 원주민들이 자신들에게 원한이 깊다는 것을 모르지 않기에 항복한다고 해도 살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답니다. 해서 아이누 탐사대장이 만약을 대비해 원주민들 일부를 거점 외곽에 매복시켜 거점을 공격하는 이 코사크인들을 포위하자 코사크인들을 살기 위해 강으로 뛰어들었다더군요.”
처음에는 자신의 예상이 틀렸다는 것에 조금 머쓱한 눈치이던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이야기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 레나 강은 강폭이 꽤 넓지 않나? 거기에 봄이면 오히려 겨울 동안 내렸던 눈이 녹으면서 물이 불어나고 물살도 제법 셀 텐데? 헌데 그 강을 맨몸으로 건너겠다고 뛰어들었다고?”
정성국이 알기로 다른 지역의 경우 보통은 여름에 비가 자주 내리고 이 빗물이 강으로 흘러들어 수량이 불어나는 반면 시베리아 지역의 경우는 겨울에 내렸다 쌓인 눈들이 봄이 되면 녹으면서 강으로 흘러들어 봄에 강물이 불어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헌데 이런 강을 맨몸으로 건너는 것이 가능한가 싶어 묻자 조용한 곰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아이누 탐사대장도 강의 물살이 거센 편이라 당연히 항복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주저 없이 강으로 뛰어들자 무척 놀랐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예상대로 일부는 도저히 못 건너겠다 싶어 다시 되돌아와 자신들에게 무기를 겨누는 원주민들에게 항복했지만, 상당수는 어떻게든 강을 건너려다 익사할 뻔했고요.”
정성국이 알기로 코사크인들은 유목 민족에 가까웠고 유목 민족들이 대부분 물에 익숙하지 않은 것을 생각해보면 아무리 말이 수영을 잘하더라도 꽤 많은 코사크인이 익사했을 것으로 짐작되어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쯧쯧...그냥 항복하지.”
“그러게 말입니다. 그나마 때마침 거점에 보급 물자를 전달하려는 북태평양 탐사선이 나타나 허우적대는 코사크인들을 대부분 구조하긴 했지만...이때 건져낸 시체만 100구가 넘는다고 하더군요.”
“저런...”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강을 건넌 인원도 거의 천명에 달한다는 겁니다.”
건진 시체만 하더라도 100구가 넘는다는 말에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던 정성국은 조용한 곰이 덧붙인 말에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생각보다 좀 많은데?”
그가 생각하기엔 태반은 안 되겠다 싶어서 되돌아와 항복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전체 병력의 1/3이 레나 강을 건넜다는 이야기에 당황하자 조용한 곰이 설명했다.
“듣자니 거점 앞에는 작은 섬들이 조금 있답니다. 그래서 코사크인들은 이 섬들로 이동해서 조금 쉬었다가 다시 다른 섬으로 건너가고...이런 식으로 결국 레나 강을 건넌 모양입니다.”
“허어.”
“그리고 아직 레나 강 서쪽에 사는 원주민들이 없지 않은 터라 강을 건넌 이 패잔병들이 원주민들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우려에 아이누 탐사대장은 즉각 추격대를 편성해 이들을 추격하고 원주민 마을 일부에는 병력도 파견한 모양입니다. 해서 일부는 사살하고 일부는 포로로 잡았지만...300명 정도는 레나 강을 따라 도주하지 않고 서쪽으로 도주했기에 결국 놓쳤다고 하더군요.”
조용한 곰의 이야기가 끝나자 정성국은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결국 도주에 성공한 코사크인들의 근성에 감탄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내륙으로 도망쳤다면야 별수 없지. 그리고 어차피 우리가 시베리아 부족 연합과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을 이미 북미신문을 통해 알린 만큼 지금쯤이면 러시아 차르국에서도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뒤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테니 정보 유출을 우려할 이유도 없고. 다만 내륙에도 소규모 원주민 부족들이 조금 살고 있지 않나? 이들이 패잔병들에 의해 습격당할 것이 조금 걱정이기는 하군.”
정성국은 자신들과 러시아 차르국과의 싸움 때문에 애먼 피해를 보게 될 소규모 원주민 부족들이 안타까워 한마디 덧붙이자 조용한 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예. 저도 그게 조금 걱정이긴 한데...그렇다고 추격대를 주로 레나 강을 따라 편성했기에 뒤늦게 내륙으로 도주한 자들을 추격해도 이미 원주민 마을을 공격한 이후일 것이 분명하고 거의 2천 명에 가까운 이들을 포로로 잡은 터라 이들을 관리하기도 쉽지 않아 결국 추격을 단념했다고 하더군요.”
조용한 곰이 묘하게 아이누 탐사대장을 변호하는 느낌이라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 이미 지난 일이니 딱히 책망하는 것은 아니네. 상황이 그렇다면 어쩔 수야 없었겠지.”
그리고 코사크인들은 러시아 차르국에 고용된 만큼 코사크인들이 도주하면서 행패를 부리면 그만큼 다른 시베리아 원주민들도 러시아 차르국에는 다시 한번 반감을 품을 것이 분명했다.
더불어 고향을 떠나기 싫다는 이유로 레나 강 동쪽으로 이주하지 않았던 원주민 부족들도 이번 일로 레나 강 서쪽은 위험하다는 것은 확실히 깨달았을 테니 레나 강 동쪽으로 이주를 고민할 테고, 그러면 레나 강 동쪽의 개발이 조금 더 원활해질 테니 나쁠 것은 없었고.
그보다는 레나 강 동쪽을 개발하려면 많은 인력이 필요한 만큼 이번에 확보한 포로 2천 명이 꽤 요긴하게 쓰일 것 같아 정성국이 슬쩍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보다는 포로가 2천 명이라...그것도 건장한 남성이면 괜찮은 노동력이 되겠는데?”
“그렇습니다. 물론 코사크인들이 꽤 강골이라 포로를 관리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더군요. 거기에 지금까지의 포로들은 주로 광산 근처의 포로수용소 안에서만 지냈지만, 이들은 레나 강 거점 주변을 개발하는 일에 투입되다 보니...”
조용한 곰이 말을 흐리자 정성국은 턱을 매만지면서 중얼거렸다.
“으음...그렇군. 관리하는 병사들이 있다고 해도 사방이 뚫려있는 셈이니 탈출하겠다고 설칠 수도 있겠는데?”
정성국의 추측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미 포로 중 일부가 탈출하려다 그 자리에서 사살되기도 했다는군요.”
“끙...그럼 이들도 모두 탄광으로 보내야 하나?”
“일단 탈출 사건 이후 아이누 탐사대장이 저들에게 평생 노예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러시아 차르국과 협상을 해서 몸값을 받으면 풀어줄 것이라고 이야기한 후 포로들의 분위기가 조금은 나아졌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노역의 강도가 높은 만큼 식량은 풍부하게 제공하는 터라 코사크인들도 결국 포로 생활에 순응하리라는 것이 아이누 탐사대장의 보고입니다.”
포로를 비교적 많이 확보했다고 기뻐하던 것도 잠시.
생각보다 이들을 다루기가 쉽지 않았던 탓에 아이누 탐사대장은 골치가 아파 왔고.
쿠나킨의 조언대로 포로들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입하고 도주를 우려해 최소한의 식량을 제공하던 것을 양질의 식량을 풍부하게 제공하기 시작하면서 험악했던 분위기가 많이 나아졌다.
이러한 사정을 상세히 설명하며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조용한 곰의 이야기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보다 우리는 시베리아 부족 연합과 동맹을 맺었는데 러시아 차르국은 우리의 동맹인 연합을 공격했지. 그 소리는 우리도 이번 문제에 개입할 수 있다는 거고.”
물론 토벌대를 조직해 시베리아 지역으로 보냈을 때만 하더라도 러시아 차르국은 이 사실을 몰랐겠지만, 그것까지 자신들이 고려할 필요는 없었기에 정성국이 묘한 표정으로 조용한 곰을 바라보자 조용한 곰은 이를 빌미로 러시아 차르국을 강하게 압박하라는 정성국의 뜻을 짐작하고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요. 해서 이번 전투를 북미신문을 통해 널리 알릴 생각입니다. 특히 러시아 차르국이 우리의 동맹국을 공격했다는 사실을 강조할 생각이고요. 더불어 런던에 있는 대사에게 러시아 차르국에 강력히 항의하라고 전하고 상황을 봐서 협상을 통해 시베리아 부족 연합의 존재를 인정하도록 만들 생각입니다.”
어차피 북미신문은 유럽에도 흘러 들어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북미신문을 이용한다? 그거 괜찮네. 그럼 믿고 맡기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 * *
표도르 3세는 급히 자신에게 알현을 청해 창백한 얼굴로 보고하는 외무장관을 보고 뜬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뒤에 북미왕국이 있다고?”
“아시다시피 북미왕국은 신문을 발행하기에 여러 정보를 비교적 손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아. 그 북미신문이라는 것 말이지?”
표도르 3세도 상인들을 통해 북미신문을 한번 본 기억이 있기에 아는체하자 외무장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북미신문에는 여러 내용이 실려 있어 런던이나 암스테르담의 커피하우스에서는 이 북미신문의 내용을 떠들어대는 지식인들을 통해 북미왕국의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지요. 헌데 최근에 그 북미왕국이 동맹을 맺었다고 알려져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맹 대상이 바로 시베리아 부족 연합이라고 합니다.”
북미왕국의 국력은 생각보다 대단했기에 유럽의 여러 나라는 북미왕국과 동맹을 맺고자 했지만, 북미왕국은 계속해서 거절해 왔다.
또한, 북미왕국의 국왕이 조선의 유민 출신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었는데 그런 조선과도 동맹 관계는 아니었기에 유럽인들은 처음으로 북미왕국과 동맹을 맺었다는 시베리아 부족 연합을 무척 궁금해했었고.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러시아 차르국의 상인들에게 혹시 아는 것이 있느냐며 질문을 던져대는 통에 러시아 차르국 상인들도 상황을 파악하고 즉각 모스크바에 이 사실을 알린 것이고 말이다.
“시베리아 부족 연합?”
생소한 이름에 표도르 3세가 표정을 찌푸렸을 때 외무장관이 표도르 3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신문의 기사 내용에 따르면 시베리아 부족 연합은 우리 러시아 차르국에 불만은 품은 시베리아 원주민 부족들이 뭉쳐 결성한 연합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연합은 북미왕국의 지원을 받아 작년 12월에 야쿠츠크 요새를 불태웠다고...”
“뭐? 야쿠츠크 요새를 불태워?! 지금 야쿠츠크 요새가 시베리아 원주민 따위에게 함락당했다는 소린가?”
표도르 3세가 옥좌에서 벌떡 일어나 그게 말이 되느냐는 표정으로 소리치자 외무장관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상인들에게 북미신문의 기사 내용을 전해 듣고 믿기지 않아 일단 이르쿠츠크 요새로 급히 전령을 파견하려 했는데...”
“했는데?”
“때마침 이르쿠츠크 요새 사령관이 보낸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전령의 보고에 따르면...봄이 되어도 별다른 연락이 없어서 확인한 결과 야쿠츠크 요새는 이미 폐허가 되었다고 합니다.”
정말 사실이라는 이야기에 표도르 3세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풀썩 옥좌에 앉아 중얼거렸다.
“허. 아무리 원주민들 뒤에 북미왕국이 있다 하더라도...”
북미왕국의 국력이 대단한 것은 알지만 북미왕국이 직접 병력을 파견한 것도 아닌데 대포까지 배치된 야쿠츠크 요새가 고작 원주민들에게 함락당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렵다는 표정의 표도르 3세를 보고 외무장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야쿠츠크 요새 사령관의 보고에 따르면 시베리아 원주민들이 어디서 머스킷을 구해 무장한 것인지 파악할 수 없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머스킷으로 무장한 원주민들이 더 늘어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아무리 요새와 대포가 있더라도 병력 규모에서 너무 밀리면...”
외무장관의 말에 이해했다는 듯 손을 내민 표도르 3세는 순간 시베리아 지역으로 보낸 토벌대를 떠올렸다.
“아! 그럼 토벌대는?!”
“이르쿠츠크 요새 사령관의 보고로는 야쿠츠크 요새가 폐허가 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토벌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일단 야쿠츠크 요새로 떠났다고...”
이에 표도르 3세는 안색이 굳어졌다.
시베리아 원주민들이 연합을 만들었고 북미왕국이 이 연합과 동맹을 맺은 이상 토벌대가 연합을 공격하면 골치 아파질 수가 있었다.
예전에야 저들이 자신들을 공격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에 저들의 항의를 무시했지만, 이전과는 상황이 달라졌고 저들은 시베리아 원주민을 이용해 시베리아 지역을 건드릴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일단 토벌대로 전령을 보내도록 하게. 작전을 중지하라고. 당장!”
“알겠습니다.”
외무장관은 표도르 3세의 성화에 곧바로 알현실을 나갔고 표도르 3세는 그런 외무장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하아...북미왕국이 시베리아 지역을 노리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