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8화
“쯧쯧쯧. 한 부족을 책임지는 추장이란 녀석이 얼굴이 그게 뭐냐. 세상 근심을 다 짊어진 표정이라니.”
강가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강을 바라보던 미주리 족 추장은 자신을 타박하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나이를 먹고 거동이 어려워 밖을 잘 나오지 않던 전대 주술사였던 나이든 노파가 한 여인의 부축을 받고 추장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고.
미주리 족 추장은 그런 전대 주술사를 보고 놀란 표정으로 급히 다가가며 안부를 물었다.
“웬일로 다 나오셨소. 몸은 좀 괜찮소?”
“괜찮다. 그래서 바람 좀 쐴 겸 나온 거고. 헌데 추장이란 녀석의 얼굴이 엉망이니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더구나.”
그 말에 미주리 족 추장은 쓴웃음을 머금고 자신의 손으로 얼굴을 잠시 매만져보다가 말했다.
“그렇게 내 얼굴이 엉망이오?”
“그래. 그냥 지나쳤다간 잠자리가 사나울 것 같아서 말을 걸 수밖에 없었지. 대체 뭐가 그리 걱정이냐.”
미주리 족 추장은 잠시 고민했지만, 그동안 이 노파에게 많은 조언을 구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후우. 부족의 앞날 때문이지.”
“뭐? 네놈답지 않게 그게 무슨...아...”
그 말에 노파는 뭔 미친 소리냐는 표정으로 미주리 족 추장을 바라보았고, 미주리 족 추장은 별말 없이 손을 들어 강의 한쪽을 가리켰다.
노파는 자연스럽게 그 손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강 위에 떠 있는 거대한 배를 보고 신기하다는 듯 감탄사를 토해냈고.
그런 노파의 반응에 미주리 족 추장이 입을 열었다.
“저게 바로 북미왕국의 배요. 할멈은 처음 보시려나? 이전에도 두세 번은 지나가긴 했는데.”
“처음 본다. 다만 네가 왜 그렇게 얼굴이 엉망이었는지는 알겠군. 저렇게 큰 배라니. 저것만 봐도 북미왕국의 강성함을 짐작하겠구나.”
“그렇지.”
“헌데 뭐가 문제냐. 북미왕국은 그리 호전적이지 않다면서.”
처음에 모인궤나 족이나 타마로아 족이 북미왕국에 합류한 이후 미주리 족은 북미왕국을 무척 경계했다.
이들과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던 탓에 이들이 북미왕국을 부추겨 자신들을 공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탓이다.
거기에 말을 탄 북미왕국의 전사가 이 지역에 대거 배치되면서 그러한 긴장감은 더 커졌고.
하지만 이들의 걱정과는 달리 북미왕국은 힘보다는 대화를 우선했고 이 대화에서 미주리 족이 지금처럼 자신들끼리 살고 싶다는 뜻을 밝히자 이를 존중하며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하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강을 이용할 수 있게만 허락해준다면 상관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미주리 족은 북미왕국과 협정을 맺었고.
노파도 이 사실을 손녀에게 모두 전해 들었기에 굳이 북미왕국의 배를 보고 걱정할 필요가 있느냐는 표정을 짓자 미주리 족 추장이 고개를 저었다.
“북미왕국이야 그렇지.”
“음?”
“지금 보이는 저 거대한 북미왕국의 배의 목적지가 어딘지 아시오?”
“글쎄다...”
노파는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부축하는 손녀를 보았지만, 손녀도 모르는지 고개를 저었다.
해서 노파가 미주리 족 추장을 바라보자 미주리 족 추장은 생각이 많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배는 물자를 가득 싣고 오토 족의 마을로 가는 배요.”
“오토 족의 마을이라고? 그럼 오토 족은...”
“그렇소. 작년부터 오토 족의 추장이 저들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 심상치 않더니 결국 북미왕국과 거래를 트기로 했답디다.”
그제야 노파는 미주리 족 추장의 반응을 이해했다.
오토 족은 미주리 족의 북서쪽에 자리한 부족으로 그리 강성한 부족은 아니었지만, 농사 기술은 뛰어난 편이라 식량은 풍부해 미주리 족은 모인궤나 족이나 타마로아 족을 약탈하고도 식량이 부족할 때에는 간혹 오토 족도 약탈하곤 했었으니까.
“흐음...북미왕국과 거래하면서 강성해진 오토 족이 우리를 공격할까 걱정하는 거냐?”
“솔직히 그렇지. 우리와 오토 족의 관계가 썩 좋은 건 아니잖소. 그나마 모인궤나 족이나 타마로아 족은 우리에게 원한이 있더라도 이미 부족은 사라진 셈이니 우리를 공격하지는 못하지만...”
“쯧쯧. 그러니 내가 주변 부족을 섣불리 공격하지 말라고 몇 번이고 말했거늘...”
노파는 미주리 족 추장을 보고 혀를 차며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미주리 족 추장은 오히려 당당하다는 듯 고개를 치켜들며 입을 열었다.
“식량이 부족한데 어쩌겠소. 배고프다고 징징대는 아이들과 먹지 못해 젖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눈물짓던 어미들을 생각해보면 주변 부족을 약탈해 식량을 얻어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소. 부족원들을 제대로 먹여 살리는 것이 추장인 내 의무이기도 하고.”
노파 역시 이전에 주변 부족을 약탈하지 않았다면 대다수의 부족원들이 굶어 죽거나 식량을 구하기 위해 부족이 해체되었을 거라는 것은 잘 알기에 더는 타박하지 않고 말했다.
“...그렇기야 하지.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다른 부족이 훗날 강성해져서 우리에게 보복할까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크흠.”
이에 미주리 족 추장은 할 말이 없는지 슬쩍 시선을 돌려 점차 가까워져서 더 거대해 보이는 북미왕국의 배로 시선을 돌리자 노파도 다시 북미왕국의 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슬쩍 입을 열었다.
“...훗날이 두렵다면 오토 족처럼 북미왕국과 교류를 하거나 아니면 모인궤나 족이나 타마로아 족처럼 북미왕국에 합류하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인다.”
북미왕국의 배를 바라보고 있던 미주리 족 추장은 노파의 말에 안색을 찌푸렸다.
“할멈은 모르나 본데...북미왕국과 거래하면 저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소.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부족은 해체되고 북미왕국만 남고.”
“안다. 나도 손녀한테 여러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다만 생각해봐라. 주변의 약소 부족들이 북미왕국과 합류하거나 거래를 튼 만큼...이전처럼 농사가 망하기라도 하면 어쩔 거냐.”
“으음...”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농사라는 것이 항상 잘 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부족을 약탈했던 것이고.
허나 주변의 약소 부족은 모두 북미왕국과 거래하거나 합류한 이상 더는 그러한 방법은 쓸 수 없고 결국 앉아서 굶어 죽거나 식량을 찾아 부족원이 뿔뿔이 흩어져 부족이 해체되거나 결국 북미왕국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지 않으냐는 노파의 시선에는 할 말이 없었던 미주리 족 추장은 그저 신음을 흘릴 뿐이었고.
그런 추장을 보고 노파가 덧붙였다.
“그리고 손녀한테 듣기로 북미왕국이 운영하며 여러 가지를 가르친다는 그 학교라는 곳에서는 아이들에게 출신 부족의 말과 부족의 역사를 가르친다고 들었다. 그럼 사실상 부족은 해체되어도 부족의 정신은 계속 이어진다고 봐야겠지. 그리고 북미왕국에 합류하면 생활하는 방식은 변화하더라도 비교적 풍족하게 살 수 있다면서. 그럼 그렇게 질색할 필요는 없지 않으냐.”
노파의 말에 미주리 족 추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이제는 멀어지는 북미왕국의 배를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만약의 경우 식량을 얻을 수 있는 모인궤나 족과 타마로아 족을 더는 공격할 수 없기에 필요 이상으로 북미왕국에 날을 세웠는데 그게 실수였던가.”
“실수야 바로잡으면 그만이지.”
툭 하니 내뱉은 노파의 말에 미주리 족 추장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긴 하지. 다만 이건 부족의 미래와 관련된 문제라 다른 부족원들과도 충분히 논의한 이후에 결정하도록 하겠소. 조언 고맙수다.”
“오냐. 아가야. 슬슬 바람은 다 쐰 듯하니 들어가자꾸나.”
“예. 할머니.”
* * *
조용한 곰은 정성국이 건넨 커피잔을 받아서 커피를 마시기 위해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가 코끝에서 느껴지는 과일 향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으며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어? 이거 무슨 커피입니까? 기존의 커피보다 커피 향이 진한 것 같은데...”
별다른 말도 하지 않았는데 커피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챈 조용한 곰을 보고 정성국은 웃으며 설명했다.
“이번에 왕실 상단 소유의 커피 농장에서 수확한 커피일세. 마셔보게.”
이에 조용한 곰은 눈을 감고 커피의 향을 즐기다 조심스럽게 커피를 마신 후 빙그레 미소지으며 말했다.
“좋군요. 풍성한 향과 맛이 무척 매력적입니다. 그리고...교역품으로도 가치가 있을 것 같고요.”
조용한 곰이 보기에는 최상품의 커피였기에 유럽의 귀족들에게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을 것 같아 흥미를 보이자 정성국이 고개를 저었다.
“뭐 아직은 교역품으로 팔 정도로 수확량이 많은 것은 아니라...”
“아. 그건 좀 아쉽군요. 헌데 이건 어느 섬에서 수확한 커피입니까?”
정성국이 워낙 커피를 좋아하는 터라 왕실 상단에서 하와이 제도 곳곳에 커피 농장을 건설했다는 것을 아는 조용한 곰이 묻자 정성국이 커피 향을 즐기다 씩 웃으며 대답했다.
“하와이 섬의 서부 지역에서 수확한 커피일세.”
전생에서 세계 3대 커피 중 하나가 바로 하와이안 코나였기에 정성국은 하와이 제도의 원주민 부족들과 교역하기 시작하면서 왕실 상단을 통해 하와이 섬의 서부 지역에 커피 농장을 건설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왕실 상단에서는 하와이 섬에 커피 농장을 건설하고 그동안 양질의 커피를 생산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실이 지금 정성국이 마시는 커피였다.
물론 전생의 하와이안 코나와는 품종이 다른 터라 그가 기억하는 맛과는 달랐지만 하와이 섬의 기후와 토양 때문인지 다른 하와이 제도에서 수확한 커피와는 확실히 나았기에 정성국은 만족했고.
“어? 그렇습니까? 오하우 섬이 아니라니 의외군요.”
“기후도, 토질도 오하우 섬보다는 하와이 섬이 커피를 재배하는데 더 적합한 것 같네.”
가장 먼저 커피를 재배한 곳이 오하우 섬이라 지금까지는 이 오하우 섬에서 재배한 커피를 최고로 쳤는데 이 커피를 마셔보니 이러한 상황이 달라질 것 같아 조용한 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흠. 나쁘지 않군요. 하와이 제도에서 오하우 섬만 너무 집중적으로 개발되는 느낌이 없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동안 정성국은 북미왕국 곳곳을 균형적으로 개발하려 하는 것을 잘 아는 조용한 곰이 그렇게 이야기하자 정성국이 맞장구쳤다.
“그렇지. 어차피 오하우 섬이야 5함대가 창설되어 5함대 사령부가 들어서기로 되어있으니 일자리야 넘쳐날 테고.”
“예. 그것 때문에 하와이 제도의 원주민들이 주로 오하우 섬으로 이주하는 터라 문제였는데 최소한 하와이 섬의 원주민들은 커피만 잘 재배하면 먹고사는 데는 큰 문제가 없을 것 같군요.”
생각보다 커피 품질이 괜찮은 터라 하와이 섬 서부 지역을 대대적으로 개발할 생각이었고 그런 만큼 다른 섬들은 계속해서 인구가 유출되긴 하겠지만 오하우 섬에만 몰리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해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보다 하와이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남태평양 문제는 어떻게 되어가나?”
남태평양의 사정이 북미신문을 통해 알려지기 전에 에스파냐, 네덜란드와 사전 작업을 해 두라고 이야기했었는데 아직 별다른 보고가 없었기에 정성국이 커피를 음미하며 묻자 조용한 곰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 그렇지 않아도 그 문제를 보고하기 위해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음?”
“그동안 에스파냐, 네덜란드 대사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두 대사는 남태평양의 섬은 원주민들의 것이라는 저희의 주장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오. 그래? 별다른 불만은 없던가?”
정성국이 의외라는 표정을 짓자 조용한 곰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두 나라 모두 남태평양의 섬까지 신경 쓸 상황은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남태평양의 섬을 발견하고도 이름만 붙이고 말았던 거고요. 거기에 이 섬들을 모두 북미왕국의 땅이라고 주장한 것도 아니고 원주민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니 딱히 할 말도 없지요.”
에스파냐는 돈이 되는 누에바 에스파냐와 남미에, 네덜란드는 향신료 제도에만 관심 있을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정성국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을 때 조용한 곰이 덧붙였다.
“다만 탐사대가 남태평양을 탐사하던 도중 발견한 무인도를 북미왕국의 영토로 인정하는 부분에서 이의를 제기하더군요.”
“뭐라고?”
“저희가 북미왕국의 영토로 편입한 무인도 중 일부는 에스파냐와 네덜란드가 먼저 발견한 섬이니까요. 물론 두 나라 모두 이 섬들을 영토로 선언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의 지분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말에 정성국은 두 대사가 왜 그런 주장을 한 것인지 짐작하고 피식 웃었다.
“최소한의 지분이라. 그래. 그를 포기하는 대가로 무엇을 요구하던가?”
이런 정성국의 반응에 조용한 곰도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유럽의 상황이 상황이라...두 나라 모두 신식 소총을 요구하더군요.”
“신식 소총이라...몇 자루나?”
“처음에야 5천 자루씩 요청했습니다만 잘 조율해서 각각 1천 자루에 총알 20만 발을 한 달 안에 넘겨주기로 합의했습니다.”
원래였다면야 신식 소총을 분해해 구조를 파악하고 어떻게든 복제하려 들 테니 최소 5천 자루 이상의 대규모 거래만 했지만, 이 경우는 상황이 조금 달랐기에 최대한 깎았다고 조용한 곰이 덧붙였고.
하지만 정성국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기억하기로는 올해 생산하는 신식 소총은 전량 잉글랜드에 넘겨주기로 되어있으니까.
“응? 한 달이라고? 그건 어렵지 않나?”
이에 조용한 곰은 괜찮다는 듯 웃으며 이런 정성국의 의문에 답했다.
“무기 제조 공방에 연락해보니 공방을 이전한 후 확장하며 공방 직원을 늘린 만큼 민간에 푸는 양을 조금 줄이면 가능할 것 같다고 하더군요. 해서 잉글랜드에 넘기기 위해 비축 중인 신식 소총을 먼저 두 나라에 건네주고 무기 제조 공방에서 열심히 추가 생산한 제품을 잉글랜드에 인도할 예정입니다.”
무기 제조 공방은 공방의 확장과 보안을 이유로 새한성에서 북동쪽의 도시로 이전했다는 것을 떠올린 정성국이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확장 공사를 계속 진행하더니 생산량이 조금 늘어난 모양이군. 그렇다면야 뭐...나쁘지 않네. 고작 신식 소총 2천 자루를 넘겨주고 유럽 세력이 남태평양에 집적대지 못하도록 막은 셈이니.”
이에 조용한 곰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북미왕국도, 남태평양 원주민도, 에스파냐도, 네덜란드도 모두 만족하는 거래이지요. 다만 프랑스의 루이 14세에게는 조금 미안하긴 합니다만...”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