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9화
정성국이 창문으로 내리쬐는 따뜻한 봄 햇살에 취해 읽고 있던 보고서를 내려놓고 잠시 눈을 감고 있을 때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전하.”
정성국이 눈을 떠 문을 바라보자 호위대장과 호위대원들이 보고서를 잔뜩 들고 온 것이 보였기에 정성국은 나른함을 떨쳐내기 위해 손으로 목덜미를 주무르며 물었다.
“아. 벌써 북방 항로가 열린 건가?”
“그렇습니다. 전하. 쾌속선을 통해 올라온 보고서들입니다.”
“알겠네. 가져오느라 고생했네.”
호위대장과 호위대원들은 정성국의 커다란 집무실 책상 한쪽에 보고서를 가득 쌓아두고 조심스럽게 퇴장했고 정성국은 자리에서 일어나 보고서들을 살폈다.
“흠...긴급 보고서가 없네? 뭐지?”
정성국이 고개를 갸웃하며 원상이나 국영 상단의 보고서 제목을 빠르게 훑어보았지만, 그가 원하는 제목의 보고서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해서 정성국이 한숨을 내쉬며 일단 원상의 보고서를 들어 올려 차근차근 살펴보고 있을 때 다시 누군가가 정성국의 집무실을 찾았다.
“전하.”
“무슨 일인가?”
정성국은 집무실을 찾은 조용한 곰을 보고 묻자 조용한 곰이 대답했다.
“북방 항로가 열리고 카무이 항에서 보고서가 도착했기에 이를 보고하러 왔습니다만...나중에 올까요?”
“아. 아닐세. 자네에게 보고를 듣는 편이 더 빠를 듯싶군. 시베리아 지역의 보고지?”
정성국이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인을 보충할 겸 티테이블로 이동하며 묻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예정대로 레나 강이 얼어붙었을 때 시베리아 부족 연합이 진격해 야쿠츠크 요새를 공격, 큰 피해 없이 함락시켰다는 보고입니다.”
그러면서 조용한 곰은 야쿠츠크 요새 전투에 관한 상세한 보고를 시작했고 정성국은 커피를 내리며 이를 모두 듣고 입을 열었다.
“요새 공격을 위해 이동형 60mm 화포도 충분히 보낸 만큼 야쿠츠크 요새의 함락은 큰 문제 없으리라고 보았지만...큰 피해가 없었다니 다행이로군.”
“그렇지요. 그리고 그곳에서 저항하던 포로와 민간인을 모두 데리고 온 모양입니다.”
“민간인까지?”
“예. 그것이...”
조용한 곰이 현지 사정을 자세히 설명하며 민간인들도 모두 포로 취급하여 데리고 올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정성국에게 설명하자 정성국은 다 내린 커피를 조용한 곰에게 건네며 수긍했다.
“아. 하긴. 생각해보면 민간인들이 그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도, 주변에서 지내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렵긴 하겠군. 외무청 관리가 잘 판단한 셈이야. 허면 이 민간인들은 지금 어디에 있나?”
“아이누 섬에 있습니다. 원래의 계획과는 달리 민간인들이 포로와 함께 있고 싶어 해서 이들의 관리 때문에 포로들을 모두 아이누 섬의 탄광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포로들은 아이누 섬의 탄광에서 일하고 노인이나 여성은 탄광 마을에서 지내며 이들의 뒷수발을 한다는 설명에 정성국은 피식 웃었다.
“나쁘지 않네. 포로가 많지도 않은데 그들을 모두 탄광에 투입할 수 있으니. 그리고 혹시 모르니 아이들의 경우 기본적인 교육은 시키도록 하게.”
“물론입니다.”
이전에 흑룡강 유역에서 북미왕국의 선박을 공격했다 붙잡힌 몇 안 되는 러시아인들도 아직 풀려나지 않고 있었다.
북미왕국에서는 굳이 이들을 오래 붙잡아 둘 생각은 없었지만, 러시아 차르국이 적반하장으로 나오자 포로들의 협상 문제는 기약 없이 뒤로 밀린 것이다.
그런 만큼 의외로 포로 생활이 길어질 수도 있었고 민간인들의 경우 공식적으로는 포로 신분도 아니었기에 정성국이 혹시나 해서 이를 언급하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포로들과 민간인의 처우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정성국은 이야기의 주제를 야쿠츠크 요새로 돌렸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야쿠츠크 요새는 예정대로 불태웠다고?”
“그렇습니다. 러시아 차르국의 영향력을 없애기 위해 야쿠츠크 요새를 불태워서 폐허로 만들었고...그 때문인지 저희 시베리아 부족 연합의 존재를 알고 있어도 눈치를 보던 소부족들이 대부분 시베리아 부족 연합에 합류한 모양입니다.”
그러한 효과를 얻기 위해 야쿠츠크 요새를 불태운 만큼 정성국은 만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최소한 레나 강 동쪽에는 러시아 차르국의 영향력이 모두 사라졌다고 봐도 되려나?”
이에 조용한 곰은 빙긋 웃으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동안 러시아 차르국의 패악이 워낙 심했던 탓에 이 소식을 접한 주변 원주민 부족들은 하나같이 이 소식을 반겼다고 합니다. 거기에 연합의 뒤에 북미왕국이란 나라가 있어 생필품을 구하는데도 크게 문제없고 러시아 차르국과의 거래처럼 조건이 박하지도 않다고 하니 더욱 기쁠 수밖에 없겠지요.”
처음 정성국은 동부 시베리아 지역에서 러시아 차르국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이야기에 일단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기에 히죽 웃었다.
그러나 점차 조용한 곰의 동부 시베리아 지역의 사정을 자세히 보고하기 시작했고 예상보다 격한 원주민들의 반응에 조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 그러면...”
“예. 그동안 러시아 차르국에 공물을 바치던 부족 태반이 연합에 합류하길 원한다더군요. 이들 중에는 레나 강 서쪽에서 사는 부족들도 많은 편이고요.”
러시아 차르국이 레나 강 인근으로 다시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동부 시베리아 지역의 원주민 부족을 모두 연합에 받아들이는 것이 좋긴 한데 잘못하면 연합의 영역이 레나 강 서쪽까지 확대될 것 같았기에 정성국은 꽤 고민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으음...그들도 연합에 합류하면 연합에서 그들을 보호해줘야 할 텐데...”
“그렇습니다. 그게 문제지요. 물론 머스킷을 대량으로 풀어 자체적으로 방어할 수 있게 도울 생각이기는 합니다만...”
이에 정성국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인구가 적은데 그게 가능하겠나?”
애초에 인구가 적은 시베리아 지역이었다.
거기에 시베리아 지역은 생산성이 낮은 땅이 대부분이다 보니 부족의 영역은 인구에 비해 무척 넓은 편이었고.
이 말은 머스킷을 대량으로 푼다 하더라도 각개격파 당하기 딱 좋다는 뜻이기도 했다.
특히나 포로로 잡힌 야쿠츠크 요새 사령관이 이야기하길, 이미 시베리아 지역의 상황을 모스크바에 알렸기에 모스크바에서는 전투에 익숙한 코사크인들을 대거 고용해 보낼 것으로 추측되는데 아무리 원주민들이 머스킷으로 무장했다 하더라도 1, 200명 규모의 소부족들이 이들을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정성국이 이를 지적하자 이를 모르지 않는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그게 문젭니다. 생산성이 낮은 땅이다 보니 원래 인구도 적은 편이었는데 러시아 차르국에서 이 지역을 헤집고 단지면서 전염병을 퍼트려 적은 인구가 더 줄어들어서 말입니다. 해서 이번에 연합에 합류한 부족들을 설득해 레나 강 동쪽으로 이주시킬 계획입니다.”
“음? 그게 가능하겠나?”
최근에야 공물 때문에 수렵의 비중이 올라가긴 했지만, 시베리아 지역의 원주민들은 주로 목축을 하며 살아왔다.
원주민들이 생계를 위해 키우는 동물이 바로 순록인데 이 순록은 시베리아 원주민들에겐 없어서는 안 될 무척 소중한 동물이었다.
순록은 힘이 좋아 사람이나 짐을 운반할 수도 있고, 젖은 음료와 유제품으로 가공할 수 있으며, 순록을 잡으면 고기, 내장, 혈액은 식용으로, 가죽은 의복이나 텐트의 재료로, 뼈와 뿔은 각종 도구의 재료로, 힘줄은 끈으로 이용할 수 있으니 작물을 재배하기 어려운 시베리아 지역의 원주민들은 순록 목축에 목을 멜 수밖에 없었고.
순록이 많은 수록 순록이 먹는 순록이끼 같은 지의류나 새순, 마른 잎 같은 순록의 먹이 때문에 원주민 부족들의 영역은 넓을 수밖에 없었다.
헌데 비록 수는 적겠지만 레나 강 서쪽의 부족들이 레나 강 동쪽으로 이주하면 이들이 키우던 순록도 함께 올 테고 자연스럽게 순록을 방목하는 영역 문제로 다툴 것은 뻔했기에 정성국이 의아한 듯 묻자 조용한 곰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그러면서 조용한 곰은 품에서 조그마한 가죽 주머니를 꺼내 정성국에게 건넸고 정성국은 이를 받아들고 안을 살펴보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이건...사금이네?”
“그렇습니다. 외무청 관리가 보고하길 에벤 족 서쪽 영역에 자리한 소부족이 북미왕국 상단과 거래할 때 모피와 함께 사금을 가져와 거래했답니다. 해서 사금의 출처를 확인해봤더니 소부족이 자리한 인근 강의 상류에서 채취했다더군요.”
조용한 곰의 이야기에 정성국은 전생에서도 이 야쿠츠크 동남쪽에 사금이 발견되면서 시베리아판 골드러시가 시작되었고, 덕분에 야쿠츠크가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가 알기로는 시베리아 지역에서 금이 발견되는 것은 18세기 정도로 기억했기에 원주민들이 사금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것에 의외라고 생각하다가 무언가 아귀가 맞지 않아 조용한 곰을 보고 급히 질문을 던졌다.
“잠깐. 원주민들이 사금을 채취해 사용했다고? 사금의 존재를 알게 된 러시아인들이 그걸 그냥 내버려 뒀고?”
이에 조용한 곰인 살짝 미소지으며 답했다.
“알아보니 사금의 존재를 발견한 것은 한 20년 전쯤이라고 합니다. 러시아 차르국과의 거래 때문에 더 많은 모피를 얻기 위해 주변에 있는 검은담비를 사냥하던 와중에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다만 족장은 사금을 채취해 사용하면 분명 러시아 차르국에서 사금의 존재를 눈치채고 자신들을 노예로 삼아 오로지 금만 채취하게 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금의 존재를 철저히 숨겼다고?”
“그렇습니다. 사금을 발견한 부족원에게도 신신당부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당시에도 러시아 차르국은 원주민들에게 패악을 부렸기에 사금을 발견한 부족원도 잘못하면 부족이 절단 날 수 있다고 여겨 입을 다문 모양이고요.”
전생에서는 그러다 사금의 존재를 기억하는 부족원과 족장이 죽어 사금의 존재가 잊혔다고 생각한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흠. 그렇게 숨겨왔던 사금의 존재를 우리에게 밝혔단 말이지?”
이는 시베리아 원주민들이 그만큼 북미왕국을 신뢰한다는 뜻이었기에 정성국이 미소를 짓자 조용한 곰이 입을 열었다.
“예. 일단 저희는 러시아 차르국과는 달리 믿을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더불어 저희의 지원으로 시베리아 부족 연합이 결성되어 러시아 차르국을 동부 시베리아 지역에서 완전히 몰아냈기에 더는 러시아 차르국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사금을 채취해 가져와 이를 이용해 물자를 구매한 거지요.”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사금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금광을 개발하자?”
“그렇습니다. 꼭 금광이 아니어도 시베리아 부족 연합의 미래를 생각하면 지금처럼 목축 산업이나 수렵에 의존하는 모피 산업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한 터라 장기적으로는 광업이나 임업에 투자할 계획이었으니까요.”
아무리 시베리아 지역을 북미왕국에서 직접 통치하지는 않을 계획이었지만 그렇다고 시베리아 지역의 개발에 손 놓을 생각은 아니었다.
당장은 몰라도 시간이 흐를수록 러시아 차르국은 강성해질 테고, 바다에 관심이 많았던 표트르 대제가 부동항을 찾겠다고 동부 시베리아 지역에 관심을 보였던 만큼, 시베리아 지역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간 훗날 뒤에서 이를 지원해야 하는 북미왕국의 손실이 커질 테니까.
더불어 시베리아 지역은 각종 광물이 넘쳐났고 북미왕국은 식량이 넘쳐났으니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해서 러시아 차르국의 지원 병력을 모두 물리친 후에는 국영 상단을 동원해 시베리아 지역에 투자하며 원주민들을 일부나마 정착시킬 생각이었고.
조용한 곰이 이 계획을 조금 앞당기자고 이야기하자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 사금을 발견한 김에 본격적으로 금광을 개발해 일자리를 만들어 레나 강 서쪽의 원주민들을 레나 강 동쪽에 정착시키자 이거지?”
“그렇습니다. 물론 연합에 정식으로 논의해야 할 사항이긴 합니다만...금광 개발만 한다면 이곳에서 나오는 금으로 식량을 비롯한 각종 물자를 거래할 수 있다는 사실과 광산을 개발하는 것을 알려주자 족장들은 꽤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니 가능할 것 같습니다.”
광산을 개발하면 자연스럽게 많은 인력이 필요하니 레나 강 서쪽의 유민들을 정착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거참...금이 부족해 걱정하던 찰나에 호주에 이어 시베리아에서도 금이 나오다니. 관리청에서 환호하겠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마치 하늘이 도운 것 같습니다.”
조용한 곰이 활짝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자 정성국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알겠네. 그럼 이 기회에 금광을 개발하며 원주민 중 일부를 정착시키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곧바로 진행하겠습니다.”
정성국의 대답을 듣고 조용한 곰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정성국이 급히 조용한 곰에게 물었다.
“아. 그런데 혹시 청나라에서 들어온 새로운 보고는 없나?”
이에 조용한 곰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예? 청나라에서요? 작년에 오삼계가 주나라를 건국해 청나라와 대치 중이라는 보고 외엔 딱히 새로운 보고는 없었습니다만...”
삼번 중 2개 번이 이탈하자 기세를 올린 청나라는 오삼계마저 정리하기 위해 오삼계가 장악하고 있던 호남, 호북으로 공세를 집중했지만 대패하면서 오삼계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2개 번이 사라진 이상 다시 화북 지방을 노리고 치고 올라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오삼계는 상황을 반전시키고자 호북성 형주를 창천부로 개칭해 도읍으로 삼고 주나라를 건국하며 스스로 황제가 되었는데 이때가 바로 작년 3월이었다.
다만 정성국이 기억하기로 오삼계는 황제가 된 후 반년도 되지 않아 노환으로 사망했고 오삼계의 사망은 무척 중요한 문제였기에 당연히 긴급 보고로 올라오리라 생각했는데 없었기에 정성국은 보고서를 하나하나 살피다가 조용한 곰에게 물어보았고.
헌데 따로 보고할 것이 없다는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은 내심 혼란스러워졌다.
‘대체 뭐지? 오삼계는 노환으로 죽었다고 알고 있고 내가 딱히 개입하지 않았기에 전생과 똑같이 작년 여름에 사망할 줄 알았더니...뭐 나쁠 건 없나?’
이번에 건국된 주나라는 오삼계의 카리스마로 유지되는 나라였기에 오삼계의 사망은 주나라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렇기에 전생에서는 오삼계가 사망하자마자 곧바로 주나라 장수들이 청나라로 투항했고 오삼계의 뒤를 이어 2대 황제가 된 오삼계의 손자 오세번은 불리함을 깨닫고 곧바로 본거지인 곤명으로 퇴각해 1678년 말엽에 청나라는 호남, 호북을 탈환하게 되고.
허나 오삼계가 살아있다면 주나라는 조금이나마 더 버틸 테고 그러면 청나라는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만큼 북미왕국에도, 조선에도 나쁠 것이 없었기에 정성국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알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