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1화
네덜란드 대사는 에스파냐 대사와 대화를 나누던 도중 방문한 잉글랜드 대사를 반기며 직접 커피를 건넸다.
잉글랜드 대사는 이를 받아들고 한 모금 마신 후 슬쩍 북미신문에 실린 시베리아 부족 연합의 이야기를 꺼냈고.
네덜란드 대사 역시 에스파냐 대사와 잠깐 시베리아 지역에 관한 이야기를 했었기에 처음엔 웃으며 맞장구쳤지만, 잉글랜드 대사의 이야기가 끝나자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건 너무 비약 아닙니까? 북미왕국은 북미 대륙을 제외한 영토는 별다른 관심이 없지 않습니까.”
“예. 그렇게 알려졌지요. 북미왕국은 북미 대륙을 제외한 영토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고. 하지만 북미왕국이 북미 대륙을 장악한 뒤로도 계속해서 영토는 확장되었습니다. 서인도 제도에, 그린란드, 아이슬란드, 그리고 페로 제도까지.”
“그러니 북미왕국에서 시베리아 지역도 북미왕국의 영토로 선언할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처음에만 하더라도 네덜란드 대사는 잉글랜드 대사의 예상이 과하다고 생각했지만, 유럽의 외교가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북미왕국이 온전히 북미 대륙을 장악한 뒤로도 영토는 계속해서 늘어난 것이 사실이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수긍하며 잉글랜드 대사의 예상을 묻자 잉글랜드 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뭐 북미왕국이 영토를 확장하는 문제에 딱히 간섭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만...북미왕국이 시베리아 지역 전체를 장악하게 되면 결국 유럽은 북미왕국에 둘러싸이는 셈이다 보니 조금 우려가 되긴 하더군요.”
“흐음...”
네덜란드 대사가 잉글랜드 대사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을 때 옆에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경청하던 에스파냐 대사는 피식 웃으며 커피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꽤 재미있는 주장이시군요.”
“에스파냐 대사께서는 저와 생각이 조금 다르신 모양이군요?”
잉글랜드 대사가 에스파냐 대사를 보며 이야기를 경청하겠다는 표정을 짓자 에스파냐 대사가 말문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전 인구 부족에 시달리는 북미왕국이 굳이 인구가 적고 땅만 넓은 시베리아 지역에 눈독을 들이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거든요. 오히려 북미왕국이 시베리아 지역의 원주민 부족들을 규합해 시베리아 부족 연합을 만들고 이 연합과 동맹을 맺은 것은 다른 나라들에 연합의 영역을 탐내지 말라고 선언하는 것 같고 말입니다.”
시베리아 지역이 멕시코 지역처럼 원주민이 많은 지역이라면 또 모를까 원주민도 그리 많지 않은 지역이기에 북미왕국이 굳이 시베리아 지역을 탐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에스파냐 대사였다.
다만 러시아 차르국이 자신들의 항의를 가볍게 여겼기에 무언가 조치를 취하긴 해야 했는데 북미왕국이 병력을 보내 시베리아 지역의 러시아 차르국 거점을 모두 부순다 하더라도 북미왕국이 이 지역을 직접 통치하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나는 모피로 재미를 봤었던 러시아 차르국이 다시 이 지역을 노릴 것이 분명했고.
해서 북미왕국은 원주민 부족들을 규합해 연합을 만들고 동맹을 맺어버림으로써 타국이 시베리아 지역에 개입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 아니겠냐는 에스파냐 대사의 추측에 옆에서 듣던 네덜란드 대사는 일리가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잉글랜드 대사는 생각에 잠기며 중얼거렸다.
“흐음...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군요.”
에스파냐 대사는 이러한 잉글랜드 대사의 반응에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그리고 설사 북미왕국이 시베리아 지역에 눈독을 들이고 그래서 시베리아 지역 전체를 북미왕국의 영토로 선언한다 하더라도 뭐 어쩌겠습니까. 설마 북미왕국의 확장을 막기 위해 잉글랜드가 앞장서서 북미왕국과 전쟁이라도 벌이실 생각이십니까?”
유럽에서는 어느 한 국가가 잘 나가면 동맹을 맺어 그 잘 나가는 국가를 견제하겠다고 전쟁을 벌이는 것이 일상이었지만 북미왕국의 경우 상황이 조금 달랐다.
물론 북미왕국의 군사력이나 기술력이 유럽의 수준보다 한 차원 높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보다는 잉글랜드도 그렇고 에스파냐나 네덜란드도 북미왕국과의 교역을 통해 충분한 이득을 보고 있었기에 북미왕국을 견제하겠답시고 전쟁을 일으켰다간 손해가 막심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에스파냐 대사는 본국이라면 이번 일을 가지고 절대 북미왕국과 척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과 그건 잉글랜드도 같은 상황이지 않냐는 표정으로 잉글랜드 대사를 보고 그렇게 묻자 잉글랜드 대사는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건 아닙니다만...”
잉글랜드 대사의 대답에 에스파냐 대사는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요. 그리고 그건 네덜란드나 저희 에스파냐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예. 그건 그렇지요. 북미왕국과의 교역을 통해 꽤 재미를 보고 있을뿐더러 솔직히 멀리 있는 북미왕국의 확장보단 가까이 있는 프랑스의 확장이 더 우려스러우니까요.”
네덜란드 대사가 에스파냐 대사의 말에 동의하자 에스파냐 대사가 잉글랜드 대사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지요. 그러니 여기서 이 문제로 왈가왈부해봐야 의미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흐음...그렇군요. 특히 티타임의 대화 주제로는 썩 적절하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고 말입니다. 이거 죄송합니다.”
잉글랜드 대사의 사과에 에스파냐 대사는 괜찮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아닙니다. 하하하.”
* * *
“호오. 그래?”
“예. 에스파냐 대사가 그러더군요. 잉글랜드 대사가 북미왕국의 확장을 무척 우려스러워한다고.”
정성국은 집무실을 찾아온 조용한 곰의 이야기에 커피잔을 내려놓고 흥미를 보였다.
“그래서 뭐라고 했나?”
“뭘 뭐라고 하겠습니까. 어차피 시베리아 지역을 직접 통치할 생각도 없는 터라 사실대로 이야기했지요. 그랬더니 에스파냐 대사는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묘하게 아쉬워하더군요.”
“음? 아쉬워했다고?”
정성국이 고개를 갸웃하자 조용한 곰이 피식 웃으며 답변했다.
“예. 아마 에스파냐 대사는 저희가 시베리아 지역에 영역을 확장하면 이를 지지해주는 대신 무언가 이득을 챙기려 했던 모양입니다.”
“하하하. 그래서 곧바로 자네를 찾은 건가?”
에스파냐 대사는 네덜란드 대사관에서의 티타임이 끝나자 곧바로 조용한 곰을 찾아와 잉글랜드 대사가 북미왕국의 확장에 무척 부정적인 것이 우려된다고 이야기한 까닭을 짐작한 정성국이 웃음을 터트리자 조용한 곰이 덧붙였다.
“예. 그리고 현재 유럽에 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프랑스가 우리 북미왕국과 덴마크가 동맹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후 곧바로 덴마크와 스웨덴 문제에 다시 끼어들었다며?”
외레순 해협에 북미왕국의 해군이 있었던 것을 목격한 프랑스에서는 런던에 주재하는 북미왕국 대사에게 외교관을 보내 북미왕국과 덴마크의 관계를 확인했고, 처음 프랑스 외교관의 질문에 어리둥절하던 북미왕국 대사는 일단 알아보겠다고 이야기한 후 사정을 확인하고 프랑스 외교관에게 동맹이 아니라고 확인해 주었다.
이에 프랑스 외교관은 급히 본국으로 돌아갔고 그 이후 프랑스는 자신들이 북미왕국 대사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군대를 재정비하고 용병 일부를 고용해 스코네 지방에 상륙한 덴마크에 최후의 통첩을 날렸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덴마크는 프랑스의 최후통첩을 받자마자 프랑스의 확장을 우려했던 신성로마제국과 네덜란드를 끌어들였고요. 헌데 여기에 에스파냐도 끼어든 모양입니다.”
“쯧쯧. 대체 무슨 이득을 보겠다고.”
정성국이 전쟁에 끼어든 에스파냐의 행동에 혀를 차자 조용한 곰이 살짝 웃으며 동의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튼, 유럽 내의 상황이 그런데 잉글랜드는 한 발짝 물러나 있는 상태고 자신들이 프랑스와 전쟁을 벌일 때 잉글랜드는 이를 구경하면서 저희와의 교역을 계속해서 확대하며 더 큰 이득을 볼 것이 확실하니 이 사실을 저에게 알려 어떻게든 잉글랜드의 교역 규모를 축소시키려는 속셈도 있는 것 같았고요.”
찰스 2세는 프랑스에 우호적인 터라 잉글랜드가 프랑스의 편을 들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이긴 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손해를 보고 피를 흘릴 때 잉글랜드는 오히려 북미왕국과의 무역을 통해 이득을 볼 것이 영 아니꼬웠던 에스파냐 대사는 조용한 곰에게 이 사실을 알려 조금이나마 잉글랜드를 견제할 속셈으로 이를 알려준 것 같다는 조용한 곰의 이야기에 정성국이 턱을 매만지면서 생각에 잠겼다 중얼거렸다.
“흠. 뭐 잉글랜드 대사가 우리를 은근히 견제하려 드는 것이 조금 그렇긴 한데 그렇다고 잉글랜드와의 교역이 축소되면 당장 우리도 손해 아닌가?”
“그렇지요. 잉글랜드의 배를 통해 유럽의 구리가 유입되고 있고 이 비중이 꽤 되니까요. 그리고 저희가 직접 상단을 보내 스웨덴의 구리를 가져오기에는...일단 이번 전쟁이 마무리된 이후에나 가능할 것 같습니다. 스웨덴도 덴마크가 무기를 사들여 다시 스코네 지방을 탈환할 수 있었던 것이 저희가 건네준 영토 매각 대금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조용한 곰의 이야기에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우리가 무상으로 덴마크를 지원한 것이 아니니 상관없을 것 같기야 한데...상인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그게 좋겠지. 거기에 일단 덴마크와 거래한 상황에서 적국인 스웨덴과도 새롭게 거래를 트는 것도 좀 그렇고. 그보다 시베리아 문제로 잉글랜드가 저렇게 반응할 줄은 몰랐는데?”
애초에 유럽은 시베리아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만약 북극 항로가 열려 있어 배를 이용해 시베리아 지역에 도착할 수 있다면 부드러운 금이라 불리는 모피를 확보하기 위해 시베리아 지역에 관심을 뒀겠지만 그게 아니다 보니.
더불어 북미왕국과 교류하는 유럽의 3국은 러시아 차르국과 우호적인 편도 아니었기에 정성국은 잉글랜드에서 저렇게 반응할 것을 예상하지 못했고.
해서 무척 의외라는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조용한 곰이 대답했다.
“런던에 주재하고 있는 대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잉글랜드는 우리 북미왕국에 꽤 우호적입니다. 이를 보았을 땐 잉글랜드 대사가 문제인 것 같긴 합니다만...”
그 말에 정성국은 커피잔을 들어 커피를 마시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흠. 원래 우리 북미왕국에 반감이 있는 인사인 건가?”
잉글랜드 대사는 예전 뉴욕 식민지의 총독이었다가 잉글랜드가 북미왕국에 식민지 전체를 넘기면서 본토로 돌아간 인물이었기에 혹시 북미왕국에 부정적인 건가 싶어 묻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기보단 이곳 새한성에 와서 우리 북미왕국의 국력이 예상보다 더 대단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기에 저희의 확장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은 잉글랜드 대사가 북미왕국을 높이 평가해 오히려 북미왕국을 경계하는 이 상황을 기뻐해야 하는 건가 하는 잡생각을 잠시 하다가 조용한 곰을 보고 입을 열었다.
“뭐 지금 상황에서 영토를 더 늘리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크게 상관은 없지만...슬슬 남태평양과 관련된 기사를 풀 생각인데 이를 보고 또 딴지를 거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파나마 운하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고 파나마 운하 공사가 내년에 완료될 예정인 만큼 슬슬 남태평양 탐사대의 기사를 실으면서 남태평양의 정확한 지도를 공개할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남태평양 원주민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고 널리 알릴 생각이었고.
헌데 잉글랜드 대사가 북미왕국의 확장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면 이러한 기사에도 부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어 정성국이 조금 걱정하자 조용한 곰이 상관없다는 듯 대답했다.
“잉글랜드야 남태평양엔 별다른 지분도 없는데 딴지를 건다고 해도 무시하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남태평양 문제는 에스파냐나 네덜란드의 반응이 문제인데...유럽에 전운이 감도는 만큼 오히려 잘 되었지요.”
잉글랜드야 남태평양에 별다른 지분이 없었지만, 에스파냐나 네덜란드는 조금 달랐다.
네덜란드는 동인도 제도를 장악한 지 오래되어 주변을 탐사하던 도중 호주를 비롯해 여러 섬을 발견하기도 했고 에스파냐도 태평양을 횡단하면서 몇몇 무인도를 발견하기도 했었으니까.
물론 두 나라 모두 이렇게 발견한 섬들을 탐내지는 않았지만, 북미왕국에서 이 섬들을 원주민들의 땅이라고 선언하면 북미왕국이 원주민들로 구성된 국가라는 사실 때문에 앞에서 반발하진 않더라도 뒤에서 불만을 품을 수는 있다고 보았고.
특히 최근 떠오르는 북미왕국의 교역품 중 하나인 진주가 남태평양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더더욱.
이에 정성국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다 조용한 곰이 오히려 유럽에 전운이 도는 만큼 지금 시기에 이 사실을 공개하는 것이 다행이라고 덧붙이자 그 속 뜻을 파악하고 피식 웃었다.
“당장 급할 테니 우리에게 불만을 표시하진 못할 거라 이거지?”
정성국의 말에 조용한 곰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불만이 있더라도 적당한 대가를 내어준다면 저들은 우리의 주장대로 남태평양의 섬들이 원주민들의 것임을 인정할 테고요. 그러면 잉글랜드의 반응 따위야...”
“적당한 대가라...알겠네. 차라리 남태평양에 관련된 기사가 나가기 전에 자네가 에스파냐 대사, 네덜란드 대사와 만나 이 남태평양 문제를 논의하고 저들의 지지를 얻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