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1화
“전하!”
“음? 무슨 일인가.”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정성국은 보고서를 들고 급히 집무실로 들어와 자신을 부르는 조용한 곰의 행동에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카무이 항에서 긴급 보고서가 올라왔습니다.”
조용한 곰의 이야기에 놀란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긴급 보고서?! 줘 보게.”
“여기 있습니다. 전하.”
정성국은 조용한 곰이 건넨 긴급 보고서의 앞부분을 확인하고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흐음.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과 전투를 치렀다? 그것도 원주민들과 연합해서? 올해 머스킷을 가져간 것 아닌가? 아직 원주민 대다수는 머스킷에 익숙하지 않을 텐데...”
시베리아 지역으로 국영 상단을 보낸 이상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과 충돌이 일어날 것은 예상했지만 원주민들과 연합해 전투를 치렀다고 하니 조금 이르지 않나 싶어 정성국이 중얼거리자 조용한 곰이 자세히 설명했다.
“일단은 원주민들과 연합해서 전투를 치렀다고 쓰여있긴 합니다만...보고서에도 뒷장에 쓰여있듯 실제 전투는 아이누 탐사대만 치렀다고 봐도 됩니다. 국영 상단을 호위하던 아이누 탐사대는 원주민들의 도움 요청을 받고 급히 이동해 야영 중이던 러시아 차르국 병사들을 발견하고 선제공격을 가했고 러시아 차르국 병사들은 어떻게든 반격하려 했지만,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이라 주변이 어두운 상태에서 기습 공격을 받아 혼란을 수습하기 어려웠던 러시아 차르국 병사들은 곧바로 퇴각했답니다. 그리고 원주민들은 이 도망치는 러시아 차르국 병사들을 추격한 거지요.”
그리고 정성국은 이런 조용한 곰의 설명에 움찔하며 표정을 찌푸렸다.
“잠깐. 도움 요청? 설마 러시아 차르국 병사들이 원주민 마을을 공격한 건가?”
이곳에 배치된 러시아 차르국 병사들은 대부분 코사크인들인데 이들은 원주민과 충돌이 잦았고 훗날 러시아 차르국이 시베리아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을 때 원주민과 코사크인 간의 갈등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는 사실을 기억한 정성국이 걱정스럽다는 듯 묻자 조용한 곰이 그건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 그건 오해가 좀 있던 모양입니다.”
“오해?”
“예. 작년에 국영 상단으로 위장한 외무청 관리가 시베리아 원주민 부족을 설득했고 그 때문에 이들은 저희가 개입하기도 전에 시베리아 부족 연합을 결성하고 러시아 차르국에 봉기하기로 한 모양입니다. 헌데 갑작스럽게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이 나타나자 이 사실이 알려진 것으로 생각한 것이죠. 해서 급히 다른 마을로 전령을 보냈는데 이 전령이 도중에 국영 상단을 만난 겁니다.”
그 말에 상황을 대충 짐작한 정성국이 턱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오해라는 것을 보면 러시아 차르국 병사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는 소린데...그럼 왜 병사들이 나타난 거지?”
이에 조용한 곰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러시아 차르국은 원주민과의 거래에서 더 많은 이득을 얻기 위해 일방적으로 거래 조건을 바꾸었습니다. 당연히 원주민들은 반발할 수밖에 없으니 이를 대비해 병사들을 대동한 거죠.”
“아. 일방적으로 하사품의 양을 줄였다 이 소리군?”
“그렇습니다. 그리고 전투 후 항복해 포로가 된 러시아 차르국 병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외에도 아직 탐사하지 못한 지역을 탐사해 원주민들에게 공물을 요구하려는 목적도 있었답니다. 헌데 이들이 탐사하려던 지역이 코랴크 부족 영역의 북쪽과 남쪽인데...”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이야기를 듣다 다시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아이누 탐사대와 충돌한 병사들이 실은 북미왕국의 영역을 침범할 예정이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기에.
헌데 생각해보니 무언가 이상하다 싶었다.
러시아 차르국이 섣불리 북미왕국의 배를 공격했다 큰 피해를 보았는데 다시 북미왕국의 영역으로 병사를 보낸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잠깐. 코랴크 부족의 남쪽이면 카무이 반도잖아? 저들은 카무이 반도가 우리 북미왕국의 영토라는 것을 모르나?”
그런 정성국의 의문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포로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모르는 모양이더군요.”
“아니. 북미왕국을 정말 모른다고? 물론 거리가 좀 떨어져 있긴 하지만 흑룡강에서 전투가 벌어졌었는데?”
물론 거리상으로는 알바진과 1천km 정도 떨어져 있긴 하지만 이 지역에 러시아 차르국의 거점이 많은 편은 아니었고 지방일수록 주변의 소문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생각해보면 저들이 북미왕국의 존재를 모른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아 정말이냐는 듯 되묻자 조용한 곰이 말했다.
“아. 포로들도 이전과는 달리 북미왕국의 존재는 알더군요.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흑룡강에서 섣불리 북미왕국의 선박을 공격했다가 병사를 잃었다는 것과 이 때문에 알바진 요새 사령관이 본국에 질책을 받은 터라 포로들도 북미왕국의 존재를 알게 되었답니다.”
“질책? 그게 다라고?”
타국의 선박을 공격했다 병사들을 다 잃어버렸는데 고작 질책을 받았다는 말에 정성국이 의아한 듯 중얼거리자 조용한 곰이 어깨를 으쓱했다.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러시아 차르국은 시베리아 지역을 제대로 통치하고 있질 못하니까요. 특히나 알바진 요새의 사령관은 시베리아 지역에 유배된 후 지방관이 자신의 딸을 겁탈하자 지방관을 살해하고 코사크인들을 회유해 함께 흑룡강으로 도망쳐 현지의 원주민들을 규합해 세력을 키운 자라고 합니다.”
“그래? 일종의 지방 군벌이란 소린가?”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작사(jaxa)라는 소왕국을 세워 러시아 차르국에 대항했는데 러시아 차르국은 이를 토벌할 능력이 없어 방관하는 중에 청나라가 자국의 영토를 불법적으로 점거한 자들을 토벌하기 위해 원정대를 보낸 거죠. 그리고 알바진 요새의 사령관이 청나라 원정대를 막아내자 러시아 차르국은 사면령을 내리고 정식으로 알바진 요새의 사령관으로 임명해 청나라에 대치하면서 흑룡강 일대를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한 셈입니다. 그러니 이자가 문제를 일으켰어도 러시아 차르국은 질책 외엔 별다른 조치를 취할 수가 없는 겁니다.”
상황을 이해한 정성국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쯧. 그것 참...헌데 그렇다면 북미왕국의 존재는 아는데 북미왕국의 영토는 정확히 모른다고 봐야 하나?”
“그렇습니다. 시베리아 지역에 제대로 된 정보가 알려지진 않은 모양인지 북미왕국은 그저 신대륙에 존재하는 나라라고만 알고 있더군요. 그래서 야쿠츠크 요새의 사령관이 주변 지역을 탐사해 더 많은 모피를 얻어오라고 명령한 거고요.”
“야쿠츠크 요새라...”
정성국이 중얼거리자 조용한 곰은 정성국이 야쿠츠크를 모른다고 생각해 설명했다.
“아. 야쿠츠크는 러시아 차르국의 요새 중 가장 동쪽에 있는 요새라는군요. 그리고 포로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야쿠츠크 요새만 함락시키면 러시아 차르국은 시베리아 동쪽 지역의 장악력을 완전히 상실할 것 같고요.”
이 시기 시베리아 지역에 거점은 많지 않았고 그렇기에 야쿠츠크 요새를 점령하면 러시아 차르국의 세력을 축소시킬 수 있을 거라고 짐작했었는데, 실제 포로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효과가 생각보다 클 것 같아 정성국이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호오. 그래?”
“예. 이 야쿠츠크 요새는 레나 강 중류에 자리하고 있다는데...이곳을 제외하면 인근엔 딱히 제대로 된 거점이 없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이곳은 원주민들뿐이고 원주민들도 강성한 세력이 없는 터라 그런 것 같습니다.”
정성국이 기억하기로도 야쿠츠크 요새를 제외하면 그나마 가까운 러시아 차르국의 거점은 야쿠츠크 요새에서 남서쪽으로 약 1300km 넘게 떨어져 있는 바이칼 호 주변의 이르쿠츠크나 네르친스크, 치타 같은 거점이 전부였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흐음...레나 강이라...이거 작년에 북태평양 탐사대가 발견한 시베리아 북쪽 바다로 나 있는 그 커다란 강 같은데...”
“예.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니 여차하면 3함대를 보내 야쿠츠크 요새를 직접 공격하는 것도 가능해 보입니다만...”
이에 정성국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흠...굳이 그럴 필요 있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말이 요새지 제대로 된 요새 같지도 않은데 그냥 이동식 60mm 화포로 두들기면 충분할 것 같은데. 그리고 시베리아 원주민들이 스스로 부족 연합을 결성했으니 이들이 스스로 러시아 차르국의 요새를 무너뜨릴 수 있도록 뒤에서 지원하는 것이 낫겠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야쿠츠크 요새만 격파하면 당분간 큰 전투는 없을 것 같았는데 이걸 북미왕국에서 나서서 홀로 격파하고 원주민들에게 평화를 쥐여주는 것보다는 시베리아 부족 연합이 직접 야쿠츠크 요새를 격파하는 것이 나아 보였다.
특히 러시아 차르국은 시베리아 원주민들에게 있어 강력하고 잔인한 통치자였으니 이를 시베리아 부족 연합이 직접 무너뜨림으로써 시베리아 동쪽 지역의 영향력을 확고히 할 수 있고 다른 원주민 부족들도 시베리아 부족 연합에 참여할 수도 있어 보였기에.
그리고 조용한 곰은 이러한 정성국의 대답을 이미 예상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이누 탐사대가 국영 상단의 용병으로 시베리아 부족 연합을 돕기 위해 이 지역에 남았으니 이들에게 카무이 항에 보관 중인 이동식 60mm 화포를 건네주면 될 것 같습니다. 다행히 국영 상단의 직원으로 위장한 외무청 관리가 북미왕국 차원에서 시베리아 부족 연합을 전폭적으로 지원할 수도 있다고 미리 이야기해둔 만큼 화포를 지원하는 것도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국영 상단의 직원으로 위장한 쿠나킨이 미리 떡밥을 다 깔아두었다는 이야기에 정성국이 만족하면서 말했다.
“그래? 그럼 바로 화포를 보내도록 하고...흠. 당장 야쿠츠크 요새로 진군해 이를 박살 내긴 어렵겠지?”
포로들의 보고를 종합해보면 생각보다 야쿠츠크 요새에 주둔한 병사들이 많지 않았고 이중 대다수가 탐사에 동원되었다가 아이누 탐사대의 기습 공격에 사망하거나 포로가 되었으니 야쿠츠크 요새는 거의 비어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이 기회에 야쿠츠크 요새를 공격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지만 당장 원주민들이 움직일 수 있을까 싶어 묻자 조용한 곰이 대답했다.
“지금 바로 시베리아 부족 연합이 야쿠츠크 요새로 이동해 요새를 부수는 것이 최선이긴 합니다만...당장은 어렵습니다. 원주민들이 화약 무기에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하고 레나 강이 생각보다 넓은 터라 강을 건너기도 쉽지 않을 겁니다. 특히 각종 물자와 화포까지 옮기려면 뗏목으로는 한계가 있지요.”
“아...그건 그렇겠군.”
레나 강의 폭이 무척 넓다는 것을 떠올린 정성국이 수긍하자 조용한 곰이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만 시베리아 부족 연합에 참여한 족장들도 포로들을 통해 야쿠츠크 요새의 사정을 알게 된 후 러시아 차르국 본국에서 추가로 병력이 증원되기 전에 이곳을 점령하는 것이 피해를 최소화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최대한 빠르게 야쿠츠크 요새를 공격할 계획이라고 하더군요. 해서...시베리아 부족 연합은 레나 강이 얼어붙으면 움직일 생각이라고 합니다.”
“헉. 겨울에?! 시베리아의 겨울에 움직이겠다고?”
시베리아의 겨울도 매섭지만, 특히 야쿠츠크의 경우 전생에서도 겨울 날씨가 춥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겨울의 평균 기온이 영하 30도에서 50도 사이였으니 말이다.
물론 그렇기에 그 넓은 레나 강도 꽝꽝 얼어 강을 건널 수 있겠지만 이런 날씨에 전투를 벌이는 짓은 미친 짓이라고 생각해 정성국이 기겁하자 조용한 곰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시베리아 지역에 살다 보니 원주민들이 추위엔 비교적 익숙한 모양입니다.”
“아무리 원주민들이 추위에 강해도 잘못하면 얼어 죽을 것 같은데...”
정성국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조용한 곰이 슬쩍 웃으며 덧붙였다.
“장기간 전투야 부담스럽겠지만 이동형 60mm 화포가 있다면 요새를 부수는 것은 금방이니까요. 해서 아이누 탐사대도 이 계획을 듣고도 딱히 반대하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그 말에 정성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카무이 반도와 시베리아 내륙의 겨울은 또 다를 텐데...아이누인들도 추위에 강한 편이긴 하지만 이거 잘못하면 큰일 날 수도 있겠군. 일단 방한용품과 연료를 최대한 지원하도록 하게.”
북미왕국은 북미대륙 전체를 영토로 삼았기에 추운 곳도 많았다.
물론 대부분은 이곳에 거주하는 원주민과 교역하는 정도였지만 알래스카나 그린란드에는 사람을 파견해야 했고.
해서 북미왕국에서는 직접 각종 방한용품을 연구, 생산 중이었기에 일단 이를 최대한 보급하라고 지시하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각종 방한용품과 연료, 식량까지 최대한 지원할 예정입니다.”
“그래. 그 정도면 되겠군. 그래도 내륙의 추위는 또 다르니까...안 되겠다 싶으면 공격을 미루라고 하게. 레나 강이 녹으면 수송선을 보내 상륙 작전을 지원하면 그만 아닌가.”
“알겠습니다. 꼭 당부하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