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6화
시베리아 지역에 러시아 차르국이 세운 야쿠츠크 요새의 사령관은 동쪽으로 떠났던 공물 수거인이 도착했다는 보고에 가뜩이나 지루한 차였기에 곧바로 집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요새 안쪽으로 들어오는 짐을 실은 말들의 행렬을 지켜보다가 무언가 이상한 듯 행렬을 다시 살펴보고 고개를 갸웃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공물 수거인은 일꾼들에게 이런저런 명령을 내리다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야쿠츠크 요새의 사령관을 확인하고 인사했다.
“아. 나오셨습니까? 사령관님.”
이에 사령관은 대충 손을 흔들고 나서 곧바로 공물 수거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 헌데 무슨 일이 있었나?”
“예? 갑자기 그게 무슨...”
공물 수거인이 뜬금없이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사령관을 바라보자 사령관은 손을 들고 말 위에 올려진 짐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평소보다 말에 실린 짐의 크기가 작은 것 같아서 말일세. 혹시 습격을 당해 짐을 일부 잃었다던가...”
“아. 아닙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공물 수거인의 말에 사령관은 안색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럼 이번에 원주민들에게 수거한 공물이 저게 전부라고?”
“그렇습니다.”
“아니. 작년에 비해 모피의 양이 확연히 적은 것 같은데?”
그 지적에 공물 수거인은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원주민들의 이야기론 사냥감의 수가 확연히 줄어들었다더군요.”
이에 사령관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 사냥감이 줄어들었다고?”
“일단 원주민들은 그렇게 이야기하더군요.”
“그...그럼 제일 중요한 검은담비의 모피는?”
이 시베리아 지역에서 얻을 수 있는 모피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바로 검은담비의 모피였다.
그리고 다른 지역의 경우 점차 검은담비 모피의 산출량이 줄어들었지만, 이 공물 수거인이 다녀온 동쪽 지역은 아직도 많은 편이었기에 설마 하는 표정으로 사령관이 급히 질문을 던지자 공물 수거인은 사령관의 눈빛을 슬쩍 피하며 대답했다.
“그것도 작년에 비하면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갑자기 작년보다 모든 모피가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는 이야기에 사령관은 자신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런 빌어먹을...혹시 그 미개한 원주민놈들이 모피를 빼돌린 것 아닌가?”
물론 모피 산출량이 줄어들 수는 있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모피를 얻기 위해 동물을 사냥했으니 동물의 수가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은 사령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우 서서히 모피 산출량이 줄어들었지 이렇게 갑자기 줄어든 경우는 없었기에 사령관이 원주민들을 의심하자 공물 수거인은 회의적인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모피를 빼돌려 어디다 쓰겠습니까. 다른 지역이라면 모를까 제가 방문하는 지역들은 무척 미개한 곳이라 제대로 된 물품을 구하기도 어려운데요. 그래서 처음엔 반항하던 에벤 족이나 알류트 족도 지금은 하사품을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해 공물의 양을 늘리고 있지 않았습니까.”
“으음...”
“그리고 제가 방문했을 때도 원주민 대다수는 사냥감을 찾기 위해 주변을 수색하느라 정신이 없었고요. 또, 저희가 떠나기 직전까지 어떻게든 모피를 얻어 공물로 바치고 더 많은 하사품을 얻기 위해 노력했고요. 그것을 보면 원주민들이 모피를 빼돌렸다기보다는 계속되는 사냥으로 동물의 수가 줄어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원주민들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공물 수거인의 방문한다는 것을 알자마자 북미왕국 상인들에게 산 물건들은 러시아인의 눈에 띄지 않게 다 숨겨두었기에, 그리고 공물 수거인은 코랴크 부족 남쪽의 카무이 반도가 북미왕국의 영토라는 사실을 모르기에 그저 다른 지역처럼 계속된 사냥으로 동물의 수가 줄어든 것으로 판단했다.
“젠장...벌써 말인가?”
직접 이 지역을 다녀온 공물 수거인의 말에 사령관은 탄식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별수 없군. 거래 조건을 조정해야겠어.”
그 말에 공물 수거인이 안색을 흐리며 물었다.
“하사품의 양을 줄이란 말씀입니까?”
“그렇지.”
사령관의 대답에 공물 수거인은 걱정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그러면 원주민들의 불만이 클 텐데요?”
하지만 사령관은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불만이야 있겠지만 감히 우리에게 덤비지는 못하겠지.”
“그렇기야...하지요.”
“그리고 모피의 양이 확연히 줄어든 이상, 지금처럼 이득을 내기 위해선 원주민들에게 사들이는 모피의 가격을 낮출 수밖에 없잖나. 그리고 모피의 가격이 낮아진 만큼 더 많은 원주민이 모피를 구하기 위해 애를 쓸 테고.”
“으음...”
모피는 러시아 차르국의 주요한 수입원 중 하나였고 그렇기에 사령관의 조치를 이해할 수는 있었다.
다만 일방적으로 하사품의 양을 줄이면 원주민들이 반발할 것이 뻔했고 감히 원주민들이 덤비지는 않겠지만 이들을 직접 상대해야 하는 공물 수거인은 상황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사령관은 그런 공물 수거인의 기색을 눈치채고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말게. 다음번 공물 수거 때는 더 많은 코사크인을 붙여주겠네. 그러면 불만이 있더라도 감히 자네에게 덤비지는 못할 거야.”
예전 일을 기억하는 원주민들은 아직도 코사크인들을 두려워하는 만큼 사령관의 말에 공물 수거인은 안도했다.
“아. 그렇다면야...알겠습니다.”
“그리고 내년에는 좀 일찍 출발하게. 코사크인들을 동원하는 김에 새로운 지역의 탐사도 함께 진행해야 할 테니.”
그 말에 공물 수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모피의 양이 줄어들었으니 아직 진출하지 않은 새로운 지역을 탐사해서 모피 수급을 원활하게 하실 생각이시군요?”
“그렇지. 그리고 새롭게 진출한 지역의 원주민들이 모피를 공물로 바치는 것을 거부한다면 동원한 코사크인들로 본때를 보여주면 될 테고.”
기왕 많은 코사크인을 동원한 김에 여러 이득을 챙기겠다는 사령관의 말에 공물 수거인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요. 알겠습니다.”
* * *
잉글랜드의 국왕인 찰스 2세는 보좌관의 보고에 반색하며 되물었다.
“오. 그래? 결국, 협정을 체결했다고?”
“그렇습니다. 해서 아마도 올해가 가기 전에 북미왕국의 대사가 런던에 도착할 겁니다.”
“이로써 북미왕국과는 우호가 더욱 돈독해지겠군.”
찰스 2세의 대답에 보좌관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그렇지요. 그리고 대사를 비롯해 꽤 많은 인원이 북미왕국에 상주하는 만큼 저들의 사정도 더욱 자세히 파악할 수 있겠고요. 더불어 북미왕국 연구청 소속의 연구원들을 회유할 수만 있다면...”
새진주를 방문해 가져오는 북미신문을 통해 북미왕국이 계속해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며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잉글랜드는 학자들을 독려하고는 있었지만, 아직도 증기기관은 별다른 진척이 없었고 최근 북미왕국이 유용하게 사용하는 전기를 만들어내는 물질이 무엇인지도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이번 협정을 통해 새한성에 외교관을 상주시키면서 북미왕국 기술 발전의 핵심인 연구청 소속의 연구원들에게 접촉해 북미왕국이 자랑하는 여러 기술을 얻을 기회라고 생각해 보좌관이 흥분한 표정을 짓자 찰스 2세가 우려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좋겠지. 하지만 절대로 무리하지는 말도록 하게. 저들이 기술 유출에 예민한 것은 이미 보고받지 않았나.”
그런 찰스 2세의 반응에 보좌관이 순간 멈칫했다.
“음...그렇긴 하군요. 예전 새한성을 방문했던 사절단도 중요한 공방이나 연구소는 근처에도 가지 못할 정도였었으니...”
새한성 방문 당시 이들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북미왕국의 기술 발전이 연구청의 존재 때문이라고 판단해 이곳을 방문하고 싶어했지만 북미왕국은 국가의 기밀이라는 이유로 절대 불가를 외쳤고 연구청이나 중요한 공방 근처에만 접근해도 병사들이 나서서 접근을 막았었다.
그렇기에 보좌관은 이것이 기회이기는 하지만 잘못하면 문제가 커질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며 중얼거리자 찰스 2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서 하는 말이야. 걸리지 않고 기술을 훔쳐올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 하지만 그게 불가능할 것 같으면 아예 시도하지도 말라고 하게. 만약 연구원들을 회유하다가 걸리기라도 하면...북미왕국의 분노를 감당하기는 쉽지 않을 테니.”
그나마 외교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잘못하면 북미왕국과 무력 충돌이 벌어질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잉글랜드는 이를 감당하긴 어려웠다.
이를 잘 아는 찰스 2세가 당부하자 보좌관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보좌관의 대답에 찰스 2세가 안심하면서도 북미왕국에 파견할 대사는 신중하고 북미왕국의 국력을 잘 아는 사람으로 정하고 이 부분을 다시 한번 당부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보좌관이 말했다.
“아. 그리고 보고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뭔가?”
“북미왕국이 아일랜드 지역에서 이주민을 모집하길 원한다고 하더군요.”
그 말에 찰스 2세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음? 아일랜드인을?”
“그렇습니다.”
이에 찰스 2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중얼거렸다.
“뭐 북미왕국의 인구가 적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니 유럽에서 이주민을 모집하려는 것도 이해할 수야 있는데...지금도 꽤 많은 프랑스인이 북미왕국으로 이주 중이지 않나?”
“그렇습니다. 이주 허가증이 있으면 북미왕국으로 이주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프랑스인, 그중에서도 주로 위그노들이 이 이주 허가증을 구해 북미왕국으로 이주하는 중이지요.”
그러면서 일부는 이주 허가증 없이 일단 플리머스 지역으로 와서 어떻게든 어선에 타려다 실패하고 플리머스에 눌러앉는 일도 있다고 덧붙이자 찰스 2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헌데 여기서 이주민을 더 받겠다고?”
“그렇습니다. 제가 확인해본 결과 지금까지 못해도 십만 명에 가까운 위그노들이 북미왕국으로 이주했지만, 그래도 턱없이 일손이 부족한 모양입니다.”
찰스 2세는 보좌관의 대답에 고개를 저었다.
“뭐 워낙 넓은 땅이고 원주민의 수가 적으니 이해는 하지만...그렇게 단기간에 이주민을 대거 받아들이면 치안이 엉망이 될 텐데...”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겠지요. 그리고 북미 동해안 지역에는 꽤 많은 병력이 배치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고요.”
어차피 북미왕국의 치안이 악화되든 말든 잉글랜드와는 별다른 상관이 없었기에 찰스 2세는 그 부분은 신경 쓰지 않고 다른 부분에 집중했다.
“그런가? 그보다 잉글랜드가 아니라 아일랜드 지역에서 이주민을 모집하고 싶다? 이거 북미왕국이 아일랜드 지역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아는 모양이군.”
“뭐 에스파냐 놈들이 자세히 설명했겠지요. 그들도 아일랜드 지역의 사정을 어느 정도는 알 테니까요.”
“흐음...”
이에 찰스 2세는 고개를 끄덕이고 북미왕국의 이 요청을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보좌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북미왕국에선 저희가 이 제안을 허락하면 일부 인원을 아일랜드 지역에 파견하고 이주민을 데려가기 위해 직접 수송선까지 보내겠다고 합니다.”
보좌관의 설명에 찰스 2세는 생각을 멈추고 조금 놀랍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허. 그래? 위그노들의 이주는 그렇게 세심하게 챙기지 않더니만...”
“그만큼 북미왕국의 인구 부족 문제가 심각하다는 뜻이겠지요. 그리고 위그노들의 이주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면 프랑스를 자극할 우려도 있었지만, 아일랜드인의 이주 문제는 공식적으로 진행되는 문제니 그런 것 같습니다.”
“흠...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찰스 2세가 보좌관의 생각을 묻자 보좌관은 미리 이 질문을 예상이라도 한 듯 곧바로 대답했다.
“저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어차피 고향을 떠날 아일랜드인들은 독실한 가톨릭교도들일 텐데...우리 잉글랜드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는 아일랜드인들이 북미왕국으로 이주한다면 아일랜드의 통치는 더욱 수월해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더불어 이를 허락함으로써 짭짤한 이득도 얻을 수 있고요.”
“이득이라고?”
찰스 2세가 호기심을 보이자 보좌관이 미소를 지었다.
“일단 아일랜드 지역에서 이주민을 모집하면 소작농으로 일할 아일랜드인이 줄어드는 셈이라 잉글랜드 지주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명목으로 소정의 보상금을 받기로 했습니다.”
“호오. 그래?”
“예. 거기에 아시다시피 북미왕국은 개인위생과 청결을 무척 중요시하잖습니까. 그래서인지 아일랜드 지역에서 이주민을 모집해 그냥 배에 태우는 것이 아니라 새진주의 외국인 거주구역처럼 따로 조그마한 격리구역을 만들고 그곳에서 이주민을 깨끗이 씻긴 후에 데려갈 모양입니다.”
“허...그렇게까지 한다고?”
보좌관의 설명에 찰스 2세는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지만, 보좌관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극성이지만...우리로선 땅을 조금 내어주고 임대료를 받을 수 있으니 나쁠 것 없지요.”
“아!”
“거기에 다른 물품은 몰라도 이곳에서 사용할 석탄은 우리가 보급하기로 했고 여기서도 쏠쏠하게 이득을 챙길 수 있을 것 같고요.”
그 외에도 보좌관은 북미왕국의 제안을 쭉 설명했고 이를 다 듣고 찰스 2세는 보좌관의 말처럼 꽤 여러 이득을 챙길 수 있을 것 같다는 판단에 안색이 밝아졌다.
“이렇게 북미왕국에서는 우리가 이 제안을 허락하면 간접적으로나마 이득을 얻을 수 있게 해두었습니다. 그러니 이를 허락하고...이 기회에 후장식 소총을 구매하는 것도 괜찮아 보입니다.”
처음 북미왕국의 후장식 소총의 존재를 알게 된 후 잉글랜드는 후장식 소총의 구매를 타진했지만, 생각보다 유지비가 많이 들고 후장식 소총의 존재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기에 결국 포기했었다.
하지만 북미왕국의 총기 기술이 계속 발전해 회전 단총까지 선보이자 찰스 2세는 이대로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후장식 소총을 구매하기로 하고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일부 상인들과 협상 중이었고.
그렇기에 찰스 2세는 보좌관의 이야기에 고심하다 결정을 내렸다.
“흐음...그래. 그게 좋겠군. 유지비가 생각보다 많이 나와서 상인들과 협상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정도면 유지비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겠군.”
“그렇지요.”
“알겠네. 그럼...어차피 북미왕국으로 대사를 파견해야 하니 대사에게 이 문제를 맡기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