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을 탈출하라-464화 (464/850)

464화

원래라면 겨울이 되기 전에 카무이 항으로 돌아갔을 쿠나킨이었지만 이번엔 시베리아 부족 연합이 동부 시베리아의 거점인 야쿠츠크 요새를 공격하기로 예정된 만큼 쿠나킨은 카무이 항으로 돌아가지 않고 보급 물자를 운반하는 후발대와 함께 이동했다.

그리고 전투가 끝나고 연합의 부족원들이 전장을 정리할 때쯤 야쿠츠크 요새 인근에 도착해 전투를 치른 부족원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후발대를 지휘해 야쿠츠크 요새 인근에 천막을 다수 건설했고.

그렇게 만약을 대비해 주변을 경계하는 일부 부족원들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부족원들이 천막 안에서 보급품으로 제공된 약간의 소주를 마시며 얼어붙은 몸을 술기운으로 녹이고 달콤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쿠나킨은 한 천막 안에서 이번 전투에 관련된 보고서를 살펴보다 탐사대장의 말에 고개를 들며 중얼거렸다.

“흠...이 야쿠츠크 요새에 사는 사람들이 겨우 570명이라고요?”

쿠나킨이 이곳에 도착하고 잠깐 야쿠츠크 요새 안쪽을 살펴봤을 당시 생각보다 빼곡히 집이 들어서 있었기에 못해도 1천 명은 넘게 이 안에서 살고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생각외로 숫자가 적어 의아한 표정을 짓자 탐사대장은 쿠나킨의 의문을 눈치채고 곧바로 덧붙여 말했다.

“그렇답니다. 물론 이건 현재 무장 해제하고 포로로 잡힌 병사들과 주민들을 제외한 숫자라고 하더군요.”

“아. 그럼 이 570명은...”

“무기를 들기 어려운 노인, 여성, 아이들뿐이지요. 그 외에는 이 야쿠츠크 요새를 지키겠다고 나섰다가 죽거나 포로가 되었고 말입니다.”

쿠나킨은 그런 탐사대장의 말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시베리아 부족 연합에게 저 야쿠츠크 요새는 큰 가치가 없었다.

물론 훗날을 생각하면 레나 강 인근에 거점이 필요하긴 한데 레나 강 서쪽에 있는 야쿠츠크 요새를 사용하기보다는 레나 강 동쪽에 새로운 거점을 만드는 편이 더 나았고.

해서 야쿠츠크 요새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불태워버려 러시아 차르국이 이를 이용하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는데 그러자니 그동안 야쿠츠크 요새에 살던 민간인들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항복했던 야쿠츠크 요새 사령관도 자신들은 몰라도 민간인들은 제발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고 북미왕국에서도 저항도 하지 않는 민간인을 공격하는 일은 엄금하고 있었으니 이들을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쿠나킨은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탐사대장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음...이 야쿠츠크 요새를 완전히 박살 내서 러시아 차르국의 거점을 없앨 생각인데 그렇게 되면 저들은....”

이에 탐사대장은 물어 무엇하느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당연히 생존하기 어려울 겁니다. 한겨울에 밖으로 내몰리는 꼴이니까요. 거기에 레나 강이 얼어붙었기에 저들은 걸어서 이르쿠츠크에 도달해야 하는데 이곳에서 이르쿠츠크까지의 거리는 직선거리로만 1800km가량 됩니다. 저희가 인도적인 차원에서 식량이나 방한 물자를 내어준다 한들 이 한겨울에 그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이 어디 가능하겠습니까?”

탐사대장의 대답은 쿠나킨이 걱정했던 것과 같았기에 쿠나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흠...이것 참 곤란한데요. 그렇다고 저들 때문에 훗날 러시아 차르국의 거점이 될 수 있는 야쿠츠크 요새를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인데...야쿠츠크 요새를 불태우는 건 나중으로 미룰까요?”

“야쿠츠크 요새를 불태우는 것으로 우리 시베리아 부족 연합의 힘을 과시해 주변 원주민 부족들을 연합에 끌어들일 생각 아니었습니까? 헌데 저들 때문에 이를 나중으로 미루는 것도 좀...그리고 다른 부족은 몰라도 러시아 차르국에 원한이 강한 편인 알류트 족은 불만을 내비칠 수도 있습니다.”

탐사대장의 말도 일리는 있었기에 쿠나킨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천상 천막을 좀 내어주고 주변에서 겨울을 넘긴 후에 이르쿠츠크로 귀환하라고 해야겠군요.”

하지만 탐사대장의 생각은 다른지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그것도 어려울 겁니다.”

“예?”

“저희가 야쿠츠크 요새를 공격했을 때 주변의 야쿠트 족 일부가 저희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저희가 요새를 무너뜨리고 저들의 항복을 받아냈을 때까지도 멀리서 이를 지켜보고 러시아 차르국의 패배를 확인했지요.”

갑자기 이 주변의 야쿠트 족을 거론하는 탐사대장의 말에 쿠나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도 이동하는 도중 야쿠트 족을 본 기억이 있기에 일단 맞장구쳤다.

“아. 제가 본 원주민들이 야쿠트 족이었나 보군요. 그리고 저들이 우리 시베리아 부족 연합이 러시아 차르국에 승리하는 모습을 보았다니 아마 이 소식이 주변에 빠르게 퍼지겠는데요?”

이에 탐사대장이 바로 그 점이 문제라는 표정으로 손가락을 튕기며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러시아 차르국의 영향력은 사라지겠지요. 헌데 러시아인들이 요새 주변에서 겨울을 넘기기 위해 머물고 있다? 하물며 저들은 자신들에게 과도하게 공물을 요구하던 이들이며 건장한 남성들은 하나도 없고 겨울을 넘길 식량마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주변 원주민들이 이를 그냥 지켜보고만 있겠습니까?”

탐사대장의 이야기에 점차 표정이 어두워지던 쿠나킨은 탐사대장의 이야기가 끝나자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분명 복수를 빙자한 약탈을 감행할 거란 소리군요.”

탐사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에벤 족에 머무는 동안 파악한 야쿠트 족의 정보에 대해 쿠나킨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특히 이 주변의 야쿠트 족은 약 30년 전 러시아 차르국의 과도한 공물 요구에 강하게 반발하며 몇 차례 대규모로 저항했고 코사크인들은 저항하던 야쿠트 족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들의 마을마저 여럿 불태워 버렸습니다. 덕분에 야쿠트 족은 부족 규모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 정도였지요. 그렇기에 지금까지야 러시아 차르국의 요구에 고분고분하며 조용히 지내왔습니다만...”

탐사대장이 말을 흐리면서도 과연 지금 상황에서 가만히 있겠느냐는 눈빛을 보내자 쿠나킨은 뒷머리를 긁적이다 문득 괜찮은 생각이 나서 입을 열었다.

“아. 혹시 탐사대장님께서는 저희가 야쿠트 족에게 저들은 민간인이고 저희가 저들의 안전을 보장했으니 건드리지 말라고 이야기해도 공격할 거라고 보십니까?”

그 질문에 탐사대장은 잠시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흐음...분명 야쿠트 족은 저희 시베리아 부족 연합의 힘을 확인했으니 일단 우리의 말을 따르긴 할 겁니다. 다만 그렇게 되면 야쿠트 족은 우리 시베리아 부족 연합을 해방자가 아니라 또 다른 정복자로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끙. 본국에서는 이 레나 강을 경계로 러시아 차르국의 군대를 막는 것이 피해를 최소화할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천상 레나 강 주변에 사는 야쿠트 족은 반드시 끌어들여야 하는데...”

그건 절대 안 된다는 표정을 하는 쿠나킨에게 탐사대장이 이 레나 강 주변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덧붙이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예. 야쿠트 족 뿐만 아니라 상류에 사는 오목 족도 끌어들여야 하는데 이들도 코사크인들에게 당한 것이 꽤 많아 러시아 차르국에 결코 좋은 감정은 없지요.”

야쿠츠크 요새의 사령관들은 야쿠트 족을 진압하는 무자비한 광경을 목격하고 지레 겁을 먹어 자신들의 공물 요구를 기꺼이 받아들인 오목 족에게도 과도한 공물을 요구하고 야쿠트 족과는 달리 오목 족과는 큰 충돌이 없었기에 오히려 저들을 강제 징병해 병사들의 수발을 들게 하거나 물자를 옮기는 일에 써먹었기에 이들도 결코 러시아 차르국에 호의적이지 않다고 설명하자 쿠나킨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중얼거렸다.

“거참...좀 적당히 할 것이지...”

“뭐 저들은 이곳 시베리아 원주민들을 같은 사람이라고도 여기지 않았을 정도라니까요. 그나마 연합에 합류한 부족들의 영역은 이곳에서 거리가 먼 편이라 알류트 족을 제외하면 조금 덜 시달렸다고 봐도 될 겁니다.”

쿠나킨이 보기에 연합에 합류한 부족 가운데 축치 족을 제외하면 다른 세 부족은 러시아 차르국에 꽤 시달린 편인데 이게 덜 시달린 셈이라니 질린 기색을 보이자 탐사대장은 쓰게 웃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아무튼, 상황이 이러니 이들에게 민간인이니 건드리지 말라고 이야기한다면 당연히 이들은 따르긴 하겠지만 속으로는 내심 반발할 겁니다. 당연한 권리인 복수를 막는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탐사대장이 이렇게 말하자 쿠나킨은 어떻게든 일을 줄이기 위해 애를 쓰던 것을 깨끗이 포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렇다고 저들을 그대로 죽게 놔둘 수야 없으니 저희가 데려가야 한다는 소린데...”

“예. 그편이 여러모로 나을 겁니다. 그리고 포로로 잡힌 주민들의 가족이기도 하니 함께 데려가면 오히려 포로들은 안도할지도 모르지요. 그들도 상황을 모르지는 않을 테니까요.”

연합의 구성원으로 살림을 맡은 북미왕국 상단이었기에, 그리고 원주민들이 포로를 관리하기엔 어려운 부분이 있었기에 이번 전투에서 포로가 생기면 북미왕국 상단에서 알아서 관리하기로 했었다.

그렇기에 야쿠츠크의 주민들을 최대한 이르쿠츠크로 보내려 했지만 276명의 포로와 더불어 570명의 짐 덩어리를 떠안게 된 쿠나킨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탐사대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휴. 포로들을 이용해 이곳까지 제대로 된 도로를 건설할 생각이었는데 그런 식이면 저 아이누 섬의 탄광에 보내는 것이 나을까요?”

도로를 건설하려면 계속해서 이동해야 하는데 주민들 가운데는 아이나 노인이 있어 아무래도 그런 생활은 힘들 수밖에 없었다.

이를 짐작한 탐사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게 관리도 더 쉬울 테고요. 그리고 북태평양 탐사대에서 북쪽 바다를 통해 레나 강으로 향하는 항로를 찾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곳까지의 대규모 물자 운송은 배를 통해서 하면 그만일 테니 길을 내는 것이 당장 중요한 것도 아니고요.”

탐사대장의 말처럼 본국에서 레나 강을 경계로 삼는 것을 원하는 것도 이곳에 철도를 깔지 않는 이상 대량으로 물자를 수송하는 것은 배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편했기 때문이었으니 도로 정비는 아무래도 중요성에서 떨어지긴 했다.

“휴.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처리하도록 하지요. 그리고 탐사대장께선 이곳에 머무실 테지요?”

“아무래도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당장은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으니 일단 돌아가겠지만, 야쿠츠크 요새 사령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봄에 있던 일을 이미 본토에 알렸다고 했으니 분명 러시아 차르국은 지원 병력을 보낼 겁니다. 이곳에서 나는 모피를 포기할 리 없으니까요. 그러니 그때를 대비해 레나 강 인근에 머무르며 저들을 막아야겠지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쿠나킨이 탐사대장을 바라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허면 야쿠츠 족과 오목 족을 시베리아 부족 연합에 끌어들이는 일은 맡겨도 되겠습니까?”

원래라면 외무청 소속인 자신이 이곳에 남아 투란과 함께 이 두 부족을 설득해 연합에 끌어들여야 하겠지만 생각보다 일이 많은 탓에 이곳에 남게 될 탐사대장에게 이를 부탁하자 탐사대장은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지요. 어차피 날이 풀리고 저희가 이곳에 머무르려면 야쿠트 족을 끌어들여야 하니까요.”

어차피 오목 족은 몰라도 야쿠트 족은 전에 연합이 러시아 차르국 병사들을 공격해 승리했다는 소문이 들릴 때부터 연합에 흥미를 보이긴 했었다.

다만 당시에는 러시아 차르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기에 연합 가입에 소극적이었지만 연합이 러시아 차르국을 상대로 승리하는 모습을 본 이상 저들은 기꺼이 연합에 합류하리라고 예상했기에 탐사대장이 쉽게 대답하자 쿠나킨이 슬쩍 덧붙였다.

“그리고...러시아 차르국에서 이곳을 토벌하기 위해 병사들을 보내면 최대한 많은 포로를 확보해 주셨으면 합니다.”

쿠나킨은 러시아 차르국 병사들을 모두 죽이지 말고 적당히 힘을 보여주고 포로로 삼아야 이곳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덧붙이자 탐사대장이 슬쩍 웃었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최대한 노력해 보도록 하지요.”

그때 천막의 입구가 열리며 투란이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여기들 있었나?”

“아. 오셨습니까?”

쿠나킨이 투란을 보고 아는체하자 투란이 쿠나킨과 탐사대장을 보고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쯧쯧. 어째 전후 처리를 위한 회의 중이었나본데...물론 그런 회의도 중요하지만 일단 이번 승리를 즐겨야 하지 않겠나? 벌써 해가 지기 시작했어.”

저녁엔 이번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는 의미로 가져온 술과 고기를 풀어 간단한 축제를 열 계획이었고 투란의 말을 듣고 귀를 기울이니 바깥은 이미 흥겨운 분위기였기에 쿠나킨이 입을 열었다.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습니까? 이거 포로 문제를 상의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군요.”

이에 투란은 고개를 저으며 쿠나킨과 탐사대장 사이로 이동해 둘과 어깨동무를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자자. 그런 문제들은 모두 내일로 미뤄두고 일단 가서 고기와 술부터 먹자고. 다들 걸신들린 듯 먹고 마시고 있어 늦게 가면 취하지도 못할걸?”

“하하하. 알겠습니다. 일단 오늘은 우리 시베리아 부족 연합의 승리를 즐깁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