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화
러시아 차르국과의 전투가 끝난 후 쿠나킨과 아이누 탐사대원들은 에벤 족과 함께 전장을 정리했다.
특히 이곳은 에벤 족 마을과 가까워 잘못하면 이곳에 전염병이 돌 수도 있었기에 뒷정리는 필수였고.
그나마 살아있던 러시아 차르국 병사들은 일단 포로로 잡았지만, 그 수는 얼마 되지 않았고.
죽은 병사들의 경우 무기를 수거하고 시체는 며칠간 고생해 판 구덩이에 옮겨 화장했다.
그렇게 뒷정리가 끝났을 때쯤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를 추격하기 위해 서쪽으로 떠났던 투란을 비롯한 에벤 족이 돌아왔다는 보고에 쿠나킨은 막사에서 나왔고.
이제 막, 말에서 내리는 투란과 알류트 족 족장에게 다가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야 오셨군요.”
이미 이들이 전장 정리를 마쳤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투란은 자신들의 일을 도와주어 고맙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늦어서 미안하오. 이 기회에 항상 우리를 무시하던 저 러시아 차르국 놈들에게 우리의 만만치 않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조금 집요하게 추적하느라 귀환이 조금 늦었소.”
“뭐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보면 나쁠 것은 없겠지요. 하지만 아예 전멸시킨 것은 아니지요?”
“하하하.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오. 일부는 말을 타고 무작정 달렸으니. 다만...저들의 본거지인 서쪽의 요새에 살아서 돌아간 자는 잘해야 1, 20명 수준일 게요.”
그 정도면 러시아 차르국 병사들은 자신들을 추격하던 시베리아 원주민들에 대한 두려움이 각인되었을 것이고 이들은 본거지로 돌아가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힘을 과대평가할 테니 자연스럽게 러시아 차르국은 섣불리 움직이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었기에 쿠나킨은 나쁘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됐습니다. 보아하니 저들을 추격하느라 많이 피곤하신 듯한데 일단 조금 쉬시지요.”
그러자 옆에 있던 알류트 족 족장이 끼어들었다.
“무슨 소리!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으니 축제를 열어야지!”
하지만 쿠나킨은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을 계속해서 추격하느라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해 피곤이 가득한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고개를 저었다.
“일단 깨끗이 씻고 조금 쉬십시오. 피곤한 상태에서 술이 들어가 봐야 얼마 마시지도 못하고 곯아떨어질 것 아닙니까. 거기에 아침부터 술을 마실 수야 없는 노릇이고요. 오후에 저희가 가져온 술과 식량을 풀 테니 그때 이번 시베리아 부족 연합의 승리를 축하하는 축제를 열도록 하지요.”
“끙...”
“알겠소. 씻고 잠시 쉬다 오겠소.”
* * *
그날 오후가 되자 북미왕국 상단은 약속한 대로 가져온 식량과 술을 풀기 시작했고 곧 마을은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투란과 알류트 족 족장도 쿠나킨이 가져온 최상품의 소주를 연신 들이마시며 당시의 전투를 회상하거나 러시아 차르국을 추격하는 도중 보았던 겁에 잔뜩 질린 공물 수거인의 추태 등을 이야기하며 웃음을 터트렸고.
그러다 알류트 족 족장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새삼 아쉽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 자리에 코랴크 족 족장이 있었어야 했는데 그게 좀 아쉽군.”
“뭐 갑자기 벌어진 일이니 어쩌겠어.”
투란도 아쉽긴 했지만 어쩌겠느냐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자 알류트 족 족장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긴 한데...이런 식이면 결국 러시아 차르국이 갑자기 움직이면 우리가 소식을 듣고 도우러 올 때까지는 에벤 족이 알아서 버텨야 하는데...이건 좀 문제 같은데?”
“글쎄? 상단의 용병이 이곳에서 우리를 도와준다면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면서 투란이 쿠나킨을 바라보자 쿠나킨은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저희가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용병들은 대부분 이곳에 배치되긴 할 겁니다만...아무리 용병들의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쪽수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지요.”
“으음...”
투란은 이전의 전투에서 상단 용병들의 강력함에 반한 상태였기에 이들이라면 어지간한 적이 몰려온다 하더라도 합심해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쿠나킨의 말도 일리가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자 쿠나킨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 각 부족에서 일부 인원을 이곳에 파견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체계를 잡아 두어야 훗날 다른 부족들이 합류해도 연합에 보탬이 될 테고요.”
“다른 부족을 연합에 끌어들이자?”
알류트 족 족장이 눈을 빛내며 묻자 쿠나킨이 씩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분명 러시아 차르국에 불만이 있는 부족들이 없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저들과 맞설 강대한 세력이 없기에 어쩔 수 없이 허리를 숙였겠지요. 헌데 이번 전투에 대한 소문이 퍼진다면 분명 러시아 차르국에 불만을 품은 부족들이 연합의 합류를 고민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저희가 연합에 속한 부족과 거래한다면...머스킷을 구할 방도는 연합에 합류하는 것뿐이니 더욱 연합에 관심을 보일 테지요.”
“연합이 커지면 나쁠 것은 없겠지만...머스킷을 추가로 가져와야 할 텐데 그게 가능하겠소?”
투란의 질문에 쿠나킨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물론입니다. 이번 일을 보고하면 위쪽에서도 흡족해하며 시베리아 부족 연합을 도우려 할 겁니다. 그러면 더 많은 머스킷을 구할수 있...아. 어쩌면 본국이 직접 나설 수도 있겠군요.”
쿠나킨이 슬쩍 떡밥을 깔아두기 시작할 타이밍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덧붙이자 투란이 고개를 갸웃했다.
“본국이라면...북미왕국 말입니까?”
“예. 최근에 러시아 차르국이 북미왕국의 배를 공격한 적이 있거든요. 해서 본국은 러시아 차르국을 썩 좋게 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시베리아 부족 연합을 지원한다면 자연스레 시베리아 지역에서 러시아 차르국의 세력이 축소된다는 것을 위쪽에서 본국의 관리에게 잘만 설명한다면...본국이 직접 시베리아 부족 연합을 도울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면 머스킷을 구하는 문제 따위는 일도 아니지요.”
“그렇...습니까?”
투란과 알류트 족 족장은 갑작스레 북미왕국이 직접 개입할 수도 있다는 말에 이게 자신들에게 득인지 실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 서로를 바라보며 눈길을 주고받고 있을 때 쿠나킨이 이를 눈치채고 입을 열었다.
“단순히 상단 차원에서 시베리아 부족 연합을 지원하는 것과 본국이 직접 나서서 연합을 지원하는 것은 차원이 다를 겁니다. 그리고 북미왕국은 영토가 넓은 터라 오히려 영토가 확장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만큼 러시아 차르국처럼 이 시베리아 지역을 탐내지도 않을 테니 연합의 입장에서 나쁠 것은 없을 겁니다.”
그 말에 투란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흐음...솔직히 갑작스러운 말이라 잘은 모르겠지만...당신들의 도움으로 우리가 러시아 차르국에 대항할 수 있게 되었고 이번 전투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지요. 그런 만큼 일단은 당신들을 믿도록 하겠습니다.”
투란의 말에 알류트 족 족장도 고개를 끄덕이자 쿠나킨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결코 저버리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 * *
야쿠츠크 요새의 사령관은 공물 수거인이 거지꼴로 도착했다는 병사의 보고에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집무실을 나섰고.
요새 안쪽 공터에서 무언가를 허겁지겁 먹고 있는 추레한 몰골의 인물들과 그중의 한 명이 공물 수거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놀란 표정으로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맙소사. 자네 대체 이게 무슨 꼴이야?”
공물 수거인은 사령관이 나온 것을 확인하고 입안에 있던 음식들을 황급히 삼킨 후 입을 열었다.
“그게...원주민들에게 공격받았습니다.”
“뭐? 원주민? 아니. 내가 만약을 대비해 딸려 보낸 병사가 300명인데 그들은 어디 가고?”
사령관은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으며 공물 수거인을 바라보자 공물 수거인은 슬쩍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그게...대부분은 원주민들의 공격에 그만...”
그 대답에 사령관은 기겁하며 급히 공물 수거인의 양어깨를 붙잡고 소리쳤다.
“뭐?! 지금 미개한 원주민들의 공격에 병사들이 모두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건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게...”
공물 수거인이 자신이 겪었던 일을 하나씩 보고하기 시작하자 사령관의 표정은 점차 심각하게 굳었고.
“머스킷? 원주민들이 머스킷으로 무장했다고?”
“그렇습니다. 그것도 한두 자루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병사들을 지휘하던 지휘관은 못해도 500명 정도가 머스킷으로 무장하고 3교대로 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군요.”
“미개한 원주민들이 그 정도의 머스킷을 대체 어디서 구한 거지?”
한두 자루의 머스킷이라면 어쩌다 시베리아 지역으로 흘러 들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500자루는 누군가가 작정하고 팔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한 수라고 생각해 사령관이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공물 수거인은 자신도 짐작되는 바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은 후 계속 설명했다.
“아무튼, 저희가 쉬고 있던 야영지를 반 포위한 원주민들이 사격을 시작하자 병사들은 어떻게든 반격을 하려 했지만, 초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을 때의 피해가 워낙 컸던 탓에 지휘관은 일단 퇴각하기로 결정했지요. 헌데...”
“헌데?”
공물 수거인은 당시의 기억이 떠오른 모양인지 손을 조금씩 떨며 입을 열었다.
“총성이 들리지 않는 유일한 방향인 서쪽도 안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원주민들인 이곳에도 매복해 있다가 저희가 이곳을 지나가자 공격했지요. 이때 지휘관이 총알에 맞아 낙마했고...어떻게든 옮기려 했지만, 부상이 심해 결국 사망했습니다.”
“쯧...퇴로라고 생각한 서쪽에도 머스킷으로 무장한 원주민이 대거 대기하고 있었다는 소린가?”
“그건 아닙니다. 서쪽에서 저희를 기다리고 있던 원주민들의 경우 머스킷은 거의 없었고 대다수는 활과 칼, 도끼로 무장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후퇴하는 저희를 계속해서 쫓으며 피해를 주었고요.”
처음 공물 수거인의 대답에 눈을 빛내던 사령관은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표정이 구겨졌고 공물 수거인의 말이 끝나자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일부를 남겨 저들을 저지하고 안전하게 퇴각했어야지 그냥 도망쳤다고?”
“그게...지휘관이 죽고 뒤이어 병사들을 지휘하던 부관마저 화살에 맞아 죽은 후론 병사들이 지휘에 따르기보단 무조건 도망쳤던 탓에...”
군기가 무너져 명령도 무시하고 살기 위해 무작정 도망치다 추격하는 원주민들에 의해 하나씩 죽어 나갔을 것이 뻔히 보였기에 사령관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혀를 찼다.
“쯧쯧. 그래서?”
“저들은 우리를 집요하게 추격하며 공격하다 며칠이 지난 후에 돌아갔습니다만...이미 살아있는 병사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대다수는 부상을 입었고 갑작스러운 습격을 피해 도망치느라 대부분의 짐을 잃어버린 탓에 물자도 부족했지요. 해서 레나 강에 도착했을 때는...”
“이것밖에 남지 않았다? 하. 기가 차는군.”
그 말에 공물 수거인은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고 사령관은 이 예상치 못한 보고에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야쿠츠크 요새는 그렇게 큰 편이 아니었고 이곳은 제대로 된 세력도 없었기에 애초에 많은 병사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그가 지휘하는 병사는 약 500명 정도였는데 이번 일로 그가 지휘하던 병사 태반이 사라진 셈이었고 에벤 족 영역에서 공격을 받은 만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진 동쪽 지역에서 공물을 받기는 글렀으니 더욱 골치 아플 수밖에 없었고.
해서 사령관은 공물 수거인이 한 보고를 머릿속에서 되새기다가 그나마 긍정적인 부분을 파악하고 중얼거렸다.
“그나마 이야기를 들어보니 머스킷이 넘쳐나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정말 머스킷이 충분했다면 활이나 도끼로 무장할 이유가 없었기에 그렇게 판단하자 공물 수거인이 동의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들이 머스킷이 많았다면 퇴각조차 하지 못하고 에벤 족 영역에서 몰살당했겠지요.”
“우리를 공격했다는 원주민 부족은 에벤 족이 확실한가?”
“그렇습니다. 공격받았을 때는 몰랐지만...저희를 추격하는 자 중에 에벤 족 족장이 있는 것을 확실히 목격했습니다.”
이에 사령관은 한숨을 내쉬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하사품의 양을 조정한 이후에 습격했다고 했지?”
“예. 처음에는 반발하는 기색이 없지는 않았지만, 곧 체념하고 모피를 공물로 바쳤기에 내심 안심했습니다만...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저희의 방심을 유발하기 위한 술책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공물 수거인이 고작 원주민에게 속았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대답하자 사령관은 무언가가 떠오른 듯 중얼거렸다.
“...어라? 생각해보면 작년에 저들이 바치던 공물의 양이 줄어들었지?”
“그렇습니다만...”
“만약 저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동물들의 수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저들이 모피를 빼돌렸다면? 그리고 그 빼돌린 모피로 머스킷을 사들였다면 앞뒤가 맞는 것 같은데? 어떤 빌어먹을 놈들이 머스킷을 판 것인지는 일단 넘어가더라도?”
공물 수거인은 사령관의 추측도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작년에 수거한 공물의 양을 떠올리며 급히 입을 열었다.
“헉! 그...그럼 일이 커집니다! 작년엔 에벤 족 뿐만 아니라 알류트 족이나 코랴크 족도 전체적으로 공물이 줄었었으니까요. 그럼 그들도...”
“머스킷으로 무장했을 가능성이 있군. 하. 젠장. 이거 일이 커지는데? 거기에 시간을 주면 줄수록 저들은 더 많은 머스킷을 구해 무장할 수도 있을 테고?”
사령관은 생각을 정리하며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작년에 다른 부족들도 공물의 양이 줄었고 자신의 가정대로 이 공물로 머스킷을 구했다면 다른 두 부족도 머스킷을 보유하고 있을 공산이 컸다.
머스킷의 수가 비슷하다고 가정하면 원주민들은 1500자루나 되는 머스킷을 보유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만 하더라도 당장은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헌데 시간이 흐를수록 원주민들은 모피를 이용해 더 많은 머스킷을 사들여 무장할 수 있다고 하니 이 문제를 도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싶었다.
“어...어쩌면 좋습니까?”
그리고 사령관의 중얼거림을 들은 공물 수거인은 사색이 되어 사령관에게 물었고 사령관은 답이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하아...이건 내 선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로군. 모스크바로 연락을 보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