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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416화 (416/850)

416화

코랴크 부족의 족장이 교역을 허락하자 이번 분쟁 때문에 외무청 소속에서 국영 상단 소속으로 자리를 옮긴 타질 마을 출신의 쿠나킨은 경계하는 기색을 늦추지 않는 아이누 탐사대원들을 보고 웃으며 이들과의 협상이 잘 풀렸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이에 아이누 탐사대원들은 조금 안도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경계를 늦추지 않았고 일부는 해안가에 정박해 있는 선박들에 미리 약속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선박들은 가져온 쪽배를 모두 내리고 병사들과 선원들이 달라붙어 각종 물자를 실어나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 일을 위해 쿠나킨처럼 코랴크 부족의 말을 할 줄 아는 이들을 다수 국영 상단에서 채용해 데려왔기에 이들이 배운 대로 여러 상품을 보기 좋게 진열하기 시작했고.

이를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물끄러미 지켜보던 코랴크 부족의 부족원들은 족장이 저들이 상인이라는 사실과 교역을 허락했으니 필요한 물품이 있다면 사도 된다고 이야기하자 무엇을 파나 싶어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상품을 진열하는 상인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했고.

“헉. 이게 요리할 때 쓰는 칼이라고요? 이리 예리하고 단단한데?”

젊은 코랴크인이 들고 있던 얇지만, 무척 날카로운 칼이 사실은 요리할 때 사용하는 부엌칼이라는 소리에 놀란 표정을 짓자 국영 상단의 상인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야 손쉽게 요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무기로 사용할 거라면 차라리 이 녀석이 더 낫지요.”

그러면서 뒤쪽에서 부엌칼보다 길고 두툼한 정글도를 꺼내자 무기를 파는 상인들 주변에 있던 젊은 남성들이 탄성을 질렀다.

“오오!”

이렇게 젊은 코랴크인들이 무기를 파는 상인 주변에 몰렸다면 늙은 코랴크인들은 생필품을 파는 상인 주변에 몰려 이들이 가져온 생소한 물품들에 관심을 보였다.

“이게 양의 털로 짠 직물이란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촘촘하게 짜인 직물이라 생각외로 따뜻합니다. 한번 입어보시지요.”

국영 상단의 상인이 모직물로 만든, 북미왕국의 추운 지역에서 사는 백성들은 누구나 한 벌은 가지고 있는 두툼한 외투를 건네자 이를 한번 입어본 늙은 코랴크인은 흡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허. 생각보다 따뜻하구려. 거기에 꽤 가볍고.”

“그렇지요. 그게 바로 모직물의 장점입니다.”

그리고 북미왕국 상인들에게 호기심을 보이는 건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이렇게 간편하게 불을 피운다고요?”

중년 여성이 믿기 어렵다는 듯 상인이 들고 있는 자그마한 불씨를 바라보자 상인이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어떻습니까. 신기하지요? 이 성냥만 있으면 불을 피운다고, 혹은 불을 관리한다고 고생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순록 모피 한 장이면 이거 열 갑을 살 수 있어요. 그리고 열 갑이면 1년은 충분히 사용할 겁니다.”

“하나 주세요.”

“저도요.”

한 중년 여성이 성냥을 사자 혹시라도 성냥의 물량이 부족할까 다른 여성들도 일제히 성냥을 사기 위해 모피를 내밀었고 상인은 그런 여성들을 보고 웃으며 이들의 모피를 최대한 털어먹기 위해 슬쩍 다른 물품을 꺼내들었다.

“걱정 마세요. 성냥은 많습니다. 그리고 이건 어떻습니까. 북미왕국의 주방용품은 가벼우면서도 튼튼하기로 전 세계에 소문이 자자합니다.”

“어머. 정말 가볍네.”

커다란 솥이 생각보다 가벼웠기에 놀란 표정을 짓자 다른 여성들도 커다란 솥을 만져보고 그 품질에 감탄하면서도 의문을 보였다.

“너무 얇지 않나? 이러면 금방 망가질 텐데?”

“어허. 북미왕국의 제련 기술은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납니다. 그러니 망가질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두께가 얇은 터라 더 빠르게 조리할 수 있고요.”

그렇게 코랴크 부족의 사람들은 품질도 월등하고 세련된 모양의 북미왕국산 물품에 매료되어 앞다투어 모피를 건네고 각종 물품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보유하고 있던 모피는 많지 않았기에 생각보다 거래는 일찍 끝났고 상인들 뒤에 산더미처럼 쌓인 물품들이 왠지 아쉬웠던 코랴크 족 사람들은 족장에게 달려갔다.

“족장님. 저들이 파는 물품의 품질이 정말 엄청납니다.”

“듣도 보도 못한 대단한 물품들도 많고요.”

“거기에 교환 조건도 엄청 좋습니다. 저 귀한 밀가루 포대가 고작 순록 모피 1장이랍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에 족장은 부족원들의 속내를 눈치채고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어 그들을 진정시켰다.

“자자. 진정들 하게. 나도 눈이 있어. 저들의 물품이 신기하고 품질이 좋으며 저렴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네. 하지만 마을 창고에 보관한 모피들은 러시아 차르국에 공물로 바치기로 되어 있지 않은가.”

몇 년 전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이 나타나 모피 공물을 요구했고 이들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기에 코랴크 부족의 족장은 고민 끝에 이를 승낙했다.

물론 일방적인 착취였다면 당연히 저항했을 테지만 공물을 바치면 여러 생필품을 하사품으로 주겠다는 일종의 거래나 다름없었기에.

이 주변에는 발전한 도시가 없어서 필요한 생필품을 구하기 쉽지 않았던 터라 러시아 차르국이 하사품을 가지고 이곳까지 온다면 그들로서는 썩 나쁠 것이 없어 여러 계산 끝에 러시아 차르국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 차르국에서 건네주는 하사품의 품질은 썩 좋지는 않았고 공물을 내어주고 하사품을 받는 이 거래 조건도 그렇게 만족스러운 편은 아니었지만, 저들이 직접 이곳까지 하사품을 가져오는 것을 고려하면 아예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기에 점차 러시아 차르국과 협의해 공물의 양을 늘리고 있었고.

그리고 공물을 많이 내는 만큼 하사품을 많이 받을 수 있었기에 부족원들도 기꺼이 모피를 공물로 내놓았고 이 모피들이 마을 창고에 저장되어 있었다.

헌데 이 모피를 반출해 저들과 교역하자는 눈치였기에 족장이 난색을 보이자 비교적 젊은 부족원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족장님. 이번엔 공물을 내지 말고 모아둔 가죽을 저들과 다 교환합시다.”

“맞습니다. 굳이 쓰레기 같은 물품들을 비싸게 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지금 창고에 보관 중인 가죽들을 모두 저들과 교환한다면 한동안은 풍족하게 살 수 있을 겁니다.”

“그뿐입니까? 왕창 사두고 다른 부족과 거래해서 이득을 챙겨도 되고요.”

“으음...”

젊은 부족원들의 이야기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저들의 의견에 동의하는 분위기가 흐르자 족장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북미왕국산 물품의 품질도 월등하고 거래 조건도 좋았기에 이득만 따지자면 이들의 이야기처럼 마을 창고에 보관 중인 모피를 모조리 꺼내 저들과 거래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동안 해오던 러시아 차르국과의 거래이자 약속은 코랴크 족이 일방적으로 깨는 셈이라 러시아 차르국이 어떻게 나올지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때 몇몇 늙은 부족원들은 족장이 무엇 때문에 고민하는지를 깨닫고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쯧쯧.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알류트 족이 공물을 내지 않겠다고 버텼다가 러시아 차르국 병사들에게 공격받았다는 소문을 자네들도 알지 않나?”

“그래. 마을 하나가 아예 잿더미가 되었다던데. 거기에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은 웃으면서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악귀와 같다는 소문이 파다하고 이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전염병마저 돈다는데 자네들 지금 제정신인가?”

이런 늙은 부족원들의 지적에 혈기 왕성한 젊은 부족원들은 반발했다.

“그렇다고 이 기회를 그냥 날리잔 말입니까? 마을 창고에 있는 가죽을 저 식량과 소금으로 교환하기만 하면 못해도 1년은 배부르게 살 수 있는데?”

“맞습니다. 차라리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과 맞서는 게 낫습니다! 아무리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이 악귀 같다 해도 이 날카로운 화살에는 장사 없을 겁니다.”

한 청년이 북미왕국 상인과 거래한 날카로운 화살촉을 품에서 꺼내며 소리치자 옆에 있던 노인이 그 청년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소리쳤다.

“큰일 날 소리! 러시아 차르국의 머스킷을 보고 그런 소릴 하는 건가? 굉음과 함께 순록이 단숨에 죽은 것을 보고?”

그렇게 계속 목소리가 높아지며 서로 다투기 시작하고 멀리 있던 북미왕국 상인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자신들을 바라보는 것을 확인한 족장은 속으로 혀를 찬 후 소리쳤다.

“그만! 다들 진정들 하게.”

족장의 외침에 부족원들은 하나둘 침묵하며 족장을 바라보았고 족장은 자신을 둘러싼 부족원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분명 러시아 차르국에 바칠 공물을 저들에게 건네주면 1년 가까이는 풍족하게 살 수 있긴 하지. 하지만 우리가 일방적으로 약속을 깨고 공물을 바치지 않는 순간 러시아 차르국의 사나운 병사들이 들이닥칠 텐데 이번에 산 무기만 믿고 그들과 싸울 수는 없네. 특히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은 머스킷으로 무장하고 있으니.”

“으음...”

족장의 말에 젊은 부족원들은 분개하거나 한숨을 내쉬었고 노인은 족장이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고 생각해 맞장구쳤다.

“그럼요.”

“맞습니다.”

“부족의 존망이 걸린 일이에요.”

족장은 손을 들어 그런 노인들의 입을 막고 계속 자신의 결정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자네들의 의견도 일리가 있어. 거래 조건이 워낙 좋으니까 잘만하면 꽤 오랫동안 풍족하게 살 수 있지. 그러니 일단은 마을 창고에 보관 중인 가죽 절반 정도만 빼서 저들과 교환하도록 하지. 그리고 공물 수거인이 오기 전까지 사냥을 해서 최대한 채워 놓도록 하고. 무기가 좋아졌으니 사냥도 비교적 쉬울 것 아닌가.”

족장의 말에 부족원들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그 정도면 나쁘지 않다는 듯 수긍했다.

“아쉽긴 하지만 그 정도면 뭐...”

“흐음...그렇다면 큰 문제는 없겠군요.”

그렇게 부족원들간의 갈등을 봉합시킨 족장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자. 그럼 마을 창고를 열고 가죽 절반 정도를 빼게.”

* * *

개항장의 관리는 갑작스럽게 개항장을 찾아온 투로시노가 꺼낸 이야기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예? 갑자기 조총을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조선의 조총을 구입하고 싶습니다.”

북방 항로가 열리고 쾌속선을 통해 전달받은 새한성의 명령에 투로시노는 곧바로 배를 타고 개항장에 도착해 조총 구매 의사를 밝혔다.

이에 개항장의 관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투로시노를 바라보았다.

“아니. 어째서 조선의 조총을 찾으십니까? 북미왕국에는 조총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후장식 소총이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연발 단총도 있고요.”

개항장의 관리는 북미왕국을 방문한 적은 없었지만, 북미신문과 세계신문을 외울 정도로 읽었고 북미왕국을 방문했다 돌아오는 사절단의 일원을 통해 각종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북미왕국의 사정에는 나름대로 정통한 편이었다.

그러니 북미왕국이 조총보다 훨씬 뛰어난 무기로 무장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러한 의문을 나타내자 투로시노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 아국의 병사들이 사용하기 위해 구입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국과 우호적인 원주민 부족에게 넘기기 위함이지요.”

“원주민 부족이라고요?”

“아시다시피 유럽 각국은 경쟁적으로 식민지를 만드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해서 힘이 없다면 짓밟히거나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지요.”

개항장의 관리는 북미왕국에서 출판해 조선으로 들어온 책들도 상당수 읽었는데 이러한 책들에는 이런 유럽 각국의 행태가 적나라하게 적혀 있었고 이를 보고 분개했었던 개항장의 관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투로시노는 계속해서 설명했다.

“물론 아국에선 우호적인 원주민 부족들이 원한다면 기꺼이 도울 생각입니다만...그렇다고 이런 원주민 부족들의 영역 모두에 아국의 병사들을 배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습니까.”

개항장의 관리는 그제야 상황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체적으로 어느 정도 버틸 수는 있어야 한다는 거군요.”

물론 원주민들에게 북미왕국의 무기를 넘겨주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북미왕국은 자신들의 무기를 엄격히 통제하는 터라 잘못하면 자신들의 무기가 다른 곳으로 흘러 들어갈 수도 있으니 차선으로 조총을 선택한 것임을 개항장의 관리가 알아채자 투로시노가 살짝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물론 아국의 공방에서 조총을 생산해도 되긴 합니다만...새한성에서는 그럴 바엔 조선에서 조총을 구입하라고 하더군요. 워낙 기술자들의 일손이 부족한 터라 그런 모양입니다. 해서 비교적 후한 값에 사들일 테니 조선의 조총을 저희에게 파시지요.”

그러면서 투로시노는 사용하지 못할 정도의 폐급 무기만 아니라면 적당히 사들일 테니 이 기회에 이를 넘기고 새 무기를 비축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자 개항장의 관리는 확실히 북미왕국은 조선을 많이 신경 쓰는구나 싶어 살짝 감동했다.

북미왕국에선 증기기관을 이용한 기계로 손쉽게 물건을 제작한다고 들었고 아무리 북미왕국의 일손이 부족하다고 한들 원주민들에게 나눠줄 조총 따위를 만들지 못할 까닭이 없었다.

헌데도 일부러 자신들에게 구입한다는 이야기에 최근 북미왕국과의 교역에서 조선의 무역 적자가 늘어나자 북미왕국에서 먼저 이를 우려하며 조선의 여러 물품을 추가로 구입하는 협상까지 진행했던 것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고.

해서 개항장의 관리는 고마움이 섞인 눈빛으로 투로시노를 바라보고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조건이라면 한양에서도 굳이 반대하지는 않을 겁니다. 바로 장계를 올리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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