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5화
프랑스 함대가 출항한 이후 승전보를 기대하던 루이 14세는 복귀한 조르쥬 제독의 보고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북미왕국이라니.
북미왕국을 만만히 보고 프랑스 해군을 신대륙으로 보냈다가 모두 잃었고 덕분에 북미왕국뿐만 아니라 네덜란드를 비롯해 유럽 각국과도 굴욕적인 종전 협정을 맺어야만 했던 기억이 선명한 루이 14세는 당연히 외레순 해협에 북미왕국 선박이, 그것도 북미왕국 해군 군함이 몇 척 정박하고 있었다는 말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조르쥬 제독이 이를 확인 후 기지를 발휘해 체면이 깎이지 않게 물러났다는 이야기에 안도하며 즉각 자세한 상황을 파악하라고 명령했고.
그 후 콜베르가 덴마크의 사정을 파악했다는 보고에 루이 14세는 즉각 콜베르를 알현실로 불러들였다.
“그래. 알아봤나?”
“그렇습니다. 국왕 폐하. 방금 막 상인들을 통해 연락을 받았습니다.”
콜베르의 대답에 루이 14세는 급히 질문을 던졌다.
“설마 북미왕국이 덴마크와 동맹을 맺은 것은 아니지?”
“예. 동맹을 맺은 것은 아니라더군요.”
“휴우. 다행이군. 헌데 북미왕국의 해군이 왜 외레순 해협에 있었던 거지?”
루이 14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북미왕국 해군이 먼 북유럽에 있었던 이유를 궁금해하자 콜베르가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그게...사정을 파악해보니 크리스티안 5세가 아이슬란드와 페로 제도를 북미왕국에 판매한 모양입니다.”
“뭐? 아이슬란드와 페로 제도를?”
“그렇습니다. 크리스티안 5세는 현 상황을 반전시킬 묘수로 이를 북미왕국에 넘기며 100만 크로네 정도를 받은 모양입니다.”
그 이야기에 루이 14세는 상황을 짐작하고 공교로운 우연에 기막히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영토 대금을 직접 수송하기 위해 북미왕국 해군이 움직였고 마침 그 타이밍에 우리 해군이 외레순 해협에 도착해 북미왕국 해군을 목격한 거로군?”
“그런 것 같습니다.”
“그것참...”
루이 14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깐만. 아이슬란드는 몰라도 페로 제도까지 북미왕국의 영토가 되었다면 북미왕국 해군이 페로 제도에 배치되는 것 아닌가?”
“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 물론 서인도제도처럼 소규모 함대가 배치될 것 같습니다만...”
하지만 루이 14세로서는 북미왕국 해군이 페로 제도에 배치되는 것이 영 껄끄러운 눈치였다.
새로 건조한 전열함과 신형 포탄의 조합이라면 유럽에선 이를 감당하지 못하리라 판단해 이전보다 더 공격적으로 영향력을 넓힐 생각이었는데 북미왕국이 유럽에 진출한 이상 그들의 눈치를 아예 보지 않을 수는 없을 테니까.
해서 루이 14세는 투덜거렸다.
“끙...크리스티안 5세는 왜 섬들을 팔아서. 그보다 북미왕국은 신대륙 외엔 별다른 관심이 없지 않았나? 왜 크리스티안 5세의 요청을 받아들여 쓸모없는 섬들을 돈까지 줘가며 사들인 거지?”
“상인들이 파악하기론 아이슬란드에만 4만 명의 주민이 있어 이들을 이주시키기 위해 북미왕국에서 기꺼이 돈을 지불한 것 같다고 보고했습니다.”
“허. 위그노들을 그렇게 데려가고도 아직 인구가 부족한가 보군?”
루이 14세도 위그노들이 프랑스를 탈출해 해외로 이주하고 있다는 보고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위그노들의 종착지가 최근엔 북미왕국이라는 것도.
다만 루이 14세는 이를 듣고도 크게 개의치는 않았는데 강력한 절대 왕권을 추구하는 루이 14세는 이를 위해 종교를 하나로 통합하길 원했는데 위그노들은 자신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건방지게 다른 종교를 믿으며 이러한 통합에 걸림돌이 되는 자들이니 남아서 분란을 일으키기보단 프랑스를 떠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탓이다.
거기에 루이 14세는 북미왕국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덕분에 신민들이 종교적으로 통합되지 않았기에 언젠가는 이들이 내부에서 분란을 일으켜 북미왕국이 혼란스러워질 것으로 여겨 오히려 위그노들이 북미왕국으로 이주하는 것이 나쁠 것 없다고 여기기도 했고.
아무튼, 꽤 많은 위그노들이 북미왕국으로 이주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도 아직도 인구가 부족해 아이슬란드마저 샀다는 이야기에 루이 14세가 고개를 흔들자 콜베르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신대륙은 워낙 넓은 땅이니까요.”
“하긴. 그렇게 넓은 땅인데도 우리보다 인구가 적다고 하니 저런 북미왕국의 행동이 이해는 되는데...페로 제도는 왜?”
“제가 판단하기에는 이제부터 북미왕국은 유럽과의 교역을 확대하겠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음?”
루이 14세가 자세한 설명을 해보라는 듯 콜베르를 바라보자 콜베르가 입을 열어 설명을 시작했다.
“북미왕국은 대서양 방면으로 진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루이 14세는 대략 10년 전쯤에 북미왕국의 존재가 알려지며 대서양 방면으로 진출했다는 것을 떠올리고 맞장구쳤다.
“그렇지. 에스파냐와의 전쟁 이후 대서양 방면으로 진출한 셈이니.”
“예. 그렇기에 북미왕국은 배가 부족했습니다. 더불어 북미왕국의 배는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만큼 태평양 방면의 배를 대서양 방면으로 이동시키기도 어려웠겠지요. 그 때문에 그동안 북미왕국은 유럽에 직접 배를 보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유럽의 배들을 새진주로 불러들였지요. 덕분에 에스파냐나 잉글랜드는 막대한 이득을 취할 수 있었고요.”
“아하. 헌데 이제 태평양 방면에도 배가 많아졌으니 이득을 극대화하기 위해 직접 유럽에 배를 보내 교역을 하겠다?”
“그것 외엔 북미왕국이 페로 제도를 매입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단정적으로 말하는 콜베르를 보고 루이 14세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흠...그럼 그동안 꽤 많은 이득을 누려왔던 잉글랜드나 에스파냐는 불만이 없진 않겠군?”
북미왕국의 소문이 퍼지면서 북미왕국을 궁금해하는 유럽의 귀족들은 많았고 자연스럽게 북미왕국산 물품의 가격은 계속해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안정적으로 북미왕국의 물품을 구할 수 있는 잉글랜드나 에스파냐는 중간에서 막대한 이득을 챙겼고.
헌데 그동안 누려왔던 이득이 줄어들 테니 루이 14세는 이를 이용해 잉글랜드를 끌어들여 북미왕국을 압박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슬쩍 운을 떼자 콜베르는 곧바로 루이 14세의 속셈을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북미왕국이 직접 배를 보내 유럽과 교역하게 되면 중간에서 막대한 이득을 보았던 잉글랜드나 에스파냐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으니까요. 다만 북미왕국의 국력을 생각하면 이를 가지고 저들을 충동질한다고 해도 북미왕국과 맞서지는 않을 겁니다.”
“하긴...”
루이 14세는 북미왕국 해군이 가까운 페로 제도에 배치되는 것이 탐탁지 않아 잉글랜드를 끌어들여 북미왕국을 압박해 페로 제도에 함대를 배치하지 못하게 하거나 혹은 페로 제도를 다시 잉글랜드에 판매하도록 해볼까 싶긴 했지만, 북미왕국의 국력을 잘 알고 있는 잉글랜드가 섣불리 그런 결정을 내리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보다 북미왕국이 페로 제도까지 진출한 문제는 당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 넘어가더라도...조르쥬 제독의 임기응변으로 체면이 구겨지는 일은 막았지만, 상황이 조금 곤란하게 된 것 같은데? 크리스티안 5세가 스코네 지방을 되찾기 위해 아이슬란드와 페로 제도마저 팔았다면 조르쥬 제독이 이야기한 것처럼 순순히 스웨덴과 종전 협정을 맺을 리가 없지 않나?”
루이 14세가 이야기의 주제를 덴마크로 돌리자 콜베르는 루이 14세의 판단이 정확하다는 듯 동의하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미 군대를 재정비하고 용병까지 구하는 중이라고 하니까요. 다만 덴마크로서는 혼자서 우리를 상대할 수야 없을 테니...당연히 주변국들과 동맹을 맺어 최대한 버티려고 하겠지요.”
콜베르가 조금 우려스럽다는 표정이었지만 루이 14세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흥. 어중이떠중이 몇이 연합해봐야 우리 프랑스를 상대할 수 있겠나. 네덜란드야 이전 전쟁에서 입은 피해가 크니 적극적으로 이번 일에 끼어들긴 어려울 테고 기껏해야 신성 로마 제국이나 에스파냐가 개입할 것 같긴 한데...그 정도야 충분히 상대할 수 있네. 아니. 이 기회에 이전의 굴욕을 갚아주는 것도 괜찮겠지.”
루이 14세는 북미왕국 해군에 의해 프랑스 해군의 전력이 급감하자 곧바로 에스파냐가 생도맹그를 공격한 사실과 당시 사정이 워낙 좋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저들이 원하는 대로 생도맹그를 포기한다는 조약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던 굴욕을 잊지 않았다.
해서 이 기회에 이를 갚아 줄 기회로 여기자 콜베르가 조심스럽게 루이 14세에게 말했다.
“그렇긴 합니다만 이전에 네덜란드를 공격한 일로 유럽 각국이 저희의 확장을 우려하고 있어 잘못하면 일이 무척 커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인들의 보고 중 조금 우려스러운 것은 크리스티안 5세가 공공연히 북미왕국과 동맹을 맺을 것처럼 이야기했다는 점입니다. 물론 우리를 견제하기 위해 그런 이야기를 흘린 것 같기는 합니다만 듣기로 북미왕국 해군 선박에 덴마크 외교관이 함께 타고 떠났다고 하니...”
기세등등하던 루이 14세는 다시 북미왕국이 거론되자 움찔했지만, 잠시 생각해보다 고개를 저었다.
“흠. 그동안 북미왕국은 유럽 국가와 동맹을 맺었다 전쟁에 휘말릴까 우려해 우호적으로 지낼지언정 동맹 제의는 거절한다고 들었는데?”
“그렇긴 하지요. 다만 지금까지야 딱히 유럽 국가와 동맹을 맺는다고 북미왕국에 이득은 없었기에 거리를 두었습니다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바뀌지 않았습니까.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적극적으로 유럽의 일에 개입할 수도 있습니다.”
“흐음...”
콜베르의 말도 일리가 있었기에 잠시 고민했지만, 자신들의 중재 제의를 무시하는 덴마크를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자신들의 체면도 체면이고 동맹인 스웨덴이 이대로 몰락하면 여러모로 곤란했으니.
다만 뒤늦게 북미왕국이 이번 일에 개입하면 여러모로 곤란했기에 일단 사전 작업이 필요하다고 여겨 콜베르를 바라보았다.
“내가 알기로 잉글랜드에 북미왕국의 대사가 상주하고 있지?”
“그렇습니다.”
“일단 그 북미왕국 대사와 접촉해 북미왕국 본국의 의향을 명확히 알아보라고 하게. 정말 덴마크와 동맹을 맺을 의향이 있는지, 그리고 전쟁이 벌어지면 개입할 의향이 있는지 말일세.”
“알겠습니다.”
* * *
“그래? 덴마크를 방문했던 외무청 관리가 귀환했다고?”
정성국은 집무실을 방문한 조용한 곰의 보고에 반문하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전하. 방금 막 새진주의 웅크린 늑대에게 연락을 받았습니다. 자세한 보고서는 기차를 통해 보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웅크린 늑대에게 들었던 내용을 간략히 정성국에게 보고하기 시작했다.
“뭐? 외무청 관리가 떠날 때쯤 프랑스 함대가 나타났다고?”
네덜란드 대사에게 신임장을 확인하긴 했지만, 북미왕국의 외무청 관리가 직접 크리스티안 5세까지 만났다는 보고에 안도했던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이야기에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고 조용한 곰은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렇습니다. 그것도 30척에 가까운 함대였답니다. 해서 당시 함대를 이끌던 함장은 잘못하다 프랑스와 덴마크의 전쟁에 휘말릴 것을 우려했습니다만...다행히도 프랑스는 당장 덴마크를 공격할 뜻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
“예. 적당히 대치하며 덴마크 해군을 압박하다 바로 물러났답니다. 그리고 나중에 덴마크 외교관에게 상황을 물어보니 프랑스는 덴마크를 압박하기 위해 함대를 보낸 모양입니다.”
“아. 그러고 보면 프랑스는 스웨덴과 동맹이었지?”
정성국의 유럽의 외교 관계를 떠올리며 중얼거리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덴마크가 목적인 스코네 지방의 탈환에 실패해 상황이 좋지 않은 것처럼 스웨덴의 상황도 썩 좋지는 않다고 합니다. 분명 덴마크의 육군을 상대로 몇 번이나 승리했지만 피해가 클뿐더러 제해권을 잃어 발트해의 섬들을 잃었으며 북독일 영토도 고립된 처지라...이대로 가다간 스웨덴의 세력이 대폭 위축될 것이 분명했기에 루이 14세가 계속 전쟁을 하면 프랑스도 이 전쟁에 개입할 수도 있다고 덴마크를 압박한 모양입니다.”
“뭐 루이 14세가 등극한 이후 여기저기 사고를 많이 치고 다녀서 주변 국가들이 루이 14세를 썩 좋게 보지 않으니까. 동맹국인 스웨덴이 몰락하면 프랑스는 고립될 테니 좋을 것 없지. 허면 덴마크는 종전을 고려 중인 건가?”
정성국은 크리스티안 5세의 처지가 안됐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조용한 곰은 그럴 리 있겠느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크리스티안 5세도 그냥 물러날 수야 없는 처지 아닙니까. 이미 스코네 지방을 되찾기 위해 아이슬란드와 페로 제도를 우리에게 팔아버렸으니까요.”
“그렇기야 하지만...스웨덴도 버거워하는 상황에서 프랑스가 참전하는 순간 덴마크는 그냥 밀릴 텐데?”
프랑스와 덴마크는 체급이 달랐다.
프랑스가 전쟁마저 불사한다면 당연히 덴마크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종전해야 했기에 의아한 듯 묻자 조용한 곰이 어깨를 으쓱했다.
“해서 네덜란드나 신성 로마 제국을 비롯해 반프랑스 국가들과 동맹을 맺고 이에 대항할 생각이라고 하더군요.”
정성국은 크리스티안 5세의 상황을 이해했지만, 전쟁이 커지고 길어질수록 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기에 안타까운 듯 혀를 찼다.
“쯧. 잘못하면 전쟁이 커지겠군.”
“그렇겠지요. 아. 그리고 덴마크는 우리 북미왕국에도 공식적으로 동맹을 제의했습니다.”
이에 정성국은 표정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동맹? 우리보고 반프랑스 동맹에 끼어들라고?”
“예. 우리도 프랑스와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니만큼, 그리고 우리도 이제 유럽 지역에 영토가 생겼으니 혹시나 한 모양입니다. 더불어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적당히 견제해 덴마크가 스코네 지방을 탈환하는 데 도움을 준다면 북미왕국 국적의 선박이 외레순 해협을 통과하더라도 통행료를 받지 않겠답니다.”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은 피식 웃었다.
“통행료? 그거 얼마나 된다고.”
“외레순 해협의 통행료는 무척 비싸다고 악평이 자자합니다만...”
오죽하면 스웨덴이 통행료 때문에 덴마크를 공격했겠냐는 듯 대답한 조용한 곰이었지만 정성국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괜히 유럽의 일에 개입하며 들어가는 비용보다야 쌀 것 아닌가.”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조용한 곰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야 하지요. 알겠습니다. 덴마크 외교관에게는 동맹은 어렵다고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