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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420화 (420/850)

420화

에스파냐 외교관은 창문을 통해 보이는 풍경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르며 중얼거렸다.

“이곳은...정말 올 때마다 황홀하군요.”

웅크린 늑대는 냉장고에서 시원한 냉차를 꺼내다 그런 에스파냐 외교관의 중얼거림을 듣고 피식 웃었다.

현재 웅크린 늑대와 에스파냐 외교관이 자리한 곳은 바로 새진주의 관공서 건물 9층에 마련된 외무청 응접실이었다.

원래였다면 웅크린 늑대가 외국인 거주 구역으로 가서 그곳에 마련된 외무청 건물에서 에스파냐 외교관과 협상해야 했지만, 작년에 관공서 건물이 완공된 이후 유럽인들은 저기 보이는 관공서 건물을 방문하고 싶어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정성국이 직접 저 관공서 건물을 보기 위해 새진주를 방문했다는 기사, 옥상에서 새진주의 풍경을 보고 감탄했다는 내용의 기사와 승강기를 설명하는 기사까지 북미신문을 통해 접했고 외국인 거주 구역의 종업원들에게도 관공서 건물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들었으니 당연히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북미왕국에서는 이전에 유럽의 외교관들에게 새한성을 개방한 이후로 자신들의 초청을 받아 북미왕국으로 온 이들을 제외한 외국인들은 여전히 외국인 거주 구역 밖을 돌아다닐 수 없도록 제한하고 있었으니 새진주를 방문한 유럽인들은 무척 아쉬워했고.

그런 유럽인들 중엔 외교관들도 있었고 외교관들은 웅크린 늑대를 만날 때마다 은근히 압박했기에 결국 웅크린 늑대는 이들을 관공서 건물로 초대했었다.

그리고 외교관들은 유리로 된 승강기를 직접 타보고 북미왕국 기술력에 새삼 놀랐으며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새진주 주변의 풍경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외교관들은 그 풍경을 잊지 못하고 웅크린 늑대에게 초대해달라고 졸라댔기에 웅크린 늑대는 가끔 이들을 관공서 건물에 마련된 응접실로 초대해 협상을 진행하곤 했었다.

“확실히 이곳 경치가 일품이긴 하지요. 자. 일단 냉차부터 드시지요.”

정신없이 창문 밖을 바라보던 에스파냐 외교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의자에 앉았다.

“아. 감사합니다.”

그리고 웅크린 늑대가 건네준 냉차를 들이켜고 다시 한번 탄성을 내뱉었다.

“크으. 시원한 것이 정말 맛있군요.”

“그렇지요? 더울 때는 냉차만 한 것이 없습니다.”

웅크린 늑대가 에스파냐 외교관의 반응에 미소를 지으며 냉차를 홀짝거리고 있을 때 에스파냐 외교관은 응접실 한쪽에 자리한 냉장고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물었다.

“저 냉장고...제가 살 수 없겠지요?”

이미 북미신문에는 가정용 냉장고를 판매한다는 기사와 광고까지 나온 터라 혹시나 하고 질문을 하자 웅크린 늑대는 실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냉장고는 전기가 없으면 단순한 철 상자에 불과합니다. 그런 철 상자를 사서 뭐한답니까.”

“휴우.”

그 말에 에스파냐 외교관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에도 은근슬쩍 전기를 만들어내는 물질을 알아내려 했었지만, 북미왕국에서는 국가 기밀이라면서 철저히 선을 그었었으니.

그리고 전등을 처음 보았을 때도, 이곳에서 승강기를 탔을 때도 전기를 만들어내는 물질의 수입을 타진했었지만, 북미왕국에선 고개를 저을 뿐이었고.

해서 에스파냐 외교관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며 냉차를 홀짝거리며 협상을 진행하기에 앞서 웅크린 늑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웅크린 늑대의 이야기에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예? 그린란드가 북미왕국의 영토가 되었다는 말씀이십니까? 전에 북미왕국은 분명 그린란드는 그곳에 사는 원주민들의 땅이라고 선언하신 것 같습니다만...”

“그렇습니다. 분명 그랬었지요. 다만 상황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상황이 바뀌었다고요?”

반문하는 에스파냐 외교관을 보고 웅크린 늑대가 입을 열었다.

“우리 북미왕국의 탐사대가 그린란드를 발견한 이후 우리는 그린란드의 원주민과 줄곧 우호적으로 교류해오고 있었습니다.”

“예.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 그린란드의 원주민들은 우리와 교류하면서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우리 북미왕국의 품에 들어와 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제야 에스파냐 외교관은 북미 대륙 외의 영토 확장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던 북미왕국이 왜 그린란드를 영토로 삼았는지 이해하고 확인하듯 질문을 던졌다.

“그린란드의 원주민 부족 전부가 이에 동의했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렇습니다. 그린란드의 원주민 부족 전부가 그런 결정을 내렸지요. 그리고 우리 북미왕국으로서는 그런 저들의 결정을 받아들였고요. 그러니 그린란드의 원주민들은 북미왕국의 백성이 되었고...자연스럽게 그린란드는 우리 북미왕국의 영토가 된 셈이지요.”

웅크린 늑대의 말에 에스파냐 외교관은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애당초 에스파냐는 그린란드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기에, 그리고 고작 얼음으로 뒤덮인 동토를 놓고 북미왕국과 척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선선히 축하의 말을 건넸다.

“으음...일단 북미왕국의 영토가 늘어난 것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빙긋 웃는 웅크린 늑대를 바라보던 에스파냐 외교관이 냉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조심스럽게 개인적인 질문을 던졌다.

“다만...지금까지 북미왕국은 영토 확장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잖습니까? 헌데 얼음투성이인 그린란드를 굳이 귀국의 영토로 삼으신 까닭이 있습니까?”

물론 영토야 넓을수록 좋겠지만 그린란드 같은 쓸모없는 땅은 이야기가 달랐다.

특히 북미왕국의 경우 직접 통치하는 지역에는 원활한 통치를 위해 수많은 관리를 파견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에스파냐 외교관이었기에 북미왕국의 입장에서 그린란드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해 얻을 수 있는 이득보다는 손해가 더 크리라 판단했고 말이다.

그런 에스파냐 외교관의 의문에 웅크린 늑대는 굳이 시시콜콜하게 속내를 드러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적당히 둘러댔다.

“솔직히 그린란드를 얻어 봐야 이득보다는 손해가 더 크긴 합니다만...그렇다고 그린란드의 원주민들이 북미왕국의 품에 들어오겠다고 했는데 이를 내칠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의외로 원주민의 수도 많은 편이고. 그래서 새한성에서는 논의 끝에 이를 받아드린 것으로 압니다.”

“아. 그렇군요.”

에스파냐 외교관은 웅크린 늑대의 대답에서 답을 찾았다고 판단해 고개를 끄덕였다.

북미왕국이 영토에 비해 인구가 부족한 편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고 북미왕국은 그린란드의 영토보다는 그린란드 원주민을 노린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해서 에스파냐 외교관이 슬쩍 입을 열었다.

“헌데...최근 많은 위그노들이 북미왕국으로 이주하고 있고 그린란드의 원주민들도 북미왕국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러다가 멕시코 원주민들이 일자리를 잃지는 않을까 걱정스럽군요.”

이미 멕시코 북부는 경제적으론 북미왕국에 종속된 형태였다.

처음에 본국이나 누에바 에스파냐에서는 이를 우려하기도 했지만, 북미왕국에 고용된 멕시코 원주민들이 가족들에게 보내는 물자들로 멕시코 북부의 경제가 돌아갔고 에스파냐는 중간에서 기존보다 많은 세금을 걷을 수 있었기에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북미왕국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북미왕국에서 일하는 멕시코 원주민의 수를 줄이기라도 할까 걱정할 정도였고.

그런 에스파냐 외교관의 걱정에 웅크린 늑대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하하하. 걱정하지 마시지요. 개발할 곳이 워낙 많은 터라 일꾼은 항상 부족한 노릇이니 말입니다. 솔직히 더 많은 멕시코 원주민을 고용하고 싶을 정도인데 줄일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허나 그 정도로 일꾼이 부족한 겁니까?”

웅크린 늑대의 대답에 에스파냐 외교관은 안도하면서도 의아한 듯 묻자 웅크린 늑대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시다시피 북미왕국의 영토는 넓고 개발할 곳은 널렸으니 어쩌겠습니까.”

이에 에스파냐 외교관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뗐다.

“흐음...허면 잉글랜드와 이야기해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잉글랜드요?”

“예. 잉글랜드는 아일랜드를 점령한 후 그곳의 주민들을 핍박하고 있지요. 그러니 북미왕국에서 잘만 협상한다면 잉글랜드는 아일랜드인의 북미왕국 이주를 허용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편이 잉글랜드에도, 아일랜드인에게도 나을 테지요.”

에스파냐는 한때 잉글랜드를 견제하기 위해 이 아일랜드인을 지원하기도 했었기에 아일랜드의 사정을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아일랜드인들은 잉글랜드에 청교도 정권이 들어선 이후 올리버 크롬웰의 탄압에 수십만 명이 죽고 아일랜드에서 그나마 비옥한 얼스터 지방에서 쫓겨나 척박한 코노트 지방으로 밀려났기에 잉글랜드에 강한 원한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만큼 아일랜드인이 북미왕국으로 이주해 정착한다면 분명 고향으로 각종 물자를 지원해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면 아일랜드인들은 다시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도 있었고 잉글랜드는 이곳에 또 군사력을 소모해야 했으니 나쁠 것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허. 위그노들은 개신교를 믿기에 프랑스에 핍박받고 아일랜드인들은 가톨릭을 믿기에 잉글랜드에 핍박받는 겁니까? 이것 참...”

웅크린 늑대는 에스파냐 외교관의 자세한 설명에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고 에스파냐 외교관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유럽에서 종교 문제는 무척 중요하니까요. 물론 일부는 귀국처럼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기도 합니다만...”

“아무튼, 좋은 조언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귀국에 도움이 될 수 있다니 기쁘군요.”

‘그리고 잉글랜드에 엿 먹일 수 있다면 더 기쁠 테고.’

그렇게 협상에 들어가기 전 이런저런 대화를 마친 웅크린 늑대는 에스파냐 외교관을 보고 입을 열었다.

“그보다 그동안 여러 논의를 한 만큼 이쯤에서 결론을 내고 협상을 마무리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웅크린 늑대는 꽤 오랫동안 에스파냐 외교관과 상주 외교관을 파견하는 문제를 협상하고 있었고 몇몇 사안을 제외하면 의견을 모두 조율한 상태였기에 더는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내비치자 에스파냐 외교관이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시지요.”

에스파냐 외교관이 동의하자 웅크린 늑대가 입을 열었다.

“우선 양국은 한 나라를 대표해 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외교관, 즉 대사를 파견하는 것엔 동의하시지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대사를 보좌하기 위한 실무 관리들을 파견하는 것도 동의하실 테고요.”

웅크린 늑대가 이미 대략적으로 합의한 사항마저 다시 되짚자 에스파냐 외교관은 어차피 조약문을 쓰면서 다시 확인할 사항을 굳이 지금 거론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기에 손을 내저었다.

“이미 대략적으로 합의한 사항은 다 넘기시지요. 어차피 조약문을 쓰면서 다시 확인할 테니. 그보다는 이견이 있는 두 부분을 오늘 합의하도록 하지요.”

이에 웅크린 늑대가 나쁠 것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사관의 위치와 대사관을 상대방의 영토로 인정하는 문제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논의도 여러 차례 진행했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었지요. 그러니 서로 하나씩 양보했으면 합니다만...”

이에 웅크린 늑대는 내심 긴장하며 에스파냐 외교관을 바라보았다.

“...그 말씀은?”

“어차피 대사를 비롯한 파견한 외교관의 면책 특권을 인정한 만큼 대사관도 상대방의 영토로 간주하겠습니다. 대신 대사관의 위치는 각국의 수도로 하지요.”

“흠...”

원래 대사관의 위치는 상대방의 수도에 건설하는 것이 맞았다.

다만 에스파냐의 수도는 내륙 깊숙이 위치하고 있어 마드리드에 대사관을 건설하게 되면 북미왕국과의 연락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그렇다고 수도뿐만 아니라 항구에도 외교 공관을 건설하고 외교관을 파견하기엔 가뜩이나 관리가 부족한 북미왕국엔 부담이었다.

해서 북미왕국은 각국의 수도가 아닌 수도와 가까운 항구에 대사관을 건설하기를 원했고.

하지만 에스파냐는 이 대사관을 통해 합법적으로 북미왕국의 내부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기에 당연히 수도에 대사관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몇 번이고 논의했지만, 에스파냐는 이 부분에서 물러날 뜻이 없어 보였기에 웅크린 늑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손을 들었다.

“휴. 어쩔 수 없군요. 알겠습니다. 이를 받아들이지요.”

“오! 정말이십니까?”

에스파냐 외교관이 반색하자 웅크린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결국, 각국의 수도에는 대사관을, 그리고 연락선이 드나들 가까운 항구에는 대사관보다는 격이 낮은 공사관을 설치하도록 하지요.”

“허면 마드리드에는 대사관을, 세비야에는 공사관을 설치하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헌데 귀국은 어쩌시겠습니까? 공사관은 아니지만, 일종의 외교 공관이 새진도에 있지 않습니까.”

지금이야 새진주를 통해 수입되는 물량이 많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태평양 방면의 새진도에서 수입되는 물량도 여전히 많긴 했다.

누에바 에스파냐의 경우 북미왕국처럼 철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태평양 방면의 도시나 마을에서 소모할 물품들은 새진도에서 거래해 배를 이용해 물품을 수송하는 것이 아무래도 편리했으니까.

그리고 이곳에는 한때 북미왕국의 포로가 되어 포로수용소에서 지내다 결국 풀려났던 로하스가 외교관의 신분으로 새진도에 머물며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하기도 하고 거래 문제를 담당하기도 했고.

그리고 웅크린 늑대는 북미왕국에서 2개의 외교 공관을 운영하기로 한 만큼 에스파냐도 그래야 하지 않겠냐는 눈빛을 보내자 에스파냐 외교관이 슬쩍 웅크린 늑대의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어...하지만 새진도에 상주하는 로하스는 엄밀히 따지면 누에바 에스파냐 소속이니 조금 다른 문제 아니겠습니까. 저희는 새한성에 대사관을, 새진주에 공사관을 세우고 싶습니다.”

이에 웅크린 늑대는 표정을 찌푸리자 에스파냐 외교관이 급히 덧붙였다.

“아. 차라리 귀국도 베라크루즈에 공사관을 하나 더 건설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누에바 에스파냐에 공사관을 설치하고 합법적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것도 나쁠 것은 없었지만 당장 인력이 부족한 터라 웅크린 늑대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 어쩔 수 없군요.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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