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3화
카무이 반도 북쪽의 코랴크 족 족장은 저 멀리서 다가오는 상단 행렬을 살펴보고 별다른 일은 없어 보였기에 안도하며 상단 행렬로 다가갔다.
이에 행렬 중간에 있던 쿠나킨이 족장을 보고 행렬에서 나와 말에서 내려 족장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족장님.”
“오. 오셨구려. 보아하니 별일은 없었던 모양이오?”
“예. 붙여주신 길잡이들 덕분에 별다른 충돌 없이 알류트 족, 예벤 족과 접촉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의 거래로 꽤 많은 모피를 챙길 수 있었고요. 정말 감사합니다.”
쿠나킨이 비교적 밝은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족장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자 족장은 이들이 이곳에서 모피 거래로 이득을 본 만큼 계속해서 이곳을 방문할 것으로 생각해 활짝 웃었다.
“하하하. 그거 다행이오. 북쪽으로 떠난 상인들도 일주일 전에 복귀했는데 당신네는 아직까지 별다른 소식이 없어 조금 걱정했는데 말이오.”
“오. 북쪽으로 떠난 상인들이 이미 복귀했다고요?”
“그렇소. 그들도 괜찮은 거래를 했다고 좋아하더이다.”
“그래요? 그거 다행이군요.”
그렇게 쿠나킨은 족장과 대화하며 발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바다가 허전하다는 것을 느끼고 북미왕국의 배를 찾기 위해 바다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저 멀리 정박해있는 북미왕국의 배를 확인하고 중얼거렸다.
“어? 선착장이 생각보다 멀리 떨어져 있군요.”
“이곳은 수심이 얕아 큰 배가 정박하기 좋지 않다면서 저곳에 선착장을 건설하더이다.”
선착장과 코랴크 부족의 마을이 꽤 떨어져 있어 선착장을 이용하는 것이 조금 불편할 것 같아 족장이 아쉬운 듯 설명했다.
“아. 그렇습니까? 그래도 선착장과 창고를 다 건설하긴 한 모양이군요.”
“물론 배가 크기에 짐작은 했지만, 내 짐작보다 선원들이 많더구려. 그리고 그 많은 선원이 일제히 달라붙고 우리 부족의 청년들이 합세하니 순식간에 선착장과 창고가 건설되었소이다.”
“그래요? 흠. 그럼 바로 떠나도 되겠군요.”
쿠나킨의 중얼거림을 듣고 족장이 놀란 표정으로 쿠나킨을 바라보고 반문했다.
“바로 떠난다고요?”
“예. 의외로 알류트 족과 에벤 족도 머스킷을 원하는 지라...생각보다 많은 머스킷과 화약을 구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듯하니 빠르게 복귀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요.”
이에 족장은 눈빛이 깊어지며 쿠나킨을 바라보았다.
“...알류트 족과 에벤 족이 머스킷을 원한다고요?”
그런 족장의 반응을 모른척하며 쿠나킨이 말했다.
“예. 그것도 꽤 대량으로 원하더군요. 그러니 머스킷과 화약을 구하려면 고생 좀 해야 할 듯싶군요.”
“흐음...그럼 그들도...”
족장은 꽤 생각이 많은 얼굴을 하면서 선착장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쿠나킨은 그런 족장을 보고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족장님께서 저희에게 머스킷을 구매하는 목적이 주변 부족을 정복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이오.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막기 위해선 힘이 필요하고 그 때문에 머스킷을 구하려는 것이지.”
족장의 대답에 쿠나킨은 눈을 빛내며 곧바로 말을 이어나갔다.
“예. 헌데 다른 부족들도 마찬가지로 외부의 위협 때문에 머스킷을 구하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이들과 연합해 외부의 위협을 막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이야기를 들어보니 외부의 위협이라는 것이 러시아 차르국에 고용된 코사크인들인 것 같던데 말입니다.”
“으음...”
“그리고 전에 머스킷을 선물하면서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이 머스킷이라는 것은 모일수록 단점을 보완할 수 있어서 말입니다.”
쿠나킨이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족장은 쿠나킨을 바라보고 말했다.
“...어째 당신은 우리가 연합하길 바라는 모양이구려?”
쿠나킨이 상행을 떠나기 전만 하더라도 이들이 머스킷을 가져온다면 바로 러시아 차르국과의 관계를 끊을 생각이었던 족장이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자 걱정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해서 일단 머스킷은 구해 놓고 앞으로의 행동을 결정할 생각이었는데 서쪽에 있는 에벤 족과 알류트 족도 머스킷을 구한다는 이야기에 족장은 직감했다.
에벤 족과 알류트 족은 머스킷을 받는 즉시 러시아 차르국에 반기를 들 거라고.
자신들과 다르게 이들은 러시아 차르국에 원한이 있긴 했으니까.
해서 족장은 이들이 반기를 들 때 함께 움직여야 하는지, 아니면 러시아 차르국과 서쪽의 부족들이 싸우는 것을 한 발자국 물러나 관망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는데 쿠나킨은 서쪽의 에벤 족, 알류트 족이 반기를 들 때 함께 움직여야 한다고 이야기하자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답을 달라는 듯 쿠나킨을 바라보았다.
이에 쿠나킨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의견을 밝히기 시작했다.
“흠. 이건 단순히 제 견해인데 그러는 편이 이곳 원주민들에게 나을 것 같아서요.”
“으음...”
코랴크 족만 생각하면 오히려 관망하는 것이 부족의 피해를 줄이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족장이 미간을 좁히자 쿠나킨은 급히 설명했다.
“물론 저희가 다음에 가져올 머스킷으로 무장해 자체적으로 러시아 차르국의 세력을 몰아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이곳 원주민들이 러시아 차르국과의 조공 관계를 끊는다면 러시아 차르국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동안 이곳에서 나오는 모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던 왕실과 상인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어요. 거기에 원주민들에게 약세를 보인다면 이를 지켜본 주변의 다른 원주민들도 독립하려 들 테니 분명 더 많은 코사크인을 고용해 이곳으로 보내겠지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족장은 쿠나킨의 이야기에 수긍했다.
족장이 걱정했던 것도 바로 그 부분이었으니까.
“헌데 부족별로 코사크인들과 맞서게 되면 아무래도 피해가 클 겁니다. 아. 물론 서쪽의 에벤 족이나 알류트 족이 코사크인들을 물리치면야 이곳의 코랴크 족은 아무런 피해 없이 외부의 위협이 사라지는 격이니 좋겠지요. 하지만 에벤 족이나 알류트 족이 버티지 못하고 코사크인들에게 굴복한다면...코랴크 족은 두 부족을 박살 내고 기세등등한 코사크인들을 상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에벤 족과 알류트 족이 굴복한 후이니 코랴크 족을 도와줄 주변 부족도 없지요.”
그 말에 족장은 발걸음을 멈추고 심각한 표정으로 쿠나킨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그 전에 연합해서 함께 싸우란 말인가?”
“아무래도 그게 낫지 않겠습니까?”
“흐음...무슨 말인지는 알겠소. 다만 부족의 앞날이 달린 문제이니 바로 결정할 문제는 아니구려.”
족장의 말에 쿠나킨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 * *
쿠나킨은 카무이 항에 도착한 후 곧바로 배를 갈아타고 아이누 섬의 포로나이로 향했다.
그리고 포로나이 도착하자마자 투로시노를 만나기 위해 외무청 건물로 향했고.
“오랜만에 뵙습니다. 투로시노 님.”
이번 시베리아행에 떠나기에 앞서 쿠나킨은 투로시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나름 친분을 쌓았기에 투로시노는 쿠나킨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
“오. 잘 다녀왔나?”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쿠나킨은 투로시노가 건네준 커피를 마시면서 이번 시베리아행의 성과를 보고하고 아이누 탐사대가 대략적으로 그린 시베리아 내륙 지도를 건넸다.
투로시노는 이 지도를 받아들고 살피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 시베리아 원주민들과 우호적으로 접촉했다고?”
“그렇습니다. 처음엔 조금 경계했습니다만 양질의 물품을 값싸게 넘기니 그 경계도 풀리더군요. 그리고 족장들에겐 가져간 머스킷을 선물로 내어주니 예상대로 더 많은 머스킷을 구하고자 했고요.”
이에 투로시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쿠나킨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들이 머스킷을 구하는 목적은 역시 러시아 차르국이겠지?”
“축치 족을 제외하면 그런 것 같습니다.”
“아. 축치 족은 아직 러시아 차르국과 접촉하지 않았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다만 축치 족도 어렴풋이 러시아 차르국의 존재를 알고 있는 터라 혹시나 해서 머스킷을 원하더군요. 그리고 생각외로 축치 족의 규모가 큰 편이라 다음에는 육로가 아닌 해로를 통해 축치 족과 직접 교역하는 것이 나아 보입니다.”
그 말에 투로시노는 쿠나킨이 건네준 지도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곳은 3함대가 탐사한 알래스카 해 서쪽 해안가이니...괜히 육지로 힘들게 물자를 운반할 바에야 자네 말대로 하는 게 낫겠군.”
그렇게 축치 족의 이야기를 끝낸 쿠나킨은 자신이 직접 방문했던 에벤 족과 알류트 족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 에벤 족과 알류트 족 모두 러시아 차르국과 마찰이 있긴 했단 소리지?”
“그렇습니다. 솔직히 하사품 수준이 별로라 손해 보는 거래나 다름없으니까요. 다만 에벤 족과는 다르게 알류트 족은 더 혹독하게 당했고 전염병까지 돌았기에 피해가 꽤 크더군요. 그렇기에 원한도 더 강했고. 그런 만큼 머스킷만 쥐여주면 곧바로 봉기할 태세였습니다.”
이는 북미왕국에서도 바라는 바였기에 투로시노는 슬쩍 미소를 지으면서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래? 그럼 코랴크 족은?”
“코랴크 족은 러시아 차르국에 큰 원한은 없어 보였습니다. 다만 코랴크 족에도 전염병이 돌았는데 이 전염병의 원인이 러시아 차르국에 있다는 사실과 계속해서 러시아 차르국에 조공을 바치고 하사품을 받는 것보다야 저희와 거래하는 것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러시아 차르국과의 관계를 끊을 생각인 듯하고요.”
쿠나킨의 대답에 투로시노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허. 한 번의 접촉으로 원하는 것은 다 얻어내다니. 정말 수고했네.”
쿠나킨은 그런 투로시노의 칭찬이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아닙니다. 아. 그리고 이들과 거래하면서 추장들에게 은근슬쩍 주변 부족과 연합하라고 슬쩍 이야기해두었습니다.”
원래 주변 부족과는 우호적으로 지내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척박한 지역일수록 더 많은 자원을 두고 다투는 일이 잦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해서 북미왕국에선 시베리아 원주민들과 좋은 조건으로 거래를 해서 이들에게 신임을 얻고 이들에게 머스킷을 싼값에 넘겨 이들이 러시아 차르국에 맞서면 그때 개입해서 시베리아 원주민 연합을 구성할 계획이었다.
헌데 쿠나킨은 원주민들의 반응을 보고 미리 연합하라고 이야기했다니 투로시노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급히 질문을 던졌다.
“어? 그래? 저들의 반응은?”
이에 쿠나킨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나쁘지 않습니다. 축치 족은 논외로 하더라도 가장 후방에 위치한 코랴크 족의 족장도 연합에 꽤 관심을 보이기도 했고요.”
그 말에 투로시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중얼거렸다.
“흠. 그럼 아이누 탐사대의 지원 규모를 늘릴 필요는 없으려나...?”
북미왕국은 시베리아 원주민들을 선동해놓고 뒤로 쏙 빠질 생각은 없었다.
북미왕국은 이번 기회에 시베리아 원주민들을 독립시킬 생각이었고 가뜩이나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인구가 적은 만큼 러시아 차르국과 싸우면서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것을 두고 볼 생각이 없었고.
다만 너무 개입하면 이들이 북미왕국에 의존할 수 있었고 이들이 스스로 러시아 차르국을 물리치는 것도 중요했기에 일단 200명 정도의 아이누 탐사대원을 용병으로 파견하고 상황을 봐서 추가로 지원할 생각이었다.
다만 쿠나킨이 접촉한 세 부족이 모두 러시아 차르국과 맞설 생각이고 이들이 연합까지 할 생각이라면 추가로 지원할 필요는 없겠다 싶어 투로시노가 이야기하자 쿠나킨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특히 에벤 족과 알류트 족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코사크인들의 수가 많지도 않습니다. 기껏해야 500명 남짓이었다고 하니. 거기에 시베리아 원주민들도 머스킷으로 무장할 것을 생각하면 지원 규모를 늘릴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직접 이 지역을 다녀온 쿠나킨의 이야기에 투로시노는 결정을 내렸다.
“그럼 시베리아 원주민들이 아직 화약 무기에 익숙하지 않은 만큼 일종의 교관 역할로 보내면 되겠군. 그리고 만약의 경우에만 개입하면 될 테고.”
“헌데 이번에 접촉한 부족이 꽤 많은지라 생각보다 많은 머스킷이 필요할 것 같은데...머스킷을 구할 수 있을까요?”
쿠나킨이 조금 걱정스럽다는 듯 이야기하자 투로시노가 그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필요할 것 같나?”
“일단 못해도 부족별로 최소 1천 자루씩은 내어줘야 할 것 같습니다만...”
이에 투로시노는 큰 문제가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다.
왜란 이후 조선은 꾸준히 조총의 생산량을 늘렸기에 조선이 비축하고 있던 조총의 수가 투로시노의 예상보다도 무척 많은 것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4천 자루? 그 정도면 충분해. 조선에서 일단 자신들이 보유한 조총을 내어주기로 했으니까. 물론 보유한 조총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다시 확인하고 손질한 후에 내어주기로 한 만큼 시간이 조금 걸리기는 하겠지만 다음번 방문까진 수량을 맞추고도 남을 걸세.”
“휴. 다행이군요. 알겠습니다.”
“헌데 자네가 보기엔 시베리아 지역에 얼마나 머스킷을 풀어야 한다고 보나?”
이에 쿠나킨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못해도 2만 자루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쿠나킨은 그 정도는 풀어야 훗날에도 러시아 차르국을 상대로 시베리아 원주민들이 대항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그렇게 답하자 투로시노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2만 자루라...알겠네. 조선에 연락해둬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