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7화
코랴크 부족의 족장은 북미왕국 상인들과의 교역이 모두 마무리된 후 이들을 환영하는 축제를 열었고 북미왕국 상인들은 이 축제에 참여하며 북미왕국의 음식들과 술을 선보였다.
아이와 여성들은 생소한 북미왕국의 음식과 달콤한 디저트를 맛보느라 정신이 없었고 열심히 순록 고기를 굽던 남성들은 북미왕국의 다양한 술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렇게 부족원들이 즐겁게 축제를 즐기는 모습을 미소지으며 바라보던 족장은 쿠나킨이 건네준 술잔을 받아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크으. 이건 또 색다른 맛이군요. 무척 부드럽고.”
“이건 북미왕국의 대표적인 술 중의 하나인 소주라는 술입니다. 쌀로 만드는 술이지요.”
쿠나킨이 빙긋 웃으며 대답하자 족장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감탄했다.
“허. 그 귀한 쌀로 술을? 정말 북미왕국은 작물이 넘쳐나는 모양이구려?”
“그런 편입니다. 본국이 워낙 크고 땅도 비옥한 편이라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쿠나킨은 술잔을 들이킨 후 북미왕국에 관한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족장은 이번 교역을 통해 북미왕국이 무척 궁금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쿠나킨이 북미왕국에 대해 언급하자 이를 유심히 들었다.
하지만 족장은 쿠나킨의 설명이 잘 와닿지는 않았기에 질문을 던졌다.
“그래요? 청나라와 비교하면 어떻소.”
족장의 물음에 쿠나킨은 빈 술잔에 술을 채우다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북미왕국은 청나라보다 훨씬 큽니다.”
“허. 그게 정말입니까?”
족장은 청나라가 세상에서 제일 크다고 알고 있었다.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주변 부족들과 접촉했을 때 그러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나이든 부족원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고.
물론 러시아 차르국과 접촉한 후 이들은 러시아 차르국이 세상에서 제일 큰 나라라고 주장했었지만, 족장은 그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았으니까.
헌데 비교적 최근에 들어보았던 이 북미왕국이 청나라보다 훨씬 크다는 쿠나킨의 이야기에 족장은 이걸 믿어야 하는 건지 허풍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지 판단하기 어려워 고민하자 쿠나킨이 술병을 내려놓고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족장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지도입니다. 세계 지도이지요. 이 세상의 모든 땅을 그린 지도라고 할까요?”
그 말에 족장은 당황한 표정으로 쿠나킨이 건네준 지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세상의 모습이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이 거대한 대륙이 바로 북미왕국의 영토이지요.”
옆에서 쿠나킨이 오른쪽의 커다란 땅덩어리의 윗부분을 손으로 짚었지만, 족장은 이게 얼마나 거대한 땅인지 제대로 짐작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했다.
“으음...”
이에 쿠나킨은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여기 이 조그마한 반도가 바로 카무이 반도입니다. 이곳 남쪽의 땅이지요.”
“음?”
지도는 메르카도르 도법으로 그려져 있었기에 북반구에 위치한 카무이 반도가 실제 크기에 비해 크게 그려져 있기는 했지만 그래 봐야 북미대륙에 비하면 아담한 크기였다.
그리고 족장은 이 남쪽의 거대한 땅덩어리가 지도에선 무척 작게 표기된 것을 깨닫고 지도의 축척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입을 쫙 벌리며 쿠나킨이 이야기한 북미왕국이 얼마나 광활한지 깨닫고 신음을 흘리자 쿠나킨이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청나라는 바로 여기입니다. 뭐 청나라도 크긴 하지만 딱 봐도 북미왕국의 땅보다는 작지요?”
“그...그렇구려.”
족장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지도를 살펴보다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이 지도에서 러시아 차르국은 어디에 위치해 있소?”
족장의 질문에 쿠나킨은 내심 긴장하면서도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손을 움직이며 설명했다.
“아. 그들은 유럽 변방의 나라입니다. 이 지역이 유럽이고 저들의 수도인 모스크바는 이곳에 있지요. 그리고 러시아 차르국의 영토는 명목상 알려져 있기로는 이 정도입니다.”
쿠나킨이 손으로 지도를 짚기 시작하자 족장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이 지도에 따르면 러시아 차르국은 북미왕국과 비견될 정도로 거대한 땅덩어리를 지닌 나라였으니까.
‘허. 공물 수거인이 그리 이야기할 만했군.’
그리고 족장은 처음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저들의 요청을 수락한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하며, 러시아 차르국이 저렇게 큰 나라라면 함부로 반항해선 안 되겠다고 생각해 착잡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으음...러시아 차르국도 무척 영토가 넓구려.”
쿠나킨은 술잔을 들이키면서도 족장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기에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요. 하지만 명목상 영토가 넓을 뿐이지 유럽에서도 허구한 날 주변국에 얻어맞는 약소국에 불과하지요.”
족장은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쿠나킨을 바라보았다.
“예? 러시아 차르국이 약소국이라고요? 이렇게 큰데 말이오?”
“그렇습니다. 한때 저들의 수도인 이 모스크바가 타국에 의해 점령당하기도 했고 주변국들이 저들의 왕을 마음대로 갈아치우기도 했지요. 최근에야 상황이 조금 나아지긴 했습니다만...그래도 다른 유럽의 강대국들에 비교한다면 약소국에 불과하지요.”
그러면서 쿠나킨은 족장이 러시아 차르국에 겁먹지 않게 유럽의 사정을 상세히 설명했고 족장은 처음 듣는 유럽의 사정을 주의 깊게 듣다가 쿠나킨의 이야기가 끝나자 질문을 던졌다.
“그럼 북미왕국과 비교하면 어떻소?”
“하하하. 유럽에서도 약소국 취급을 받는 러시아 차르국 따위가 우리 북미왕국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우리 북미왕국은 유럽의 강대국들과의 전쟁에서 연달아 승리했었는데 말입니다.”
“으음...”
족장은 쿠나킨의 이야기를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다시 고민하고 있을 때 쿠나킨이 다시 손으로 지도를 짚으며 설명했다.
“그리고 지도로만 보면 러시아 차르국이 무척 커 보이는데 실제 영토는 무척 작습니다. 이곳 우랄 산맥 서쪽 정도가 실제 러시아 차르국의 영토지요.”
“그럼 이 동쪽은?”
족장이 우랄 산맥 동쪽을 가리키자 쿠나킨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합니다만...정말 이곳을 자신들의 땅이라고 여겼다면 관리와 병사를 보내 직접 통치할 텐데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병사를 보내지 못한다고요?”
분명 예전에 자신들을 방문한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을 기억하기에 족장은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인상을 찌푸리자 쿠나킨이 입을 열었다.
“예. 러시아 차르국은 자신들의 정예병을 이 먼 곳까지 보내고 보급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상인들과 유목 부족에게 이를 대신 맡긴 거죠. 그렇기에 규모도 얼마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고요.”
“으음...하지만 규모가 얼마 안 되는 상인들과 유목 부족이 이리 넓은 땅을 정복했다는 거요? 그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정복이 아니라 단순히 이 영토가 모두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할 뿐이라고. 저들은 모피를 위해 동진했고 안정적인 교역로를 만들기 위해 중간중간 작은 마을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마을을 건설한 후엔 주변 지역이 다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뿐이지요.”
“...그렇소?”
“그렇습니다. 그리고 상인들과 유목 부족이 거침없이 일정 지역마다 마을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이곳 원주민들의 무장이 뒤처져 이들을 감당할 수 없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저들이 무척 지저분해 각종 전염병을 몰고 다니는지라 그 전염병에 의해 원주민들이 쉽사리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러면서 쿠나킨이 콧방귀를 끼고 술잔을 다시 들이키자 족장은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쿠나킨이 해준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그리고 계속 북미왕국과 교역할 수 있다면 러시아 차르국과의 관계를 끊는 것이 부족에 이득이었으니까.
더불어 자신들도 그렇고 주변 부족들도 러시아 차르국이 등장한 이후 간혹 전염병이 돌곤 했는데 이게 러시아인들 때문이라는 말에 충격도 받았고.
해서 족장은 연거푸 술잔을 들이키며 술을 마시다가 모닥불 주변에서 흥겹게 춤을 추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껄껄 웃는 쿠나킨을 보고 슬쩍 입을 열었다.
“헌데 말이오.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 그거 머스킷이지요?”
“오. 머스킷을 아시는군요?”
이에 족장이 예전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예전에 머스킷이 발사되는 광경을 본 적이 있소. 굉음과 함께 순록이 즉사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지.”
쿠나킨은 족장의 얼굴에서 족장이 내심 머스킷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렇습니까? 잠시만요.”
그리고 쿠나킨은 아이누 탐사대원에게 미리 준비한 머스킷을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다.
북미왕국에서는 시베리아 원주민들에게 머스킷을 저렴하게 판매할 생각이었고 그 때문에 국영 상단은 이번 상행에서 만날 시베리아 원주민 족장들에게 선물로 넘길 머스킷 정도는 준비해두었었다.
“여기 가져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이누 탐사대원에게 머스킷을 건네받은 쿠나킨은 족장에게 다가가 살짝 미소지으며 머스킷을 넘겼다.
“이게 머스킷입니다. 선물로 한 정 드리지요.”
머스킷을 건네주자 얼떨결에 받았던 족장은 쿠나킨의 말에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이걸 말이오?”
“그렇습니다. 족장님께서 교역을 허락해 주신 덕분에 꽤 많은 모피를 구할 수 있었으니까요. 한번 사용해보시겠습니까?”
“물론이오!”
족장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고 쿠나킨은 족장에게 머스킷의 사용법을 차근차근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발사 준비가 끝나자 축제를 즐기는 부족원들이 놀라지 않게 미리 이야기하고 부족원들을 조금 물렸고.
‘탕!’
모닥불 근처에 놓인 맥주가 가득 담긴 통을 조준한 족장이 머스킷을 발사하자 굉음과 함께 맥주 통에 구멍이 나면서 맥주가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부족원들은 환호했다.
“와아!”
그리고 쿠나킨은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한 족장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단순히 굉음으로 상대를 해하는 무기가 아니었구려?”
“예? 하하하. 그렇습니다. 굉음은 그저 화살촉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총알을 발사하기 위해 화약이 터지면서 나는 소리에 불과하지요.”
그 설명에 족장이 쿠나킨을 바라보았다.
“그럼 머스킷은...”
“활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아. 물론 활을 제대로 다루려면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이건 배우기 간단하다는 것이 장점입니다. 그리고 화살에 비하면 총알은 잘 보이지도 않고 굉음 때문에 상대를 놀라게 할 수도 있지요. 다만 뭐 단점도 꽤 많은 무기입니다.”
그러면서 쿠나킨이 머스킷의 장단점을 자세히 설명하자 족장은 진지한 표정으로 이를 듣다가 쿠나킨의 설명이 끝나자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이 머스킷. 더 살 수 있겠소?”
이에 쿠나킨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겉으로는 고민하는 척하다가 입을 열었다.
“뭐 머스킷이 사냥하는 데 나쁘지는 않지요. 하지만 머스킷은 생각보다 값이 좀 나가서 말입니다. 화약도 그렇고.”
“너무 비싸지만 않다면 사겠소.”
족장의 대답에 쿠나킨은 슬쩍 미소지으며 곧바로 족장을 바라보았다.
“그럼 두 가지 조건을 허락해주시면 팔겠습니다. 아. 그 전에 저희는 이번 교역에서 머스킷을 팔 생각은 없었기에 당장 팔 물량은 없습니다. 허니 다음에 올 때 충분한 머스킷을 가지고 오지요.”
그러면서 자신들이 만약을 대비해 보유한 무기를 팔 수야 없는 노릇 아니냐고 덧붙이자 족장은 사정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인 후 질문을 던졌다.
“두 가지 조건이라면?”
쿠나킨이 바다 위에 떠 있는 북미왕국의 커다란 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먼저 하나는 이 근처에 선착장을 건설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겁니다. 제대로 된 선착장이 없다 보니 배를 댈 수가 없어서 작은 배로 교역품을 날라야 하는지라 무척 번거로우니까요. 그리고 교역품을 잠시 보관할 수 있는 창고도요.”
이에 족장은 앞으로를 생각하면 제대로 된 선착장과 창고가 있어 나쁠 것이 없다는 생각에 흔쾌히 동의했다.
“음...뭐 선착장과 창고를 건설하는 거야 우리에게도 도움이 되니 허락하겠소. 그럼 다른 조건은 뭐요.”
이에 쿠나킨은 다시 북미왕국의 배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보이는 저 커다란 배에 물건을 가득 싣고 왔는데...아쉽게도 교역량은 얼마 안 되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저 물건을 처리하기 위해 내륙의 다른 부족들과도 직접 교역하고 싶은데...저희들이 코랴크 부족 내의 영역을 돌아다닐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족장은 상황을 봐서 이들에게 산 물건을 주변 부족에 더 비싸게 팔 생각도 하고 있었지만, 이 조건을 수락한다면 그건 힘들었다.
해서 거부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보다는 이 머스킷을 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이를 수락하기로 마음먹으면서 입을 열었다.
“으음...허나 위험하지 않겠소?”
값비싼 교역품을 가득 싣고 내륙으로 이동하는 것이 무척 위험하다는 사실을 잘 아는 족장이 질문하자 쿠나킨은 피식 웃으며 자신의 주변에서 술도 마시지 않고 주변을 경계하는 아이누 탐사대원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 상인들을 지켜줄 용병들과 함께 왔으니까요. 그리고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저 배에도 아직 내리지 않은 용병들이 꽤 있습니다.”
족장이 보기에도 축제에도 흐트러짐 없이 주변을 경계하는 저들이라면, 그리고 이들은 머스킷으로 무장하고 있는 만큼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들이 우리 부족원들을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우리 부족의 영역을 돌아다닐 수 있도록 허락하겠소. 그리고 길 안내를 위해 사람도 붙여주겠소.”
이에 쿠나킨은 이번 코랴크 부족과의 협상에서 얻어낼 것은 다 얻어냈기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오. 그럼 감사하지요. 허면 저희가 다음에 올 때는 충분한 머스킷을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음. 부탁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