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화
아직 한여름이 되지도 않았는데 묘하게 더운 느낌이라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던 정성국은 냉방장치를 작동시켜야 하는가로 잠시 고민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 집무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음? 무슨 일 있나?”
정성국은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조용한 곰의 얼굴을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을 던지자 조용한 곰은 정성국이 질문을 던지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입을 열었다.
"전하. 드디어 그린란드의 원주민들이 북미왕국으로의 합류를 결정했습니다.“
북대서양 탐사대가 창설되어 그린란드의 원주민과 접촉한 이후, 그리고 정성국이 안보상의 이유로 그린란드를 북미왕국의 영토로 두는 것이 나을 거라는 뜻을 밝힌 이후 외무청에서는 그린란드의 원주민들을 북미왕국으로 합류시키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린란드의 원주민들은 북미왕국과의 교역엔 무척 긍정적으로 반응했지만, 아예 북미왕국의 백성이 되라는 외무청의 제의에는 의외로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외무청에서는 이런저런 혜택을 보장하며 이들을 북미왕국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그린란드의 원주민들은 어차피 지금까지도 자신들끼리 잘 살아온 만큼 교역 정도면 모를까 굳이 북미왕국의 밑으로 들어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해서 외무청에서는 북미왕국의 국력을 과시해 이들을 설득할 요량으로 북미왕국의 방문을 권했지만, 이들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고.
북미 대륙의 수많은 원주민 가운데는 이처럼 북미왕국으로의 합류를 원하지 않고 자신들의 생활양식을 고수하려는 원주민들도 있었고 이런 경우 외무청에서는 깔끔하게 한발 물러나는 편이었지만 그린란드의 경우 정성국이 관심을 보이는 지역이었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물론 정성국이야 느긋하게 설득하라고 이야기했지만, 외무청에서는 아무래도 조급할 수밖에 없었고.
해서 그린란드에 배치된 외무청 관리들은 그린란드의 원주민을 초청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고 덕분에 작년 12월쯤에 그린란드의 원주민들이 북미왕국에 방문했었다는 사실은 정성국도 보고받아 알고는 있었다.
다만 북미왕국을 방문한 원주민들이 날이 따뜻해지기 전 다시 그린란드로 돌아갔고 그 이후로는 별다른 보고가 없었기에 그린란드의 원주민을 설득하는 것은 꽤 장기적으로 봐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이런 보고가 올라왔기에 정성국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전에 보고 받기로는 북미왕국으로 합류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싶었는데...이거 의외로군.”
이에 조용한 곰은 활짝 웃으며 맞장구쳤다.
“예. 전에 한 번 보고드리기도 했지만, 저들이 새한성까지 방문했는데도 북미왕국의 국력에는 놀라면서도 북미왕국으로의 합류에는 조금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여 내심 걱정했었지요. 해서 저들이 떠나기 전 급히 새의주에 연락을 취해 이미 북미왕국의 백성이 된 알래스카 지역의 이누이트인들, 그리고 저들이 복귀하는 도중 북미 동해안 지역의 원주민들과의 만남을 주선한 것이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알래스카 지역의 원주민과 북미 동해안 지역의 원주민이라...?"
당시에는 세세한 사항까지 보고받진 않았었기에 정성국은 처음 듣는 이 이야기를 듣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북미왕국의 백성이 된 알래스카 지역의 이누이트들과 유럽인들과 부대꼈던 북미 동해안 지역의 원주민들이 무슨 말을 했을지는 대충 짐작되었으니까.
"그렇습니다. 알래스카 지역의 원주민들은 북미왕국에 합류한 이후 생활양식이 조금 변했을지언정 이전과는 달리 겨울에 풍족하고 따뜻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기에 북미왕국으로 합류한 자신들의 결정이 옳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거기에 원주민들은, 특히 비교적 척박한 환경에 사는 원주민들일수록 생명이 탄생하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북미왕국으로 합류한 이후 아이들이 많이 태어나니 더욱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굳게 믿고 있는 터라 이들과 대화를 나누면 북미왕국으로의 합류에 미적지근한 그린란드의 원주민들도 다시 생각할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새의주의 경우 개발청에서 온돌이 깔린 집을 왕창 지어 북미왕국의 백성이 된 알래스카의 원주민들에게 내어주기도 했고 식량도 저렴한 가격에 보급하고 있었기에 인구가 무척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다.
특히 새로 태어나는 아이가 무척 많은 터라 정성국은 무척 기뻐하며 아이들을 위한 각종 물품을 추가로 보내기도 했고.
그 때문에 새의주의 주민들은 북미왕국에 무척 호의적이라는 것은 정성국도 잘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자 조용한 곰이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북미 동해안 지역의 원주민들은 그들이 겪었던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유럽인들의 탐욕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했고요. 특히 그린란드의 원주민들은 이전에 자신들의 땅에 정착하려 들었던 유럽인들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북미 동해안 지역 원주민들의 생생한 경험담에 꽤 관심을 보인 모양입니다.”
이에 정성국은 조금 호기심을 보이며 질문을 던졌다.
“그래? 이전에 그린란드에 이주했던 유럽인들을 기억하고 있었다고?”
“예. 아무래도 척박한 지역에서 그나마 괜찮은 땅을 두고 다퉜던지라 자신들의 땅에 정착하려 들었던 이방인들에 관한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진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마을 터나 이런 것들이 아직 남아있긴 한 모양이고요.”
10세기에 바이킹들이 그린란드에 진출한 이후 꽤 오랫동안 그린란드에 살면서 원주민들과 충돌했고 이들이 그린란드에서 사라진 것은 15세기 정도였으니 그린란드의 원주민들에게는 이 바이킹에 관한 이야기가 구전으로 충분히 전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던졌다.
“그래? 그럼 그 이방인들은 어떻게 되었다던가?”
“그린란드의 환경이 변하면서 배를 타고 자신들의 땅에 정착하려 했던 이방인들은 다시 배를 타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더군요.”
소빙하기가 시작되면서 그나마 그린란드의 환경에 완벽히 적응했던 이누이트들과는 달리 바이킹들은 극심한 식량난을 겪었고 이로 인해 굶어 죽었을 거라는 추측과 가까운 아이슬란드도 떠났을 거라는 추측이 있었는데 이 의문을 해소하게 되어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런가...”
“그리고 그린란드의 원주민들은 이 이방인들과의 충돌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이를 자신들의 승리로 받아들였고 외무청 관리에 의해 이 이방인들이 유럽인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이런 사정 때문에 유럽인들을 썩 대단하지 않게 여긴 모양입니다. 헌데 북미 동해안 지역 원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전과는 달리 유럽인들의 기술이 발전해 무척 강력해졌다는 이야기에 생각이 많아진 모양이고요.”
"아무래도 그랬겠지.“
그린란드의 원주민들도 북미왕국과 접촉한 이후 화약 무기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 화약 무기로 무장한 유럽의 이주민들에 의해 북미 동해안 지역의 원주민들이 속절없이 밀렸다는 것에 그린란드의 원주민들은 자연스럽게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린란드의 원주민과 대화를 나눈 상대 중에는 아카디아 지역의 원주민 추장도 있었는데 이들도 예전 그린란드에 정착했던 이방인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이들은 부족한 목재를 얻기 위해 남하한 이 이방인들을 상대로는 우위를 거뒀지만, 시간이 흘러 화약 무기로 무장한 새로운 유럽인들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마저 들었으니.
자연스럽게 유럽인들에게 밀려 좋은 땅을 빼앗겼던 북미 동해안 지역 원주민들의 이야기가 다시 생각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그런 암울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북미왕국 덕분이었으니 미래를 생각하면 그들처럼 강력한 북미왕국의 품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해서 그린란드로 돌아간 후 부족원들과 오랫동안 상의한 끝에 결국 북미왕국으로의 합류를 결정한 모양입니다."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설명이 끝나자 빙긋 웃으며 그동안 고생했을 외무청의 공로를 치하했다.
"그래. 고생했네. 아무래도 그린란드의 경우 안보와 직결된 문제라 조금 신경 쓰이긴 했는데...이제 그린란드가 완전히 우리 북미왕국의 영토가 되었으니 마음을 놓아도 되겠어."
정성국의 칭찬에 슬쩍 미소를 짓던 조용한 곰은 정성국의 말이 끝나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음...헌데 전하. 북미왕국의 안보를 생각하면 그린란드와 비교적 가까운 아이슬란드도 북미왕국의 영토로 만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정성국은 순간 전생의 어느 나라가 떠올라 실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글쎄? 그런 논리라면 북미왕국의 안보를 위해 세계정복을 해야 할 걸세. 난 그럴 생각은 없고."
어차피 조용한 곰도 정성국이 북미 대륙 외에는 크게 욕심을 내지 않는다는 사실은 잘 알기에 이런 정성국의 반응에 고개를 끄덕였을 때 정성국이 덧붙였다.
"그리고 내가 그린란드를 나름대로 중요시한 까닭은 그린란드의 해안가를 따라 항해하면 북미 대륙 북부로 진출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네. 그렇다고 그 넓고 복잡한 북미 대륙 북부의 바다를 모조리 순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뉴펀들랜드 섬과 그린란드 사이의 바다를 철저히 통제할 생각으로 그린란드를 북미왕국의 영토로 설정한 것이었고. 그에 비해 아이슬란드는 위치만 그린란드에 가까울 뿐이지 북미왕국의 안보와는 큰 상관이 없잖나.”
“그건 그렇지요.”
“게다가 아이슬란드는 이미 유럽의 변방으로 인식되고 있는 터라 우리가 이곳에 관심을 보이는 순간 유럽 각국이 내심 경계할 수도 있으니 무리할 이유가 없지. 지금도 북미왕국의 영토는 무척 넓어 감당이 안 되는 편인데 굳이 영토 확장에 열을 올릴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남태평양의 섬들이나 시베리아 지역을 독립시키려 하시는 겁니까?"
비록 정성국의 뜻에 따라 이 지역 원주민들을 자립시키려고 교육청과 의논해 외국인 학교까지 세우긴 했지만, 외무청에서는 북미왕국을 위해서도 그리고 남태평양이나 시베리아의 원주민들을 위해서라도 이 지역을 북미왕국의 영토로 삼고 북미왕국이 원주민들을 보호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하는 이야기가 종종 나오곤 했다.
해서 조용한 곰이 슬쩍 질문을 던지자 정성국이 쓴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이 거대한 북미 대륙을 개발하는 데만 하더라도 막대한 노력이 필요할 테고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걸세. 헌데 계속해서 영토를 확장해 역량을 분산시키는 것은 북미왕국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네. 그리고 지금도 유럽은 우리의 눈치를 보는 터라 우리가 다른 지역의 원주민들과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을 알린다면 유럽에서도 섣불리 이 지역을 탐내지 못할 테고."
“그렇긴 하지요.”
정성국의 말에 조용한 곰이 수긍하자 정성국은 이야기의 주제를 돌렸다.
“뭐 이 이야긴 여기까지 하고 일단 그린란드의 이야기로 돌아가지. 먼저 그린란드의 원주민들이 북미왕국에 합류한 만큼 신문을 통해 이를 알리도록 하게. 그리고 에스파냐, 잉글랜드, 네덜란드에도 이를 알리도록 하고.”
현재 대사관을 설립하는 문제로 저 세 나라와 협의 중이었기에 정성국이 이를 거론하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전하.”
“그리고 행정청, 개발청, 교육청에 알려 곧바로 관리들을 파견하도록 하고. 특히 이곳의 겨울은 무척 추운 만큼 알래스카 지역에 건설한 집들처럼 난방, 단열, 보온에 특히 신경 써서 집을 건설하도록 해야 하네.”
이런 정성국의 당부에 조용한 곰은 씩 웃으며 답했다.
“물론입니다. 그린란드의 원주민들도 알래스카 지역의 원주민들처럼 나중에는 북미왕국으로 합류한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 지원할 생각이니까요. 다만 조금 고민스러운 것은 알래스카 지역에는 수많은 광물이 넘쳐나는 터라 알래스카 지역의 원주민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지만, 그린란드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는 겁니다.”
섬 대부분이 얼음으로 뒤덮여있는 터라 자원을 탐사하기도 힘들다고 조용한 곰이 토로하자 정성국은 상관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린란드에는 막대한 자원이 묻혀있긴 했지만 다른 지역에도 자원은 넘쳐났기에 굳이 힘들게 그린란드에서 광물을 캘 필요는 없다는 것이 정성국의 생각이었다.
다만 알루미늄의 대량 생산에 필요한 빙정석이 그린란드 서해안의 이비루트 부근에 대량으로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정성국은 개발청에 이야기해 이 빙정석 정도만 확보할 생각이었고.
해서 정성국이 대안을 제시했다.
“대신 근처에 풍부한 어장이 있지 않나. 그리고 냉동 창고를 설치한 어선과 수송선도 건조 중이고. 이 어선들을 그린란드로 보내게. 최근 내륙에서 생선 소모량이 증가하고 있다고 들었으니 그것만으로도 그린란드의 어부들은 풍족하게 살 수 있을 거야.”
“아. 그러면 되겠군요. 알겠습니다.”
냉동차가 개발되면서 내륙의 백성들도 크고 맛도 좋은 바닷물고기의 맛을 알게 되었고 덕분에 생선 소모량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다.
생선이야 양질의 단백질 공급원이라는 사실을 잘 아는 정성국은 이 소식에 기뻐하며 냉동 창고를 설치한 어선을 건조하도록 했고.
이를 떠올린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성국이 덧붙였다.
“그리고 연구청에서 전기를 이용한 난방장치를 개발 중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 그러니 그린란드에도 화력 발전소를 세우도록 하게.”
“온돌이나 난로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그리고...”
그러면서 정성국은 계속해서 그린란드 개발을 위한 각종 일거리를 던져주기 시작했고 조용한 곰은 이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정성국의 말이 끝난 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휴우. 어느 정도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신경 써야 할 것은 많고 일은 넘쳐나는군요. 이런 것을 생각하면 남태평양의 섬들이나 시베리아 지역은 독립시키는 것이 올바른 선택인 것 같습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