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화
덴마크의 외교관인 한스 바인은 새진주 외국인 거주 구역의 응접실을 들어오는 웅크린 늑대를 보고 급히 질문을 던졌다.
“확인해보셨습니까?”
한스와 웅크린 늑대는 며칠 동안 협정문의 문구를 수정하며 최종 협정문을 작성했지만, 아직 웅크린 늑대는 이 협정문에 서명하지 않고 있었다.
이에 한스가 의아해하며 협정문을 더 수정할 생각이냐고 질문을 던지자 웅크린 늑대는 한스가 처음 건넸던 크리스티안 5세의 인장이 찍혀 있는 문서의 진위를 확인하는 중이니 조금은 기다려 달라고 양해를 구했고.
그동안 별다른 교류가 없었기에 이해는 했지만, 막상 협상은 빨리 끝냈는데도 불구하고 이 문제로 정식으로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오랜 시일이 걸릴까 우려하는 한스에게 웅크린 늑대는 새한성에 유럽의 외교관들이 여럿 있으니 금방 확인할 수 있을 거라고 안심시켜주었고.
해서 조금 안도하긴 했지만 그래도 조급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한 한스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찰나 웅크린 늑대가 등장했으니 곧바로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리고 웅크린 늑대는 그런 한스를 보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예. 새한성에 있는 네덜란드 대사에게 확인해보니 전권을 위임한다는 문서에 찍혀 있는 인장이 덴마크 국왕 전하의 인장이 맞다고 확인해주더군요.”
네덜란드는 덴마크의 동맹국인 만큼 외무청에서는 먼저 네덜란드 대사에게 문서의 진위를 확인했고 네덜란드 대사는 곧바로 문서에 인장은 크리스티안 5세의 인장이라고 확인해주자 외무청은 곧바로 웅크린 늑대에게 연락해서 협정을 체결하라고 명령했다.
해서 웅크린 늑대는 급히 움직인 것이고.
그리고 한스는 잔뜩 기대한 표정으로 웅크린 늑대를 바라보았다.
“허면...”
“예. 정식으로 협정을 맺도록 하지요.”
“오오!”
자신의 말에 기뻐하는 한스를 보고 다시금 미소를 지은 웅크린 늑대는 미리 작성해두었던 두 부의 협정문을 꺼내 서명하면서 말했다.
“이것으로 협정은 체결되었고 오늘 이 시간 이후로 아이슬란드와 페로 제도는 북미왕국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한 부의 협정문을 챙긴 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허면 30만 파운드 가치의 물품들은?”
“이미 다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이야기했던 대로 북미왕국의 배를 통해 직접 덴마크의 수도까지 운반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기회에 덴마크의 국왕 전하께 인사도 드리고.”
한스도 이 북미왕국의 제안이 크리스티안 5세의 인장이 찍힌 문서를 보였음에도 이를 완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뜻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다만 한스는 이를 불쾌하게 여기기보단 소문의 북미왕국 배를 타고 복귀할 수 있다는 것과 북미왕국의 배를 이용하면 빠르게 복귀할 수 있을 거라는 웅크린 늑대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고.
“물론입니다. 헌데 정말 1달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겁니까?”
한스가 새진주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이 4개월 정도였다.
서인도제도의 덴마크 식민지로 향하는 배를 타고 아프리카를 거쳐서 서인도제도에 도착해 다시 배를 구해 새진주에 도착했으니 꽤 돌아온 셈이었고.
허나 웅크린 늑대는 덴마크까지 복귀하는 데 1달이 채 걸리지 않을 거라 장담했기에 아무리 북미왕국의 배가 빠르다고 하지만 그게 가능한가 싶어서 다시 묻자 웅크린 늑대가 씩 웃으며 말했다.
이미 이곳에서 런던까지 가는데도 2주면 충분했으니 런던에서 덴마크의 수도인 쾨벤하운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면 1달이면 도착하고도 남았다.
“그렇습니다. 북미왕국의 배는 무척 빠르니까요. 물론 중간중간에 연료나 물자를 보급받아야 하고 런던 동쪽으로는 직접 항해한 경험은 없기에 전속력으로 항해하긴 어려운 터라 시간이 좀 걸리기는 할 텐데...그래도 한 달 안에는 도착할 겁니다.”
웅크린 늑대가 이렇게 장담하자 한스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쯤 출항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모레 아침 정도면 출항할 수 있을 겁니다.”
웅크린 늑대의 대답에 한스는 조금 감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허. 생각보다 빠르군요.”
“귀국은 전쟁 중이니 이 정도 배려는 해야겠지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 지었을 때 한스는 문득 정식으로 협정을 체결했기에 이전까지는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커다란 건물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 것을 깨닫고 조심스럽게 웅크린 늑대에게 말했다.
“원래는 북미왕국에 방문했으니 유럽에도 소문이 자자한 새한성을 방문해보고 싶었지만, 일정상 그건 어려울 것 같고...혹시 외국인 거주 구역 밖을 나갈 수는 없는 겁니까? 잠깐만이라도 북미왕국의 도시를 둘러보고 싶은데 말입니다.”
이에 웅크린 늑대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으로 허가받지 않은 외국인은 외국인 거주 구역을 나갈 수 없습니다만...정식으로 북미왕국과 덴마크-노르웨이 왕국이 협정을 체결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로 저기 본청에 연락해 조촐한 자리라도 만들고 제가 귀하를 초청하도록 하지요.”
“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럼 일어나시지요.”
* * *
“정식으로 협정을 체결했다고?”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보고에 반색하며 되묻자 조용한 곰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방금 새진주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오늘 날짜로 아이슬란드와 페로 제도는 공식적으로 북미왕국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허. 정말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느낌이네. 그래도 영토 협상인데 일주일 만에 정식으로 협정까지 체결했으니.”
정성국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리자 조용한 곰이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뭐 덴마크의 사정도 썩 좋지 않고 이런 문제를 길게 끌어봐야 괜히 유럽 각국이 끼어들 여지가 있으니 빠르게 협정을 체결하는 것이 나쁠 것 없습니다. 특히 페로 제도는 잉글랜드 본토에 가까운 편이라 저희가 페로 제도를 매입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면 잉글랜드가 이 거래에 끼어들 수 있다는 예측도 있었고요.”
잉글랜드가 북미왕국과 우호적인 관계라고는 하나 비교적 가까운 곳에 북미왕국의 해군이 배치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특히나 페로 제도는 스코틀랜드 북쪽에서 320km 정도 떨어져 있었기에 비교적 가까운 편이었으니 자신의 머리 위에 강력한 북미왕국 해군이 배치된다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잉글랜드는 페로 제도를 매입할 나라는 자신들뿐인데 덴마크에 돈을 주고 매입해봐야 이를 관리하는데 비용만 발생하는 터라 매입을 꺼렸지만, 이 경우는 상황이 달랐기에 만약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든 덴마크의 전권대사인 한스와 접촉해 이 거래에 끼어들 수 있었고 그렇게 되면 페로 제도의 가치가 올라갈 테니 빠르게 영토 협정을 체결했다는 이야기에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다만 이제 정식으로 협정을 체결했으니...불편한 기색은 나타내도 별다른 말을 하진 못할 테고. 아. 그리고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프랑스가 이 소식을 듣게 되면 좀 놀라긴 하겠군.”
이에 조용한 곰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지요. 북미왕국 해군이 그만큼 가까이 배치되는 셈이니까요.”
프랑스는 뉴펀들랜드 해전으로 프랑스 해군 절반을 잃었기에 북미왕국 해군이라면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북미왕국이 페로 제도까지 매입해 북미왕국 해군이 유럽에 비교적 가까운 페로 제도에 배치된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당연히 떨떠름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도 루이 14세가 전폭적인 지원을 해 줘서 프랑스 해군은 어느 정도 복구했다면서?”
비록 프랑스와는 별다른 교류는 없었지만, 프랑스 이주민들이 북미왕국으로 이주하면서 이들을 통해 프랑스의 사정을 알아낼 수 있었고 유럽의 대사관에서도 유럽에 떠도는 각종 소문을 수집해 보내오고 있었기에 외무청에서는 이를 종합해 프랑스의 사정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정보에 따르면 이미 뉴펀들랜드 해전 이전의 프랑스 해군 규모는 되는 모양입니다. 루이 14세가 전폭적인 지원을 해 줘서 프랑스 내에 있는 조선소 대부분이 프랑스 해군의 전열함을 건조했다고 하니까요.”
“허. 당시 잃었던 전열함만 40척 아닌가? 그걸 벌써 복구했다고?”
“예. 거기에 듣기로는 뉴펀들랜드 해전 당시 북미왕국의 포탄에 무력하게 당한 것 때문에 선체 전체에 얇은 동판을 둘러 방어력을 올린 모양입니다. 거기에 전열함 크기도 키워 더 많은 화포를 실을 수 있게 만들었고요.”
기존의 전열함만 해도 건조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 복구하는데 많은 돈이 들어갈 텐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여기서 돈을 더 퍼부었다는 뜻이었기에 정성국이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와우. 그 정도로 재정이 넘쳐나는 건가?”
그가 알기로 루이 14세 때 프랑스의 재정이 거의 바닥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직 그 정도까진 아닌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조용한 곰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프랑스는 유럽 제일의 부국이니까요. 아. 그리고...이건 확인된 정보는 아닌데 프랑스에서 우리처럼 포탄 안에 화약을 넣어 폭발하는 방식의 포탄을 개발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처음 듣는 보고에 정성국은 놀란 표정으로 조용한 곰을 바라보았다.
“허. 그래?”
“예. 뉴펀들랜드 해전에서 포탄이 폭발하면 얼마나 위력적인지를 뼈저리게 깨달았을 테니까요. 그래서인지 당시 프랑스 해군을 지휘했던 아브라함 듀케인 제독이 프랑스로 복귀한 후 기술자들을 모아 폭발하는 화약을 개발 중이라는 이야기가 있긴 했는데...”
“결국, 폭발하는 포탄을 개발했다?”
“그렇습니다. 일단 정보기관에서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프랑스로 인원을 파견했다고 합니다만...”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흠. 뭐 지연 신관을 사용한다면 그렇게 어려울 건 없겠지만...이거 프랑스 해군도 복구했고 폭발하는 포탄마저 개발했으니 이전의 굴욕을 갚아주겠다고 시비 걸지는 않겠지?”
정성국은 루이 14세가 자신의 권위에 무척 집착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그렇게 이야기하자 조용한 곰은 회의적인 표정으로 대답했다.
“글쎄요. 뉴펀들랜드 해전 당시 북미왕국 해군의 강력함을 뼈저리게 느꼈던 루이 14세라면 그런 모험을 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패배한다면 프랑스 해군을 이번처럼 단기간에 복구하기도 어려울 테니까요.”
물론 루이 14세는 과시욕과 명예욕이 대단한 만큼 이 기회에 다시 북미왕국 해군을 꺾어 프랑스의 강력함을 증명하려 들 수도 있긴 했다.
하지만 뉴펀들랜드 해전으로 프랑스 해군이 반 토막 나면서 프랑스 해군 대부분이 본토 방어에 매달리느라 무역로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아 대외 무역이 위축되어 막대한 손해를 입어야 했고 서인도제도의 식민지인 생도맹그마저 에스파냐에 빼앗기고 이를 갚아주기는커녕 다른 서인도제도의 섬을 지키기 위해 생도맹그를 포기하고 종전 협정을 제의해야 했으니 아무리 루이 14세라도 다시 프랑스 해군을 가지고 그런 도박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덧붙이자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행인데.”
“다만...호전적인 루이 14세의 성향을 생각해보면 만만한 다른 나라를 노릴 것 같기는 합니다.”
많은 돈을 들여 복구한 프랑스 해군이니 루이 14세나 콜베르는 이를 통해 어떻게든 이득을 보려 할 것이 분명했고, 새롭게 건조한 최신 전열함과 새롭게 개발한 폭발하는 포탄이라면 당연히 다른 유럽 해군들을 상대하기는 충분할 테니 루이 14세가 과연 가만히 있겠냐는 외무청에 예측에 정성국은 해군의 우위로 간신히 종전 협정을 체결했던 네덜란드를 떠올리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빌럼 3세가 밤잠을 설치겠군.”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