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3화
“족장님! 족장님! 나와보십시오!”
아직 이른 아침이라 잠을 자던 코랴크 족의 족장은 부족원의 호들갑에 잠이 깨서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밖으로 소리쳤다.
“대체 무슨 일인데 아침부터 이 난리야!”
하지만 부족원은 족장의 신경질적인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밖에서 외쳤다.
“빨리 나와보세요! 족장님! 남쪽에서 배가 보입니다!”
그 말에 족장은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뭐?! 그들이 확실한가?”
“예! 작년에 보았던 그 거대한 배입니다!”
밖으로 나온 족장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대답하는 부족원을 뒤로하고 저 멀리 바다를 바라보다 멀리서 보이는 북미왕국 특유의 거대하고 돛이 없는 배를 확인하고 중얼거렸다.
“드디어...저들이 왔군.”
북미왕국 상인들은 다음에 올 때 머스킷을 가져오기로 약속했었고 저들이 약속대로 머스킷을 가져왔다면 앞으로는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 족장은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표정으로 점차 조금씩 가까워지는 북미왕국의 배를 바라보다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족장이 선착장까지 이동했을 때 이미 북미왕국의 배가 보인다는 이야기가 마을에 퍼져 부족원들 전체가 선착장에 몰려들어 선착장에 다가오는 북미왕국의 배 4척을 바라보았고.
선착장에 배가 정박하자 가장 먼저 배에서 내린 쿠나킨은 선착장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코랴크 족의 족장을 보고 환하게 미소지으며 인사했다.
“아. 족장님. 오랜만입니다.”
“오! 오셨구려! 이렇게 보니 참으로 반갑소!”
“하하하. 이렇게 환영해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렇게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용병으로 위장한 아이누 탐사대원들과 선원들은 배에서 부지런히 물건들을 내리기 시작했고 족장은 이를 힐끗힐끗 바라보다 참지 못하고 쿠나킨에게 질문을 던졌다.
“헌데...혹시 머스킷은...”
“물론 가져왔지요.”
쿠나킨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웃으며 아이누 탐사대원들이 옮기던 나무 상자를 이쪽으로 가져오라고 손짓했다.
이에 아이누 탐사대원들은 들고 있던 나무 상자를 쿠나킨과 족장이 있는 곳에 내려놓고 나무 상자의 윗부분을 열었고.
상자 안에 머스킷이 가지런히 놓여있자 족장이 탄성을 내뱉었다.
“오오!”
쿠나킨은 그런 족장의 반응에 싱긋 웃으며 설명했다.
“지금 이 상자에는 머스킷 10자루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상행에 이런 상자를 총 300개 가져왔지요.”
“헉! 머스킷을 3천 자루나 가져왔다는 말이오?”
예상보다 많은 머스킷에 족장이 놀란 표정으로 쿠나킨을 바라보자 쿠나킨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 물론 에벤 족이나 알류트 족에게도 머스킷을 팔겠다고 약속한 만큼 이 물량을 다 코랴크 족에게만 넘길 수야 없습니다마는...그래도 100상자는 배정할 생각입니다.”
그것만 하더라도 무려 머스킷 1천 자루였기에 기껏해야 2,300자루를 예상했던 족장은 이들의 능력에 감탄했다.
“허. 그 정도면 충분하지. 다만...머스킷의 가격은 얼마요?”
부족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이들이 가져온 머스킷을 전량 사들여야겠지만 이들이 가져온 머스킷의 양이 워낙 많은 터라, 그리고 머스킷이 무척 비싸리라고 생각한 족장이 내심 긴장하며 쿠나킨을 바라보았고.
쿠나킨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머스킷 한 자루에 순록 모피 2장과 교환하도록 하겠습니다.”
“어?”
“왜 그러십니까?”
쿠나킨이 당황한 족장을 바라보자 족장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니...조금 예상외라서 말이오. 저번에도 그러지 않았소? 머스킷은 무척 비쌀 거라고?”
족장도 이들의 물건이 품질에 비해 무척 저렴하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저번에 이들과 거래했을 때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도끼나 정글도가 순록 모피 1장씩이었으니 쿠나킨이 비싸다고 했던 머스킷은 못해도 순록 모피 5장, 최대 10장으로 교환할 수 있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쿠나킨의 대답은 예상과는 달리 무척 저렴했기에 족장이 당황하여 질문을 던지자 쿠나킨이 고개를 저었다.
“아. 아시다시피 머스킷을 사용하려면 추가로 화약과 총알도 필요하니 유지비도 꽤 들어갈 겁니다. 그걸 생각하면 싼 가격은 아니지요.”
쿠나킨은 족장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머스킷의 가격은 저렴한 편이었다.
특히나 북미왕국은 조선의 조총을 무려 2배나 되는 가격을 지불하고 사들여 이들에게 저렴하게 판매하는 중이었기에 팔면 팔수록 막대한 손해를 보는 구조였고, 화약과 총알 역시 저렴하게 제공할 예정이었으니 이야기와는 다르게 시베리아 원주민들이 유지비를 부담스러워할 리도 없었고.
이는 북미왕국에서 시베리아 원주민들을 독립시켜 러시아 차르국의 자금줄인 모피 무역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 어느 정도의 손해는 기꺼이 감수하고 내린 결정이었지만 굳이 이를 이들에게 알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쿠나킨이 이렇게 설명했고.
“흐음...”
족장은 그런가 하는 표정을 짓자 쿠나킨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제가 위쪽에 이 시베리아 지역의 사정을 설명했고, 특히 코랴크 족이나 다른 부족의 사정을 확실히 전달했습니다.”
“음? 뭐라고 말이오?”
“러시아 차르국의 부당한 공물 요구에 여러 부족이 힘들어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머스킷을 요구한 부족 일부는 아마 러시아 차르국에 반기를 들 수도 있는데 그러면 당장 무기를 비롯한 여러 물자가 중요하다고 말이지요.”
“음...”
쿠나킨의 말처럼 러시아 차르국과 충돌하게 되면 여러 물자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었기에 족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쿠나킨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위에서는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여겨 논의 끝에 일단 머스킷을 제가 접촉한 시베리아 부족에게 전달하고 머스킷 대금은 내년부터 5년간 나눠서 갚아도 된다고 허락했습니다.”
“헉! 그게 정말이오?”
비록 머스킷의 가격이 생각보다 저렴하기는 했지만, 워낙 이들이 가져온 머스킷의 수가 많았기에 머스킷의 가격으로 생각보다 많은 모피를 지불해야 했고 그렇게 되면 생필품이나 식량 등을 사들일 모피는 부족할 수밖에 없었기에 내심 걱정이던 족장은 쿠나킨의 말에 눈을 번쩍 뜨며 급히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위에서도 그동안 러시아 차르국에 공물을 바치던 시베리아 지역의 부족들이 독립하게 되면 그동안 러시아 차르국에 공물로 바쳤던 모피들도 거래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니까요. 아. 그리고 식량도 일부 무상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식량을?”
머스킷의 대금을 나눠서 갚을 수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되었는데 여기서 식량마저 지원해주겠다는 말에 족장이 놀라고 있을 때 쿠나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뭐 그리 많은 양은 아닙니다만...독립을 생각하는 시베리아 지역의 부족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지원을 해주는 만큼 독립하고 나면 꼭 저희 상단과 독점적으로 거래해달라는 뜻이 담긴 뇌물이기도 하고요. 하하하.”
그러면서 쿠나킨이 멋쩍은 듯 웃음을 터트리자 족장은 상인이면서도 앞날을 생각해 자신들을 지원하려는 이들의 행동에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니겠소. 그보다 바로 상행을 떠날 생각은 아니지요?”
이에 쿠나킨은 선착장을 통해 열심히 물품이 담긴 상자들을 운반하는 선원들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물론 선착장 덕분에 이전보다 물자를 빠르게 내릴 수는 있긴 한데 가져온 물자들을 생각하면 시간이 좀 걸릴 테니 그건 어렵겠지요.”
“그럼 오늘은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 축제를 열어야겠구려. 하하하.”
“오. 그거 좋지요. 하하하.”
* * *
쿠랴크 족의 마을은 온종일 북적거렸다.
낮에는 북미왕국 상인들을 돕거나 거래하기 위해, 그리고 해가 질 무렵 족장이 북미왕국 상인들을 환영하기 위해 축제를 연다는 말과 이전처럼 북미왕국의 상인들이 축제를 위해 술을 무상으로 제공한다는 소리에 마을이 들썩거릴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코랴크 족 사람들과 북미왕국 사람들이 어울려 축제를 즐기고 있을 때 쿠나킨이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주변을 둘러보고 입을 열었다.
“저번의 방문 때도 그랬지만 여기 사람들은 술을 무척 좋아하는 느낌입니다.”
이에 족장은 조금은 무거운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렇게 맛있는 술을 구하기는 어려우니 그런 것도 있고...미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을 잠시나마 잊기 위함이기도 하겠지요.”
“미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라...”
쿠나킨은 족장의 의미심장한 말에 취기가 조금 가시는 것을 느끼며 술잔을 내려놓자 족장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번에 당신들이 떠난 이후 러시아 차르국에서 보낸 공물 수거인이 마을에 왔었소. 그리고...당신들과 거래한 모피와 비슷한 양의 모피를 공물로 바쳤지. 헌데 하사품이랍시고 받은 물품의 품질은 당신들과 거래했던 물품들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조악했고 물품의 양도 절반에 못 미쳤지. 물론 이전까지야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지만, 당신들과 거래한 직후였기에 더욱 비교될 수밖에 없었고.”
바로 그 점을 노리고 시베리아 원주민들과 거래했었기에 쿠나킨은 당시의 분위기를 대충 짐작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족장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거기에 부족원들은 당신들이 다음에 방문할 때 머스킷을 가져와 팔겠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공물 수거인이 돌아간 후 일제히 불만을 터트리며 러시아 차르국과의 관계를 끊고 공물로 바칠 모피로 당신들이 파는 머스킷을 사자고 한목소리로 외쳐댔고.”
작년에 쿠나킨이 이 마을을 떠나기 전까지 족장을 은근슬쩍 부추기긴 했지만, 그리고 러시아 차르국과의 관계를 끊고 자신들과 거래하는 것이 더욱 이득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부족의 앞날이 걸린 문제였기에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족장의 말에 쿠나킨은 내심 긴장하며 족장을 바라보았다.
“허면...”
“그렇소. 모든 부족원들과 논의한 끝에 더는 러시아 차르국에 공물을 바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소. 또한, 당신이 이전에 이야기한 대로 에벤 족, 알류트 족과 연합해 러시아 차르국의 위협을 물리치기로 했고.”
러시아 차르국에 독립하는 것을 넘어 그가 슬쩍 언급했었던 대로 주변 부족과 연합하겠다는 족장의 이야기에 쿠나킨은 반색했다.
“오. 그렇습니까? 그럼 저희가 중간에서 연결을...”
족장은 그런 쿠나킨의 반응에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는 없소.”
“예?”
“부족원들과 우리 부족의 앞날에 대해 의논한 직후 곧바로 내가 직접 알류트 족의 영역을 방문했었소.”
“족장님께서 직접 말입니까?”
쿠나킨이 놀란 표정으로 반문하자 족장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부족의 미래가 달렸는데 직접 움직여야 하지 않겠소. 헌데 알류트 족의 영역에는 이미 에벤 족의 족장들도 몇 와 있더구려. 그리고 그들은 당신들에게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인지 별다른 교류가 없음에도 나를 환영했고.”
쿠나킨은 알류트 족이나 에벤 족과 거래하면서 러시아 차르국에 맞서 주변 부족과 연합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슬쩍 언질을 주긴 했지만, 자신들이 개입하기도 전에 족장들이 만나 연합을 논의했다는 말에 새삼 이들의 추진력에 놀라며 급히 되물었다.
“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러 이야기를 나눈 끝에 우리 코랴크 족도 알류트 족, 에벤 족과 함께 연합하기로 했소. 그리고 러시아 차르국이 병사를 보낸다면 우리도 돕기로 약조했고.”
쿠나킨은 족장의 대답에서 북미왕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갔기에 반색하며 말했다.
“오! 족장님은 부족의 미래를 위해 올바른 결정을 내리신 겁니다.”
“그러길 바라오. 아무튼, 이러한 사실을 돌아와 부족원들에게도 알렸고...당신들이 머스킷을 가져온 이상 부족원들도 조만간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과 전투가 벌어질 것을 짐작했겠지요. 그래서 저렇게 술에 매달리는 거겠고.”
그러면서 족장은 술을 퍼마시는 부족원들을 둘러보다가 다시 술잔을 들이켰고 쿠나킨은 그런 족장을 바라보고 물었다.
“걱정되십니까?”
“분명 당신들 덕분에 많은 머스킷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러시아 차르국은 우리보다 머스킷에 능숙할 테니 어찌 걱정이 안 될 수 있겠소. 특히 우리가 연합해 반기를 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러시아 차르국과의 전투에서 패한다면 우리들은 저들의 노예가 되거나 모두 죽을 텐데 말이오.”
그런 족장의 말에 쿠나킨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훈련만이 살길이지요.”
“훈련?”
“예. 어차피 용병 중 일부는 배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 남아야 하니 용병에게 미리 이야기해두겠습니다. 이들에게 머스킷을 다루는 법이나 실제 전투에서 머스킷을 어떻게 운용해야 하는지 등을 배우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들이 고용한 용병은 무척 뛰어나 보였고 화약 무기에도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머스킷을 다루는 법이나 운용하는 법을 배운다면 분명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 족장이 감사의 뜻을 밝혔다.
“흐음...고맙구려.”
하지만 쿠나킨은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듯 덧붙였다.
“그리고 코랴크 족이나 에벤 족, 알류트 족이 러시아 차르국에 의해 망한다면 저희도 손해가 막심합니다. 머스킷 대금도 날리는 셈이고요. 그러니 저희들도 시베리아 부족 연합을 직접 돕겠습니다.”
“직접 돕겠다고?”
“예. 저희가 고용한 용병들은 화약 무기에 익숙한 만큼...이들을 일부 남겨두겠습니다. 물론 이들을 고용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저희가 감당하도록 하고요. 이들은 무척 뛰어난 전사들이니 러시아 차르국의 코사크인들을 상대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식량을 일부 지원하거나 머스킷 대금을 나눠서 갚도록 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신들을 도와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들은 간접적인 지원을 넘어 직접 자신들을 돕겠다고 이야기하니 족장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그게 정말이오?”
“물론입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몸속에도 코랴크 족의 피가 흐르는 만큼 절대로 러시아 차르국이 코랴크 족을 노예로 삼거나 학살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지원할 생각이니까요.”
쿠나킨이 자신만만하게 미소를 짓자 족장은 불안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정말 고맙소. 그리고 내 약속하리다. 우리가 저들을 물리친다면 당신들과만 거래하겠다고.”
“하하하. 예. 그거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