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7화
작년 야쿠츠크에서 올라온 보고서에 모스크바는 꽤 시끄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미개한 원주민들에게 패배하다니.
거기에 원주민에게 패배하면서 원주민들의 공격을 우려한 야쿠츠크 요새 사령관이 대외 활동을 금지하고 야쿠츠크 요새에 틀어박혀 있는 통에 공물을 제대로 걷지 못해 모피 생산량의 3할 가까이가 줄어든 셈이었으니 모피 산업에 지분이 있는 귀족들은 이익이 줄어들어 하루라도 빨리 차르에게 반기를 든 미개한 원주민들을 토벌해야 한다고 난리를 쳐댔고.
이에 차르인 표도르 3세는 즉각 코사크인들로 구성된 토벌대를 편성했다.
이걸 그냥 내버려 두었다간 애써 구축한 시베리아에서의 영향력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더불어 보고서에 따르면 공물 문제로 원주민들이 반기를 들었다고 했는데 이건 달리 해석하면 미개한 원주민들 따위가 자신의 권위를 실추시킨 셈이기도 했으니 그냥 넘어갈 수도 없었고.
다만 원주민들이 머스킷으로 무장했다는 것이 조금 걸리기는 했다.
보고서에는 꽤 많은 원주민이 머스킷으로 무장했다고 쓰여 있었으니.
다만 대다수는 이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청나라도 화약 무기를 사용하는 만큼 일부 무기가 원주민들에게 흘러 들어간 것을 야쿠츠크 요새 사령관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확대해석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청나라가 화약 무기를 사용했지만, 그렇다고 그 비중이 높은 것은 아니었기에 무기가 시베리아 원주민들에게 흘러들어 가봐야 소량일 거라는 이야기는 일리가 있었고.
물론 일부는 바다 건너에 존재하는 북미왕국이 개입하지 않았나 의심하며 조금 사정을 자세히 파악해야 한다고 말을 꺼내기도 했지만 당장 원주민의 반란을 진압하지 않으면 손해를 보는 귀족들의 외침에 이 이야기는 묻혔다.
해서 토벌대의 대장인 이고르는 올해가 가기 전에 반기를 든 원주민들을 모두 진압하라는 차르의 명령을 받고 거의 3달 동안 이동해 바이칼 호 인근의 이르쿠츠크에 도착했고.
부하들에게 잠시 휴식을 취하라고 명령한 후 이르쿠츠크 요새의 사령관을 만나 보급 지원을 요청하려 했을 때 사령관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아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야쿠츠크 요새가 이미 함락되었다고요?”
“그래.”
사령관은 그게 말이 되느냐는 표정을 짓는 이고르를 보고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껴 다시 입을 열었다.
“겨울이 지나고 날이 풀리면서 얼어붙었던 레나 강도 녹기 시작했지. 해서 일부 물자를 야쿠츠크 요새로 수송하기 위해 수송 부대를 보냈고. 헌데...”
“헌데?”
“이번에 복귀한 병사들이 그러더군. 이미 야쿠츠크 요새는 폐허가 되었다고.”
“폐허...라고요?”
야쿠츠크 요새가 폐허가 되었다는 이야기에 이고르가 놀란 표정을 짓자 사령관이 씁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원주민들이 야쿠츠크 요새를 함락시키고 내부에도 불을 지른 모양이야. 그래서 그런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더군. 듣자니 복구하는 것보다 근처에 새로 요새를 짓는 편이 나을 정도로 엉망이 되었다는군.”
“그럼 그곳에 있던 주민들은?”
“모르네. 죽었는지, 아니면 원주민들이 노예로 써먹기 위해 끌고 갔는지는.”
사령관의 대답에 이고르는 역시 생존자가 없기에 정보가 부실했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이며 이 예상외의 상황을 잠시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생각에 잠겼다가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 혹시나 하고 사령관에게 질문을 던졌다.
“으음...분명 원주민들이 머스킷으로 무장했다는 사실은 들었습니다만 야쿠츠크 요새를 함락시킬 정도였다는 겁니까? 제가 알기로 야쿠츠크 요새에는 만약을 대비한 대포도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이곳도 그렇지만 시베리아 지역의 거점 요새들은 대포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요새를 공격하려는 적을 방어하기가 쉬웠고.
헌데도 원주민들의 공격을 버티지 못했다니 생각보다 원주민의 수가 많은 건가 싶어 사령관에게 묻자 사령관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휴우. 그래. 분명 야쿠츠크 요새에는 대포가 배치되어 있었지. 그뿐인가? 야쿠츠크 요새 사령관이 하도 불안해해서 이곳에 배치되어 있던 대포도 일부 빌려주기까지 했어. 헌데 그걸로도 원주민들을 막긴 어려웠던 모양이야.”
그런 사령관의 한탄에 이고르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허. 분명 야쿠츠크 사령관의 보고서에는 머스킷으로 무장한 원주민은 많지 않다고 들었는데...”
“다만 그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기도 했지. 원주민이 어디서 머스킷을 구했는지 알 수 없기에 원주민들이 더 많은 머스킷으로 무장할 가능성도 있다고.”
그 말에 이고르는 모스크바에서 생각한 것처럼 원주민들이 청나라에서 무기를 구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과 일부가 주장했던 북미왕국 개입설을 떠올리면서 신음을 흘렸다.
“으음...허면 원주민들이 더 많은 머스킷을 구한 걸까요?”
“그건 모르겠네. 생존자가 전혀 없으니. 거기에 내가 알기로는 야쿠츠크 요새 주변에는 야쿠트인들이 일부 사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들도 사라졌거든.”
“사라졌다고요?”
이고르는 야쿠츠크 요새 주변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사령관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 사령관이 입을 열었다.
“그렇네. 야쿠츠크 요새 주변에 있던 원주민 마을들이 텅 비었다고 하더군. 다만 남아있는 가재도구가 거의 없는 것을 보면 급하게 도망쳤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고 야쿠츠크 요새가 폐허가 되었으니 다른 곳으로 이주한 것이 아닐까 싶다는데 상황이 상황이라 이들을 추격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사령관의 말처럼 이미 야쿠츠크 요새가 무너진 이상 러시아 차르국의 영향력은 완전히 사라진 셈이었다.
더불어 이고르도 코사크인들이 원주민을 가혹하게 대했다는 사실은 모르지 않기에, 야쿠츠크 요새마저 무너진 이상 더는 러시아 차르국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레나 강 인근 유역의 원주민들이 고작 수송 부대를 보고 협조적으로 나오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은 짐작했고.
“끙...그러면 야쿠츠크 요새에 관련된 정보나 레나강 동쪽에서 우리 러시아 차르국에 반기를 들었다는 원주민 부족들에 관한 정보가 아예 없는 겁니까?”
“그건 아니네. 주변에서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 못한 수송 부대의 지휘관은 야쿠츠크 요새의 상황을 하루라도 빨리 보고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하고 병사들과 함께 다시 배를 타고 레나 강을 거슬러 이동했고...레나 강 유역에 사는 원주민 부족이 보이면 무조건 정박해 정보를 수집했네. 물론 이들은 아는 것이 많지는 않았지만...한 가지는 파악할 수 있었지.”
이에 이고르는 눈을 빛내며 사령관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엇입니까?”
“레나 강 동쪽의 시베리아 원주민 부족이 모두 뭉쳤다는 것.”
“예? 에벤 족 뿐만 아니라 레나 강 동쪽의 모든 부족이 말입니까?”
이고르가 놀란 표정으로 다시 한번 확인하자 사령관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들은 자신들을 시베리아 부족 연합이라고 지칭한다더군.”
“시베리아 부족 연합이라...”
이고르가 시베리아 부족 연합이라는 명칭을 몇 번이고 중얼거리고 있을 때 사령관이 말했다.
“최근 야쿠츠크 요새 사령관이 더 많은 모피를 확보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거래 조건을 변경한 것으로 아는데 이 때문에 레나 강 동쪽의 원주민들은 불만을 품었겠지. 거기에 에벤 족이 야쿠츠크 요새의 병사들을 기습해 태반을 죽였으니...”
이고르는 속으로 야쿠츠크 요새 사령관의 경솔한 행동에 혀를 차며 사령관의 말을 받았다.
“쯧. 레나 강 동쪽에 있는 원주민들이 에벤 족을 중심으로 뭉친 모양이군요.”
“그런 것 같아. 그리고 결국 야쿠츠크 요새를 함락시켰으니 지금은 기세가 더욱 올랐을 테고...그동안 우리에게 복종하던 주변 원주민들도 죄다 이 연합에 붙은 모양이고.”
그 말에 이고르는 신음을 흘렸다.
“으음...그렇다면...”
“그래. 자네들의 계획을 전면 재검토해야 할 거야. 이미 야쿠츠크 요새가 폐허가 된 지라 제대로 된 지원을 받을 수도 없고 주변의 원주민들은 적대적이거나 자네들에게 비협조적일 테니까. 거기에 에벤 족 뿐만 아니라 여러 부족이 뭉친 시베리아 부족 연합을 모두 상대해야 할 테니...자네가 데리고 온 병력이 총 3천 명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전투력이 뛰어난 코사크인들로 구성된 부대입니다. 그래서 모스크바에서는 이 정도면 우리 러시아 차르국을 공격한 에벤 족에게 본때를 보여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원주민 세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모스크바에서 코사크인을 무려 3천 명이나 보냈다는 것은 그만큼 모스크바에서도 이번 일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다만 야쿠츠크 요새가 온전했다면 모를까 현 상황에서 과연 3천 명으로 레나 강 동쪽을 다시 장악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었기에 사령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쉽지 않을 거네. 저들은 이미 화약 무기를 사용하고 있고 병사들의 보고에 따르면 야쿠츠크 요새에 있던 대포마저 모두 사라졌다고 하니 어쩌면 저들이 대포를 노획해 사용할 수도 있을 테고.”
“맙소사. 대포마저...”
모스크바에서 야쿠츠크까지는 워낙 멀었기에 감히 대포를 끌고 온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헌데 원주민이 야쿠츠크에 배치된 대포를 노획한 것 같다는 이야기에 이고르는 탄식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고.
아무리 코사크인들의 전투력이 뛰어나다 한들 대포가 배치되어 있는 원주민 마을을 섣불리 공격하기란 쉽지 않으니까.
그리고 야쿠츠크 요새가 무너진 이상 대포를 구할 곳은 이곳뿐이라 이고르가 간절한 눈빛으로 사령관에게 지원을 요청하려는 찰나 그 낌새를 눈치챈 사령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우리도 야쿠츠크 요새에 내포를 일부 대여해줬다가 되돌려 받지 못한 만큼 자네들에게 대포를 지원해줄 수는 없네. 이곳을 방어하기 위해서도 대포가 꼭 필요하니.”
이에 이고르는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사령관의 처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대포를 몇 문 잃어버린 상황에서 다시 대포를 내어주긴 어려울 테니.
“그럼 병사라도...”
이고르는 차선으로 레나 강 유역의 지형에 익숙한 병사들을 대거 지원받을 생각을 했지만, 사령관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병사도 어려워. 지금이야 별다른 소문이 퍼지진 않았지만, 우리가 원주민에게 패배하고 야쿠츠크 요새가 불태워졌다는 이야기가 돌아다니면 원주민들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물자 지원 정도야 조금은 해줄 수 있네만...그것도 자네들이 오래 사용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닐 걸세. 잘해야 한 달 정도?”
이고르도 처음에야 사령관의 처지를 이해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너무나도 박한 지원에는 분통을 터트리고 말았다.
“허. 여기서 야쿠츠크 요새까지 한 달 정도 걸리지 않습니까? 그리고 야쿠츠크 요새가 폐허가 되었으니 보급도 받지 못하는데 한 달 치 식량이라니요. 그게 말이 됩니까? 조금만 더 지원해주십시오.”
그런 이고르의 요청에 사령관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식량을 요청한다는 것은 결국 레나 강 유역의 상황이 완전히 변했는데도 불구하고 이곳으로 떠나겠다는 뜻이었기에.
물론 이고르와 토벌대가 반기를 든 원주민들을 토벌하면 상관이 없는데, 만약 이들이 원주민 토벌에 실패하면 시베리아에서 러시아 차르국의 영향력은 더욱 약화될 것이 분명했기에 사령관은 이고르가 조금 신중하게 판단했으면 하는 생각에 말했다.
“흠. 결국, 야쿠츠크로 떠날 건가? 솔직히 위험할 텐데? 내가 모스크바에 전령을 보냈으니 이곳에서 대기하면서 모스크바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 낫지 않나?”
“그것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제가 받은 명령은 올해가 가기 전에 러시아 차르국에 대항하는 원주민들을 모두 토벌하라는 것이라...이곳에서 언제 내려올지 알 수 없는 모스크바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일단 야쿠츠크 요새로 이동해 주변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나아 보입니다.”
사령관은 이고르의 대답에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보급은 어쩌고.”
“오히려 시베리아 지역의 원주민들이 적대적이라면...약탈하면 그만 아닙니까.”
보급이 어렵다면 아예 원주민 마을을 약탈하겠다는 이고르의 이야기에 사령관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으음...그게 말처럼 쉬울까?”
“제가 알기로 야쿠츠크 요새의 주민들은 대부분 코사크인들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사실을 전한다면 코사크인들은 분노하며 원주민 토벌에 열을 올리겠지요.”
코사크인들의 전투력은 생각보다 대단했고 이들의 감정을 건드린다면 비록 상황은 불리해도 사기는 떨어지지 않을 거라는 이고르의 이야기에 한참을 고심하던 사령관은 결정을 내렸다.
“흐음...알겠네. 추가로 물자를 지원해주도록 하지. 그리고 길잡이도 몇 붙여주겠네.”
웬만하면 개입하고 싶지는 않은데 모스크바에서 이 지역에 무척 관심을 보이는 터라 제대로 지원해주지 않으면 후에 자신에게도 화살이 날아올 공산이 컸기에.
그런 사령관의 생각을 눈치채지 못한 이고르는 그저 추가로 지원해주겠다는 이야기에 만족해했다.
“오! 정말 감사합니다. 사령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