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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432화 (432/850)

432화

해가 바뀌었지만 아직 봄이 오지 않아 찬바람이 쌩쌩 부는 갑판 위에서 새치가 인상적인 노인은 외투를 부여잡으면서도 저 멀리 보이는 항구를 확인하고 감탄사를 토해냈다.

“호오.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새진주인가?”

“그렇습니다. 대사님.”

이 노인은 이번에 잉글랜드의 전권대사로 북미왕국에 파견된 인물이었기에 함장은 혹시라도 이 노인이 찬 바닷바람을 맞고 탈이라도 날까 걱정스러워 안절부절못하며 대사 옆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사는 날카로운 눈으로 새진주의 풍경을 관찰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인상적인 항구로군. 꽤 발달한 항구 도시이기도 하고.”

“예. 특히 기차가 등장한 이후 새진주의 발달이 더욱 빨라졌지요.”

대사는 함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각종 물자와 인력을 손쉽게 실어나를 수 있으니 당연한 결과겠지. 그보다...저게 그 유명한 새진주 시청이로군?”

다른 건물과는 달리 홀로 삐쭉하게 하늘로 뻗은 건물을 가리키며 대사가 질문하자 함장이 답했다.

“예. 이들은 관공서 건물이라고 부르더군요. 그리고 해가 질 때쯤에 저 건물이 빛을 발하는데 그게 참으로 장관입니다.”

“아...그 전기를 이용해 빛을 낸다는 전등이 건물에 설치되어 있는 건가?”

“정확히는 건물 안에 설치되어 있고 저 유리창으로 빛이 새어 나오는 건데...솔직히 볼 때마다 신기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요. 전등의 빛은 촛불과는 전혀 달라서 말입니다.”

대사는 함장의 대답을 듣고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관공서 건물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으음...이거 곧바로 기차를 타고 새한성으로 갈 예정이었는데...핑계를 대고 하루는 쉬어야겠군.”

“하하하. 그러는 것도 괜찮겠지요. 저 건물은 멋진 볼거리니까요. 물론 새한성의 야경 풍경도 대단하다고는 하는데...새한성에는 저런 고층 건물이 없으니...”

대사는 함장의 말에 의아한 기색으로 함장을 바라보았다.

“어? 그런가? 새한성은 북미왕국의 수도인데 저런 고층 건물이 없다고?”

물론 잉글랜드 외교 사절이 새한성을 방문했을 때야 저런 고층 건물이 없었다.

다만 저기 보이는 고층 건물도 고작 1년 만에 지은 만큼 새한성에는 더 많은 고층 건물이 있지 않을까 싶었던 대사였기에 묻자 함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북미 동해안의 다른 지역에는 저런 고층 건물을 건설 중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오는데...의외로 새한성에는 고층 건물을 건설한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이에 대사는 새한성에선 궁전보다 높은 건물을 짓는 것이 꺼려져서 그런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흐음...저 고층 건물에만 존재한다는 승강기를 한 번 타볼 생각이었는데...그럼 새한성에 가기 전에 저 새진주 시청을 방문해봐야겠군.”

* * *

대사는 새진주에 도착한 후 곧바로 목욕탕에서 바닷바람에 얼어붙었던 몸을 녹이고 북미왕국 외무청에 관공서 건물을 방문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대사가 새진주에 도착했을 때 이미 보고를 받았던 웅크린 늑대는 그 요청에 피식 웃고 대사를 외무청으로 초청했고.

말로만 듣던 유리 승강기를 타지는 못했지만, 작은 승강기 안에 들어갔다가 나오니 다른 층에 도착한 것은 인상적이었기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던 대사는 웅크린 늑대의 안내에 따라 응접실에 들어와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새삼 감탄했다.

“허어...이곳이 바로 소문의 응접실이군요.”

“예?”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웅크린 늑대가 어리둥절하자 대사는 바깥 풍경에 눈을 떼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

“이곳을 방문했던 잉글랜드 외교관이 쓴 보고서에 이곳 풍경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쓰여 있어 런던의 사교가에선 이 응접실이 꽤 유명합니다.”

“허. 그렇습니까? 풍경은 옥상의 풍경이 더 나을 텐데요. 개방감도 있고.”

이에 대사는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대신 옥상에서는 차를 못 마시잖습니까.”

“하하하. 그렇긴 하지요.”

속으로 유럽인들은 정말 차를 좋아한다고 생각한 웅크린 늑대는 웃으며 커피를 대접했다.

그리고 잡담을 나누며 서로를 탐색하던 둘은 동시에 커피잔을 내려놓았고.

이에 응접실은 침묵이 감돌았고 웅크린 늑대가 이 침묵을 깨뜨렸다.

“그보다 런던에서 바로 오셨으니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말씀하시지요.”

“혹시 아일랜드인 이주 문제에 대해 아직 논의 중인 겁니까?”

“아...어느 정도 결론이 났습니다만 세부적으로 귀국과 협상할 것이 있습니다만...”

대사는 웅크린 늑대를 바라보며 자신과 협상할 권한이 있느냐는 듯 바라보자 웅크린 늑대가 대답했다.

“그럼 저와 협상하시지요. 유럽 각국과의 협상에 대해선 저도 전권을 갖고 있으니까요.”

“아. 그렇습니까? 허면...우리 잉글랜드는 논의 끝에 귀국과의 우호를 위해 귀국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아무리 식민지의 백성이라 한들 이들이 이주하면 아일랜드의 일꾼이 사라지는 셈이라 처음부터 이렇게 긍정적으로 대답할 거라고는 예상 못 한 웅크린 늑대는 대사의 말에 반색했다.

“오. 그렇습니까?”

“다만...귀국은 아일랜드 지역에 땅을 가지고 있는 지주들을 위해 소정의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했지요?”

“그렇습니다만...”

이에 대사는 묘한 표정으로 웅크린 늑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귀국이 직접 아일랜드 지역의 지주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것보다는 우리 잉글랜드 정부가 이를 받아 지주들에게 지급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북미왕국이 잉글랜드와 협상해 아일랜드 땅에서 이주민을 모집한다 하더라도 아일랜드에 땅을 가진 지주들이 이주민 모집에 훼방을 놓으면 골치라 약간의 보상금을 제의한 건데 지금 대사의 이야기는 잉글랜드 정부에서 이 보상금까지 가져가겠다는 뜻이었으니 웅크린 늑대는 잠시 고민하다 어깨를 으쓱했다.

“뭐 지주들이 이주민 모집에 훼방만 놓지 않게 정리해주신다면야...”

웅크린 늑대의 답변에 대사는 씩 웃으며 약속했다.

“아. 물론 그 부분은 약속드리겠습니다.”

“그럼 상관없겠지요.”

“그리고...”

대사는 그 후로도 잉글랜드의 이득을 위해 웅크린 늑대와 협상을 벌였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대사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커피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중얼거렸다.

“예. 이 정도면 괜찮겠군요.”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이득을 얻기 위해 집요하게 달려든 대사를 상대하느라 왠지 모르게 지친 웅크린 늑대는 대사의 대답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그럼 이대로 협정문을 작성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시지요.”

그렇게 웅크린 늑대가 종이에 협정문을 적는 사이 해가 슬슬 지고 있었기에 웅크린 늑대는 자리에서 일어나 전등을 켰고.

“오! 저게 그...”

대사가 천장에 달린 전등을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웅크린 늑대가 곧바로 경고했다.

“예. 전등입니다만 계속 응시하지는 마시지요. 눈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그 말에도 대사는 전등을 어떻게든 바라보려 애를 쓰며 중얼거렸다.

“아...이야기는 들었지만...촛불과는 차원이 다른 밝기군요.”

“예. 조금 밝은 편이지요. 자. 읽어보시지요.”

웅크린 늑대가 협정문의 초안을 작성해 대사에게 건네자 대사는 이를 받아들었지만 잘 보이지 않는 탓에 당황했다.

이에 웅크린 늑대는 한숨을 내쉬며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 질 거라고 달랬고 잠시 후 글자가 잘 보이자 대사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웅크린 늑대를 보고 웃고 협정문 초안을 살펴보았다.

“흐음...좋습니다. 따로 수정할 것은 없어 보입니다. 이대로 협정을 맺도록 하지요.”

그러면서 웅크린 늑대에게 펜을 받아 협정문 끝부분에 서명했고.

웅크린 늑대도 협정문에 서명하자 대사가 입을 열었다.

“이것으로 협정은 체결되었으니 바로 본국에 이 협정문을 보내야겠군요.”

“그러시지요.”

“그리고...한가지 더 논의할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이전에 귀국은 신식 소총을 판매할 수 있다고 하셨지요?”

이에 웅크린 늑대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사를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만...귀국은 신식 소총 수입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까?”

“뭐 이젠 나름의 여유가 생겼으니 감당할 수 있겠지요.”

방금 맺은 협정을 떠올린 웅크린 늑대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흠...알겠습니다. 이전처럼 5천 자루의 신식 소총을 수입하겠다는 뜻이지요?”

“그렇습니다.”

이전에도 신식 소총의 수입 문제로 협상을 어느 정도 해두었기에 웅크린 늑대는 자리에서 일어나 새로운 종이를 하나 더 가져오며 말했다.

“그럼 바로 계약서를 작성하도록 하지요. 아. 다만 신식 소총의 인도 시기는 빨라야 내년쯤이 될 것 같습니다만...”

“그렇게 오래 걸립니까? 북미왕국이라면 어느 정도 비축해둔 물량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말입니다.”

대사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웅크린 늑대가 펜을 놀리면서 말했다.

“아. 있기는 있는데...이 물량은 다른 곳에 이미 팔린 터라 새로 만들어야 해서요.”

그 말에 대사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급히 되물었다.

“타국이 신식 소총을 산 겁니까? 설마 에스파냐가?”

이에 웅크린 늑대는 심드렁한 반응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타국과의 거래를 제가 귀하께 시시콜콜 이야기할 수야 없는 노릇이지요.”

“하지만...”

대사가 무어라 말하려 할 때 웅크린 늑대가 슬쩍 웃으며 말했다.

“다만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군요. 유럽 국가 중에서는 귀국과 처음으로 신식 소총을 거래하는 거라고.”

내심 당황했던 대사는 그 말에 진정할 수 있었다.

대사도 북미왕국과 조선의 관계를 알고 있었기에 저 대답은 조선에 판매했다는 뜻이라는 것을 파악한 것이다.

“아...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 * *

“새한성에 상주할 잉글랜드의 대사가 새진주에 도착했다고?”

저번 달에 이미 에스파냐 대사가 새한성에 도착한 상황에서 잉글랜드 대사가 북미왕국에 도착했다는 이야기에 미소를 짓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웅크린 늑대의 말론 예전 뉴욕 식민지의 총독이기도 했었답니다.”

“그래?”

“예. 그리고 잉글랜드가 북미 동해안 지역을 우리 북미왕국에 넘긴 후로는 본토에 돌아가 근무하다 이번에 찰스 2세에게 전권대사로 임명되어 이렇게 북미왕국으로 왔다고 하더군요.”

“그럼 정보가 아예 없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 말에 조용한 곰이 대답했다.

“예. 정보기관에서 곧바로 뉴욕 지역에 사람을 급파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조만간 잉글랜드의 대사가 어떤 인물인지는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다만...웅크린 늑대가 잠깐 만나본 바론 의외로 깐깐하고 만만한 인물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그래?”

웅크린 늑대는 나름 잔뼈가 굵은 협상의 대가였는데 이 웅크린 늑대가 깐깐하고 만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평했을 정도면 나름 능력 있는 인물이라고 판단한 정성국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짓자 조용한 곰이 대답했다.

“예. 이번에 아일랜드인 이주 문제를 협상했는데 그런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고 하더군요.”

“응? 아일랜드인 이주 문제?”

“예. 처음 만난 자리에서 웅크린 늑대가 전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후 곧바로 협상에 돌입해 협상을 끝냈다고 하더군요.”

“허...그래?”

정성국은 이 협상이 꽤 지체될 거로 생각했는데 벌써 협상이 끝났다는 말에 당황하자 조용한 곰이 말했다.

“웅크린 늑대의 말로는 저들은 아일랜드인이 이주하면서 얻게 될 이득에 집중했다고 하더군요. 이주민 100명마다 잉글랜드에 소정의 보상금을 지급한다던가, 아일랜드 지역에 임대할 땅의 임대료라던가, 석탄 공급 가격에 대해 꽤 치열하게 협상한 모양이더군요.”

그러면서 조용한 곰이 웅크린 늑대와 잉글랜드 대사간의 협상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자 정성국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중얼거렸다.

“찰스 2세는 아일랜드의 국왕도 겸임하고 있지 않나? 헌데 대놓고 자국의 백성을 팔겠다고?”

“종교가 다른 골칫덩어리 백성이니까요. 어느 정도 수가 줄어야 통치가 수월하겠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쩝...종교가 뭔지. 그래도 우리 입장에선 나쁠 것은 없겠네.”

정성국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나쁠 것 없다는 듯 히죽 웃자 조용한 곰이 따라 웃었다.

“그렇지요. 특히 잉글랜드는 신식 소총 구매 의사를 밝혔답니다.”

“허. 아일랜드인과 총알을 교환하겠다?”

정성국이 혀를 찼지만 조용한 곰은 씩 웃으며 덧붙였다.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총알 가격을 꽤 비싸게 책정한 터라 결과적으로는 별다른 지출 없이 아일랜드인을 데려올 수 있게 되었고요.”

그나마 조선의 경우 사정을 뻔히 알았기에 나름 싸게 판매했지만, 잉글랜드의 경우는 굳이 사정을 봐줄 이유가 없었기에 총알 가격을 비싸게 책정했었다.

그렇기에 결국 아일랜드인을 데려오기 위해 잉글랜드에 어느 정도 돈을 주더라도 손해가 없다는 말에 정성국은 대소했다.

“하하하. 그게 괜찮네. 헌데 이렇게 빠르게 아일랜드인의 이주가 결정될 줄은 몰라서...조금 애매한데?”

“일단 아일랜드 서쪽의 리머릭이라는 항구 외곽의 땅을 임대하기로 했으니 이곳에 선착장을 비롯해 숙소, 목욕탕 등의 시설을 건설하는데 시간이 꽤 걸릴 것으로 생각되니 상관은 없을 것 같습니다.”

“아. 그럼 개발청에 이야기해서 준비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이 잠시 고민하며 손가락으로 탁자를 툭툭 치다가 다시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슬쩍 에스파냐에 잉글랜드가 신식 소총을 구입했다는 사실을 흘리게.”

“에스파냐에도 신식 소총을 판매하실 생각이십니까?”

이에 정성국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잉글랜드에 신식 소총을 판매한 이상 에스파냐에도 못 팔 것은 없지. 그리고 나중에 에스파냐가 이를 알고 투덜거릴 것이 뻔하니...미리 이야기를 흘리란 걸세.”

그 말에 조용한 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요.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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