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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436화 (436/850)

436화

알류트 족 족장은 머스킷을 만지작거리며 에벤 족 마을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표정을 살짝 찌푸리고 입을 열었다.

“이거 너무 늦는 것 아닙니까?”

“그러게요. 벌써 30분이 흘렀는데...”

쿠나킨이 희미한 달빛에 의지해 회중시계를 확인하고 대꾸하자 옆에서 날카로운 시선으로 에벤 족 마을을 바라보던 아이누 탐사대장이 쿠나킨에게 시선을 돌렸다.

“철수할까요?”

그 말에 쿠나킨은 고개를 들어 조용한 에벤 족 마을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흐음...조금만 더 기다려 보지요. 딱 10분만 더 기다려 보고 나타나지 않으면 철수하는 것으로 합시다.”

“알겠습니다.”

그때 옆에서 알류트 족 족장이 손을 들며 낮게 소리쳤다.

“어? 저기 옵니다.”

“두...명?”

마을에서 두 명의 사람이 이곳으로 접근하고 있었기에 쿠나킨은 고개를 갸웃했고, 그들이 가까이 접근했을 때야 비로소 누군지 알게 되었다.

“아. 에벤 족 족장님이시군요.”

쿠나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에벤 족 족장인 투란은 쿠나킨의 손을 덥썩 잡으며 감동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소. 그리고 우리를 돕기 위해 오셨다지요? 진심으로 감사하오.”

투란은 알류트 족에 소식을 전하라고 보낸 사내가 하루도 안 돼 돌아오자 무슨 일인가 싶어 사내에게 자세한 사정을 들었고, 알류트 족의 마을로 이동하다 이곳으로 접근하는 북미왕국 상단을 만났고 이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마을을 도와달라고 이야기하자 북미왕국 상단은 기꺼이 자신들을 돕기 위해 이렇게 왔다는 이야기에 새삼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작년에 북미왕국 상단과 거래하면서 이들은 다른 상인들과는 달리 이익을 우선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고, 술자리에서 상인들은 무조건 이익만 추구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자신의 물음에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익을 보게 된다면 당장은 좋을지라도 그 거래가 오래가지는 않으니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웃으며 대답한 쿠나킨을 보고 믿을만한 자라고 생각하긴 했었다.

하지만 상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들을 돕겠다고 나설 줄은 몰랐기에, 투란은 쿠나킨에게 연신 감사의 말을 던졌고.

쿠나킨은 그런 투란의 행동에 뜬금없이 움직인 러시아 차르국 덕분에 이들의 믿음을 제대로 얻을 수 있었기에 속으로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를 이곳에 보낸 누군가에게 감사하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저희도 시베리아 부족 연합을 지원하기로 했으니 당연한 행동이지요.”

“오! 그렇소?”

그 말을 듣고 투란이 다시 쿠나킨에게 고맙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옆에 있던 알류트 족 족장은 고개를 저으며 끼어들었다.

“이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우리가 만난 에벤 족 사람은 마치 큰일이 난 것처럼 이야기했는데...정말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이 오긴 한 거야?”

이에 투란은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고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네. 저기 마을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공터에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이 야영 중이지.”

“대체 왜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온 건데? 아까 그 친구의 걱정과 달리 마을에 아무 일 없는 것 보면 연합에 대한 일을 알고 온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거래 조건의 변경 때문일세.”

“음? 아. 공물?”

“그래. 이놈들이 작년에 바친 공물이 적어 이익이 줄어들었기 때문인지 일방적으로 하사품의 양을 꽤 줄였네.”

투란이 분기 어린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고 대답하자 알류트 족 족장은 그제야 갑작스럽게 러시아 차르국이 병사를 동원한 이유를 파악하고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 우리가 반발할 것 같으니 병사를 대동했다?”

“그렇지.”

투란의 대답에 알류트 족 족장은 러시아 차르국의 탐욕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까지의 거래 조건도 러시아 차르국에 유리한 편이었고 북미왕국 상인들을 통해 러시아 차르국이 자신들과의 모피 거래로 막대한 부를 얻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는데 모피가 조금 줄어들었다고 곧바로 병사까지 동원했으니.

“그래서? 공물을 내어 줬나?”

“후우. 어쩌겠나. 갑자기 나타나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못한 상태에서 저들과 맞설 수야 없는 노릇이니...”

투란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하자 알류트 족 족장은 씩 웃으며 쿠나킨을 보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지.”

그 말에 투란도 눈빛을 빛내며 대꾸했다.

“그래. 그것 때문에 내가 이렇게 직접 온 걸세. 머스킷은 구해오셨지요? 아. 물론 대부분의 모피는 마을 창고에 보관했기에 공물로 러시아 차르국에 넘길 수밖에 없었지만, 검은담비 모피는 다른 곳에 보관해둔 터라 머스킷 일부는 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아. 그건 걱정하지 마시지요. 일단 머스킷 대금은 나중에 받을 테니까요.”

“오오! 그게 정말입니까?”

가뜩이나 머스킷을 사기 위해 모았던 모피를 모두 러시아 차르국에 넘기고 조악한 생필품과 얼마 안 되는 식량, 소금 등을 받았기에 비록 검은담비 모피가 있어도 머스킷을 많이 사지는 못할 거라 짐작해 안타까워했던 투란은 그런 쿠나킨의 대답에 환호할 수밖에 없었고.

쿠나킨은 그런 투란의 반응에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해서 코랴크 족과 알류트 족은 저희가 가져온 머스킷 1천 자루로 무장한 상태이고요.”

“헉! 1천 자루?! 허면 총 3천 자루나 가져왔다는 겁니까?”

“그렇다니까? 이 정도면 충분히 저놈들을 서쪽으로 몰아낼 수 있다고.”

생각보다 많은 머스킷에 투란이 놀랐을 때 알류트 족 족장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끼어들었고 투란 역시 그의 의견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쿠나킨에게 물었다.

“그럼 바로 머스킷을 넘겨주실 수 있겠습니까? 비록 화약 무기에 익숙하지는 않지만 1천 자루의 머스킷이라면 저 서쪽 공터에서 야영하는 러시아 차르국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부족원들을 지키기 위한 결정이었으나 부족원들이 고생해서 모은 모피를 헐값에 거래해야 했으니 투란은 무척 속이 쓰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를 갚아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간절한 눈빛으로 쿠나킨을 바라보자 쿠나킨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당장은 어렵습니다. 이 마을을 구원하기 위해 상단을 나누고 뒤쪽에 짐을 맡겨둔 상태라서요.”

“아...”

쿠나킨의 대답에 투란이 무척 아쉬워하고 있을 때 알류트 족 족장이 쿠나킨에게 질문을 던졌다.

“헌데 이젠 어쩔 겁니까? 내 생각엔 어차피 저들이 공물을 수거하기 위해 우리 알류트 족의 마을로 올 테니 일단 여기서는 물러나서 우리 마을로 돌아가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 나타나는 저들을 공격하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그 말에 아이누 탐사대장이 슬쩍 끼어들어 의견을 제시했다.

“전 반대입니다. 아직 알류트 족 사람들이 머스킷에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실제 전투에 동원해봐야 혼란만 가중될 뿐입니다. 그리고 알류트 족의 영역에서 저들을 완벽히 포위 섬멸하면 모를까...일부가 도망친다면 분명 패잔병들이 여러 문제를 일으킬 겁니다. 그러니 곧바로 저들을 공격하는 것이 낫습니다.”

어차피 전투나 병력 운용은 아이누 탐사대장에 일임했기에 쿠나킨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때 투란이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허면 우리도 돕겠소.”

“예?”

“병사들만 300명이지 일꾼들까지 합치면 4,500명은 되는데...지금 여기 있는 용병들만으로 상대하긴 어려울 거요. 그러니 우리가 저들의 시선을 분산시키겠소.”

투란 역시 용병들의 수가 적었기에 이쪽이 불리하다고 판단했고, 이들이 목숨을 걸고 전투에 임하는데 자신들이 한 발짝 물러나 지켜보기만 할 수야 없었기에 이렇게 이야기하자 아이누 탐사대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일단 저들이 야영하고 있다는 곳을 확인한 뒤에 결정하도록 하지요.”

* * *

투란의 안내를 받아 쿠나킨과 아이누 탐사대장은 조심스럽게 마을 서쪽의, 러시아 차르국 병사들이 야영한다는 곳 근처까지 접근했고.

“생각보다...경계가 철저한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야영지가 엉망일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야영지를 밝히는 화롯불도 많았고 일부 병사들이 머스킷을 들고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기에 쿠나킨은 쉽지 않겠다 여기며 작은 목소리로 아이누 탐사대장에게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에벤 족이 밤사이 습격할 것을 대비한 모양이로군요.”

“허면...”

쿠나킨이 투란을 힐끗 보며 질문을 던지자 아이누 탐사대장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에벤 족 족장의 제안대로 했다간 에벤 족의 피해가 클 겁니다.”

“그럼 안되지.”

“예. 나중을 생각하면 에벤 족의 피해가 커서는 절대 안 되지요. 그러니 이번 전투는 저희끼리 치르는 것이 나아 보입니다.”

이에 쿠나킨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낮에 무력하게 저들에게 공물을 넘겨준 일 때문에 어떻게든 저들을 공격해 이를 갚아주려 하는 눈치 같은데...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이번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 낫지 않겠소?”

쿠나킨의 말마따나 당분간 에벤 족은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과 계속해서 전투를 벌여야 하는 만큼 이들의 사기는 무척 중요했다.

해서 아이누 탐사대장이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흠...허면 저들의 추격을 맡기지요.”

“추격?”

“예. 달빛이 밝은 편이 아니고 갑오 소총의 경우 발사 속도가 빠른 편이라 우리가 사격하기 시작하면 분명 저들은 우리의 숫자를 오판할 겁니다.”

“아. 확실히 그렇겠군.”

아이누 탐사대장의 말이 일리가 있어 쿠나킨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누 탐사대장이 덧붙여 말했다.

“거기에 저들은 에벤 족의 접근을 경계해 주변에 모닥불을 많이 켜둔 터라 우리로선 조준하기도 쉽지요. 그러니 전투가 벌어지면 오래 버티지 못하고 도망칠 겁니다. 그때 추격을 맡기면 되지 않습니까. 어차피 저들은 이곳 지리를 훤히 꿰뚫고 있을 테니까요.”

“아. 그러면 되겠군. 그렇게 전하도록 하지.”

* * *

모닥불 근처에 앉아 어두컴컴한 주변 숲을 응시하며 연신 하품을 하던 수염이 덥수룩한 병사는 지겹다는 표정으로 조용히 투덜거렸다.

“어우. 시간 엄청 안 가네.”

이에 옆에서 육포를 질겅질겅 씹고 있던 병사가 맞장구쳤다.

“그러게 말이야. 에휴. 평소처럼 적당히 불침번을 서면 그만이지 이게 무슨 난리인지.”

“뭐 아까 원주민들이 순순히 모피를 가져오면서도 눈에는 불만이 가득했으니 이해 못 할 것도 아니긴 하지. 다만 평소보다 조금 신경 써서 불침번을 서면 될 텐데...이건 좀 과한 것 같긴 해.”

그 말에 육포를 삼킨 병사가 슬쩍 주변을 살펴보고 지휘관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입을 열었다.

“좀? 엄청 과한 거지. 한 열 명 정도만 서면 될 불침번을 무슨 50명이 서고 있어? 어차피 원주민놈들은 감히 우리에게 덤비지도 못할 텐데?”

투덜거렸던 수염이 덥수룩한 병사는 자신의 말에 격하게 반응하는 병사를 보고 괜히 말을 꺼냈나 싶어 진정하라고 손짓하며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저 에벤 족도 예전엔 조금 반항하긴 했었다며. 그러니 나름 안전을 생각해서 이러는 거지 뭐.”

그 말에 한숨을 내쉰 병사가 품에서 다시 육포를 꺼내며 중얼거렸다.

“어휴. 여기서도 이 정도인데...동쪽으로 이동해 알류트 족 영역에 들어서면 불침번의 수를 더 늘릴까 걱정이다.”

“으...그건 좀 싫은데...”

“차라리 예전처럼 조금이라도 불만스러운 기색을 보이면 마을을 약탈해 그런 기색조차 보이지 못하게 하는 게 나아 보이는데 말이지.”

그 말에 수염이 덥수룩한 병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서라. 아서. 이번에 야쿠츠크에서 떠나기 전 사령관님이 직접 우리를 배웅하면서 그랬잖아? 함부로 원주민들을 건드리지 말라고. 가뜩이나 전염병이 돌고 해서 사냥해야 할 원주민들이 줄어든 상황이니 직접 반항하지 않는다면 절대 손대지 말라고.”

그의 말처럼 야쿠츠크 요새의 사령관이 직접 이야기를 한 만큼 원주민 마을을 약탈해 재미를 볼 수 없으리라 생각한 병사가 육포를 칼로 잘라 입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어휴. 이번 탐사는 꽤 지루할 것 같네.”

이에 수염이 덥수룩한 병사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공물 수거가 끝나면 주변을 탐사해 새로운 원주민 마을을 찾을 예정이잖아? 그때가 되면 재미 좀 보겠지.”

“킬킬킬.”

그렇게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던 두 병사는 슬슬 불침번을 교대할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사실에 환호했고.

“어휴. 드디어 끝났네.”

“끝난 것은 좋지만...잠깐 자고 다시 일어나야 하니 이 시간대에 불침번을 서면 온종일 피곤하단 말이지.”

수염이 지저분한 병사가 투덜거리자 육포를 씹던 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해. 하지만 계속 불침번을 설 생각은 없잖아?”

“그거야 당연하지. 그럼 내가 교대할 친구들을 깨우고 올게.”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수염이 지저분한 병사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라?”

“왜?”

“저기 저거...불빛 맞지?”

그 말에 육포를 씹던 병사는 시선을 돌렸고.

아직 아침 해가 뜨지 않아 어두운 숲속에 조그마한 두 개의 불빛이 보이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네? 웬 불빛이지?”

‘탕! 탕!’

“컥!”

생각지도 못한 총성과 옆에서 들리는 비명 소리에 기겁한 수염이 지저분한 병사는 재빨리 몸을 숙이고 한쪽에 세워둔 머스킷을 집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병사를 확인했지만, 총알을 맞고 즉사한 모양인지 쓰러져서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기에 수염이 지저분한 병사는 분노한 표정으로 야영지를 향해 소리치려 했다.

“습격...”

‘타타타타타타타탕!’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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