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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479화 (479/850)

479화

“으음...이거 엉망인데?”

고생해가며 말을 달려 야쿠츠크 요새에 도착한 러시아 차르국의 토벌대 지휘관 이고르는 이미 폐허가 되어 버린 요새의 풍경을 보고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보좌관이 주변을 둘러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희가 다시 이곳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요새를 완전히 허물어버렸군요.”

요새의 벽은 모두 허물어져 방어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고 안쪽의 건물 대부분은 나무 기둥이 불에 타 무너져있었다.

일부 건물들은 괜찮아 보이기는 하지만 재와 검댕이 가득해 이곳에서 밤이슬을 피하기는 힘들어 보였고.

“듣기야 했지만 이렇게 엉망일 줄은. 이거 날이 추워지기 전에 그 시베리아 부족 연합을 족치지 못하면 곤란하겠는데?”

시베리아가 춥다는 것이야 이고르도 모르지 않았고 제대로 된 거점도 없이 허허벌판에서 시베리아의 강추위를 견딜 수야 없었기에 이고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보좌관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이고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보급품이 적어서 날이 추워지기 전에 원주민 부족을 찾지 못하면 여러모로 곤란합니다만...”

“크흠. 그렇긴 하지.”

보좌관의 지적에 딱히 할 말이 없었던 이고르는 괜히 헛기침한 후 야쿠츠크 요새에 미련을 버리고 발걸음을 옮기며 보좌관에게 말했다.

“적당히 거점으로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너무 엉망이야. 차라리 좀 떨어진 곳에 진을 치는 것이 맞는 것 같아.”

“제 생각도 같습니다.”

보좌관이 동의하자 이고르는 아직 해가 높이 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잠시 고민하다 명령을 내렸다.

“그럼 바로 야영준비를 하도록 하지. 그리고 그동안은 이동하느라 고생했으니 야영준비가 끝나면 초병을 제외한 인원은 쉴 수 있게 하고.”

“알겠습니다.”

그렇게 명령을 내린 이고르는 잠시 고개를 돌려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코사크인들은 폐허가 되어 버린 야쿠츠크 요새를 보고 분노하거나, 혹은 안타까워하거나, 혹은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이고르는 슬쩍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식량은 어느 정도나 남아 있지?”

이에 보좌관도 주변을 살피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계산상으론 약 한 달 반 정도입니다.”

“으음...2주 안에 원주민 마을을 약탈하지 못하면...”

“예. 곧바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이르쿠츠크 요새 사령관을 설득해 추가적인 지원을 얻어낼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그렇기에 2주 안에 이 주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러시아 차르국에 반기를 든 원주민 마을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결국 임무는 실패한다는 뜻이었기에 이고르는 보좌관의 대답에 혀를 차며 추가로 명령을 내렸다.

“쯧. 그렇다면 여유를 부릴 수도 없군. 병사들에겐 미안하지만, 오늘 쉬면서 조를 짜도록 하고 내일부터는 바로 주변 지역을 탐색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 * *

야쿠츠크 요새를 무너뜨린 시베리아 부족 연합은 일단 부족으로 돌아와 겨울을 넘겼다.

그리고 봄이 되어 날씨가 풀리기 시작하자 겨우내 계획한 대로 연합의 일부 인원들이 다시 서쪽으로 향해 미리 눈여겨 봐두었던 야쿠츠크 요새에서 북동쪽으로 50km 정도 떨어진 곳에 거점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다행히 이곳에 배치된 인원들은 모두 건장한 남성들이었기에 계속해서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고 덕분에 4개월 만에 텐트 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다.

해서 이 거점의 임시 책임자인 아이누 탐사대장은 집무실에서 잠시 한숨을 돌리며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하고 있을 때 부관이 헐레벌떡 집무실로 들어왔고.

부관의 보고에 아이누 탐사대장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뭐? 러시아 차르국 병사들이 옛 야쿠츠크 요새 폐허 근처에 나타났다고? 설마 이전처럼 소규모 부대는 아니지?”

연합이 야쿠츠크 요새를 폐허로 만들었지만, 당연히 그냥 방치해 둔 것만은 아니었다.

러시아 차르국이 언젠간 야쿠츠크 요새를 방문할 것이 뻔했으니까.

해서 일부 인원을 배치해 멀리서 야쿠츠크 요새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고.

덕분에 레나 강이 녹아 배를 이용해 야쿠츠크 요새를 방문한 러시아 차르국 소규모 부대의 존재를 알아챌 수 있었고 말이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정찰병의 보고를 확인한 결과 이전처럼 소규모 보급부대가 아닌 대규모 전투 부대로 추측됩니다.”

“그래? 헌데 대규모라...적 병력이 얼마나 되길래?”

“대략 3천 명 정도라고 합니다.”

아이누 탐사대장은 부관의 말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3천 명? 예상보다...좀 많군.”

“그러게 말입니다. 야쿠츠크 요새 사령관 말로는 많아야 2천 명 내외로 예측했는데 확실히 그보다는 많았습니다.”

야쿠츠크 요새 사령관은 포로가 된 뒤로 비교적 협조적이었다.

원주민들이 얼마나 강력하든 원주민들에 의해 야쿠츠크 요새를 빼앗긴 이상 그는 모스크바로 돌아간다 한들 제대로 출세하긴 글렀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으니까.

또한, 북미왕국은 포로를 무척 관대하게 다뤘으니 사령관이 보기엔 적당히 아는 정보를 넘기고 대우를 받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고.

해서 사령관은 아는 것을 대부분 털어놓았는데 사령관은 자신의 지원 요청을 받은 모스크바에서 동부 시베리아 지역으로 많아 봐야 2천 명 정도의 병력을 보내리라고 예측했다.

동부 시베리아 지역이 워낙 먼 탓에 그 이상은 보급 문제로 인해 어렵다면서.

이 정보를 전달받은 연합은 논의 끝에 총 2천 명의 인원을 거점에 배치했고.

헌데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가 자신들보다 많다고 하니 머스킷으로 무장한 연합으로서는 섣불리 움직이기 어려워졌기에 부관이 아쉽다는 듯 중얼거리자 아이누 탐사대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만큼 러시아 차르국이 이 동부 시베리아 지역에서 나는 모피가 중요하다는 뜻이겠지. 헌데 저들의 부대 구성은 어떻게 되나.”

“그...코사크인들로 이루어진 기병 부대라고 하더군요.”

“기병 부대라...그럼 육로로 온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다만...레나 강에 러시아 차르국의 수송선이 함께 보였다는 보고를 생각해보면 아마 러시아 차르국은 빠른 이동을 위해 보급은 강을 통해서 하는 것 같습니다.”

아이누 탐사대장은 그 말에 눈을 빛내며 질문들을 쏟아냈다.

“배? 몇 척이나 되지? 크기는?”

“이전에 야쿠츠크 요새 지역을 방문했던 그 수송선 한 척이 전부랍니다.”

부관의 말에 아이누 탐사대장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전에 보고 야쿠츠크를 방문한 배는 기껏해야 100톤 정도의 수송선이었으니까.

“음? 그게 전부라고? 확실해?”

“그렇습니다. 다른 배는 없었습니다.”

이르쿠츠크에서 야쿠츠크까지의 거리를 생각해보면, 그리고 3천 명의 부대 규모를 생각하면 의외로 보급 규모가 적은 편이었기에 아이누 탐사대장은 러시아 차르국이 이번 일을 꽤 쉽게 보고 있다고 판단하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주변의 원주민들에게 입단속을 시키긴 했지만...북미왕국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모양인데? 나쁠 것 없군.’

“흐음...알겠네. 전투를 준비해야겠군.”

“알겠습니다. 그리고 절차대로 주변 부족에 이 사실을 통보하겠습니다.”

“그러도록 하게.”

* * *

야쿠츠크에 도착한 지도 벌써 5일이 지났는데도 원주민 부족을 찾지 못했기에 이고르는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레나 강 유역에 원주민들이 꽤 많이 살고 있다고 들었는데...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지? 북쪽이 아니라 동쪽을 탐사해야 하나?”

당장은 보급과 거점이 우선이었기에 레나 강을 따라 북쪽을 탐사했건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기에 이고르는 수색 방향을 바꿔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보좌관이 급히 이고르의 천막으로 들어왔다.

“찾았습니다!”

“뭐? 드디어 원주민 마을을 찾았다고?”

“그렇습니다. 레나 강을 따라 북쪽으로 2일 정도 거리에 마을이 있답니다.”

그러면서 보좌관은 품에서 야쿠츠크 주변 지역의 지도를 꺼내 한 곳을 가리켰고 이고르는 그 지도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어? 비교적 가까운데 왜 이제야 보고가 올라온 건가?”

그 말에 보좌관이 이번에 찾은 마을 앞쪽을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여기 지도에도 나와 있듯이 마을 앞쪽에 일종의 삼각주가 여럿 있고 이 삼각주에는 나무가 무성해 강을 건너지 않고선 마을이 보이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솔직히 발견한 것도 운이 좋아서였지요.”

“아. 그래? 레나 강 맞은 편이라...역시 동쪽도 살펴야 했나. 그보다 마을 규모는 크다던가?”

“그렇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을 주변에는 낮고 두터워 보이는 방벽이 존재했고 그 방벽 위에는 분명 대포가 배치되어 있었다는 보고입니다.”

보좌관의 말에 이고르는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으음...대포라. 그럼 병사들이 발견한 마을은 그 시베리아 부족 연합 소속의 마을이 분명하겠군. 이 야쿠츠크 요새에 배치되어 있던 대포를 가져갔으니.”

“예.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이고르의 추측에 보좌관이 동의하자 이고르는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그래. 혹시 대포가 얼마나 있는지도 보고했나?”

“병사들이 확인한 것만 10문이 넘는다고 합니다.”

보좌관의 대답에 이고르는 곧바로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함락 직전에 적이 대포를 노획하지 못하도록 부수지도 않은 건가.”

이고르가 야쿠츠크 요새 사령관의 무능함에 화를 낼 때 보좌관이 진정하라는 듯 급히 입을 열었다.

“다만 다행인 점은 대포 대부분이 강으로 오는 적을 공격하게끔 배치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어?! 그게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대포의 위치를 살핀 병사들의 보고는 모두 같았습니다. 그러니 일단 이곳에서 강을 건넌 후 빠르게 북상해 전투를 벌인다면...아마 당장은 대포 공격을 받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전투가 길어지면 저들은 대포를 옮겨 사용할 테지만 당장 마을로 접근할 때 대포알이 날아오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기에 이고르는 안색이 활짝 펴졌다.

“오오! 그러면야 이야기가 쉽지. 저들이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기 전에 바로 공격하면 되겠군!”

이에 보좌관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단 보고받기로는 방벽의 높이는 그리 높지 않아 오르는 것은 크게 어려울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생각보다 마을 규모가 크고 원주민들도 많아 보여 점령하기가 쉬울지는 조금 의문입니다만...”

“그래? 얼마나 되길래?”

“얼핏 보기에 마을 안에 있는 원주민 수가 1천 명은 가볍게 넘는다는 보고입니다.”

이고르가 이곳에 오기까지 일부 원주민 부족 마을을 지나쳤지만, 대부분은 모든 원주민을 합친다 하더라도 500명이 채 되지 않는 조그마한 부족들이었다.

헌데 이번에 발견한 마을은 생각보다 원주민이 바글바글했기에 이고르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흐음...연합 소속의 마을인데 원주민까지 그렇게 많다? 어쩌면 그 마을은 연합의 주요 거점일 수도 있겠군.”

“아마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길잡이에게 확인해보니 이전까지 이 주변에 그러한 원주민 마을은 없었다고 하니까요.”

보좌관의 대답에 이고르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

“좋아. 차라리 잘됐어. 어차피 우린 보급 물자가 풍족하지 않은 편이니 오히려 적 거점을 발견하는 것이 늦어지면 여러모로 곤란하지. 물론 적은 방벽 뒤에 숨어 있는 만큼 마을을 점령하기가 쉽지 않겠지만...일단 우리의 수가 더 많고 원주민보다야 화약 무기에도 익숙하니 나름대로 승산은 있어.”

물론 연합의 원주민들이 야쿠츠크 요새까지 무너뜨린 것을 보면 원주민들도 만만치야 않겠지만 자신에게는 3천 명의 코사크인들이 있었다.

거기에 방벽의 높이가 그리 높지 않다고 했으니 기마에 능숙한 코사크인들이라면 말 등을 박차서 바로 방벽을 오를 수도 있어 보였고.

그런 만큼 상황을 봐서 곧바로 돌격해 근접전으로 돌입하든, 아니면 적당히 접근해 사격전으로 원주민의 수를 줄여 마을을 점령하든, 자신들에게 승산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보좌관 역시 이고르의 판단에 동의했다.

“그렇긴 합니다. 그리고 마을이 큰 만큼 각종 물자도 꽤 있을 테니...”

“그렇지. 원주민 마을을 거점 삼아 주변 지역을 정찰하고 약탈하고. 이를 계속 반복하다 보면 결국 원주민들은 다시 우리에게 무릎 꿇고 공물을 바칠 테니 임무도 완수할 수 있겠지. 아. 헌데 원주민들이 아직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지는 못했겠지?”

이에 보좌관은 어깨를 으쓱했다.

“병사들이 조심히 접근해 정찰했다고는 합니다만...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떠날 때까지 마을 분위기는 별다른 소란 없이 조용한 편이었다고 합니다.”

그 말에 이고르는 결정을 내렸다.

“좋아. 그럼 즉시 정찰 나간 병사들을 모두 불러들이고 강을 건너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수송선이 있으니 내일이면 모든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을 겁니다.”

“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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