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화
코랴크 부족의 족장은 바깥이 소란스러웠기에 잠에서 깼다.
어제 북미왕국의 상인들이 주는 술을 넙죽넙죽 마셨던 대가인지 골이 울리는 느낌이 들었기에 족장은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밖에 나오자 눈부신 아침 햇살이 족장의 눈을 공격했고 족장은 반사적으로 눈두덩이에 손을 올리며 신음을 흘렸다.
“으음...”
그때 마을 안에서 이동하던 쿠나킨은 그런 족장을 발견하고 미소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일어나셨습니까. 족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아. 좋은 아침이오. 헌데 당신은 얼굴이 멀쩡하구려.”
족장이 쿠나킨의 얼굴을 확인하고 뚱한 표정으로 이야기하자 쿠나킨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술을 자주 마시다 보니 익숙합니다. 속이 불편하시면 시원한 물을 좀 마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러면서 쿠나킨은 허리춤에 있는 물통을 족장에게 건넸고 족장은 물통을 입에 가져다 대고 벌컥벌컥 마셨다.
“크으. 물맛이 참 좋구려. 헌데 저들은...”
“아. 족장님께서 내륙 상행을 허락해주셨으니 준비하는 거지요.”
아침부터 바깥이 소란스러웠던 원인은 바로 해안가 인근에서 북미왕국 상인들이 말과 여러 물자를 내리느라 꽤 많은 선원이 해안가에 상륙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워낙 규모가 크고 데리고 온 수백 필의 말을 일일이 조그마한 배로 옮겨야 했으니 당연히 소란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허...상단이 저런 커다란 배를 3척이나 몰고 왔을 때 짐작하긴 했지만...규모가 무척 크구려. 거기에 말도 수백 마리나...”
족장이 해안가 인근의 광경을 보고 살짝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쿠나킨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 이 지역의 내륙 사정은 잘 모르지만, 이 지역이 넓다는 것은 잘 압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말을 구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기에 출발하기 전 미리 충분한 말을 준비했을 뿐이지요.”
쿠나킨의 말에 역시 상단이라 준비성이 철저하구나 싶어 감탄한 족장은 공터를 바라보다가 해안가에 쌓인 물품을 말에 싣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머스킷을 등 뒤에 소지하고 있었기에 이채를 띠며 질문을 던졌다.
“으음...헌데 저기 머스킷으로 무장한 자들은 상단의 호위를 위해 고용한 용병인게요?”
“그렇습니다.”
“...생각보다 수가 많구려.”
대충 헤아려봐도 수백은 되어 보이는 인원이었기에 족장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전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이 공물을 바치라며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100명 남짓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그리고 그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보다 저들의 복장이나 무장이 더 좋아 보이고 절도 있는 분위기라는 것을 고려해보면 어제 축제 때 쿠나킨이 이야기한 것처럼 러시아 차르국보다는 북미왕국이 월등히 강력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런 족장의 반응에 쿠나킨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희가 운반하는 물품들이 이곳에서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상단의 안전을 위해서는 과할 정도로 많은 호위병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이렇게 준비한 겁니다. 그리고 이런 내륙 상행의 경우 상단 규모가 크면 클수록 섣불리 공격하지도 못할 테고요.”
“음...그건 그렇지요.”
머스킷으로 무장한 말을 탄 수백 명을 상대할 주변 부족은 없었기에 확실히 이들의 상행은 안전하리라 생각해 고개를 끄덕이는 족장이었다.
“아. 그리고 어제 족장님께서 여러 부족의 마을들을 알려주셨잖습니까? 해서 저희는 상의 끝에 무리를 나누어 북쪽과 서쪽에 있는 부족들과 동시에 접촉할 생각입니다.”
어제 쿠나킨에게 자신이 아는 이 주변 부족들에 관해 대략적으로 설명해주었었다.
서쪽으로는 예벤 족, 알류트 족이 있었고, 북쪽으로는 축치 족이 자리하고 있는 만큼 어디부터 들를지 잘 생각해서 결정하라고 했었는데 이들은 아예 무리를 나누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다만 이들은 워낙 규모가 컸기에 저 무리를 둘로 나눈다 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어 보였고 차라리 그 정도가 되어야 다른 부족들도 너무 경계하지 않을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족장이 입을 열었다.
“그렇소? 알겠소. 그럼 그들의 말을 할 줄 알고 가끔 그들의 마을에 방문했었던 자들을 길 안내인으로 붙여주겠소이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희들은 상행을 위해 떠나겠지만 저 배들은 이곳에서 저희가 복귀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 않습니까.”
쿠나킨이 해안가 인근에 정박한 커다란 배들을 가리키며 이야기하자 족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그리고 저 배를 지키기 위한 용병들과 선원이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그래서 저희가 상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이곳과 조금 떨어진 해안가에 선착장과 나중을 대비한 창고를 조금 건설하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어차피 어제 선착장을 건설해도 된다고 허락했었기에 족장은 흔쾌히 승낙했다.
“아. 물론이오. 손이 부족하다면 도와줄 수도 있고.”
“오. 그러면 감사하지요. 저희를 도와주신다면 그 대가를 충분히 제공하겠습니다.”
그때 한 상인이 다가와 쿠나킨에게 무어라 이야기했고 쿠나킨은 고개를 끄덕인 후 족장을 바라보고 말했다.
“족장님. 저기 쌓여있는 물품들 보이시지요?”
족장은 해안가 한쪽에 적당히 쌓여있는 각종 포대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만...?”
“저건 이번 거래대금의 일부를 식량과 소금으로 환산해 내려놓은 물품입니다. 자릿세이니 가져가시지요.”
이에 족장은 당황한 표정으로 쿠나킨을 바라보았다.
“어? 저...저 많은 물품이 자릿세라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쿠나킨이 무슨 문제 있느냐는 표정으로 족장을 바라보자 족장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허...이렇게 주고도 남는 것이 있소? 거래 조건도 무척 후했는데 거기에 자릿세로 저렇게 많은 식량과 소금을 주고도?”
“으하하. 상인이 밑지고 팔 리가 있겠습니까? 이래도 충분히 남습니다.”
족장의 말에 쿠나킨이 대소하자 족장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렇게 모피의 가치가 높다는 말이오?”
“솔직히 저 모피들. 저희 북미왕국에선 큰 가치는 없습니다. 저희야 무거운 모피보다는 그보다 가벼운 모직물을 선호하니까요. 하지만 유럽에서는 그동안 열심히 동물을 사냥했기에 동물의 씨가 말라버렸고 그 때문에 모피가 꽤 비싸게 팔리지요. 물론 먼 거리를 수송해야 하는 만큼 운송비가 꽤 들어가는 편이지만...그래도 충분히 남습니다.”
“음...”
족장은 쿠나킨의 말에서 그동안 자신들을 비롯해 이 주변에서 나오는 모피를 공물로 수거해간 러시아 차르국이 이 모피로 얼마나 막대한 부를 얻게 되었을지 짐작하고 내심 분노하며 생각했다.
‘일단은 굽히되 이들에게 머스킷을 사면 바로 거래를 끊는 게 낫겠어.’
“그리고 식량과 소금은 원가로 계산해 조금 더 드린 겁니다. 어제 이야기한 대로 북미왕국에선 식량과 소금이 넘쳐나 가격이 무척 싼 편이라 많이 가져왔는데...어째 이곳 상황을 보니 꽤 많이 남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허허....”
다시 가져갈 바엔 그냥 공짜로 풀겠다는 쿠나킨의 이야기에 족장은 이들의 부와 배포에 질린 듯 헛웃음을 지었다.
“아. 그리고 어제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금은 괜찮아졌지만, 러시아 차르국과 접촉한 이후 이런저런 전염병이 돌곤 했었다고 하셨었지요?”
“그랬지요. 그 때문에 황폐해진 마을도 좀 있고.”
족장이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쿠나킨이 목소리를 살짝 낮추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전염병에 효과가 있는 약이 하나 있습니다.”
“약?!”
족장이 눈을 크게 뜨고 쿠나킨을 바라보자 쿠나킨이 손을 내저었다.
“아. 물론 그 약을 먹는다고 모든 전염병을 치료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천연두라고 전염되면 피부에 발진이 일어나는 병이 있습...”
“헉!? 그 저주 말이오?!”
쿠나킨이 미처 설명하기도 전에 족장이 기겁하자 쿠나킨은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쩝. 이미 천연두가 퍼졌었나 보군요.”
“다행히 우리 부족은 아닌데 저 알류트 족은 그 저주 때문에 몇몇 마을이 완전히 초토화되었다고 들었소. 근데 그게 저주가 아니라 전염병이었다니...”
그러면서 족장은 어제 쿠나킨이 이곳에 전염병을 몰고 온 것은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이라는 이야기를 떠올리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예. 맞습니다. 그리고 무척 전염이 잘 되는 병이라 골치 아픈 병이지요.”
다만 러시아 차르국에 대한 분노는 분노였고 당장 중요한 것은 저주를 이겨낼 수 있는 약이었기에 족장이 급히 되물었다.
“북미왕국은 그 저주를, 아니 전염병을 치료할 약을 가지고 있다는 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남아 배를 지킬 선원들에게 이야기해두었으니 이들이 이 약을 복용하는 데 도와줄 겁니다. 이 약이 미리 복용해야 효과가 있고 일반적으로 먹는 약과는 달리 피부에 직접 주입하는 형식이라서 말입니다.”
쿠나킨의 이야기에 족장은 잠시 쿠나킨을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그런 귀한 약을 비싼 값에 팔지 않고 그냥 내어준다는 것이 왠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특히 이들은 돈을 위해 먼 곳까지 온 상인 아닌가.
“...그런 귀한 약을 그냥 내어주겠다는 뜻이오?”
족장의 표정이 기쁜 표정은 아니었기에 왜 저러나 싶었던 쿠나킨은 이내 족장의 속내를 파악하고 손을 내저었다.
“그렇습니다. 아.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그 약을 공짜로 내어주는 것은 선의로 하는 일이라기보단 다 저희에게 이득이 되니 그런 겁니다.”
“귀한 약을 그냥 내어주는 게 당신들에게 이득이 된다고?”
족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쿠나킨은 한숨을 내쉬며 하소연하듯 설명을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물론 이 약이 천연두에 걸린 자들에게 복용시켜 곧바로 치료할 수 있다면 비싸게 팔았을 겁니다. 족장님은 반신반의하면서도 만약을 대비해 소량의 약을 사둘 테고 실제 천연두가 퍼져도 약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저희가 얼마에 팔든 무조건 사려고 하겠지요.”
“아마...그랬을 겁니다.”
“헌데 북미왕국에서 개발한 이 약은 천연두에 걸리기 전에 복용해야 효과가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당장 천연두에 걸려 앓는 사람들에겐 효과가 없어요. 그뿐입니까? 약을 미리 먹었기에 천연두에 걸리지 않은 건데 이를 천연두가 아예 돌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그러니 효과는 좋은데 팔아먹기엔 영 좋지 않은 약입니다.”
“으음...”
족장은 그런 약이 있을 수 있나 싶은 표정이었지만 이들의 물품을 보면 신기한 것들이 많았기에 이 약도 그런 것인가 싶었고 정말 약의 성질이 그렇다면 팔아먹기엔 좋지 않다는 쿠나킨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래서 그냥 주는 겁니다. 팔아먹지는 못할지언정 그냥 주면 저희와 거래하는 부족은 최소한 천연두에는 걸리지 않으니 천연두가 돌아도 신경 쓰지 않고 더 많은 모피를 구해 저희와 거래할 테니까요.”
“으음...나름대로 계산해서 내린 결정이라는 거구려.”
족장이 이해했다는 표정을 짓자 쿠나킨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부담 갖지 마시고 저들의 말대로 접종, 아니. 약을 복용하세요. 뭐 영 꺼림칙하다면 맞지 않으셔도 상관없고요. 저희가 강제할 수야 없는 노릇이니까요.”
정성국은 시베리아 원주민들이 러시아 차르국에 맞서려면 원주민의 숫자가 너무 적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유럽인들이 신대륙에 진출해 각종 전염병을 옮겨서 신대륙의 원주민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든 것처럼 러시아인과 코사크 족이 시베리아 지역으로 진출해서 모피를 얻겠다고 그동안 고립되어 살아가던 원주민들을 찾아가면서 이들에게도 각종 전염병을 옮겨 그나마 희박하던 시베리아 원주민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해서 정성국은 겨우내 대량의 우두를 준비해 북방 항로가 열리자마자 시베리아 지역으로 진출할 국영 상단에게 보낸 것이고 시베리아 원주민들과 접촉할 때는 항상 위생을 신경 쓰고 가능하면 이들에게 우두를 접종하라고 명령했다.
이미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여기서 시베리아 원주민들이 더 줄어드는 것은 막겠다는 생각에서 말이다.
다만 쿠나킨은 원주민들에게 강제로 우두를 접종해봐야 북미왕국을 의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한 발짝 물러서듯 이야기했고 말이다.
“으음...알겠소.”
그렇게 쿠나킨이 족장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아이누 탐사대원이 쿠나킨에게 다가와 말했다.
“출발 준비가 끝났습니다. 이들이 주선해준 길잡이에게도 말을 건네주었고요.”
이에 쿠나킨은 고개를 끄덕이고 족장에게 말했다.
“준비가 끝났다는군요.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이번 상행에 큰일이 없기를 바라겠소. 아. 그리고 어제 이야기한 대로 서쪽의 알류트 족은 분위기가 썩 좋지 않을 거요. 그러니 특히 조심하시오.”
“물론입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