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4화
“족장님! 큰일 났습니다!”
마을 창고에서 모피를 확인하던 에벤 족의 족장 투란은 아침에 마을을 떠났던 사냥꾼이 다급한 목소리로 자신을 찾자 무슨 일인가 싶어 급히 창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다 자신을 확인한 후 허겁지겁 달려오는 사냥꾼을 확인하고 질문을 던졌고.
“큰일?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나?”
이에 사냥꾼을 헐떡이면서 손을 들어 서쪽을 가리키고 외쳤다.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이 나타났습니다!”
“뭐라고?!”
사냥꾼의 보고에 투란뿐만 아니라 사냥꾼이 시끄럽게 소리쳤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나왔던 부족원들이 모두 기겁했다.
올해 북미왕국의 상인들이 머스킷을 가져오면 러시아 차르국에 반기를 들기로 하고 이미 주변 부족과도 연합을 이룬 상태였기에 언제쯤 북미왕국의 상인들이 머스킷과 함께 도착할까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다리던 북미왕국의 상인들이 아닌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가 나타났다고 하니 당황한 것이다.
그리고 투란은 놀란 표정으로 화급히 사냥꾼에게 다가가 자세한 보고를 들었고 사냥꾼의 말이 끝나자 굳은 얼굴로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게 정말인가? 병사들이 무려 300명이 넘는다고?”
“머스킷을 들고 있는 병사들을 대충 헤아려보니 그 정도는 되었습니다.”
사냥꾼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투란과 사냥꾼을 둘러싸고 있던 부족원들이 잔뜩 불안한 표정으로 떠들기 시작했다.
“이거 우리가 알류트 족과 코랴크 족과 연합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러시아 차르국에서 병사들을 보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일부 부족원들이 그렇게 단정 짓자 한 부족원이 호들갑을 떨었다.
“맙소사! 그럼 저들은 우리를 토벌하기 위해 왔다는 소리잖습니까! 족장님! 어쩌지요?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아직 우리는 머스킷이 없잖습니까.”
머스킷이라도 있었다면 모를까 아직 머스킷도 없는데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와 싸울 수는 없다는 한 부족원의 이야기에 일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한참 심각한 표정을 짓던 투란은 다시 사냥꾼에게 질문을 던졌다.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이 마을에 도착하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이에 사냥꾼은 잠시 하늘을 보고 시간을 헤아려보다가 대답했다.
“물론 저들이 천천히 이동 중이긴 했습니다만...아마 정오가 되기 전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사냥꾼의 대답에 주변에서는 일제히 탄식이 쏟아졌다.
조금이라도 일찍 발견해 어느 정도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면 모를까 당장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이 들이닥칠 것 같았기에.
“지금이라도 최대한 빠르게 짐을 챙겨 도망치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정오가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잖습니까. 분명 따라잡힐 겁니다.”
“차라리 항복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저들의 노예로 살자는 소리요? 차라리 모두 흩어져서 도망치고 나중을 기약하는 것이 낫지!”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그게 가능할 것 같소?”
“어떻게든 알류트 족의 영역으로 가면 되잖소!”
“이곳이 텅 비어 있으면 저들은 당연히 알류트 족의 영역으로 향할 텐데 그때는 또 어떻게 하고!”
그렇게 부족원들의 의견이 엇갈리며 서로 토론을 빙자한 말다툼이 오고 가자 사냥꾼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던 투란이 주변을 보고 소리쳤다.
“조용!”
이에 부족원들은 입을 다물고 투란을 바라보았고 투란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한 사내를 보고 명령했다.
“일단 자네는 알류트 족에 사람을 보내 현 상황을 알리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뭐하나! 당장 말이 있는 곳으로 출발하게!”
투란은 자신의 말을 듣고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사내를 다그친 후 헐레벌떡 뛰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시선을 돌려 다른 청년을 바라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자네는 이곳뿐만 아니라 주변 마을에도 사람을 보내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이 오는 만큼 북미왕국의 물품을 모두 숨기라고 전하고.”
투란의 말에 청년은 급히 뛰기 시작했고.
하지만 아까 목소리를 높여 도망쳐야 한다고 주장했던 에벤 족의 한 노인이 이 무슨 황당한 소리냐는 표정으로 투란을 바라보았고.
“아니. 그게 무슨...”
무어라고 이야기하려는 찰나 투란이 손을 들어 노인의 말을 막고 입을 열었다.
“저들이 나타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고 발견이 늦어 현실적으로 도망치긴 어렵지.”
투란의 말에 일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노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족장! 허면 그냥 항복하겠다는 소리요?”
“뭐 저들이 정말 우리를 공격하러 왔다면 그것도 고려해야겠지.”
머스킷이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그리고 저들이 연합의 일을 알고 나타난 거라면 차라리 항복하고 나중을 기약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투란이었다.
그리고 노인은 아직 결정한 것은 아니라는 듯한 말투를 하는 투란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고.
“음?”
투란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서 우리가 다른 부족들과 연합을 맺었다는 것과 러시아 차르국에 맞설 생각이라는 이야기를 주변 부족에 떠벌리고 다닌 사람이 있긴 한가?”
이에 주변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고 그런 반응에 투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없지? 헌데 저들이 어떻게 우리의 계획을 알고 나타나겠나.”
투란도 처음에는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이 나타났다는 보고에 저들이 모든 일을 다 알고 온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코랴크 족이나 알류트 족은 자신들보다 동쪽에 있어 러시아 차르국이 이번 일을 알게 되었다면 천상 부족원 중 누군가가 이 일을 러시아 차르국에 이야기했다는 건데 과연 그럴 사람이 있긴 한가 싶었던 것이다.
알류트 족까지는 아니지만, 자신들도 러시아 차르국에 당한 것이 없지는 않았고 러시아 차르국에 공물을 바치는 것보다 북미왕국의 상인들과 거래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라는 사실을 다들 잘 알고 있었으니까.
특히나 작년 겨울은 북미왕국과 거래한 덕택에 꽤 풍족하게 보낼 수 있었고 그 때문에 부족원들은 다들 하루라도 빨리 북미왕국의 상인들이 오기만을 기다렸으니.
거기에 혹시라도 이 일이 알려질까 우려해서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기까지 했고 부족원들에겐 누누이 입조심을 하라고 항상 당부했다는 것이 떠오르자 러시아 차르국이 무슨 수로 이 일을 알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달까.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이야기하자 다른 부족원은 그건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허면 족장님께서는 러시아 차르국이 우리의 계획을 모른다고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항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부족원이 아직 불안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질문하자 투란은 애써 확신에 찬 얼굴로 대답했다.
“난 모를 거라고 보네. 그저 우리가 갑자기 나타난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을 보고 지레 겁먹은 게지.”
그런 투란의 얼굴에 일부는 불안감이 가시는 것을 느꼈지만 누군가는 아직 불안한 표정으로 다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저들이 우리의 계획을 모른다면 왜 병사들을 동원했겠습니까?”
이에 투란은 애써 심드렁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뭐. 우리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겠지. 어쩌면 예전에 병사들을 대동하고 나타나 우리에게 공물을 요구한 것처럼 다른 부족에게 공물을 요구하기 위해 지나가던 중일 수도 있겠고.”
“으음...”
부족원들이 다들 수긍한 눈치였기에 투란은 내심 안도하면서 명령했다.
“그러니 일단 자네들은 집에 가서 북미왕국의 물품을 최대한 숨기게. 어서!”
* * *
공물 수거인과 함께 에벤 족의 한 마을에 도착한 야쿠츠크 소속의 지휘관은 말 위에서 에벤 족의 마을을 살피다 고개를 갸웃했다.
“왠지 마을 분위기가 좀 이상한 것 같습니다만...”
“그럴 수밖에 없지 않소? 원래 우리가 방문하는 시기도 아니고 평소와는 달리 많은 병사가 함께 왔으니 원주민들로선 불안할 수밖에 없겠지.”
더불어 이들은 예전에 이 주변의 마을 하나를 약탈하기도 했으니 당연히 원주민들은 신경이 곤두섰을 거라 짐작한 공물 수거인이 당연한 것 아니냐는 표정으로 대꾸하자 지휘관은 딱히 할 말이 없었기에 머쓱한 표정을 지었고.
“크흠...”
“그러니 병사들은 마을 밖에서 쉬도록 하고 일부만 마을로 들어갑시다.”
공물 수거인의 이야기에 지휘관은 잠시 고민했지만, 원주민들이 감히 자신들을 공격하지는 못하리라고 판단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러시지요.”
* * *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이 마을 근처에 도착하자 에벤 족 부족원들은 잔뜩 긴장해서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병사들은 마을 근처 공터에 쉴 생각인지 말에서 내려 천막을 치기 시작했고 그들의 분위기를 확인한 에벤 족 부족원들은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어?”
“분위기가 썩 나쁘진 않은데요?”
“저들이 우리를 공격하려 했다면 바로 달려들지 저기에 천막을 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저기 보세요. 병사들이 웃고 떠드는데...족장님 말씀처럼 그냥 지나가던 중이었나 본데요?”
“그렇긴 한데...그럼 저들이 이 미묘한 시기에 나타난 것이 정말 우연이라고?”
그때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 일부가 마을에 접근하는 것이 보이자 다들 입을 다물었고.
눈이 밝은 한 청년이 입을 열었다.
“어?! 저기 저 사람 공물 수거인인 것 같은데요?”
“아. 맞네! 그럼 정말 다른 일 때문에 들른 건가?”
“어휴. 괜히 겁먹었잖아?”
에벤 족 부족원들은 맨 앞에서 일부 병사들과 접근하는 공물 수거인을 확인하고 안도하며 떠들어대기 시작하자 투란은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에 안도하면서 곧바로 부족원들에게 소리쳤다.
“다들 조용하게. 조용!”
투란의 명령에 부족원들이 입을 다물 때쯤 공물 수거인과 병사들이 마을에 들어왔고 투란은 곧바로 공물 수거인에게 다가갔다.
“갑작스럽게 무슨 일로 방문하신 겁니까?”
이에 공물 수거인은 흐릿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제가 무슨 일로 이곳을 방문했겠습니까. 공물을 수거하러 왔지요.”
투란은 지나가던 길에 들렸다는 대답을 예상했다가 공물 수거인의 말에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공물을요? 아니. 지금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무슨 문제 있느냐는 표정을 짓는 공물 수거인을 보고 투란은 어떻게든 그를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작년에 공물을 가져간 지도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아직 비축해둔 모피가 많지 않습니다. 거기에 아직 공물을 바칠 시기가 아니라 주변 마을에서 모피를 가져오지도 않았고요. 그러니...”
“뭘 그런 것을 걱정하십니까. 그거야 돌아갈 때 다시 들러 수거하면 되는 문젠데.”
“그...그렇지요.”
애써 웃으며 그렇게 대답한 투란이었지만 속으로는 무척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북미왕국의 상인들이 머스킷을 가져온다고 약속했었기에 그 대금으로 지급할 모피를 준비해두었는데 이것을 홀라당 러시아 차르국에 공물로 바쳐야 할 상황이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창고가 부족해 모피 중 가장 값비싼 검은담비 모피는 자신의 창고에 보관 중이긴 했지만, 마을 창고에 보관 중인 모피의 양도 상당했기에 곧바로 마을 창고로 발걸음을 옮기는 공물 수거인을 따라가면서 투란은 고민했다.
‘하필이면 이 시기에 공물을 수거하겠다고 나타나다니. 평상시였다면 모를까 밖에 있는 병사들을 생각하면 그냥 내쫓을 수도 없고...하. 천상 보관한 모피를 공물로 바치는 방법밖에는 없나?’
그때 공물 수거인은 마을 창고의 입구에서 서성거리는 원주민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고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이 움직이려는 찰나 투란이 직접 나서 부족원들을 비키게 하고 마을 창고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공물 수거인은 마을 창고 안쪽에 가득 쌓여있는 모피를 확인하고 활짝 웃었고.
“어? 예상보다 모피가 많군요?”
이 정도면 작년에 수거한 양의 2배 정도였기에 공물 수거인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작년에 이미 동물의 수가 급감했다고 이야기했던 투란이 급히 변명하듯 대답했다.
“아. 그게 작년에 공물로 바친 모피가 적어 하사품의 양도 적었기에 부족원들이 주변 지역을 열심히 수색한 덕분이지요.”
투란의 말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은 공물 수거인은 그저 속으로 야쿠츠크 요새 사령관의 판단이 과연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흐. 그렇군요. 그리고 이 정도의 모피라면...”
공물 수거인이 투란에게 이번에 건넬 하사품의 양을 이야기하자 투란은 인상을 찌푸렸다.
“잠깐만요. 뭔가 잘못 계산하신 것 아닙니까? 이 정도의 모피를 공물로 바치는데?”
모피의 양만 따지면 작년에 2배에 가까웠는데 하사품은 작년에 비해 1.5배 정도였기에 이상하다는 듯 묻자 공물 수거인이 별일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그동안 이 지역 원주민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공물을 많이 바쳤기에 우리도 나름 배려해서 더 많은 하사품을 내렸습니다만...작년에 너무 적은 공물을 바쳤기에 하사품의 양을 조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허...”
가뜩이나 북미왕국과 비교하면 박한 조건이었는데 여기서 더 조건이 나빠졌다는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는 투란이었다.
특히 작년에 북미왕국의 상인들이 러시아 차르국이 자신들의 모피로 막대한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더더욱.
더불어 투란은 공물 수거인이 왜 병사들을 대거 대동하고 방문했는지를 깨달았다.
자신들이 이번 조건에 반발할 것을 우려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저들과 충돌한다면 마을이 약탈당해 다른 물품들마저 뺏길 것을 우려한 투란은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후우. 알겠소.”
투란의 결정에 공물 수거인은 미소지었지만, 마을 창고 주변에 있던 부족원들은 분개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고 투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투란은 이들에게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은 후 공물 수거인에게 말했다.
“부족원들이 조금 흥분한 것 같은데 이들을 잠시 진정시킨 후 공물을 내어줄 테니 밖에서 기다려주셨으면 합니다만...”
그 말에 공물 수거인도 주변 분위기를 파악하고 괜히 충돌이 일어나봐야 좋을 것은 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밖에서 쉬고 있으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